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1765년 12월 27일 북경에 도착한 홍대용은 북경에서 꼭 하고자 했던 천주교 성당 방문을 추진한다. 이듬해가 되자 미리 방문 준비를 해놓았고, 1월 9일 드디어 북경 남쪽에 건립된 남당(南堂)을 방문한다. 홍대용은 정문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성당과 부속 건물의 모습, 실내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서양 선교사와 서양의 위치 등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일을 기록하였고, 예배당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의 외양을 묘사하고 직접 조선의 음악을 연주해본 일, 자명종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에 들어가 톱니바퀴 등으로 이루어진 자명종 기계를 살펴본 일 등을 기록하였다. 인용문은 그 기록의 일부이다. 홍대용은 1월 13일에 천주교 남당을 다시 방문하였고, 19일에도 다시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와 천문, 역법, 천주교(기독교) 등에 대하여 필담하였다. 1월 24일에는 북경의 동쪽에 건립한 천주교 동당(東堂)을 방문하여 남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동당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바를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고전본문
드디어 이덕성, 홍명복과 한 수레를 타고 천주당으로 향했다. … 큰 문을 들어가니 서쪽으로 또 문이 있는데 천주당 경내로 통하는 문이었다. 동쪽에 벽돌로 담을 깔끔하게 쌓고 가운데에 문을 내었는데 반쯤 열려 있어 그 문 밖의 켜켜이 자리한 집들이 은은히 보였다. 세팔을 불러 저기가 어느 곳이냐고 묻자 세팔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진짜 문이 아니라 담에 그림을 그려 구경하는 사람에게 솜씨를 뽐내려 한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두어 걸음을 다가서 보니 과연 담에 그린 그림이고 문도 진짜 문이 아니었다. 이것만 봐도 서양국의 그림 재주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 뒷문으로 들어가자 좌우에 켜켜이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고 뜰을 건너 두어 층 돌계단을 올라 남쪽을 향한 큰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은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었다. … 좌우 바람벽에 산수와 화초를 그렸고 또 인물을 가득 그렸는데 다 진짜 형상이었으며 공중에 드러나서 몇 발자국을 물러서면 내내 그림인 줄을 믿지 못할 듯하였다. 사람의 생기와 눈동자가 완연히 산 사람의 거동이어서 차마 가까이 나아가지 못할 듯하였고, 높은 바위에서 폭포가 쏟아지는 모습은 그 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옷이 젖는 듯하였다. … (본당은) 그 안이 남북으로 열 칸 정도였고 동서는 대여섯 칸이었으며 높이는 일고여덟 장이었다. 네 벽과 반자*를 다 벽돌로 만들고 나무는 전혀 안 썼으니 그 이상한 건축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북쪽 벽 위 한가운데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다. 여자의 상으로 머리를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 데를 바라보고 있는데 무한한 생각과 근심하는 기상이었다. 이것이 곧 천주(天主)**라 하는 사람이다.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 있는 모양이고, 선 곳은 깊은 감실*** 같아 처음 볼 때는 조각상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림이었다. 눈동자가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법이었다. 동서 벽에 각각 열 명 정도의 그림을 그렸는데 다 머리털을 드리우고 장삼 같은 긴 옷을 입었으니 이것이 서양국의 의복 제도인가 싶었다.
– 홍대용, 『을병연행록』 , 1766년 1월 9일자 일기.
* 반자 : 지붕 밑이나 위층 바닥 밑을 편평하게 하여 치장한 각 방의 윗면.
** 천주(天主) : 천주교의 하나님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예수를 가리킨다.
*** 감실(龕室) : 벽을 동굴처럼 움푹 파놓은 곳.
토론하기
(1) 홍대용이 천주교 성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상하다고 느낀 것들을 꼽아보자. 그것들은 왜 이상하다고 느껴졌을까? 또한 홍대용은 왜 그림을 실제 풍경이나 실제 인물 또는 조각으로 인식했을까?
(2)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을 접했던 경험을 나누어 보자. 그때 처음 접한 것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얘기해보자. 만약 처음 접한 것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겼는지에 대하여 분석해보자.
(3) 홍대용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했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사람의 인식은 과연 정확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연행사는 연행 사절단이라는 뜻으로 조선이 중국 청나라에 정기, 비정기로 파견하던 공식 사신단이다. ‘연행’은 ‘연경(燕京)에 갔다 오다’는 뜻으로 연경은 청나라의 수도 북경의 옛 이름이다. 그러니까 연행은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사신단으로서 갔다 온다’는 뜻이다. 연행록은 그러한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사람이 기록한 여행기를 가리킨다.
