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청소년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사랑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건 나이와 성별을 떠나서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 중 하나이며, 인생의 ‘봄날’을 맞은 청소년들이 이차 성징과 함께 성에 눈뜨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보다 평균수명이 절반 이하이던 시절임을 참작해야겠지만, 이몽룡과 성춘향이 사랑에 빠진 나이는 이팔청춘 16세이고, 이보다 더 조숙했던 줄리엣은 14살에 로미오를 따라 죽는다. 많은 청소년들이 그들과 같은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지만, 십대의 조숙한 연애를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어른들의 편견 어린 시선과 과도한 입시경쟁 속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랑을 포기하거나 유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십대의 사랑은 아직 여러모로 성숙하지 않아 위태롭고 때론 불나방같이 무모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가능한 순수함과 풋풋함이 있다. 이 셀묶음은 1930년대 비슷한 시기에 쓰인 두 편의 유명한 중국 현대소설에서 뽑아보았다. 쓰촨의 봉건적 대가정과 후난 서쪽 샹시(湘西) 지방 산골마을 젊은이들의 비슷한 듯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음력 섣달 그믐날 낮, 막내 줴후이(覺慧)가 둘째 줴민(覺民)과 화원을 산책하다가 ‘만향루(晩香樓)’에 숨어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는 큰형 줴신(覺新)을 발견한다. 그는 며칠 전 길에서 우연히 첫사랑 메이와 마주치고 그녀가 청상과부가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에 자신이 지키지 못한 옛사랑과 지금의 아내를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줴후이는 애초에 집안 어른들이 혼사를 결정할 때 반항하지 않고 순종한 형이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형의 비통한 표정을 보면서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위로한다.
고전본문
“너 메이(梅) 누이를 보았니?”
“메이 누나? 메이 누나가 돌아왔다는 걸 형이 어떻게 알아?” 줴후이(覺慧)는 놀라며 이렇게 반문했다. 그는 형이 그런 것을 물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못 봤지만 친(琴) 누나는 본 적 있대.”
줴신(覺新)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그녀를 벌써 보았어. 며칠 전 아케이드 안에 있는 신발상(新發祥) 상점 문 앞에서 말이야.”
여기까지 말한 그는 당시의 정경을 회상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줴후이는 말없이 형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줴후이는 표정에서 그의 심정과 생각을 읽어보려 했다.
“큰이모하고 같이 왔더라. 큰이모는 상점 안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시고 메이는 상점 입구에서 옷감을 보고 있었는데 나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지. 하마터면 소리를 질러 부를 뻔했다. 메이도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듯 마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을 안쪽으로 돌리기에 시선을 따라 안을 들여다 보고서야 큰이모가 서 계신 걸 봤단다. 나는 옆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어. 메이는 그 크고도 시원스러워 보이는 눈으로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라. 그녀는 입술을 약간 달싹거리며 무슨 말을 할 듯하더니 뜻밖에도 머리를 돌리며 말 한 마디 없이 안으로 들어가버리고는 다시는 나를 돌아보지 않더구나.”
