전후맥락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대인이다.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최우등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자 전쟁 중이던 파시즘에 저항하는 유격대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붙잡혔다. 어느 날, 레비를 포함한 포로들은 기차에 실렸다. 그중 일부는 한밤중에 트럭으로 갈아타야 했다. 마침내 트럭이 멈춰 섰고 큰 문과 그 위에서 환히 빛나는 글씨가 보였다.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케 하리라). 그가 이송된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당시 그가 보고 겪었던 일들을 담아낸 책이 『이것이 인간인가』이다.
고전본문
수용소 한가운데에 아주 넓은 점호 마당이 있다. 아침이면 작업반을 짜기 위해, 저녁이면 점호를 받기 위해 그곳에 모여야 한다. 점호 마당 앞에는 정성스레 다듬어놓은 풀밭이 있는데, 필요할 경우 그곳에 교수대가 세워진다.
우리는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범죄자, 정치범,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모두 줄무늬 옷을 입고 있고 모두 해프틀링*이지만, 범죄자들은 상의에 박힌 숫자 옆에 초록색 삼각형을 달고 다닌다. 정치범들은 빨간색이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유대인 별을 단다. 물론 SS 대원*들도 있었지만 그 수가 적고 수용소 밖에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상 우리의 실질적인 주인은 초록색 삼각형들이다. 그들은 우리들을 자유롭게 건드린다. 게다가 다른 두 부류들 중 기꺼이 이 초록색 삼각형을 도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다. 그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우리는 또한 각자의 이해력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조만간 다른 것들도 배우게 되었다. “야불”Jawohl(예. 알았습니다)이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 절대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항상 이해한 척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음식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식사를 마친 뒤 반합의 바닥을 열심히 긁어내고 빵을 먹을 때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턱 밑에 반합을 댄다. 이제 우리는 죽통의 윗부분에서 푼 죽과 밑에서 푼 죽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상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를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우리는 벌써 놀랄 만큼 복잡한 수용소 규율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 금지사항들을 다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가시 철조망에 2미터 이내로 접근 금지, 상의를 입거나 속옷을 입지 않거나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자지 말 것. ‘카포* 전용’나 ‘라이히스도이체* 전용’인 특별 목욕탕과 변소 이용 금지. 정해진 날에 샤워를 할 것. 정해지지 않은 날에는 샤워 금지. 단추가 떨어진 상의를 입거나 깃을 세우고 막사에서 나오는 것 금지. 추위를 막으려고 옷 속에 종이나 짚을 넣는 것 금지. 상의만 벗고 씻는 것 금지.
수행해야 할 의식은 끝도 없고 무의미했다. 매일 아침 ‘침대’를 완벽할 정도로 평평하고 고르게 정리해야 한다. 진흙투성이에 구역질 나는 나막신에 적당한 기계용 기름을 발라야 한다. 옷에서 진흙을 털어내 자국을 없애야 한다(페인트, 기름과 녹 자국은 그냥 둬도 된다). 저녁이면 이(蟲)가 없는지, 발은 씻었는지 검사를 받아야 한다. 토요일에는 수염과 머리를 깎아야 하고 누더기를 수선하거나 수선하도록 시켜야 한다. 일요일에는 전체적으로 피부병이 옮지 않았는지 검사받아야 하고 상의에 단추가 다섯 개 다 달려 있는지 검사받아야 한다.
*해프틀링: 포로
*SS 대원: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카포: 반장
*라이히스도이체: 독일 제국의 시민
『이것이 인간인가』 ‘바닥에서’ 중에서
토론하기
(1)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분류한 방식과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수용소에 ‘복잡한 규율’, ‘셀 수 없는 금지사항’, ‘무의미한 의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수용소에 준한다고 생각하는 장소를 고르고 그곳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봅시다.
해설읽기
수용소에서 가장 먼저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은 쓸만한 노동력인가 아닌가이다.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심사를 받는데 찰나의 판단으로 어떤 사람은 가스실로 다른 사람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들을 살려둔 이유는 제국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노동력 부족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수용소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왼쪽 팔뚝에 문신으로 번호를 새기고 그 번호로 불린다. 번호를 살펴보면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수용자를 분류하는 일반적인 기준은 삼각형이었다. 빨간색 삼각형은 ‘정치범’, 즉 공산주의자 같은 반체제 활동인사를 가리킨다. 초록색 삼각형은 절도, 강도, 폭행 같은 ‘일반적인 범죄자’를 의미한다. 보라색 삼각형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 분홍색 삼각형은 ‘동성애자’, 검은색 삼각형은 노숙인, 부랑자, 알콜중독자 같은 ‘반사회적 인간’을 뜻한다.