이상의 뜻만 보면 이 표현에는 아무런 폄하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연행은 실은 청나라를 낮잡아보는 뉘앙스가 담긴 표현이다. 주지하듯이 조선은 명나라를 종주국으로서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에 파견하는 공식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기록한 여행기를 ‘조천록(朝天錄)’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국왕보다 더 높은 ‘천자에게 조회하러 다녀온 여행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조회하다’는 표현은 지역의 군주가 중앙의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이니 조선을 낮추고 중국을 높이는 중화주의가 잔뜩 묻어 있는 표현이다. 이에 비해 연행록은 청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던 조선의 인식이 투영된 표현이다. 천자를 알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조선보다 못한 유목민족 출신의 왕조인 청나라에 갔다 왔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연행록은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명명이다. 지역 군주가 중앙의 천자를 알현하다 식의 뜻이 담겨 있지 않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일종의 멸칭(蔑稱, 경멸하는 호칭)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긍정적 명칭일 수 있다는 얘기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다.
주지하듯이 조선은 청이 명을 멸하고 중국의 새로운 천자의 나라로 섰을 때 청을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목지대에서 살던 소위 ‘오랑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청의 문물이 고도로 발달하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청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홍대용을 비롯하여 그와 친하게 교유했던 박지원,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청에 다녀오는 것이 이들 실학자들의 버킷 리스트 상위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홍대용도 예외가 아니어서 연행을 무척 바랐고, 드디어 숙부가 연행사의 책임자로 청에 다녀오게 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신단을 호위하는 군관 자격으로 연행사를 수행하였다. 인용문이 수록되어 있는 을병연행록은 이렇게 다녀오게 된 청나라 방문에서 경험한 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여행기이다.
홍대용은 중국에 가기 전부터, 앞서 중국에 다녀온 이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서양의 문물과 학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북경에 도착하자 서둘러 북경에 있는 천주교 성당을 방문하고자 했다. 1766년 1월 9일 홍대용은 드디어 천주교 성당을 방문한다. 당시 북경에는 동서남북 각각 천주교 성당이 한 채씩 건립되어 있었다. 그중 남쪽에 건립되어 있는 천주교 성당을 ‘남당’이라고 하였는데, 홍대용이 처음으로 방문한 천주교 성당이 바로 남당이었다. 그는 남당에 방문했을 때 보고 느낀 바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그 기록을 보면, 인용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상하다는 말이 몇 차례 보인다. 성당 경내에 둘러쳐 있는 벽에 그려진 그림을 봤을 때 홍대용은 그림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실제 경치를 그린 것으로 인지했다. 그러다 같이 간 종자가 실제 경치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말해주자 홍대용은 이상하다고 반응한다. 이는 홍대용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의 벽에 그린 인물 그림을 보았을 때도, 본당 정면 벽에 붙어 있는 예수가 공중에 떠 있는 그림을 봤을 때도 반복된다. 왜 이상하다고 인지했을까? 홍대용은 본당 정면 벽의 그림 속 인물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것을 보고는 여자라고 인식한다. 머리를 풀어 드리운 형상은 그의 인식 속에서 두 가지 차원과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머리를 풀고 드리운 채로 다니는 이는 여성이라는, 남녀에 대한 정형화된 구별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남자가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님은, 한자어로 ‘산발(散髮)’하고 있음은 소위 ‘오랑캐’의 표지라는 중화주의 세계관이다. 홍대용은 남자임에도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예수의 형상이 이 두 차원을 환기하였기에 이상하다고 한 것이다. 공중에 떠있는 형상도 이상하게 여겼다. 신선이라면 학 같은 동물을 타고 있거나 우화등선이라는 표현처럼 적어도 날개라도 달고 있어야 하는데 예수는 전혀 그런 양태가 아닌 채로 공중에 떠 있으니 이상하다고 인지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자신이 본 것이 그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성당 경내에 둘러쳐 있는 벽에 그린 그림을 보고 홍대용은 그림이 아닌 실경이라고 인지했는데 알고 보니 그림이었다. 본당 정면에 붙어 있는 그림을 봤을 때는 그림이 아닌 조각이려니 했다. 둘 다 먼 데는 작게 보이고 가까운 데는 크게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림이었던 것이다. 홍대용은 3차원의 입체감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해내는 선원근법을 몰랐던지라, 그에 대하여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가깝고 먼 것의 차이가 느껴지면 입체로 여겼고, 그 결과 입체감이 느껴지는 실제 풍경 아니면 조각한 것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조선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화법에 의하여 그려진 그림임에도 홍대용은 자신에게 익숙하고 당연한 방식으로 서양 그림을 인지하였고, 그 결과 그림은 실경이나 조각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음이다.
