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두 개의 짧은 인용문은 <논어>의 학이편과 옹야편에 나오는 글이다. 첫번째 글은 공자와 제자 자공의 대화의 일부이다. 자공은 공자 제자 중에서 재물을 많이 모은 자이다. 두번째 글은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 안회에 관해 언급하는 내용이다. 안회는 “도에 가까왔지만 자주 끼니를 굶고”, “배우기를 가장 좋아하는” 제자이다.
고전본문
자공이 “가난한데 아첨하지 않고 부자인데 뽐내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라고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괜찮구나. 그렇지만 가난한데 즐거워하며 부자인데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구나”. (<논어> 학이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구나, 안회야! 한 그릇의 밥과 한 통의 물만 가지고 누추한 시골에서 산다면 사람들은 근심을 이기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야” (<논어> 옹야편)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論語> 學而)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論語> 雍也)
토론하기
1. 공자는 자공의 물음에 괜찮기는 하지만 충분치는 않다고 대답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 공자가 언급한 안회의 ‘그 즐거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해설읽기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에서 특이하게도 돈 버는 재주가 비상하여 많은 재화를 축적한 사람이다. 이 대화에서 언급된 사람이 자공 자신인지 다른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자공 자신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자공은 자신이 가난했던 시절부터 부자가 된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를 말하면서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 축에 끼는 것이 아닌가라고 스승에게 넌지시 물어보고 있는 듯하다. 가난할 때는 호구지책을 위해서라도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일이 말을 터이니 본의 아니더라도 아첨할 일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어서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면서 거만한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다. 적어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언뜻 듣기에는 훌륭하다고 할 만한데 공자는 그 정도면 괜찮다(可),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데 그친다. 조금 박하고 인색한 대답인 듯하다. 공자는 왜 이렇게 답했을까?
자공의 질문에는 가난한 삶이라는 조건 안에서, 또 부자라는 삶의 조건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가난과 부유함이라는 물질적 조건과 상관없이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의 고민은 비껴나 있다. 가난하다는 ‘불행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다는 ‘자랑할 만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겸손하다는 말에는 가난하다는 사실, 부유하다는 사실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즉 가난한 삶이냐, 부유한 삶이냐가 관건이 된다. 아첨하지 않고 뽐내지 않는 것은 사람의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가난함과 부유함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러하다. 이 때문에 자공의 물음에 괜찮기는 하지만, 충분히 좋은 삶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에게 가난한 이의 덕목을, 부자에게 부자의 덕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덕목을 요구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데도 즐거워한다 (貧而樂)’는 말은 무슨 말일까? 비록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 즐거운 일들을 많이 찾아내어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산꼭대기 동네에 살면서 도토리를 줍고 나물을 캐며 약수물을 길어다가 마시고 바위에 누워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 유유자적 하는 즐거움 말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또 다른 실마리를 찾는데 도움을 준다. 과연 공자의 애제자이면서 공부를 가장 좋아한다는 안회가 그런 즐거움에 만족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 즐거움(其樂)을 바꾸지 않’는다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가난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뚜렷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가난과 무관하게 안회가 추구하는 자신만의 즐거움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초라한 달동네의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 집에 들어갔지만 집에는 식은 밥 한 덩이와 생수 한 통밖에 없다면 그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난 자체를 즐거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난한데도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이 간직하고 추구하는 즐거움의 대상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의 대상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즐거워한다(樂)’ 뒤에는 생략된 말이 있는 것이다. 다소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안빈낙도’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자면 바로 ‘도(道)’이다. 여기서 ‘도’는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하여 가고 싶은 길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것이 거대한 이념일 수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일 수도 있고,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일 수도 있다. 요즘 식으로는 ‘꿈’이라고 한다면 더 맞을 것이다.
가난에 쪼들리는 와중에도 자기의 꿈을 놓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길(道)을 좇아간다면, 그것이 조금씩 실현될 때마다 생겨나는 즐거움이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가난에 짓눌리고 속박되어 아예 자신의 길을 만들고 꿈꾸는 것을 놓아버리는데, 그 즐거움을 계속 추구할 수 있다면 이는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뛰어나고 탁월한 사람인 것이다. 위 인용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유명한 ‘절차탁마’인 것을 보면, 분명 그 길은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치는 힘든 길이기도 하다.
가난하지 않다면 당장에는 폼 나는 운동화와 멋진 패딩을 살 수 있어서 즐거울 수 있겠다. 만약 가난해진다면 그 삶은 불행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추구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도(=꿈)가 있는 사람에게는 가난 여부가 자기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가난하더라도 추구할 도(=꿈)가 있다면, 예컨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고, 쓰고 싶은 글이 있고, 입증하고 싶은 과학적 가설이 있고, 만들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거기에 몰두하느라 가난 자체는 잊어버리거나 익숙해져서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에서 ‘안빈’이란 별도의 단계가 아니라 ‘낙도’를 하게 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류가 최근 2백년간 축적한 부와 문명은 수천년 동안 쌓아올린 것보다 훨씬 방대하다. 사람들은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지내면서도 자신이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살까봐 늘 전전긍긍하며 돈을 버는 일에 몰두한다.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을 해서도 돈을 모으는 일에만 올인한다. 가난 자체를 너무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대인들을 보면서 공자는 가난 그까이꺼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추구할 꿈도 가고 싶은 길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키워드
가난, 공자, 안빈낙도, 안회, 자공
전후맥락
두 개의 짧은 인용문은 <논어>의 학이편과 옹야편에 나오는 글이다. 첫번째 글은 공자와 제자 자공의 대화의 일부이다. 자공은 공자 제자 중에서 재물을 많이 모은 자이다. 두번째 글은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 안회에 관해 언급하는 내용이다. 안회는 “도에 가까왔지만 자주 끼니를 굶고”, “배우기를 가장 좋아하는” 제자이다.
