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청소년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사랑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건 나이와 성별을 떠나서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 중 하나이며, 인생의 ‘봄날’을 맞은 청소년들이 이차 성징과 함께 성에 눈뜨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보다 평균수명이 절반 이하이던 시절임을 참작해야겠지만, 이몽룡과 성춘향이 사랑에 빠진 나이는 이팔청춘 16세이고, 이보다 더 조숙했던 줄리엣은 14살에 로미오를 따라 죽는다. 많은 청소년들이 그들과 같은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지만, 십대의 조숙한 연애를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어른들의 편견 어린 시선과 과도한 입시경쟁 속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랑을 포기하거나 유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십대의 사랑은 아직 여러모로 성숙하지 않아 위태롭고 때론 불나방같이 무모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가능한 순수함과 풋풋함이 있다. 이 셀묶음은 1930년대 비슷한 시기에 쓰인 두 편의 유명한 중국 현대소설에서 뽑아보았다. 쓰촨의 봉건적 대가정과 후난 서쪽 샹시(湘西) 지방 산골마을 젊은이들의 비슷한 듯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시내에서 학생들이 연극 공연을 하는데 군인들이 억지를 쓰며 공짜로 입장해서는 소란을 피우고 난동을 부리다 극장 기물을 부수고 학생들을 폭행하는 사건 발생하자, 줴후이는 매일 시위에 나가다가 할아버지에게 외출 금지 명령을 받는다. 줴후이는 갑갑한 마음에 집안의 매화 숲 정원을 거닐다가 새어머니의 분부를 받고 매화가지를 따고 있는 밍펑과 마주친다. 줴후이는 밍펑의 손이 닿지 않는 꽃가지를 대신 꺾어주고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지만, 요즈음 들어 왠지 자신을 피하는 듯한 밍펑의 태도가 서운하다.
고전본문
“너 요새 나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아. 나하고 말도 잘 하지 않으려 하고. 도대체 왜 그래?” 그는 한 손으로 옆에 늘어진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진담 반 농담 반인 듯한 어조로 말했다.
“무서워하긴 누가 널 무서워하니?” 밍펑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한가하게 이야기할 틈이 어딨니!”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가려고 했다.
줴후이가 다급히 손짓으로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 “난 알아. 너 정말 나를 무서워하잖아. 이야기할 새가 없다면서 그럼 아까는 어떻게 첸얼(倩兒)하고 거기서 놀았어? 호심정(湖心亭)에서 첸얼하고 이야기하는 거 다 봤어.”
“넌 도련님이고 난 계집종인데, 내가 어떻게 감히 너랑 길게 이야기하겠니?” 밍펑이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예전에는 어떻게 나랑 자주 놀았어? 그때도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줴후이는 계속 따져 물었다.
밍펑은 밝은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숙이고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다르지, 우린 다 컸잖아.”
“큰 게 무슨 상관인데? 우리들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줴후이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그런 게 아니야. 다 큰 남녀가 자주 붙어 다니면 남들이 흉본다구. 이 저택 안에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 같은 건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지만 너는 도련님이란 신분을 잊지 말고 조심해야 해.” 밍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는데, 목소리에서 괴로움이 느껴졌다.
“바로 돌아가지 말고 우리 저기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 좀 하자. 매화는 내가 들고 갈 테니 이리 줘.” 줴후이는 밍펑의 대답은 상관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서 매화가지를 빼앗아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작은 가지 두세 개를 골라냈다.
줴후이는 매화숲 밖 호숫가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었고 밍펑은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그는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한두 마디씩 물어보았고,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하거나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중략)
“이리 와서 앉아. 넌 왜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질 못하니?”
밍펑이 말없이 다가와 앉았다.
그들은 마주보며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난 가봐야겠어. 정원에 너무 오래 있으면 마님께서 날 나무라실 거야.” 그녀가 꿈에서 깨어난 듯이 일어서며 말했다.
“괜찮아. 마님은 나무라지 않으실 거야. 방금 와서 몇 마디 하지도 못했는데 누가 보내줄 줄 알고!” 줴후이는 밍펑의 왼쪽 팔을 붙잡아 다시 제자리에 앉혔다.
밍펑은 여전히 말이 없었으나 줴후이의 손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듯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거절의 표시는 아니었다.