문명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며, 그러한 것을 구현하는 솜씨가 다르고 기법이 다르면 똑같은 사실도 이렇게 판이하게 인지한다. 그래서 나에게, 우리에게 익숙하다고 하여, 또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상식에 속하며 진리라고 판단되는 것들을 늘 문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과연 항상 그러한지, 또 언제부터 그것이 익숙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며 상식이고 진리인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나나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지를 반드시 반문해봐야 한다. 나아가 나, 우리와 다른 타자를 접할 때이면 필히 나,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연하며 상식이고 진리라는 점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홍대용처럼 그림을 실제 풍경이나 실제 인물, 조각상이라고 인지하는 오류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그림, 선원근법, 오후맥락
1765년 12월 27일 북경에 도착한 홍대용은 북경에서 꼭 하고자 했던 천주교 성당 방문을 추진한다. 이듬해가 되자 미리 방문 준비를 해놓았고, 1월 9일 드디어 북경 남쪽에 건립된 남당(南堂)을 방문한다. 홍대용은 정문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성당과 부속 건물의 모습, 실내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서양 선교사와 서양의 위치 등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일을 기록하였고, 예배당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의 외양을 묘사하고 직접 조선의 음악을 연주해본 일, 자명종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에 들어가 톱니바퀴 등으로 이루어진 자명종 기계를 살펴본 일 등을 기록하였다. 인용문은 그 기록의 일부이다. 홍대용은 1월 13일에 천주교 남당을 다시 방문하였고, 19일에도 다시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와 천문, 역법, 천주교(기독교) 등에 대하여 필담하였다. 1월 24일에는 북경의 동쪽에 건립한 천주교 동당(東堂)을 방문하여 남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동당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바를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고전본문
드디어 이덕성, 홍명복과 한 수레를 타고 천주당으로 향했다. … 큰 문을 들어가니 서쪽으로 또 문이 있는데 천주당 경내로 통하는 문이었다. 동쪽에 벽돌로 담을 깔끔하게 쌓고 가운데에 문을 내었는데 반쯤 열려 있어 그 문 밖의 켜켜이 자리한 집들이 은은히 보였다. 세팔을 불러 저기가 어느 곳이냐고 묻자 세팔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진짜 문이 아니라 담에 그림을 그려 구경하는 사람에게 솜씨를 뽐내려 한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두어 걸음을 다가서 보니 과연 담에 그린 그림이고 문도 진짜 문이 아니었다. 이것만 봐도 서양국의 그림 재주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 뒷문으로 들어가자 좌우에 켜켜이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고 뜰을 건너 두어 층 돌계단을 올라 남쪽을 향한 큰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은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었다. … 좌우 바람벽에 산수와 화초를 그렸고 또 인물을 가득 그렸는데 다 진짜 형상이었으며 공중에 드러나서 몇 발자국을 물러서면 내내 그림인 줄을 믿지 못할 듯하였다. 사람의 생기와 눈동자가 완연히 산 사람의 거동이어서 차마 가까이 나아가지 못할 듯하였고, 높은 바위에서 폭포가 쏟아지는 모습은 그 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옷이 젖는 듯하였다. … (본당은) 그 안이 남북으로 열 칸 정도였고 동서는 대여섯 칸이었으며 높이는 일고여덟 장이었다. 네 벽과 반자*를 다 벽돌로 만들고 나무는 전혀 안 썼으니 그 이상한 건축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북쪽 벽 위 한가운데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다. 여자의 상으로 머리를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 데를 바라보고 있는데 무한한 생각과 근심하는 기상이었다. 이것이 곧 천주(天主)**라 하는 사람이다.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 있는 모양이고, 선 곳은 깊은 감실*** 같아 처음 볼 때는 조각상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림이었다. 눈동자가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법이었다. 동서 벽에 각각 열 명 정도의 그림을 그렸는데 다 머리털을 드리우고 장삼 같은 긴 옷을 입었으니 이것이 서양국의 의복 제도인가 싶었다.
– 홍대용, 『을병연행록』 , 1766년 1월 9일자 일기.
* 반자 : 지붕 밑이나 위층 바닥 밑을 편평하게 하여 치장한 각 방의 윗면.
** 천주(天主) : 천주교의 하나님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예수를 가리킨다.
*** 감실(龕室) : 벽을 동굴처럼 움푹 파놓은 곳.
토론하기
(1) 홍대용이 천주교 성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상하다고 느낀 것들을 꼽아보자. 그것들은 왜 이상하다고 느껴졌을까? 또한 홍대용은 왜 그림을 실제 풍경이나 실제 인물 또는 조각으로 인식했을까?
(2)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을 접했던 경험을 나누어 보자. 그때 처음 접한 것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얘기해보자. 만약 처음 접한 것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겼는지에 대하여 분석해보자.
(3) 홍대용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했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사람의 인식은 과연 정확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연행사는 연행 사절단이라는 뜻으로 조선이 중국 청나라에 정기, 비정기로 파견하던 공식 사신단이다. ‘연행’은 ‘연경(燕京)에 갔다 오다’는 뜻으로 연경은 청나라의 수도 북경의 옛 이름이다. 그러니까 연행은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사신단으로서 갔다 온다’는 뜻이다. 연행록은 그러한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사람이 기록한 여행기를 가리킨다.
