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본문]
밖에서는 저녁때부터 뿌리던 눈발이 진눈깨비가 되고, 게다가 바람도 세차간다. 아래층의 쿵쾅 소리가 자지러들자, 모진 풍세에 우르를 하고 유리창이 지동치듯 흔들린다. 방 안의 사람들은 어깨를 쪼그라뜨리고, 집에 돌아갈 걱정에 팔려 있다.
A는 밖으로 나가서 차끈차끈한 진눈깨비를 맞으며 헤매어보고 싶은 충동이 간절하였으나, 지금 자기마저 자리를 뜨면 도망이나 하는 줄들 알리라는 생각이 들자, 한층 더 보조를 빨리하여 콩콩 구르며 부리나케 뺑뺑돈다.
“아 저놈의 시계가 앉인뱅이가 되었드람! 툇! 아직두 10시가 못 돼!”
누구인지 이런 소리를 한다. 차차 시간이 되어가니까 내남직없이 더 갑갑증이 나는 모양이다.
“흐흥, 그 일 묘하게 되어간다. 이때것 안 된 게, 10분 후에 되다니? 그 빌어먹을 윤전기*라도 진작 팔아먹구 다 집어치울 일이지. 번연히 안 될 일을 언제까지 이러구 있으면, 누가 장하다나? 흥, 뻔뻔스럽게 말들은 잘하지.”
“이 사람아 두 달두 속아왔는데 10분이야 못 참겠나? 하지만 싹이 노라이!”
“인젠 고만일세. 오늘이 대목야! 내일부터 여기 다시 발을 들여놓을, 개아들놈 없지.”
이런 조소와 맹세가 뒤달아 나왔다
(…)
A는 언젠가 어느 직공이 A를 옆에 세워놓고 들어보라는 듯이 이렇게 비웃던 말이 머리에 떠올라왔다.
‘신문도 먹어야 하지!’
옳지 않은 말은 아니지마는, 사원회에서 자기네들이 뽑아서 맡긴 위원들을, 시시각각으로 주눅이 들게 조르는 그네들의 생활이, A의 생활보다 여유가 있는 것은 그들의 옷 입고 다니는 것이나 잔돈푼 쓰는 것으로 보아도 뻔한 일이다.
신문이 아무리 중하여도 먹어야 하겠지마는, 굶고라도 신문은 죽여서 안 되겠다는 것은 허영심도 야심도 아니다. 누구고 간에 다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을 가망이 없고, 그 발행권의 취소가 무서운 까닭이다. 적당한 경영자가 나서기까지 발행권을 유지하는 것이, 민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라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일반 사원은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치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A는 낮에 몇 남지 않은 편집국원이 만들어놓고 나간 원고를, 이 책상 저 책상에서 돌아다가 네 면 기사를 따로따로 봉지에 넣어서 자기 책상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10시에 온다는 사람이 와서 반달치씩이라도 공장의 월급만 치르면, 오늘도 밤을 새워서라도 신문을 내어보내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 윤전기: 신문을 인쇄하는 데 쓰이는 인쇄기의 일종
염상섭의 「윤전기」중에서
토론하기
1) 만약 여러분이 위 작품에 나오는 신문사에 고용된 직공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태업을 벌일 것인가? A의 입장에 공감하고 신문사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볼 것인가? 아니면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찾아볼 것인가?
2) 학급의 담임 선생님이 반의 환경미화 평가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저녁 늦게까지 청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위의 글에서 살펴본 개인의 희생과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해보자.
3) 만약 여러분이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나가기 위해 버스를 이용했는데 낮은 임금과 부당한 노동조건 등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교통체증이 생겼다면, 파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파업으로 인해 시민들의 불편이 초래된다면 파업은 부당할까?
해설읽기
위 인용문은 노동자와 회사 임원들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들은 미지급된 임금을 조속히 지불할 것을 요구하며 회사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A를 비롯한 간부들이 돈을 주겠다며 약속해놓고서 도망이라도 가버리면 결국 임금을 지불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이 오지 않을까봐 초조한 것은 A도 마찬가지다. A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현실을 걱정하는 민족주의자 지식인으로, 언론을 통한 문화의 보급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고 있다. 따라서 A 역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신문사를 정상화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냉소적이다. 이미 몇 달씩이나 임금을 받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밤 10시까지 기다린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냐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시간은 왜 또 이리 안 가는지, 도대체 10시는 언제 되느냐며 성질을 부리는 노동자도 있다. 그 중에서도 A의 입장에서 제일 뼈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경영할 능력이 없으면 진작에 윤전기를 팔아 치우고 사업을 포기할 것이지 뭣하러 되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냐’는 어느 노동자의 비난이다. 몇 달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도 임금을 지불받지 못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못할 소리는 아니지만, A에게도 할 말이 있다.
첫째, 어려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굳이 정도를 따져보자면 A를 비롯한 간부단들이 훨씬 못 먹고 못 입어 가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A에 따르면 이 신문사는 사장이 따로 존재하는 회사라기보다 사원회를 통해 공동으로 운영하는 회사로, 회사 간부 역시도 노동자들이 직접 뽑아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 역시도 회사의 운영에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간부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자기 돈 좀 못 받는다는 이유로 민족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간부들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하는 노동자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A는 생각한다.