“왜 말이 없어? 여기는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어. 이젠 날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는 일부러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밍펑은 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마음이 우리 집을 떠난 거로구나. 마님께 가서 너도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일찌감치 시집 보내시라고 말씀 드려야겠다.” 줴후이는 그녀의 운명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지만 실은 몰래 그녀의 눈빛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빛이 금세 변하더니 그 밝게 빛나던 눈빛이 어두워지며 한동안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약간 달싹거리긴 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수정 같은 눈물이 두 눈에 고여 빛나기 시작하더니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이야?”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으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중략)
“나도 언젠가 시얼(喜兒)과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걸 피할 수 없다고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뭐가 이렇게 빨리 왔다는 거야?”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그녀의 마지막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가 한 말 말이야…….”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그건 방금 농담이라고 했잖아. 난 어찌됐든 널 내보내지 않을 거고 시얼과 같은 길을 걷게 하지도 않을 거야. 그의 태도는 아주 진실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왼손을 끌어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만약에 마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어떻게 할래?” 밍펑이 물었다. 그녀는 이미 울음을 그쳤으나 목소리는 아직도 슬픔에 젖어 있었고 뺨에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줴후이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게 방법이 있어. 마님이 내 말대로 하시게 할 거야. 널 아내로 맞겠다고 말씀드리겠어…….” 그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나, 그는 이때 자신의 처지를 자세히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토론하기
(1) 평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지니고 가마조차 타지 않는 줴후이는 밍펑에게 “나도 너처럼 평범한 인간이야. 너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난 반드시 널 아내로 맞을 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네가 돈 있는 집에 태어났거나 친(琴) 누나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아쉬워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밍펑에 대한 줴후이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관료 대지주 집안의 자제인 줴후이와 하녀인 밍펑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를 줴후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말해보자.
(2) 늙은 지주의 첩으로 팔려가게 된 밍펑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내가 만약 밍펑과 같은 처지라면 어떻게 할까? 밍펑의 선택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해보자.
(3) 우리나라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도 집안 배경이나 경제력, 교육 수준 등에 의해 보이지 않는 계층과 계급 구분이 엄연히 존재한다. 조건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에 빠졌을 때 순수한 감정만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해설읽기
삼형제의 막내 줴후이(覺慧)는 작은 형 줴민(覺民)과 외국어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집안 어른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줴신과는 달리 반항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다. 부잣집 도련님이지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며 하인을 하대하지 않고 가마 타는 것을 싫어하는 ‘인도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순진하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열여섯 살 소녀 밍펑(鳴鳳)을 좋아한다. 밍펑은 7년 전 친아버지에 의해 가오씨 댁에 팔려온 계집종이다. 관료 대지주 집안의 자제와 하녀인 둘의 사랑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밍펑에게 줴후이는 손길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의 달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또래 사이의 두 사람은 신분을 떠나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지만, 최근 들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밍펑은 줴후이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자신을 피하는 듯 냉담한 밍펑의 태도에 서운해진 줴후이는 밍펑을 골려 주려고 “어머니께 일찌감치 시집 보내시라고 말씀 드려야겠다”라고 짓궂게 말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핀다. 당시 계집종은 혼기가 차면 마님이 적당히 골라준 생면부지의 상대, 즉 대개는 나이 많고 돈 없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집안일을 해주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가난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운명이었다. 어쩌면 10여 일쯤 지나서 다시 돌아와 옛 주인을 모시게 될지도 모른다. 달라지는 게 있다면 그때는 다만 몇 푼이라도 품삯을 받게 되고 매를 맞거나 욕을 먹는 건 좀 덜해질 것이다. 다섯째 마님(줴후이에게는 다섯째 숙모)의 하녀 시얼(喜兒)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밍펑이 그러한 운명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줴후이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밍펑의 반응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은 줴후이는 감동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한 심정으로 그녀를 위로한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듯 진지하게 밍펑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나, 자신의 처지를 자세히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이날 밍펑에게 “때가 되면 반드시 마님께 말하겠다”, “꼭 너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한다. 이에 대해 밍펑은 그런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으며, 다만 평생 곁에서 하녀로서 시중을 들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줴후이는 늘 큰형의 우유부단함을 비난했는데, 그도 밍펑에 대해서만큼은 결정적인 순간 무심하고 무책임하며 비겁했다. 오래지 않아 할아버지 가오 나으리가 밍펑을 예순이 다 된 펑러산(馮樂山)의 첩으로 보내려 했고, 그녀는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줴후이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다. 줴후이는 밍펑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지만 이튿날 아침까지 내야 할 원고와 주보사(週報社) 일로 바쁜 나머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고 며칠만 기다리라고 한다. 그녀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떠난 직후 줴후이는 작은 형으로부터 밍펑이 바로 내일 펑러산의 첩으로 보내질 거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줴후이는 밍펑에게 믿음을 주며 거듭 사랑을 확인시켰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쉽게 단념한다. 그는 밍펑이 그날 밤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야 뒤늦은 후회를 한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거나 다른 것에 눈이 어두워 그녀를 희생시킨 것 같아.”
“그녀는 언제나 내가 저를 구원해줄 걸로 믿고 있었건만 나는 그녀를 저버리고 말았어. 내가 그녀를 죽인 거야. 나는 용기가 부족했어…….”