이상의 뜻만 보면 이 표현에는 아무런 폄하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연행은 실은 청나라를 낮잡아보는 뉘앙스가 담긴 표현이다. 주지하듯이 조선은 명나라를 종주국으로서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에 파견하는 공식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기록한 여행기를 ‘조천록(朝天錄)’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국왕보다 더 높은 ‘천자에게 조회하러 다녀온 여행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조회하다’는 표현은 지역의 군주가 중앙의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이니 조선을 낮추고 중국을 높이는 중화주의가 잔뜩 묻어 있는 표현이다. 이에 비해 연행록은 청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던 조선의 인식이 투영된 표현이다. 천자를 알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조선보다 못한 유목민족 출신의 왕조인 청나라에 갔다 왔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연행록은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명명이다. 지역 군주가 중앙의 천자를 알현하다 식의 뜻이 담겨 있지 않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일종의 멸칭(蔑稱, 경멸하는 호칭)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긍정적 명칭일 수 있다는 얘기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다.
주지하듯이 조선은 청이 명을 멸하고 중국의 새로운 천자의 나라로 섰을 때 청을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목지대에서 살던 소위 ‘오랑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청의 문물이 고도로 발달하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청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홍대용을 비롯하여 그와 친하게 교유했던 박지원,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청에 다녀오는 것이 이들 실학자들의 버킷 리스트 상위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홍대용도 예외가 아니어서 연행을 무척 바랐고, 드디어 숙부가 연행사의 책임자로 청에 다녀오게 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신단을 호위하는 군관 자격으로 연행사를 수행하였다. 인용문이 수록되어 있는 을병연행록은 이렇게 다녀오게 된 청나라 방문에서 경험한 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여행기이다.
홍대용은 중국에 가기 전부터, 앞서 중국에 다녀온 이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서양의 문물과 학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북경에 도착하자 서둘러 북경에 있는 천주교 성당을 방문하고자 했다. 1766년 1월 9일 홍대용은 드디어 천주교 성당을 방문한다. 당시 북경에는 동서남북 각각 천주교 성당이 한 채씩 건립되어 있었다. 그중 남쪽에 건립되어 있는 천주교 성당을 ‘남당’이라고 하였는데, 홍대용이 처음으로 방문한 천주교 성당이 바로 남당이었다. 그는 남당에 방문했을 때 보고 느낀 바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그 기록을 보면, 인용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상하다는 말이 몇 차례 보인다. 성당 경내에 둘러쳐 있는 벽에 그려진 그림을 봤을 때 홍대용은 그림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실제 경치를 그린 것으로 인지했다. 그러다 같이 간 종자가 실제 경치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말해주자 홍대용은 이상하다고 반응한다. 이는 홍대용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의 벽에 그린 인물 그림을 보았을 때도, 본당 정면 벽에 붙어 있는 예수가 공중에 떠 있는 그림을 봤을 때도 반복된다. 왜 이상하다고 인지했을까? 홍대용은 본당 정면 벽의 그림 속 인물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것을 보고는 여자라고 인식한다. 머리를 풀어 드리운 형상은 그의 인식 속에서 두 가지 차원과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머리를 풀고 드리운 채로 다니는 이는 여성이라는, 남녀에 대한 정형화된 구별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남자가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님은, 한자어로 ‘산발(散髮)’하고 있음은 소위 ‘오랑캐’의 표지라는 중화주의 세계관이다. 홍대용은 남자임에도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예수의 형상이 이 두 차원을 환기하였기에 이상하다고 한 것이다. 공중에 떠있는 형상도 이상하게 여겼다. 신선이라면 학 같은 동물을 타고 있거나 우화등선이라는 표현처럼 적어도 날개라도 달고 있어야 하는데 예수는 전혀 그런 양태가 아닌 채로 공중에 떠 있으니 이상하다고 인지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자신이 본 것이 그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성당 경내에 둘러쳐 있는 벽에 그린 그림을 보고 홍대용은 그림이 아닌 실경이라고 인지했는데 알고 보니 그림이었다. 본당 정면에 붙어 있는 그림을 봤을 때는 그림이 아닌 조각이려니 했다. 둘 다 먼 데는 작게 보이고 가까운 데는 크게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림이었던 것이다. 홍대용은 3차원의 입체감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해내는 선원근법을 몰랐던지라, 그에 대하여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가깝고 먼 것의 차이가 느껴지면 입체로 여겼고, 그 결과 입체감이 느껴지는 실제 풍경 아니면 조각한 것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조선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화법에 의하여 그려진 그림임에도 홍대용은 자신에게 익숙하고 당연한 방식으로 서양 그림을 인지하였고, 그 결과 그림은 실경이나 조각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음이다.