둘째, 신문을 만들기에 앞서 일단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할 수 있게끔 임금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당대 민족 현실을 감안할 때, 신문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경영을 그저 포기해버리기만 한다면 민족을 위한 신문 사업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총칼로 억압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민족을 지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일본은 한국 민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겠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웠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육 기회가 조금 더 확대되고 민족 신문의 간행이 허가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볼 때 일본은 언론사의 운영을 많은 부분에서 제약할 수 있었다.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에는 일본이 만든 통치 기구인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 번 신문 발행이 취소되면 신문사를 다시 되살리는 데는 어려움이 너무나 컸다. 그렇기에 ‘펜의 힘으로 민족현실을 극복해보겠다’는 의지로 뭉친 당대의 민족주의적 지식인 A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경영난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신문사 운영을 포기하지 않아야 옳다. 다시 말해, “민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노동자들도 신문사의 어려움을 가급적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용문 속의 상황은 식민지 현실에서 ‘민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대의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지불’이라는 의무가 충돌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A가 주장하는 바에 따를 때, 우리 민족이 외적에 의해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는 민족 수난의 상황에서 민족의 지식과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문사 경영자들의 헌신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렇잖아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조차 받지 못한 채, ‘대의에 헌신한다’는 명분만을 가지고 몇 달씩이나 임금도 받지 않고 노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도 부당한 일이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인용문의 말미에서 보다시피 노동자들에게 지급될 임금은 겨우 반 달치에 불과하다.
작품이 쓰여진 1925년 무렵에도 바로 이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어, 어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의 작가가 민족 현실을 위해 헌신한다는 감정에 치우쳐 노동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작가는 다르게 생각했다. 식민지에서 언론 사업을 벌이는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이 모두 어려운 처지에 있는 건 똑같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처지만 어려운 것처럼 단정지을 수는 없고, 오히려 이런 때에야말로 조선인 노동자와 조선인 경영자가 합심하여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작가에 따르면 작품에서 묘사된 노동자들의 ‘태업’은 ‘민족’의 미래따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앞가림만 생각한다는 점에서 비판될 여지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민족 모두의 이익이라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식민지 시기에 일제에 저항하고 민족의 대의에 헌신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모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야 했던 당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대의에 대한 헌신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큰 희생 없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포기하면서까지 민족의 대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국가적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면 우리는 나라를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국가의 위기를 구실삼아 희생을 강요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당할까? 위의 인용문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전본문]
밖에서는 저녁때부터 뿌리던 눈발이 진눈깨비가 되고, 게다가 바람도 세차간다. 아래층의 쿵쾅 소리가 자지러들자, 모진 풍세에 우르를 하고 유리창이 지동치듯 흔들린다. 방 안의 사람들은 어깨를 쪼그라뜨리고, 집에 돌아갈 걱정에 팔려 있다.
A는 밖으로 나가서 차끈차끈한 진눈깨비를 맞으며 헤매어보고 싶은 충동이 간절하였으나, 지금 자기마저 자리를 뜨면 도망이나 하는 줄들 알리라는 생각이 들자, 한층 더 보조를 빨리하여 콩콩 구르며 부리나케 뺑뺑돈다.
“아 저놈의 시계가 앉인뱅이가 되었드람! 툇! 아직두 10시가 못 돼!”
누구인지 이런 소리를 한다. 차차 시간이 되어가니까 내남직없이 더 갑갑증이 나는 모양이다.
“흐흥, 그 일 묘하게 되어간다. 이때것 안 된 게, 10분 후에 되다니? 그 빌어먹을 윤전기*라도 진작 팔아먹구 다 집어치울 일이지. 번연히 안 될 일을 언제까지 이러구 있으면, 누가 장하다나? 흥, 뻔뻔스럽게 말들은 잘하지.”
“이 사람아 두 달두 속아왔는데 10분이야 못 참겠나? 하지만 싹이 노라이!”
“인젠 고만일세. 오늘이 대목야! 내일부터 여기 다시 발을 들여놓을, 개아들놈 없지.”
이런 조소와 맹세가 뒤달아 나왔다
(…)
A는 언젠가 어느 직공이 A를 옆에 세워놓고 들어보라는 듯이 이렇게 비웃던 말이 머리에 떠올라왔다.
‘신문도 먹어야 하지!’
옳지 않은 말은 아니지마는, 사원회에서 자기네들이 뽑아서 맡긴 위원들을, 시시각각으로 주눅이 들게 조르는 그네들의 생활이, A의 생활보다 여유가 있는 것은 그들의 옷 입고 다니는 것이나 잔돈푼 쓰는 것으로 보아도 뻔한 일이다.
