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이 글은 조선시대에 출제된 시험의 질문에 대답을 작성하는 책문 형식으로 저술되었다. 질문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귀신은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이다. 동아시아인의 오래된 통념상 귀신은 자연의 생명 에너지인 기가 뭉쳐서 작용하는 존재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으로 흩어진다. 이는 달리 말해 제사를 지낼 대상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질문에서는 귀신이 조만간 소멸할 존재임에도 후손이 그들의 조상에게 계속 제사 지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고전본문
제사를 지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귀신이 되었을 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정기가 흩어지더라도 즉각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나의 정성과 공경이 조상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미 흩어진 저 기는 본디 듣지도,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나의 정성으로 그분이 살아생전에 계시던 것을 생각하고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즐겨하시던 것을 생각하여 조상께서 항상 눈앞에 계시던 것을 뚜렷하게 보게 된다면, 이는 이미 흩어진 기가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귀신의 기운이 서린다’는 뜻도 저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조상의 기가 세대를 거듭하며 후손으로부터 멀어졌다면, 그 기는 사라져도 그 리는 없어지지 않기에 또한 정성으로 서로 감응할 수 있습니다. (…) 오래전에 돌아가신 조상에게는 본디 감응할 수 있는 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지극히 정성스레 한결같이 하면 결국 감응할 수 있는 이유는, 감응할 수 있는 기는 없어도 감응할 수 있는 리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기로써 감응하고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면 리로써 감응합니다. 기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서로 감응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 이것이 효자와 자손들이 감히 그 어버이가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고 제사를 매우 엄숙히 지내는 까닭입니다.
–『율곡전서』의 「삶과 죽음, 귀신에 대한 답안」 중에서
토론하기
(1) 귀신이 자연법칙임에도 불구하고 이이가 제사의 당위성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2) 리와 기 개념을 가져와서 조상이 후손과 감응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이이의 설명이 설득력 있는지, 없는지를 논의해보자.
(3)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대다수 귀신을 믿지 않지만, 많은 가정에서 제수를 준비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 이유를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이이는 귀신을 천리 즉 자연법칙을 실현하는 에너지로 보았다. 즉 귀신은 말 그대로 신출귀몰한 무형의 인격적 존재가 아닌, 자연법칙이 실현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귀신에서 인격성을 배제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남게 된다. 제사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다. 귀신이 단지 물질 에너지의 일종일 뿐이라면, 후손이 그 조상을 추모하고 공경하는 제사 행위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이이는 제사를 지내는 이유를 리와 기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과 백을 구성하는 정기가 흩어진다. 정기가 흩어지면서 육신과 분리된 백은 더 이상 몸의 감각 기관을 통해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이들 정보를 종합하여 사고하는 혼의 능력 역시 사라진다. 때문에 흩어진 상태의 정기에는 아무런 지적 능력이 없다.
이처럼 인간의 사후에는 정기가 흩어지고 지적 능력도 상실하지만, 한동안은 우주로 산산이 흩어지지 않은 상태로 퍼져 있다. 이런 까닭에 후손이 온 정성을 다하여 조상을 추모하고 공경한다면, 일정 범위에 퍼져 있던 그의 정기가 한데 모이게 되어 후손의 마음에 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런 까닭에 마치 눈앞에 조상이 계신 듯 그의 모습과 목소리, 행동거지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으며, 이로써 조상과 교감하게 된다. “귀신의 기운이 서린다”는 공자의 말씀도, 바로 후손이 조상을 추모할 때 흩어졌던 그의 정기가 후손의 기 즉 마음과 감응하여 한데 모여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귀신의 정기는 점점 멀리 퍼져, 나중에는 후손의 기로도 감응이 어려울 정도로 산산이 흩어진다. 때문에 후손으로부터 세대가 멀리 떨어진 조상일수록 기로써 감응하여 조상을 부르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오래전에 돌아가신 조상을 제사 지내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이는 리 개념을 끌어온다. 그에 따르면 먼 조상의 기는 이미 우주에 산산이 흩어져 후손의 기로는 감응할 수 없다. 대신 인간과 우주에 편재한 보편 법칙인 천리는 천지만물에 전부 동일한 리로 존재하므로, 인간의 리와 조상의 리는 서로 같은 법칙이며 따라서 연결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조상의 기는 우주의 기의 일부로 돌아가지만 조상의 리는 우주의 자연법칙으로써, 후손의 마음과 몸을 구성하는 리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연결되며 감응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키워드
감응, 귀신, 기, 리, 백, 정기, 제사, 혼