이때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 조용해졌다. 줴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번 만남으로 지난 일들이 모두 되살아났어. 그동안 나는 그녀를 잊고 있었어. 네 형수는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잘 하고 있고 나도 네 형수를 좋아한단다. 그런데 이번에 메이가 돌아왔고 나로 하여금 과거의 모든 것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구나. 내가 어떻게 메이를 잊을 수 있겠니? 이런 환경에서 나는 도저히 메이를 잊을 수 없어. 나는 그녀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고 싶어. 메이는 아마 내가 자기를 저버렸다고 원망하고 있을 거야. 난 그녀가 시집을 갔다가 과부가 되어 지금은 이모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도 다 알고 있어…….”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회한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는 형을 원망하지 않을 거야.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고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누구라도 과거의 일은 다 잊어버렸을 거야. 나는 형이 무엇 때문에 과거의 일을 가지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지 모르겠어. 지난 일들은 깊이깊이 묻어버려. 우리는 현재만 보고 앞으로의 일만 생각해야 해. 그리고 메이 누나도 아마 일찌감치 형을 잊어버렸을 걸.” 줴후이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이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는 몰라.” 줴신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메이가 어떻게 지난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겠니? 더구나 여자들이 지난 일을 얼마나 잘 기억하는데. 메이의 환경이 좀 나아서 그녀를 살뜰히 보살펴주는 남편이라도 있다면 과거를 어느 정도 잊어버릴 수도 있을 거고 나 역시 마음이 놓일 거야.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청상과부가 되어 이제 한평생 그 완고한 어머니 곁에서 비구니 같은 생활을 해야 하다니. 내가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으며 어떻게 메이를 잊어버릴 수 있겠니! 그렇지만 메이 생각을 많이 하면 또 네 형수에게 미안해져. 네 형수는 그렇게나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야 되겠니? 이러다가는 두 여자를 다 그르칠 것만 같아. 그러니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어?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래서 나는 내 머리를 흐릿하게 하려고 요새 자주 술을 마시는 거야. 너는 내가 종종 남몰래 운다는 것을 모를 게다. 남들 앞에서는 울 수도 없으니. 그런데 술이란 건 짧은 시간이 지나면 마취의 효력이 다하고 그 다음엔 뼈저린 후회만이 남아. 이렇게 무기력한 인간이 되어버린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
줴후이는 처음엔 “그건 모두 형이 자초한 거야. 왜 애당초 반항하지 않고 형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지? 지금 이 지경이 된 건 자업자득이라구!”라고 줴신을 책망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더 슬프고 괴로운 줴신의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그를 책망할 수 없었다.
토론하기
(1) 소설을 다 읽고 줴신과 메이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말해보자. 줴신이 다른 두 동생처럼 자유롭고 과감하게 행동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2) 『가(家)』는 억압적인 봉건 대가정에서 새로운 사상에 눈뜬 젊은 세대가 구세대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고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안에서 줴신(覺新), 줴민(覺民), 줴후이(覺慧) 삼형제의 사랑과 결혼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커플을 골라 그 이유를 말해보자.
(3)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책임감’을 느낀다. 형/언니/동생으로서의 책임감, 부모/자식으로서의 책임감, 학생으로서의 책임감, 친구로서의 책임감 등등. 지금 내가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책임감’은 무엇인가? 그 책임감으로 인해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한 적이 있는가?
해설읽기
『가(家)』의 무대는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의 관료 대지주 집안이자 4대가 모여 사는 대가정 가오(高)씨 댁으로, 큰집의 줴신(覺新), 줴민(覺民), 줴후이(覺慧) 삼형제가 주인공이다. 가문의 법통이 적장자(嫡長子: 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를 통해 이어지고 그 적장자가 가부장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 가부장적 종법질서 속에서 맏이 줴신이 느끼는 삶의 무게는 다른 두 동생과 달랐다. 어릴 적부터 잘 생기고 똑똑했던 줴신은 집안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의 총애를 받으며, 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를 졸업한 후 상하이나 베이징에 있는 명문대에 들어가 계속 공부하고 독일 유학까지 갈 꿈을 꾸었다. 