신문이 아무리 중하여도 먹어야 하겠지마는, 굶고라도 신문은 죽여서 안 되겠다는 것은 허영심도 야심도 아니다. 누구고 간에 다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을 가망이 없고, 그 발행권의 취소가 무서운 까닭이다. 적당한 경영자가 나서기까지 발행권을 유지하는 것이, 민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라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일반 사원은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치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A는 낮에 몇 남지 않은 편집국원이 만들어놓고 나간 원고를, 이 책상 저 책상에서 돌아다가 네 면 기사를 따로따로 봉지에 넣어서 자기 책상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10시에 온다는 사람이 와서 반달치씩이라도 공장의 월급만 치르면, 오늘도 밤을 새워서라도 신문을 내어보내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 윤전기: 신문을 인쇄하는 데 쓰이는 인쇄기의 일종
염상섭의 「윤전기」중에서
토론하기
1) 만약 여러분이 위 작품에 나오는 신문사에 고용된 직공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태업을 벌일 것인가? A의 입장에 공감하고 신문사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볼 것인가? 아니면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찾아볼 것인가?
2) 학급의 담임 선생님이 반의 환경미화 평가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저녁 늦게까지 청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위의 글에서 살펴본 개인의 희생과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해보자.
3) 만약 여러분이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나가기 위해 버스를 이용했는데 낮은 임금과 부당한 노동조건 등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교통체증이 생겼다면, 파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파업으로 인해 시민들의 불편이 초래된다면 파업은 부당할까?
해설읽기
위 인용문은 노동자와 회사 임원들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들은 미지급된 임금을 조속히 지불할 것을 요구하며 회사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A를 비롯한 간부들이 돈을 주겠다며 약속해놓고서 도망이라도 가버리면 결국 임금을 지불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이 오지 않을까봐 초조한 것은 A도 마찬가지다. A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현실을 걱정하는 민족주의자 지식인으로, 언론을 통한 문화의 보급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고 있다. 따라서 A 역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신문사를 정상화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냉소적이다. 이미 몇 달씩이나 임금을 받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밤 10시까지 기다린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냐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시간은 왜 또 이리 안 가는지, 도대체 10시는 언제 되느냐며 성질을 부리는 노동자도 있다. 그 중에서도 A의 입장에서 제일 뼈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경영할 능력이 없으면 진작에 윤전기를 팔아 치우고 사업을 포기할 것이지 뭣하러 되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냐’는 어느 노동자의 비난이다. 몇 달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도 임금을 지불받지 못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못할 소리는 아니지만, A에게도 할 말이 있다.
첫째, 어려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굳이 정도를 따져보자면 A를 비롯한 간부단들이 훨씬 못 먹고 못 입어 가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A에 따르면 이 신문사는 사장이 따로 존재하는 회사라기보다 사원회를 통해 공동으로 운영하는 회사로, 회사 간부 역시도 노동자들이 직접 뽑아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 역시도 회사의 운영에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간부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자기 돈 좀 못 받는다는 이유로 민족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간부들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하는 노동자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A는 생각한다.
둘째, 신문을 만들기에 앞서 일단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할 수 있게끔 임금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당대 민족 현실을 감안할 때, 신문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경영을 그저 포기해버리기만 한다면 민족을 위한 신문 사업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총칼로 억압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민족을 지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일본은 한국 민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겠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웠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육 기회가 조금 더 확대되고 민족 신문의 간행이 허가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볼 때 일본은 언론사의 운영을 많은 부분에서 제약할 수 있었다.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에는 일본이 만든 통치 기구인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 번 신문 발행이 취소되면 신문사를 다시 되살리는 데는 어려움이 너무나 컸다. 그렇기에 ‘펜의 힘으로 민족현실을 극복해보겠다’는 의지로 뭉친 당대의 민족주의적 지식인 A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경영난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신문사 운영을 포기하지 않아야 옳다. 다시 말해, “민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노동자들도 신문사의 어려움을 가급적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용문 속의 상황은 식민지 현실에서 ‘민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대의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지불’이라는 의무가 충돌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A가 주장하는 바에 따를 때, 우리 민족이 외적에 의해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는 민족 수난의 상황에서 민족의 지식과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문사 경영자들의 헌신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렇잖아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조차 받지 못한 채, ‘대의에 헌신한다’는 명분만을 가지고 몇 달씩이나 임금도 받지 않고 노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도 부당한 일이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인용문의 말미에서 보다시피 노동자들에게 지급될 임금은 겨우 반 달치에 불과하다.
작품이 쓰여진 1925년 무렵에도 바로 이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어, 어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의 작가가 민족 현실을 위해 헌신한다는 감정에 치우쳐 노동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작가는 다르게 생각했다. 식민지에서 언론 사업을 벌이는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이 모두 어려운 처지에 있는 건 똑같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처지만 어려운 것처럼 단정지을 수는 없고, 오히려 이런 때에야말로 조선인 노동자와 조선인 경영자가 합심하여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작가에 따르면 작품에서 묘사된 노동자들의 ‘태업’은 ‘민족’의 미래따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앞가림만 생각한다는 점에서 비판될 여지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민족 모두의 이익이라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식민지 시기에 일제에 저항하고 민족의 대의에 헌신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모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야 했던 당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대의에 대한 헌신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큰 희생 없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포기하면서까지 민족의 대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국가적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면 우리는 나라를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국가의 위기를 구실삼아 희생을 강요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당할까? 위의 인용문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