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세잔은 ‘원초적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그는 문명화된 우리들의 습관적 인식 틀을 넘어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세계를 드리고자 했다. 그는 이미 명료하게 규정된 습관적 사유의 편견, 습관적 시각의 편견을 넘어서 마치 “인간이 첫 번째 말을 내뱉듯이” 붓 터치를 이어나갔다. 그 결과 그의 회화는 마치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원초적 세계가 구현된 화폭 속에는 주체와 세계, 지성과 감성 등 이분법이 사라지고 질서와 카오스가 이상야릇한 공존을 이루고 있었다.
고전본문
세잔은 그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기 그림의 고유한 방향을 따르고자 했다. 카오스와 질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잔은 감각과 사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볼 때에는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사물과 실상 그 사물이 나타나는 고정되지 않은 방식을 구분하려 들지 않으며, 점차 형태를 갖추어가는 중인 물질, 자발적 조직화를 통해 생겨나고 있는 질서를 그리고자 했다. 그는 ‘감각’과 지성’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 사물의 자발적 질서와 사고 및 학문이라는 인간적 질서를 가른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하고, 그것을 이해하며, 사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이 ‘자연’이라는 초석 위에 학문을 세운다. 세잔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원초적 세계다. 그리고 풍경을 찍은 사진이 인간의 작업, 인간의 편의, 인간의 임박한 현존을 시사하는 데 반해 세잔의 그림이 자연 본래의 인상을 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잔은 결코 “야만인처럼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지성, 사고, 학문, 원근법, 전통이 그것들이 이해해야만 하는 자연 세계와 만나기를, 즉 자연과 대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세잔이 말했듯이, 학문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
[출전] 메를로 퐁티 「세잔의 회의」 중에서
토론하기
(1) 세잔은 감각과 사유를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 이전의 보다 근본적인 원초적 세계, 곧 ‘자연’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 감각과 사유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게 된다. 위의 글에서 이분법적으로 이해된 ‘감각’ 및 ‘사유’의 특징들은 각각 무엇인가?
2) 감각과 사유의 이분법 내지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 이전의 원초적 세계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 경험에 대해 기술해보시오.
해설읽기
메를로-퐁티는 세잔이 “최초의 말을 할 때의 어려움”을 가지고 작업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습관화되고 세속화된 인식방식에 기대지 않고 세계 속 사물들과의 최초의 만남 속에 형성되는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의미한다. 메를로-퐁티는 그러한 원초적 접촉을 세계와 이성의 ‘신비’라 표현하며, 현상학자와 예술가가 이러한 신비를 길어내는 어려움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메를로-퐁티가 “주의와 경이”로 표현하는 그러한 어려움과 그것의 결과는 각각 우리가 객관적 사유의 양태를 벗고 오로지 현상하는 사태 자체에 주목하는 어려움, 그리고 이로써 야기되는 자연스런 경이감을 말한다. 이러한 주의와 경이는 결국 세계를 즉자적 상태의 것으로 축소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한 나의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 현상학적 태도를 말한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이 우리와 상관없이 저편에 있는 대상의 정보를 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고의 편견에 의한 것이다. 19세기 이래로 급격히 발달한 개별 과학들은 모든 대상 영역들에 무차별적으로 이러한 객관적 사고의 편견을 적용했다. 이러한 객관적 사고의 편견은 사실상 나와 대상이 애매하게 얽혀있는 존재의 모습을 가리고 왜곡한다. 세잔이 ‘눈을 크게 뜨고 시골 풍경과 함께 발아하고자’ 했을 때, 그는 이러한 객관적 사고의 편견 이전에 원초적으로 떠오르는 자연을 그리고자 했다.
순수 객관, 순수 주관이란 사실상 추상화된 사유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경험 속에서 매순간 자연과의 긴밀한 상호침투 속에 있다. 그리고 화가는 그러한 경험을 화폭에 옮긴다. 예술은 우리의 습관적 사고, 습관적 시각으로 굳어진, (사실은 그렇게 굳어져 있지 않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지평들의 망 속에 있다.) 그러한 외관 너머에서 우리에게 현상하는 바의 사물에 곧장 다가서고자 한다. 화가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지각이 현상의 전부인 것인 양 제공했던 사물들의 외관을 넘어서서 사물의 심층을 파고드는 “탐욕스러운 시각”을 행사한다. 일차적으로 드러났던, 언뜻 불연속적 감각 메시지들로 보였던 가시적 외관들은, 그것이 사실상 한 몸처럼 가지고 있으나 자신 아래에 감추어 두었던 비가시적인 두께와 깊이를 이러한 화가의 탐욕스런 시각 앞에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시각은 화가뿐 아니라 누구나 매일같이 행사하고 있는 것이나 일상의 의식적 차원에는 가려져 있다. 따라서 이를 드러내는 행위는 ‘마법적’이랄만한 놀라움을 동반한다. 사실 나의 봄, 나의 사유 속에는 대상들의 면면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고, 사물들 속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 그 본질적 속성에까지 침투해있어 이러한 기반 하에 나와 대상이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화가가 실천한다는 “마법적 시각이론”은 다만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고 있으나 놓치는 이러한 시각의 현상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에 ‘마법적’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만큼, 그러한 현상을 반성적으로 확인하고 의식화하는 데에는 우리에게 견고히 뿌리박힌 습관적 태도를 거스르는 낯섦의 감성이 동반된다. 자신의 지각에 충실하게 그린 세잔의 회화가 우리에게 언뜻 낯설고 불편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두고 세잔의 회화를 바라보면 어느새 그러한 불편함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더 없이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우리의 지각의 세계의 풍부함과 깊이를 마주하게 된다.