중학교 재학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촌 동생을 후처로 맞아들였는데, 어머니의 빈 자리는 크게 느껴졌지만 줴신의 곁에는 그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이종사촌 여동생 메이(梅)가 있었다. 당시 이런 양반 가정에서 고종 혹은 이종사촌 간의 결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줴신이 은사와 학우들의 찬사 속에 졸업장을 타가지고 돌아온 날 밤, 그는 아버지로부터 “혼처를 보아 두었으니 올해 안으로 결혼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당시는 혼인 당사자가 배우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부모 또는 가부장권을 행사하는 집안의 웃어른이 결정한 배우자와 결혼하는 중매혼이 성행했다. 그는 메이를 사랑했고 그녀와 결혼하리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려던 꿈도 깨지고 사랑하는 메이와 결혼하려는 희망도 물거품이 되자, 줴신은 방문을 닫아걸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통곡했지만 감히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한 마디 원망도 없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
사실 줴신과 메이가 이어지지 못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처음엔 줴신의 아버지가 중매인을 내세워 정식으로 혼담을 넣었고 메이의 엄마도 둘을 결혼시킬 생각이 있었다. 줴신의 계모도 메이를 마음에 들어했고, 그 집에서 메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 메이의 엄마 첸(錢)씨 부인은 줴신의 친엄마와 친자매이고 계모 저우(周)씨와는 사촌지간이다. 그런데 어느 날 줴신의 계모와 메이의 엄마가 마작을 하다가 다툼이 생겼고, 무시당했다고 느낀 메이의 엄마가 “두 사람이 상극이라 결혼하면 여자 쪽이 일찍 죽는다”는 궁합을 핑계로 혼사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후 줴신네 집에서는 다른 집안과 혼사를 추진했고, 줴신이 약혼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메이의 엄마도 화가 나서 줴신의 계모와 대판 싸우고 의절하게 되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던 줴신은 예쁘고 다정다감한 리루이줴(李瑞珏)를 아내로 맞이한 후 이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만족하며 메이를 잊어버렸다. 한편 메이는 자오(趙)씨 집안으로 시집갔다가 일년도 못 되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시가에서 학대까지 당하여 친정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직장 근처의 상점에서 우연히 메이와 재회하게 된 줴신은 옛 감정이 되살아난다. 그는 메이의 불쌍한 처지를 슬퍼하면서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또 아내에 대해서도 다른 여자를 생각한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인가? 메이와의 어긋난 인연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며 술을 마시고 괴로워한 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의 희망이 사라진 메이는 “하루라도 더 살면 더 사는 것만큼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폐병이 걸린 사실을 어머니한테까지 감추다가 숨을 거둔다. 장손의 굴레를 끝내 벗어 던지지 못한 줴신은 옛사랑 메이는 물론 결국엔 사랑하는 아내마저 지키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내의 해산일이 임박했는데, 영구가 아직 집안에 있는 동안 집에서 출산을 하면 시신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의 첩 천(陳)씨가 아내를 성밖 외딴 곳으로 멀리 보내서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아내의 생명이 달린 일을 놓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데도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랐다가 아내는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줴신은 임종조차 하지 못한다.
키워드
가부장제, 결혼, 봉건예교, 사랑, 연애, 자유혼, 장손, 중매혼
전후맥락
음력 섣달 그믐날 낮, 막내 줴후이(覺慧)가 둘째 줴민(覺民)과 화원을 산책하다가 ‘만향루(晩香樓)’에 숨어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는 큰형 줴신(覺新)을 발견한다. 그는 며칠 전 길에서 우연히 첫사랑 메이와 마주치고 그녀가 청상과부가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에 자신이 지키지 못한 옛사랑과 지금의 아내를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줴후이는 애초에 집안 어른들이 혼사를 결정할 때 반항하지 않고 순종한 형이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형의 비통한 표정을 보면서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위로한다.
고전본문
“너 메이(梅) 누이를 보았니?”
“메이 누나? 메이 누나가 돌아왔다는 걸 형이 어떻게 알아?” 줴후이(覺慧)는 놀라며 이렇게 반문했다. 그는 형이 그런 것을 물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못 봤지만 친(琴) 누나는 본 적 있대.”
줴신(覺新)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그녀를 벌써 보았어. 며칠 전 아케이드 안에 있는 신발상(新發祥) 상점 문 앞에서 말이야.”
여기까지 말한 그는 당시의 정경을 회상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줴후이는 말없이 형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줴후이는 표정에서 그의 심정과 생각을 읽어보려 했다.