밍펑의 비극적인 죽음은 신분제의 모순이나 사회적 불평등, 개인의 도덕성—집안의 하인을 가축이나 물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가오 나으리나 젊은 여자의 육체를 탐하는 펑러산—등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무책임하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었던 줴후이도 그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밍펑이 죽은 뒤 줴후이는 봉건예교와 집안의 구세대 어른들에게 대한 반항심을 더욱 불태우며 둘째 형 줴민과 친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돕는다.
키워드
가부장제, 결혼, 봉건예교, 사랑, 신분 격차, 연애, 자살, 자유혼, 중매혼
전후맥락
시내에서 학생들이 연극 공연을 하는데 군인들이 억지를 쓰며 공짜로 입장해서는 소란을 피우고 난동을 부리다 극장 기물을 부수고 학생들을 폭행하는 사건 발생하자, 줴후이는 매일 시위에 나가다가 할아버지에게 외출 금지 명령을 받는다. 줴후이는 갑갑한 마음에 집안의 매화 숲 정원을 거닐다가 새어머니의 분부를 받고 매화가지를 따고 있는 밍펑과 마주친다. 줴후이는 밍펑의 손이 닿지 않는 꽃가지를 대신 꺾어주고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지만, 요즈음 들어 왠지 자신을 피하는 듯한 밍펑의 태도가 서운하다.
고전본문
“너 요새 나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아. 나하고 말도 잘 하지 않으려 하고. 도대체 왜 그래?” 그는 한 손으로 옆에 늘어진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진담 반 농담 반인 듯한 어조로 말했다.
“무서워하긴 누가 널 무서워하니?” 밍펑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한가하게 이야기할 틈이 어딨니!”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가려고 했다.
줴후이가 다급히 손짓으로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 “난 알아. 너 정말 나를 무서워하잖아. 이야기할 새가 없다면서 그럼 아까는 어떻게 첸얼(倩兒)하고 거기서 놀았어? 호심정(湖心亭)에서 첸얼하고 이야기하는 거 다 봤어.”
“넌 도련님이고 난 계집종인데, 내가 어떻게 감히 너랑 길게 이야기하겠니?” 밍펑이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예전에는 어떻게 나랑 자주 놀았어? 그때도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줴후이는 계속 따져 물었다.
밍펑은 밝은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숙이고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다르지, 우린 다 컸잖아.”
“큰 게 무슨 상관인데? 우리들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줴후이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그런 게 아니야. 다 큰 남녀가 자주 붙어 다니면 남들이 흉본다구. 이 저택 안에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 같은 건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지만 너는 도련님이란 신분을 잊지 말고 조심해야 해.” 밍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는데, 목소리에서 괴로움이 느껴졌다.
“바로 돌아가지 말고 우리 저기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 좀 하자. 매화는 내가 들고 갈 테니 이리 줘.” 줴후이는 밍펑의 대답은 상관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서 매화가지를 빼앗아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작은 가지 두세 개를 골라냈다.
줴후이는 매화숲 밖 호숫가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었고 밍펑은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그는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한두 마디씩 물어보았고,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하거나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중략)
“이리 와서 앉아. 넌 왜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질 못하니?”
밍펑이 말없이 다가와 앉았다.
그들은 마주보며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난 가봐야겠어. 정원에 너무 오래 있으면 마님께서 날 나무라실 거야.” 그녀가 꿈에서 깨어난 듯이 일어서며 말했다.
“괜찮아. 마님은 나무라지 않으실 거야. 방금 와서 몇 마디 하지도 못했는데 누가 보내줄 줄 알고!” 줴후이는 밍펑의 왼쪽 팔을 붙잡아 다시 제자리에 앉혔다.
밍펑은 여전히 말이 없었으나 줴후이의 손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듯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거절의 표시는 아니었다.
“왜 말이 없어? 여기는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어. 이젠 날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는 일부러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밍펑은 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마음이 우리 집을 떠난 거로구나. 마님께 가서 너도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일찌감치 시집 보내시라고 말씀 드려야겠다.” 줴후이는 그녀의 운명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지만 실은 몰래 그녀의 눈빛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빛이 금세 변하더니 그 밝게 빛나던 눈빛이 어두워지며 한동안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약간 달싹거리긴 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수정 같은 눈물이 두 눈에 고여 빛나기 시작하더니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이야?”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으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중략)
“나도 언젠가 시얼(喜兒)과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걸 피할 수 없다고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뭐가 이렇게 빨리 왔다는 거야?”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그녀의 마지막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가 한 말 말이야…….”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그건 방금 농담이라고 했잖아. 난 어찌됐든 널 내보내지 않을 거고 시얼과 같은 길을 걷게 하지도 않을 거야. 그의 태도는 아주 진실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왼손을 끌어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만약에 마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어떻게 할래?” 밍펑이 물었다. 그녀는 이미 울음을 그쳤으나 목소리는 아직도 슬픔에 젖어 있었고 뺨에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줴후이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게 방법이 있어. 마님이 내 말대로 하시게 할 거야. 널 아내로 맞겠다고 말씀드리겠어…….” 그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나, 그는 이때 자신의 처지를 자세히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토론하기
(1) 평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지니고 가마조차 타지 않는 줴후이는 밍펑에게 “나도 너처럼 평범한 인간이야. 너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난 반드시 널 아내로 맞을 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네가 돈 있는 집에 태어났거나 친(琴) 누나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아쉬워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밍펑에 대한 줴후이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관료 대지주 집안의 자제인 줴후이와 하녀인 밍펑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를 줴후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말해보자.