키워드
나감성, 세잔, 원초적 세계, 이분법, 자연, 지성
전후맥락
세잔은 ‘원초적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그는 문명화된 우리들의 습관적 인식 틀을 넘어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세계를 드리고자 했다. 그는 이미 명료하게 규정된 습관적 사유의 편견, 습관적 시각의 편견을 넘어서 마치 “인간이 첫 번째 말을 내뱉듯이” 붓 터치를 이어나갔다. 그 결과 그의 회화는 마치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원초적 세계가 구현된 화폭 속에는 주체와 세계, 지성과 감성 등 이분법이 사라지고 질서와 카오스가 이상야릇한 공존을 이루고 있었다.
고전본문
세잔은 그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기 그림의 고유한 방향을 따르고자 했다. 카오스와 질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잔은 감각과 사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볼 때에는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사물과 실상 그 사물이 나타나는 고정되지 않은 방식을 구분하려 들지 않으며, 점차 형태를 갖추어가는 중인 물질, 자발적 조직화를 통해 생겨나고 있는 질서를 그리고자 했다. 그는 ‘감각’과 지성’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 사물의 자발적 질서와 사고 및 학문이라는 인간적 질서를 가른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하고, 그것을 이해하며, 사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이 ‘자연’이라는 초석 위에 학문을 세운다. 세잔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원초적 세계다. 그리고 풍경을 찍은 사진이 인간의 작업, 인간의 편의, 인간의 임박한 현존을 시사하는 데 반해 세잔의 그림이 자연 본래의 인상을 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잔은 결코 “야만인처럼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지성, 사고, 학문, 원근법, 전통이 그것들이 이해해야만 하는 자연 세계와 만나기를, 즉 자연과 대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세잔이 말했듯이, 학문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
[출전] 메를로 퐁티 「세잔의 회의」 중에서
토론하기
(1) 세잔은 감각과 사유를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 이전의 보다 근본적인 원초적 세계, 곧 ‘자연’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 감각과 사유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게 된다. 위의 글에서 이분법적으로 이해된 ‘감각’ 및 ‘사유’의 특징들은 각각 무엇인가?
2) 감각과 사유의 이분법 내지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 이전의 원초적 세계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 경험에 대해 기술해보시오.
해설읽기
메를로-퐁티는 세잔이 “최초의 말을 할 때의 어려움”을 가지고 작업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습관화되고 세속화된 인식방식에 기대지 않고 세계 속 사물들과의 최초의 만남 속에 형성되는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의미한다. 메를로-퐁티는 그러한 원초적 접촉을 세계와 이성의 ‘신비’라 표현하며, 현상학자와 예술가가 이러한 신비를 길어내는 어려움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메를로-퐁티가 “주의와 경이”로 표현하는 그러한 어려움과 그것의 결과는 각각 우리가 객관적 사유의 양태를 벗고 오로지 현상하는 사태 자체에 주목하는 어려움, 그리고 이로써 야기되는 자연스런 경이감을 말한다. 이러한 주의와 경이는 결국 세계를 즉자적 상태의 것으로 축소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한 나의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 현상학적 태도를 말한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이 우리와 상관없이 저편에 있는 대상의 정보를 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고의 편견에 의한 것이다. 19세기 이래로 급격히 발달한 개별 과학들은 모든 대상 영역들에 무차별적으로 이러한 객관적 사고의 편견을 적용했다. 이러한 객관적 사고의 편견은 사실상 나와 대상이 애매하게 얽혀있는 존재의 모습을 가리고 왜곡한다. 세잔이 ‘눈을 크게 뜨고 시골 풍경과 함께 발아하고자’ 했을 때, 그는 이러한 객관적 사고의 편견 이전에 원초적으로 떠오르는 자연을 그리고자 했다.
순수 객관, 순수 주관이란 사실상 추상화된 사유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경험 속에서 매순간 자연과의 긴밀한 상호침투 속에 있다. 그리고 화가는 그러한 경험을 화폭에 옮긴다. 예술은 우리의 습관적 사고, 습관적 시각으로 굳어진, (사실은 그렇게 굳어져 있지 않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지평들의 망 속에 있다.) 그러한 외관 너머에서 우리에게 현상하는 바의 사물에 곧장 다가서고자 한다. 화가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지각이 현상의 전부인 것인 양 제공했던 사물들의 외관을 넘어서서 사물의 심층을 파고드는 “탐욕스러운 시각”을 행사한다. 일차적으로 드러났던, 언뜻 불연속적 감각 메시지들로 보였던 가시적 외관들은, 그것이 사실상 한 몸처럼 가지고 있으나 자신 아래에 감추어 두었던 비가시적인 두께와 깊이를 이러한 화가의 탐욕스런 시각 앞에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시각은 화가뿐 아니라 누구나 매일같이 행사하고 있는 것이나 일상의 의식적 차원에는 가려져 있다. 따라서 이를 드러내는 행위는 ‘마법적’이랄만한 놀라움을 동반한다. 사실 나의 봄, 나의 사유 속에는 대상들의 면면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고, 사물들 속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 그 본질적 속성에까지 침투해있어 이러한 기반 하에 나와 대상이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화가가 실천한다는 “마법적 시각이론”은 다만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고 있으나 놓치는 이러한 시각의 현상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에 ‘마법적’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만큼, 그러한 현상을 반성적으로 확인하고 의식화하는 데에는 우리에게 견고히 뿌리박힌 습관적 태도를 거스르는 낯섦의 감성이 동반된다. 자신의 지각에 충실하게 그린 세잔의 회화가 우리에게 언뜻 낯설고 불편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두고 세잔의 회화를 바라보면 어느새 그러한 불편함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더 없이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우리의 지각의 세계의 풍부함과 깊이를 마주하게 된다.
키워드
나감성, 세잔, 원초적 세계, 이분법, 자연, 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