노란색 삼각형은 유대인으로 기본적인 형태의 삼각형과 합쳐져 육각형 모양의 ‘다윗의 별’을 이룬다. 프리모 레비는 정치범 출신 유대인이기 때문에 빨간색 삼각형과 노란색 삼각형이 합쳐진 표식을 달았다. 그밖에 알파벳은 수감자들의 국적을 구분하기 위한 표지로 P는 폴란드, T는 체코, F는 프랑스를 나타내는 독일어에서 따온 글자다. 수용소를 관리하던 친위대들은 이와 같은 표지를 사용해서 수용자들을 집단으로 나누고 서열을 매기고 경쟁시켰다. 본문에 나온 것처럼 초록색 삼각형인 일반 범죄자들이 다른 수감자들을 지배하는 형태였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수용소에서는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프리모 레비가 열거하는 사례는 아주 많다. 예컨대, 손톱이 길면 잘라야 하는데, 수감자에게는 마땅한 도구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빨로 자를 수밖에 없다. 손톱만 언급하는 까닭은 발톱의 경우에는 신발과 마찰시켜서 닳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화장실이나 샤워실에 갈 때는 자기 물건을 모두 가지고 가야 한다. 세수할 때는 옷을 보관하는 보따리를 무릎 사이에 끼워야 한다. 이 모든 행동들은 자신의 물건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이다. 언제 어디서든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자신의 물건을 도둑 맞을 수 있었다. 수용소 생활에서 도덕이나 윤리는 사치품이 되었다.
특히 신발은 매우 의미심장한 물건이다. 신발에서부터 죽음이 시작될 수 있다. 신발을 신고 몇 시간 행군을 하면 발을 짓무르고 세균에 감염된다. 발이 감염된 사람은 어디든 제일 늦게 도착하고 사정없이 얻어맞았다. 발이 부을수록 신발의 나무나 헝겊과의 마찰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병원밖에 답이 없지만 여기서는 치료될 수 없기에 결국 가스실로 향하도록 재분류되기 십상이었다.
이처럼 수감자들의 삶은 눈앞의 급박하고 구체적인 문제(‘눈이 오지 않을까’, ‘부려놔야 할 석탄이 있을까’, ‘오늘은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등)에 골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미래라는 시제는 모두 사라져버린다. 수용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미래를 지워버리고 도둑질과 같은 새로운 것들을 배워나간다.
지워진 것은 미래뿐만이 아니었다. 과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수용소에 당도한 프리모 레비를 포함한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에 수용소 한쪽 구석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 이탈리아인들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었고 남은 사람들의 몰골이 갈수록 비참해져서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일요일 모임에 나가려고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이 드는 생활이었다. 결정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수감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지혜란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용소는 감옥처럼 벌을 받는 공간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수용소는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이었다고 말한다.
키워드
수용소, 아우슈비츠, 인간성, 폭력, 학살
전후맥락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대인이다.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최우등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자 전쟁 중이던 파시즘에 저항하는 유격대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붙잡혔다. 어느 날, 레비를 포함한 포로들은 기차에 실렸다. 그중 일부는 한밤중에 트럭으로 갈아타야 했다. 마침내 트럭이 멈춰 섰고 큰 문과 그 위에서 환히 빛나는 글씨가 보였다.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케 하리라). 그가 이송된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당시 그가 보고 겪었던 일들을 담아낸 책이 『이것이 인간인가』이다.
고전본문
수용소 한가운데에 아주 넓은 점호 마당이 있다. 아침이면 작업반을 짜기 위해, 저녁이면 점호를 받기 위해 그곳에 모여야 한다. 점호 마당 앞에는 정성스레 다듬어놓은 풀밭이 있는데, 필요할 경우 그곳에 교수대가 세워진다.
우리는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범죄자, 정치범,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모두 줄무늬 옷을 입고 있고 모두 해프틀링*이지만, 범죄자들은 상의에 박힌 숫자 옆에 초록색 삼각형을 달고 다닌다. 정치범들은 빨간색이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유대인 별을 단다. 물론 SS 대원*들도 있었지만 그 수가 적고 수용소 밖에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상 우리의 실질적인 주인은 초록색 삼각형들이다. 그들은 우리들을 자유롭게 건드린다. 게다가 다른 두 부류들 중 기꺼이 이 초록색 삼각형을 도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다. 그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우리는 또한 각자의 이해력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조만간 다른 것들도 배우게 되었다. “야불”Jawohl(예. 알았습니다)이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 절대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항상 이해한 척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음식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식사를 마친 뒤 반합의 바닥을 열심히 긁어내고 빵을 먹을 때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턱 밑에 반합을 댄다. 이제 우리는 죽통의 윗부분에서 푼 죽과 밑에서 푼 죽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상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를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우리는 벌써 놀랄 만큼 복잡한 수용소 규율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 금지사항들을 다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가시 철조망에 2미터 이내로 접근 금지, 상의를 입거나 속옷을 입지 않거나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자지 말 것. ‘카포* 전용’나 ‘라이히스도이체* 전용’인 특별 목욕탕과 변소 이용 금지. 정해진 날에 샤워를 할 것. 정해지지 않은 날에는 샤워 금지. 단추가 떨어진 상의를 입거나 깃을 세우고 막사에서 나오는 것 금지. 추위를 막으려고 옷 속에 종이나 짚을 넣는 것 금지. 상의만 벗고 씻는 것 금지.