전후맥락
이 글은 조선시대에 출제된 시험의 질문에 대답을 작성하는 책문 형식으로 저술되었다. 질문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귀신은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이다. 동아시아인의 오래된 통념상 귀신은 자연의 생명 에너지인 기가 뭉쳐서 작용하는 존재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으로 흩어진다. 이는 달리 말해 제사를 지낼 대상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질문에서는 귀신이 조만간 소멸할 존재임에도 후손이 그들의 조상에게 계속 제사 지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고전본문
제사를 지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귀신이 되었을 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정기가 흩어지더라도 즉각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나의 정성과 공경이 조상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미 흩어진 저 기는 본디 듣지도,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나의 정성으로 그분이 살아생전에 계시던 것을 생각하고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즐겨하시던 것을 생각하여 조상께서 항상 눈앞에 계시던 것을 뚜렷하게 보게 된다면, 이는 이미 흩어진 기가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귀신의 기운이 서린다’는 뜻도 저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조상의 기가 세대를 거듭하며 후손으로부터 멀어졌다면, 그 기는 사라져도 그 리는 없어지지 않기에 또한 정성으로 서로 감응할 수 있습니다. (…) 오래전에 돌아가신 조상에게는 본디 감응할 수 있는 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지극히 정성스레 한결같이 하면 결국 감응할 수 있는 이유는, 감응할 수 있는 기는 없어도 감응할 수 있는 리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기로써 감응하고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면 리로써 감응합니다. 기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서로 감응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 이것이 효자와 자손들이 감히 그 어버이가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고 제사를 매우 엄숙히 지내는 까닭입니다.
–『율곡전서』의 「삶과 죽음, 귀신에 대한 답안」 중에서
토론하기
(1) 귀신이 자연법칙임에도 불구하고 이이가 제사의 당위성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2) 리와 기 개념을 가져와서 조상이 후손과 감응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이이의 설명이 설득력 있는지, 없는지를 논의해보자.
(3)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대다수 귀신을 믿지 않지만, 많은 가정에서 제수를 준비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 이유를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이이는 귀신을 천리 즉 자연법칙을 실현하는 에너지로 보았다. 즉 귀신은 말 그대로 신출귀몰한 무형의 인격적 존재가 아닌, 자연법칙이 실현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귀신에서 인격성을 배제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남게 된다. 제사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다. 귀신이 단지 물질 에너지의 일종일 뿐이라면, 후손이 그 조상을 추모하고 공경하는 제사 행위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이이는 제사를 지내는 이유를 리와 기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과 백을 구성하는 정기가 흩어진다. 정기가 흩어지면서 육신과 분리된 백은 더 이상 몸의 감각 기관을 통해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이들 정보를 종합하여 사고하는 혼의 능력 역시 사라진다. 때문에 흩어진 상태의 정기에는 아무런 지적 능력이 없다.
이처럼 인간의 사후에는 정기가 흩어지고 지적 능력도 상실하지만, 한동안은 우주로 산산이 흩어지지 않은 상태로 퍼져 있다. 이런 까닭에 후손이 온 정성을 다하여 조상을 추모하고 공경한다면, 일정 범위에 퍼져 있던 그의 정기가 한데 모이게 되어 후손의 마음에 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런 까닭에 마치 눈앞에 조상이 계신 듯 그의 모습과 목소리, 행동거지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으며, 이로써 조상과 교감하게 된다. “귀신의 기운이 서린다”는 공자의 말씀도, 바로 후손이 조상을 추모할 때 흩어졌던 그의 정기가 후손의 기 즉 마음과 감응하여 한데 모여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귀신의 정기는 점점 멀리 퍼져, 나중에는 후손의 기로도 감응이 어려울 정도로 산산이 흩어진다. 때문에 후손으로부터 세대가 멀리 떨어진 조상일수록 기로써 감응하여 조상을 부르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오래전에 돌아가신 조상을 제사 지내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이는 리 개념을 끌어온다. 그에 따르면 먼 조상의 기는 이미 우주에 산산이 흩어져 후손의 기로는 감응할 수 없다. 대신 인간과 우주에 편재한 보편 법칙인 천리는 천지만물에 전부 동일한 리로 존재하므로, 인간의 리와 조상의 리는 서로 같은 법칙이며 따라서 연결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조상의 기는 우주의 기의 일부로 돌아가지만 조상의 리는 우주의 자연법칙으로써, 후손의 마음과 몸을 구성하는 리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연결되며 감응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키워드
감응, 귀신, 기, 리, 백, 정기, 제사,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