고전본문
자공이 “가난한데 아첨하지 않고 부자인데 뽐내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라고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괜찮구나. 그렇지만 가난한데 즐거워하며 부자인데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구나”. (<논어> 학이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구나, 안회야! 한 그릇의 밥과 한 통의 물만 가지고 누추한 시골에서 산다면 사람들은 근심을 이기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야” (<논어> 옹야편)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論語> 學而)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論語> 雍也)
토론하기
1. 공자는 자공의 물음에 괜찮기는 하지만 충분치는 않다고 대답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 공자가 언급한 안회의 ‘그 즐거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해설읽기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에서 특이하게도 돈 버는 재주가 비상하여 많은 재화를 축적한 사람이다. 이 대화에서 언급된 사람이 자공 자신인지 다른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자공 자신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자공은 자신이 가난했던 시절부터 부자가 된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를 말하면서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 축에 끼는 것이 아닌가라고 스승에게 넌지시 물어보고 있는 듯하다. 가난할 때는 호구지책을 위해서라도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일이 말을 터이니 본의 아니더라도 아첨할 일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어서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면서 거만한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다. 적어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언뜻 듣기에는 훌륭하다고 할 만한데 공자는 그 정도면 괜찮다(可),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데 그친다. 조금 박하고 인색한 대답인 듯하다. 공자는 왜 이렇게 답했을까?
자공의 질문에는 가난한 삶이라는 조건 안에서, 또 부자라는 삶의 조건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가난과 부유함이라는 물질적 조건과 상관없이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의 고민은 비껴나 있다. 가난하다는 ‘불행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다는 ‘자랑할 만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겸손하다는 말에는 가난하다는 사실, 부유하다는 사실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즉 가난한 삶이냐, 부유한 삶이냐가 관건이 된다. 아첨하지 않고 뽐내지 않는 것은 사람의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가난함과 부유함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러하다. 이 때문에 자공의 물음에 괜찮기는 하지만, 충분히 좋은 삶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에게 가난한 이의 덕목을, 부자에게 부자의 덕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덕목을 요구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데도 즐거워한다 (貧而樂)’는 말은 무슨 말일까? 비록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 즐거운 일들을 많이 찾아내어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산꼭대기 동네에 살면서 도토리를 줍고 나물을 캐며 약수물을 길어다가 마시고 바위에 누워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 유유자적 하는 즐거움 말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또 다른 실마리를 찾는데 도움을 준다. 과연 공자의 애제자이면서 공부를 가장 좋아한다는 안회가 그런 즐거움에 만족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 즐거움(其樂)을 바꾸지 않’는다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가난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뚜렷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가난과 무관하게 안회가 추구하는 자신만의 즐거움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초라한 달동네의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 집에 들어갔지만 집에는 식은 밥 한 덩이와 생수 한 통밖에 없다면 그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난 자체를 즐거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난한데도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이 간직하고 추구하는 즐거움의 대상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의 대상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즐거워한다(樂)’ 뒤에는 생략된 말이 있는 것이다. 다소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안빈낙도’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자면 바로 ‘도(道)’이다. 여기서 ‘도’는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하여 가고 싶은 길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것이 거대한 이념일 수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일 수도 있고,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일 수도 있다. 요즘 식으로는 ‘꿈’이라고 한다면 더 맞을 것이다.
가난에 쪼들리는 와중에도 자기의 꿈을 놓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길(道)을 좇아간다면, 그것이 조금씩 실현될 때마다 생겨나는 즐거움이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가난에 짓눌리고 속박되어 아예 자신의 길을 만들고 꿈꾸는 것을 놓아버리는데, 그 즐거움을 계속 추구할 수 있다면 이는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뛰어나고 탁월한 사람인 것이다. 위 인용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유명한 ‘절차탁마’인 것을 보면, 분명 그 길은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치는 힘든 길이기도 하다.
가난하지 않다면 당장에는 폼 나는 운동화와 멋진 패딩을 살 수 있어서 즐거울 수 있겠다. 만약 가난해진다면 그 삶은 불행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추구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도(=꿈)가 있는 사람에게는 가난 여부가 자기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가난하더라도 추구할 도(=꿈)가 있다면, 예컨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고, 쓰고 싶은 글이 있고, 입증하고 싶은 과학적 가설이 있고, 만들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거기에 몰두하느라 가난 자체는 잊어버리거나 익숙해져서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에서 ‘안빈’이란 별도의 단계가 아니라 ‘낙도’를 하게 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류가 최근 2백년간 축적한 부와 문명은 수천년 동안 쌓아올린 것보다 훨씬 방대하다. 사람들은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지내면서도 자신이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살까봐 늘 전전긍긍하며 돈을 버는 일에 몰두한다.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을 해서도 돈을 모으는 일에만 올인한다. 가난 자체를 너무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대인들을 보면서 공자는 가난 그까이꺼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추구할 꿈도 가고 싶은 길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키워드
가난, 공자, 안빈낙도, 안회, 자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