문명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며, 그러한 것을 구현하는 솜씨가 다르고 기법이 다르면 똑같은 사실도 이렇게 판이하게 인지한다. 그래서 나에게, 우리에게 익숙하다고 하여, 또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상식에 속하며 진리라고 판단되는 것들을 늘 문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과연 항상 그러한지, 또 언제부터 그것이 익숙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며 상식이고 진리인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나나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지를 반드시 반문해봐야 한다. 나아가 나, 우리와 다른 타자를 접할 때이면 필히 나,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연하며 상식이고 진리라는 점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홍대용처럼 그림을 실제 풍경이나 실제 인물, 조각상이라고 인지하는 오류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그림, 선원근법, 오랑캐, 을병연행록, 조각, 중화주의, 천주교, 성당, 타자, 홍대용
전후맥락
1765년 12월 27일 북경에 도착한 홍대용은 북경에서 꼭 하고자 했던 천주교 성당 방문을 추진한다. 이듬해가 되자 미리 방문 준비를 해놓았고, 1월 9일 드디어 북경 남쪽에 건립된 남당(南堂)을 방문한다. 홍대용은 정문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성당과 부속 건물의 모습, 실내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서양 선교사와 서양의 위치 등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일을 기록하였고, 예배당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의 외양을 묘사하고 직접 조선의 음악을 연주해본 일, 자명종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에 들어가 톱니바퀴 등으로 이루어진 자명종 기계를 살펴본 일 등을 기록하였다. 인용문은 그 기록의 일부이다. 홍대용은 1월 13일에 천주교 남당을 다시 방문하였고, 19일에도 다시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와 천문, 역법, 천주교(기독교) 등에 대하여 필담하였다. 1월 24일에는 북경의 동쪽에 건립한 천주교 동당(東堂)을 방문하여 남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동당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바를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고전본문
드디어 이덕성, 홍명복과 한 수레를 타고 천주당으로 향했다. … 큰 문을 들어가니 서쪽으로 또 문이 있는데 천주당 경내로 통하는 문이었다. 동쪽에 벽돌로 담을 깔끔하게 쌓고 가운데에 문을 내었는데 반쯤 열려 있어 그 문 밖의 켜켜이 자리한 집들이 은은히 보였다. 세팔을 불러 저기가 어느 곳이냐고 묻자 세팔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진짜 문이 아니라 담에 그림을 그려 구경하는 사람에게 솜씨를 뽐내려 한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두어 걸음을 다가서 보니 과연 담에 그린 그림이고 문도 진짜 문이 아니었다. 이것만 봐도 서양국의 그림 재주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 뒷문으로 들어가자 좌우에 켜켜이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고 뜰을 건너 두어 층 돌계단을 올라 남쪽을 향한 큰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은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었다. … 좌우 바람벽에 산수와 화초를 그렸고 또 인물을 가득 그렸는데 다 진짜 형상이었으며 공중에 드러나서 몇 발자국을 물러서면 내내 그림인 줄을 믿지 못할 듯하였다. 사람의 생기와 눈동자가 완연히 산 사람의 거동이어서 차마 가까이 나아가지 못할 듯하였고, 높은 바위에서 폭포가 쏟아지는 모습은 그 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옷이 젖는 듯하였다. … (본당은) 그 안이 남북으로 열 칸 정도였고 동서는 대여섯 칸이었으며 높이는 일고여덟 장이었다. 네 벽과 반자*를 다 벽돌로 만들고 나무는 전혀 안 썼으니 그 이상한 건축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북쪽 벽 위 한가운데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다. 여자의 상으로 머리를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 데를 바라보고 있는데 무한한 생각과 근심하는 기상이었다. 이것이 곧 천주(天主)**라 하는 사람이다.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 있는 모양이고, 선 곳은 깊은 감실*** 같아 처음 볼 때는 조각상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림이었다. 눈동자가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법이었다. 동서 벽에 각각 열 명 정도의 그림을 그렸는데 다 머리털을 드리우고 장삼 같은 긴 옷을 입었으니 이것이 서양국의 의복 제도인가 싶었다.
– 홍대용, 『을병연행록』 , 1766년 1월 9일자 일기.
* 반자 : 지붕 밑이나 위층 바닥 밑을 편평하게 하여 치장한 각 방의 윗면.
** 천주(天主) : 천주교의 하나님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예수를 가리킨다.
*** 감실(龕室) : 벽을 동굴처럼 움푹 파놓은 곳.
토론하기
(1) 홍대용이 천주교 성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상하다고 느낀 것들을 꼽아보자. 그것들은 왜 이상하다고 느껴졌을까? 또한 홍대용은 왜 그림을 실제 풍경이나 실제 인물 또는 조각으로 인식했을까?
(2)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을 접했던 경험을 나누어 보자. 그때 처음 접한 것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얘기해보자. 만약 처음 접한 것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겼는지에 대하여 분석해보자.
(3) 홍대용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했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사람의 인식은 과연 정확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연행사는 연행 사절단이라는 뜻으로 조선이 중국 청나라에 정기, 비정기로 파견하던 공식 사신단이다. ‘연행’은 ‘연경(燕京)에 갔다 오다’는 뜻으로 연경은 청나라의 수도 북경의 옛 이름이다. 그러니까 연행은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사신단으로서 갔다 온다’는 뜻이다. 연행록은 그러한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사람이 기록한 여행기를 가리킨다.