수행해야 할 의식은 끝도 없고 무의미했다. 매일 아침 ‘침대’를 완벽할 정도로 평평하고 고르게 정리해야 한다. 진흙투성이에 구역질 나는 나막신에 적당한 기계용 기름을 발라야 한다. 옷에서 진흙을 털어내 자국을 없애야 한다(페인트, 기름과 녹 자국은 그냥 둬도 된다). 저녁이면 이(蟲)가 없는지, 발은 씻었는지 검사를 받아야 한다. 토요일에는 수염과 머리를 깎아야 하고 누더기를 수선하거나 수선하도록 시켜야 한다. 일요일에는 전체적으로 피부병이 옮지 않았는지 검사받아야 하고 상의에 단추가 다섯 개 다 달려 있는지 검사받아야 한다.
*해프틀링: 포로
*SS 대원: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카포: 반장
*라이히스도이체: 독일 제국의 시민
『이것이 인간인가』 ‘바닥에서’ 중에서
토론하기
(1)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분류한 방식과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수용소에 ‘복잡한 규율’, ‘셀 수 없는 금지사항’, ‘무의미한 의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수용소에 준한다고 생각하는 장소를 고르고 그곳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봅시다.
해설읽기
수용소에서 가장 먼저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은 쓸만한 노동력인가 아닌가이다.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심사를 받는데 찰나의 판단으로 어떤 사람은 가스실로 다른 사람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들을 살려둔 이유는 제국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노동력 부족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수용소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왼쪽 팔뚝에 문신으로 번호를 새기고 그 번호로 불린다. 번호를 살펴보면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수용자를 분류하는 일반적인 기준은 삼각형이었다. 빨간색 삼각형은 ‘정치범’, 즉 공산주의자 같은 반체제 활동인사를 가리킨다. 초록색 삼각형은 절도, 강도, 폭행 같은 ‘일반적인 범죄자’를 의미한다. 보라색 삼각형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 분홍색 삼각형은 ‘동성애자’, 검은색 삼각형은 노숙인, 부랑자, 알콜중독자 같은 ‘반사회적 인간’을 뜻한다.
노란색 삼각형은 유대인으로 기본적인 형태의 삼각형과 합쳐져 육각형 모양의 ‘다윗의 별’을 이룬다. 프리모 레비는 정치범 출신 유대인이기 때문에 빨간색 삼각형과 노란색 삼각형이 합쳐진 표식을 달았다. 그밖에 알파벳은 수감자들의 국적을 구분하기 위한 표지로 P는 폴란드, T는 체코, F는 프랑스를 나타내는 독일어에서 따온 글자다. 수용소를 관리하던 친위대들은 이와 같은 표지를 사용해서 수용자들을 집단으로 나누고 서열을 매기고 경쟁시켰다. 본문에 나온 것처럼 초록색 삼각형인 일반 범죄자들이 다른 수감자들을 지배하는 형태였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수용소에서는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프리모 레비가 열거하는 사례는 아주 많다. 예컨대, 손톱이 길면 잘라야 하는데, 수감자에게는 마땅한 도구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빨로 자를 수밖에 없다. 손톱만 언급하는 까닭은 발톱의 경우에는 신발과 마찰시켜서 닳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화장실이나 샤워실에 갈 때는 자기 물건을 모두 가지고 가야 한다. 세수할 때는 옷을 보관하는 보따리를 무릎 사이에 끼워야 한다. 이 모든 행동들은 자신의 물건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이다. 언제 어디서든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자신의 물건을 도둑 맞을 수 있었다. 수용소 생활에서 도덕이나 윤리는 사치품이 되었다.
특히 신발은 매우 의미심장한 물건이다. 신발에서부터 죽음이 시작될 수 있다. 신발을 신고 몇 시간 행군을 하면 발을 짓무르고 세균에 감염된다. 발이 감염된 사람은 어디든 제일 늦게 도착하고 사정없이 얻어맞았다. 발이 부을수록 신발의 나무나 헝겊과의 마찰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병원밖에 답이 없지만 여기서는 치료될 수 없기에 결국 가스실로 향하도록 재분류되기 십상이었다.
이처럼 수감자들의 삶은 눈앞의 급박하고 구체적인 문제(‘눈이 오지 않을까’, ‘부려놔야 할 석탄이 있을까’, ‘오늘은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등)에 골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미래라는 시제는 모두 사라져버린다. 수용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미래를 지워버리고 도둑질과 같은 새로운 것들을 배워나간다.
지워진 것은 미래뿐만이 아니었다. 과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수용소에 당도한 프리모 레비를 포함한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에 수용소 한쪽 구석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 이탈리아인들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었고 남은 사람들의 몰골이 갈수록 비참해져서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일요일 모임에 나가려고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이 드는 생활이었다. 결정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수감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지혜란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용소는 감옥처럼 벌을 받는 공간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수용소는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이었다고 말한다.
키워드
수용소, 아우슈비츠, 인간성, 폭력,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