(2) 늙은 지주의 첩으로 팔려가게 된 밍펑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내가 만약 밍펑과 같은 처지라면 어떻게 할까? 밍펑의 선택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해보자.
(3) 우리나라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도 집안 배경이나 경제력, 교육 수준 등에 의해 보이지 않는 계층과 계급 구분이 엄연히 존재한다. 조건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에 빠졌을 때 순수한 감정만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해설읽기
삼형제의 막내 줴후이(覺慧)는 작은 형 줴민(覺民)과 외국어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집안 어른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줴신과는 달리 반항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다. 부잣집 도련님이지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며 하인을 하대하지 않고 가마 타는 것을 싫어하는 ‘인도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순진하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열여섯 살 소녀 밍펑(鳴鳳)을 좋아한다. 밍펑은 7년 전 친아버지에 의해 가오씨 댁에 팔려온 계집종이다. 관료 대지주 집안의 자제와 하녀인 둘의 사랑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밍펑에게 줴후이는 손길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의 달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또래 사이의 두 사람은 신분을 떠나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지만, 최근 들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밍펑은 줴후이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자신을 피하는 듯 냉담한 밍펑의 태도에 서운해진 줴후이는 밍펑을 골려 주려고 “어머니께 일찌감치 시집 보내시라고 말씀 드려야겠다”라고 짓궂게 말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핀다. 당시 계집종은 혼기가 차면 마님이 적당히 골라준 생면부지의 상대, 즉 대개는 나이 많고 돈 없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집안일을 해주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가난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운명이었다. 어쩌면 10여 일쯤 지나서 다시 돌아와 옛 주인을 모시게 될지도 모른다. 달라지는 게 있다면 그때는 다만 몇 푼이라도 품삯을 받게 되고 매를 맞거나 욕을 먹는 건 좀 덜해질 것이다. 다섯째 마님(줴후이에게는 다섯째 숙모)의 하녀 시얼(喜兒)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밍펑이 그러한 운명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줴후이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밍펑의 반응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은 줴후이는 감동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한 심정으로 그녀를 위로한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듯 진지하게 밍펑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나, 자신의 처지를 자세히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이날 밍펑에게 “때가 되면 반드시 마님께 말하겠다”, “꼭 너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한다. 이에 대해 밍펑은 그런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으며, 다만 평생 곁에서 하녀로서 시중을 들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줴후이는 늘 큰형의 우유부단함을 비난했는데, 그도 밍펑에 대해서만큼은 결정적인 순간 무심하고 무책임하며 비겁했다. 오래지 않아 할아버지 가오 나으리가 밍펑을 예순이 다 된 펑러산(馮樂山)의 첩으로 보내려 했고, 그녀는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줴후이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다. 줴후이는 밍펑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지만 이튿날 아침까지 내야 할 원고와 주보사(週報社) 일로 바쁜 나머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고 며칠만 기다리라고 한다. 그녀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떠난 직후 줴후이는 작은 형으로부터 밍펑이 바로 내일 펑러산의 첩으로 보내질 거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줴후이는 밍펑에게 믿음을 주며 거듭 사랑을 확인시켰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쉽게 단념한다. 그는 밍펑이 그날 밤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야 뒤늦은 후회를 한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거나 다른 것에 눈이 어두워 그녀를 희생시킨 것 같아.”
“그녀는 언제나 내가 저를 구원해줄 걸로 믿고 있었건만 나는 그녀를 저버리고 말았어. 내가 그녀를 죽인 거야. 나는 용기가 부족했어…….”
밍펑의 비극적인 죽음은 신분제의 모순이나 사회적 불평등, 개인의 도덕성—집안의 하인을 가축이나 물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가오 나으리나 젊은 여자의 육체를 탐하는 펑러산—등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무책임하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었던 줴후이도 그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밍펑이 죽은 뒤 줴후이는 봉건예교와 집안의 구세대 어른들에게 대한 반항심을 더욱 불태우며 둘째 형 줴민과 친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