이상의 뜻만 보면 이 표현에는 아무런 폄하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연행은 실은 청나라를 낮잡아보는 뉘앙스가 담긴 표현이다. 주지하듯이 조선은 명나라를 종주국으로서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에 파견하는 공식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기록한 여행기를 ‘조천록(朝天錄)’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국왕보다 더 높은 ‘천자에게 조회하러 다녀온 여행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조회하다’는 표현은 지역의 군주가 중앙의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이니 조선을 낮추고 중국을 높이는 중화주의가 잔뜩 묻어 있는 표현이다. 이에 비해 연행록은 청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던 조선의 인식이 투영된 표현이다. 천자를 알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조선보다 못한 유목민족 출신의 왕조인 청나라에 갔다 왔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연행록은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명명이다. 지역 군주가 중앙의 천자를 알현하다 식의 뜻이 담겨 있지 않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일종의 멸칭(蔑稱, 경멸하는 호칭)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긍정적 명칭일 수 있다는 얘기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다.
주지하듯이 조선은 청이 명을 멸하고 중국의 새로운 천자의 나라로 섰을 때 청을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목지대에서 살던 소위 ‘오랑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청의 문물이 고도로 발달하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청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홍대용을 비롯하여 그와 친하게 교유했던 박지원,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청에 다녀오는 것이 이들 실학자들의 버킷 리스트 상위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홍대용도 예외가 아니어서 연행을 무척 바랐고, 드디어 숙부가 연행사의 책임자로 청에 다녀오게 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신단을 호위하는 군관 자격으로 연행사를 수행하였다. 인용문이 수록되어 있는 을병연행록은 이렇게 다녀오게 된 청나라 방문에서 경험한 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여행기이다.
홍대용은 중국에 가기 전부터, 앞서 중국에 다녀온 이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서양의 문물과 학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북경에 도착하자 서둘러 북경에 있는 천주교 성당을 방문하고자 했다. 1766년 1월 9일 홍대용은 드디어 천주교 성당을 방문한다. 당시 북경에는 동서남북 각각 천주교 성당이 한 채씩 건립되어 있었다. 그중 남쪽에 건립되어 있는 천주교 성당을 ‘남당’이라고 하였는데, 홍대용이 처음으로 방문한 천주교 성당이 바로 남당이었다. 그는 남당에 방문했을 때 보고 느낀 바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그 기록을 보면, 인용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상하다는 말이 몇 차례 보인다. 성당 경내에 둘러쳐 있는 벽에 그려진 그림을 봤을 때 홍대용은 그림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실제 경치를 그린 것으로 인지했다. 그러다 같이 간 종자가 실제 경치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말해주자 홍대용은 이상하다고 반응한다. 이는 홍대용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의 벽에 그린 인물 그림을 보았을 때도, 본당 정면 벽에 붙어 있는 예수가 공중에 떠 있는 그림을 봤을 때도 반복된다. 왜 이상하다고 인지했을까? 홍대용은 본당 정면 벽의 그림 속 인물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것을 보고는 여자라고 인식한다. 머리를 풀어 드리운 형상은 그의 인식 속에서 두 가지 차원과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머리를 풀고 드리운 채로 다니는 이는 여성이라는, 남녀에 대한 정형화된 구별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남자가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님은, 한자어로 ‘산발(散髮)’하고 있음은 소위 ‘오랑캐’의 표지라는 중화주의 세계관이다. 홍대용은 남자임에도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예수의 형상이 이 두 차원을 환기하였기에 이상하다고 한 것이다. 공중에 떠있는 형상도 이상하게 여겼다. 신선이라면 학 같은 동물을 타고 있거나 우화등선이라는 표현처럼 적어도 날개라도 달고 있어야 하는데 예수는 전혀 그런 양태가 아닌 채로 공중에 떠 있으니 이상하다고 인지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자신이 본 것이 그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성당 경내에 둘러쳐 있는 벽에 그린 그림을 보고 홍대용은 그림이 아닌 실경이라고 인지했는데 알고 보니 그림이었다. 본당 정면에 붙어 있는 그림을 봤을 때는 그림이 아닌 조각이려니 했다. 둘 다 먼 데는 작게 보이고 가까운 데는 크게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림이었던 것이다. 홍대용은 3차원의 입체감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해내는 선원근법을 몰랐던지라, 그에 대하여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가깝고 먼 것의 차이가 느껴지면 입체로 여겼고, 그 결과 입체감이 느껴지는 실제 풍경 아니면 조각한 것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조선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화법에 의하여 그려진 그림임에도 홍대용은 자신에게 익숙하고 당연한 방식으로 서양 그림을 인지하였고, 그 결과 그림은 실경이나 조각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음이다.