“큰이모하고 같이 왔더라. 큰이모는 상점 안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시고 메이는 상점 입구에서 옷감을 보고 있었는데 나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지. 하마터면 소리를 질러 부를 뻔했다. 메이도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듯 마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을 안쪽으로 돌리기에 시선을 따라 안을 들여다 보고서야 큰이모가 서 계신 걸 봤단다. 나는 옆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어. 메이는 그 크고도 시원스러워 보이는 눈으로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라. 그녀는 입술을 약간 달싹거리며 무슨 말을 할 듯하더니 뜻밖에도 머리를 돌리며 말 한 마디 없이 안으로 들어가버리고는 다시는 나를 돌아보지 않더구나.”
이때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 조용해졌다. 줴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번 만남으로 지난 일들이 모두 되살아났어. 그동안 나는 그녀를 잊고 있었어. 네 형수는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잘 하고 있고 나도 네 형수를 좋아한단다. 그런데 이번에 메이가 돌아왔고 나로 하여금 과거의 모든 것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구나. 내가 어떻게 메이를 잊을 수 있겠니? 이런 환경에서 나는 도저히 메이를 잊을 수 없어. 나는 그녀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고 싶어. 메이는 아마 내가 자기를 저버렸다고 원망하고 있을 거야. 난 그녀가 시집을 갔다가 과부가 되어 지금은 이모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도 다 알고 있어…….”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회한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는 형을 원망하지 않을 거야.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고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누구라도 과거의 일은 다 잊어버렸을 거야. 나는 형이 무엇 때문에 과거의 일을 가지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지 모르겠어. 지난 일들은 깊이깊이 묻어버려. 우리는 현재만 보고 앞으로의 일만 생각해야 해. 그리고 메이 누나도 아마 일찌감치 형을 잊어버렸을 걸.” 줴후이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이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는 몰라.” 줴신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메이가 어떻게 지난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겠니? 더구나 여자들이 지난 일을 얼마나 잘 기억하는데. 메이의 환경이 좀 나아서 그녀를 살뜰히 보살펴주는 남편이라도 있다면 과거를 어느 정도 잊어버릴 수도 있을 거고 나 역시 마음이 놓일 거야.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청상과부가 되어 이제 한평생 그 완고한 어머니 곁에서 비구니 같은 생활을 해야 하다니. 내가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으며 어떻게 메이를 잊어버릴 수 있겠니! 그렇지만 메이 생각을 많이 하면 또 네 형수에게 미안해져. 네 형수는 그렇게나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야 되겠니? 이러다가는 두 여자를 다 그르칠 것만 같아. 그러니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어?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래서 나는 내 머리를 흐릿하게 하려고 요새 자주 술을 마시는 거야. 너는 내가 종종 남몰래 운다는 것을 모를 게다. 남들 앞에서는 울 수도 없으니. 그런데 술이란 건 짧은 시간이 지나면 마취의 효력이 다하고 그 다음엔 뼈저린 후회만이 남아. 이렇게 무기력한 인간이 되어버린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
줴후이는 처음엔 “그건 모두 형이 자초한 거야. 왜 애당초 반항하지 않고 형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지? 지금 이 지경이 된 건 자업자득이라구!”라고 줴신을 책망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더 슬프고 괴로운 줴신의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그를 책망할 수 없었다.
토론하기
(1) 소설을 다 읽고 줴신과 메이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말해보자. 줴신이 다른 두 동생처럼 자유롭고 과감하게 행동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2) 『가(家)』는 억압적인 봉건 대가정에서 새로운 사상에 눈뜬 젊은 세대가 구세대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고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안에서 줴신(覺新), 줴민(覺民), 줴후이(覺慧) 삼형제의 사랑과 결혼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커플을 골라 그 이유를 말해보자.
(3)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책임감’을 느낀다. 형/언니/동생으로서의 책임감, 부모/자식으로서의 책임감, 학생으로서의 책임감, 친구로서의 책임감 등등. 지금 내가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책임감’은 무엇인가? 그 책임감으로 인해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한 적이 있는가?