문명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며, 그러한 것을 구현하는 솜씨가 다르고 기법이 다르면 똑같은 사실도 이렇게 판이하게 인지한다. 그래서 나에게, 우리에게 익숙하다고 하여, 또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상식에 속하며 진리라고 판단되는 것들을 늘 문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과연 항상 그러한지, 또 언제부터 그것이 익숙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며 상식이고 진리인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나나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지를 반드시 반문해봐야 한다. 나아가 나, 우리와 다른 타자를 접할 때이면 필히 나,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연하며 상식이고 진리라는 점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홍대용처럼 그림을 실제 풍경이나 실제 인물, 조각상이라고 인지하는 오류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그림, 선원근법, 오후맥락
1765년 12월 27일 북경에 도착한 홍대용은 북경에서 꼭 하고자 했던 천주교 성당 방문을 추진한다. 이듬해가 되자 미리 방문 준비를 해놓았고, 1월 9일 드디어 북경 남쪽에 건립된 남당(南堂)을 방문한다. 홍대용은 정문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성당과 부속 건물의 모습, 실내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서양 선교사와 서양의 위치 등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일을 기록하였고, 예배당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의 외양을 묘사하고 직접 조선의 음악을 연주해본 일, 자명종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에 들어가 톱니바퀴 등으로 이루어진 자명종 기계를 살펴본 일 등을 기록하였다. 인용문은 그 기록의 일부이다. 홍대용은 1월 13일에 천주교 남당을 다시 방문하였고, 19일에도 다시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와 천문, 역법, 천주교(기독교) 등에 대하여 필담하였다. 1월 24일에는 북경의 동쪽에 건립한 천주교 동당(東堂)을 방문하여 남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동당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바를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고전본문
드디어 이덕성, 홍명복과 한 수레를 타고 천주당으로 향했다. … 큰 문을 들어가니 서쪽으로 또 문이 있는데 천주당 경내로 통하는 문이었다. 동쪽에 벽돌로 담을 깔끔하게 쌓고 가운데에 문을 내었는데 반쯤 열려 있어 그 문 밖의 켜켜이 자리한 집들이 은은히 보였다. 세팔을 불러 저기가 어느 곳이냐고 묻자 세팔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진짜 문이 아니라 담에 그림을 그려 구경하는 사람에게 솜씨를 뽐내려 한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두어 걸음을 다가서 보니 과연 담에 그린 그림이고 문도 진짜 문이 아니었다. 이것만 봐도 서양국의 그림 재주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 뒷문으로 들어가자 좌우에 켜켜이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고 뜰을 건너 두어 층 돌계단을 올라 남쪽을 향한 큰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은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었다. … 좌우 바람벽에 산수와 화초를 그렸고 또 인물을 가득 그렸는데 다 진짜 형상이었으며 공중에 드러나서 몇 발자국을 물러서면 내내 그림인 줄을 믿지 못할 듯하였다. 사람의 생기와 눈동자가 완연히 산 사람의 거동이어서 차마 가까이 나아가지 못할 듯하였고, 높은 바위에서 폭포가 쏟아지는 모습은 그 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옷이 젖는 듯하였다. … (본당은) 그 안이 남북으로 열 칸 정도였고 동서는 대여섯 칸이었으며 높이는 일고여덟 장이었다. 네 벽과 반자*를 다 벽돌로 만들고 나무는 전혀 안 썼으니 그 이상한 건축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북쪽 벽 위 한가운데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다. 여자의 상으로 머리를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 데를 바라보고 있는데 무한한 생각과 근심하는 기상이었다. 이것이 곧 천주(天主)**라 하는 사람이다.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 있는 모양이고, 선 곳은 깊은 감실*** 같아 처음 볼 때는 조각상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림이었다. 눈동자가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법이었다. 동서 벽에 각각 열 명 정도의 그림을 그렸는데 다 머리털을 드리우고 장삼 같은 긴 옷을 입었으니 이것이 서양국의 의복 제도인가 싶었다.
– 홍대용, 『을병연행록』 , 1766년 1월 9일자 일기.
* 반자 : 지붕 밑이나 위층 바닥 밑을 편평하게 하여 치장한 각 방의 윗면.
** 천주(天主) : 천주교의 하나님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예수를 가리킨다.
*** 감실(龕室) : 벽을 동굴처럼 움푹 파놓은 곳.
토론하기
(1) 홍대용이 천주교 성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상하다고 느낀 것들을 꼽아보자. 그것들은 왜 이상하다고 느껴졌을까? 또한 홍대용은 왜 그림을 실제 풍경이나 실제 인물 또는 조각으로 인식했을까?
(2)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을 접했던 경험을 나누어 보자. 그때 처음 접한 것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얘기해보자. 만약 처음 접한 것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겼는지에 대하여 분석해보자.
(3) 홍대용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했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사람의 인식은 과연 정확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연행사는 연행 사절단이라는 뜻으로 조선이 중국 청나라에 정기, 비정기로 파견하던 공식 사신단이다. ‘연행’은 ‘연경(燕京)에 갔다 오다’는 뜻으로 연경은 청나라의 수도 북경의 옛 이름이다. 그러니까 연행은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사신단으로서 갔다 온다’는 뜻이다. 연행록은 그러한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사람이 기록한 여행기를 가리킨다.
이상의 뜻만 보면 이 표현에는 아무런 폄하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연행은 실은 청나라를 낮잡아보는 뉘앙스가 담긴 표현이다. 주지하듯이 조선은 명나라를 종주국으로서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에 파견하는 공식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기록한 여행기를 ‘조천록(朝天錄)’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국왕보다 더 높은 ‘천자에게 조회하러 다녀온 여행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조회하다’는 표현은 지역의 군주가 중앙의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이니 조선을 낮추고 중국을 높이는 중화주의가 잔뜩 묻어 있는 표현이다. 이에 비해 연행록은 청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던 조선의 인식이 투영된 표현이다. 천자를 알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조선보다 못한 유목민족 출신의 왕조인 청나라에 갔다 왔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연행록은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명명이다. 지역 군주가 중앙의 천자를 알현하다 식의 뜻이 담겨 있지 않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일종의 멸칭(蔑稱, 경멸하는 호칭)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긍정적 명칭일 수 있다는 얘기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다.
주지하듯이 조선은 청이 명을 멸하고 중국의 새로운 천자의 나라로 섰을 때 청을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목지대에서 살던 소위 ‘오랑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청의 문물이 고도로 발달하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청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홍대용을 비롯하여 그와 친하게 교유했던 박지원,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청에 다녀오는 것이 이들 실학자들의 버킷 리스트 상위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홍대용도 예외가 아니어서 연행을 무척 바랐고, 드디어 숙부가 연행사의 책임자로 청에 다녀오게 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신단을 호위하는 군관 자격으로 연행사를 수행하였다. 인용문이 수록되어 있는 을병연행록은 이렇게 다녀오게 된 청나라 방문에서 경험한 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여행기이다.
홍대용은 중국에 가기 전부터, 앞서 중국에 다녀온 이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서양의 문물과 학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북경에 도착하자 서둘러 북경에 있는 천주교 성당을 방문하고자 했다. 1766년 1월 9일 홍대용은 드디어 천주교 성당을 방문한다. 당시 북경에는 동서남북 각각 천주교 성당이 한 채씩 건립되어 있었다. 그중 남쪽에 건립되어 있는 천주교 성당을 ‘남당’이라고 하였는데, 홍대용이 처음으로 방문한 천주교 성당이 바로 남당이었다. 그는 남당에 방문했을 때 보고 느낀 바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그 기록을 보면, 인용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상하다는 말이 몇 차례 보인다. 성당 경내에 둘러쳐 있는 벽에 그려진 그림을 봤을 때 홍대용은 그림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실제 경치를 그린 것으로 인지했다. 그러다 같이 간 종자가 실제 경치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말해주자 홍대용은 이상하다고 반응한다. 이는 홍대용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의 벽에 그린 인물 그림을 보았을 때도, 본당 정면 벽에 붙어 있는 예수가 공중에 떠 있는 그림을 봤을 때도 반복된다. 왜 이상하다고 인지했을까? 홍대용은 본당 정면 벽의 그림 속 인물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것을 보고는 여자라고 인식한다. 머리를 풀어 드리운 형상은 그의 인식 속에서 두 가지 차원과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머리를 풀고 드리운 채로 다니는 이는 여성이라는, 남녀에 대한 정형화된 구별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남자가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님은, 한자어로 ‘산발(散髮)’하고 있음은 소위 ‘오랑캐’의 표지라는 중화주의 세계관이다. 홍대용은 남자임에도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예수의 형상이 이 두 차원을 환기하였기에 이상하다고 한 것이다. 공중에 떠있는 형상도 이상하게 여겼다. 신선이라면 학 같은 동물을 타고 있거나 우화등선이라는 표현처럼 적어도 날개라도 달고 있어야 하는데 예수는 전혀 그런 양태가 아닌 채로 공중에 떠 있으니 이상하다고 인지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자신이 본 것이 그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성당 경내에 둘러쳐 있는 벽에 그린 그림을 보고 홍대용은 그림이 아닌 실경이라고 인지했는데 알고 보니 그림이었다. 본당 정면에 붙어 있는 그림을 봤을 때는 그림이 아닌 조각이려니 했다. 둘 다 먼 데는 작게 보이고 가까운 데는 크게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림이었던 것이다. 홍대용은 3차원의 입체감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해내는 선원근법을 몰랐던지라, 그에 대하여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가깝고 먼 것의 차이가 느껴지면 입체로 여겼고, 그 결과 입체감이 느껴지는 실제 풍경 아니면 조각한 것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조선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화법에 의하여 그려진 그림임에도 홍대용은 자신에게 익숙하고 당연한 방식으로 서양 그림을 인지하였고, 그 결과 그림은 실경이나 조각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음이다.
문명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며, 그러한 것을 구현하는 솜씨가 다르고 기법이 다르면 똑같은 사실도 이렇게 판이하게 인지한다. 그래서 나에게, 우리에게 익숙하다고 하여, 또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상식에 속하며 진리라고 판단되는 것들을 늘 문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과연 항상 그러한지, 또 언제부터 그것이 익숙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며 상식이고 진리인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나나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지를 반드시 반문해봐야 한다. 나아가 나, 우리와 다른 타자를 접할 때이면 필히 나,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연하며 상식이고 진리라는 점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홍대용처럼 그림을 실제 풍경이나 실제 인물, 조각상이라고 인지하는 오류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그림, 선원근법, 오랑캐, 을병연행록, 조각, 중화주의, 천주교, 성당, 타자, 홍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