해설읽기
『가(家)』의 무대는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의 관료 대지주 집안이자 4대가 모여 사는 대가정 가오(高)씨 댁으로, 큰집의 줴신(覺新), 줴민(覺民), 줴후이(覺慧) 삼형제가 주인공이다. 가문의 법통이 적장자(嫡長子: 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를 통해 이어지고 그 적장자가 가부장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 가부장적 종법질서 속에서 맏이 줴신이 느끼는 삶의 무게는 다른 두 동생과 달랐다. 어릴 적부터 잘 생기고 똑똑했던 줴신은 집안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의 총애를 받으며, 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를 졸업한 후 상하이나 베이징에 있는 명문대에 들어가 계속 공부하고 독일 유학까지 갈 꿈을 꾸었다. 중학교 재학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촌 동생을 후처로 맞아들였는데, 어머니의 빈 자리는 크게 느껴졌지만 줴신의 곁에는 그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이종사촌 여동생 메이(梅)가 있었다. 당시 이런 양반 가정에서 고종 혹은 이종사촌 간의 결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줴신이 은사와 학우들의 찬사 속에 졸업장을 타가지고 돌아온 날 밤, 그는 아버지로부터 “혼처를 보아 두었으니 올해 안으로 결혼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당시는 혼인 당사자가 배우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부모 또는 가부장권을 행사하는 집안의 웃어른이 결정한 배우자와 결혼하는 중매혼이 성행했다. 그는 메이를 사랑했고 그녀와 결혼하리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려던 꿈도 깨지고 사랑하는 메이와 결혼하려는 희망도 물거품이 되자, 줴신은 방문을 닫아걸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통곡했지만 감히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한 마디 원망도 없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
사실 줴신과 메이가 이어지지 못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처음엔 줴신의 아버지가 중매인을 내세워 정식으로 혼담을 넣었고 메이의 엄마도 둘을 결혼시킬 생각이 있었다. 줴신의 계모도 메이를 마음에 들어했고, 그 집에서 메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 메이의 엄마 첸(錢)씨 부인은 줴신의 친엄마와 친자매이고 계모 저우(周)씨와는 사촌지간이다. 그런데 어느 날 줴신의 계모와 메이의 엄마가 마작을 하다가 다툼이 생겼고, 무시당했다고 느낀 메이의 엄마가 “두 사람이 상극이라 결혼하면 여자 쪽이 일찍 죽는다”는 궁합을 핑계로 혼사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후 줴신네 집에서는 다른 집안과 혼사를 추진했고, 줴신이 약혼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메이의 엄마도 화가 나서 줴신의 계모와 대판 싸우고 의절하게 되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던 줴신은 예쁘고 다정다감한 리루이줴(李瑞珏)를 아내로 맞이한 후 이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만족하며 메이를 잊어버렸다. 한편 메이는 자오(趙)씨 집안으로 시집갔다가 일년도 못 되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시가에서 학대까지 당하여 친정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직장 근처의 상점에서 우연히 메이와 재회하게 된 줴신은 옛 감정이 되살아난다. 그는 메이의 불쌍한 처지를 슬퍼하면서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또 아내에 대해서도 다른 여자를 생각한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인가? 메이와의 어긋난 인연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며 술을 마시고 괴로워한 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의 희망이 사라진 메이는 “하루라도 더 살면 더 사는 것만큼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폐병이 걸린 사실을 어머니한테까지 감추다가 숨을 거둔다. 장손의 굴레를 끝내 벗어 던지지 못한 줴신은 옛사랑 메이는 물론 결국엔 사랑하는 아내마저 지키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내의 해산일이 임박했는데, 영구가 아직 집안에 있는 동안 집에서 출산을 하면 시신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의 첩 천(陳)씨가 아내를 성밖 외딴 곳으로 멀리 보내서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아내의 생명이 달린 일을 놓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데도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랐다가 아내는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줴신은 임종조차 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