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86년, 포숙아는 제 양공이 시해되기 전 이미 제 양공의 무도無道함을 보면서 장차 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공자 소백을 데리고 이웃 거나라로 망명한다. 자규를 모시던 관중과 소홀은 반란이 일어난 후 노나라로 피한다. 거나라와 노나라는 소백과 자규의 외가이기도 하다. 또 제나라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노 장공은 자기 나라에 와 있던 공자 규를 제 나라에 입국시켜 제 임금으로 세우려 했지만, 제나라와 거리상 더 가까운 거나라에 있던 소백이 먼저 제 나라에 들어가 군주의 자리에 올라 제 환공이 된다. 노 장공은 자신이 지지한 공자 규가 임금이 되기를 바라여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크게 패한다. 이때 공자 규와 관중, 소홀이 제환공 측의 포로가 된다.
고전본문
당초 제 양공재위 기원전 698~686이 군주가 되었을 때 언행이 상도를 벗어나니, 포숙아鮑叔牙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들을 방종하게 만들고 있어, 장차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고 하고서, 공자 소백小白을 모시고 거莒나라로 도망하였다. [공손 무지公孫 無知 등이 양공을 시해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관중과 소홀召忽은 공자 규糾를 모시고 노나라로 도망하였다.
9년 봄에 옹름雍廩이 공손 무지를 죽였다. 노 장공이 제 대부와 기蔇에서 결맹했는데, 이는 제나라에 임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름에 노 장공이 제나라를 치고 공자 규를 제나라 임금으로 들여보내려 했는데, 소백이 거나라에서 먼저 제나라로 들어갔다.
가을에 노 군대가 제 군대와 간시乾時에서 싸웠는데 노 군대가 대패하였다. 노 장공은 수레를 잃고서 다른 수레를 타고 돌아왔다. 진자秦子 · 양자梁子가 장공의 깃발을 가지고 사잇길로 피해 제 군대를 유인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모두 제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포숙아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말했다.
“자규는 친족이니 바라건대 노 임금께서 그를 죽이시고, 관중과 소홀은 원수이니 넘겨주시면 기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노나라가] 공자 규를 죽였다. 소홀은 공자 규를 따라 죽었다. 관중은 제나라의 포로가 되기를 요청하였고, 포숙이 넘겨받아 당부堂阜에서 그를 풀어주었다.
포숙이 돌아가서 제 환공(소백)에게 “관중은 나라를 다스리는 재능이 고혜高傒보다 뛰어나니, 그를 재상으로 삼으소서.”라고 고하니, 환공이 그의 말을 따랐다.
토론하기
1. 관중이 소홀처럼 주군을 따라 죽지 않을 수는 있지만, 자기 주군의 원수였던 제 환공의 정권에서 재상으로 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까?
2. 관중과 포숙아 두 사람 중에 한 명을 스승으로 모신다면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가? 그 이유를 얘기해 보자.
3. 이글에 등장한 인물들을 나열해 보자. 드라마나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은가? 인물의 캐리커쳐를 직접 그려보아도 좋다.
해설읽기
(일부 수정 예정. 독립 셀로 있다가, 제출 전에 ‘한마음 두마음’ 셀묶음에 넣음)
이 기사는 <춘추좌전>의 노 장공 8년과 9년(기원전 686-685년)에 기록되어 있다. 변하지 않는 참된 우정의 대명사인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과 포숙아가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명의 주요 인물이다. 관중과 포숙아의 일은 <사기 열전>에도 실려 있지만, <좌전>의 이 부분은 관중과 포숙아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고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어, 그들 각각의 성격과 모습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태도 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보기 좋다.
관중은 역사가나 사상가들이 즐겨 언급하는 인물들 중의 한 명이다. 제 환공이 패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보좌한 춘추시대 최고의 재상이라서가 아니라,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학자마다 관중에 대한 호불호가 다를 뿐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도 관중의 이미지에 대한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맹자의 제자인 공손추가 맹자에게 제 나라에서 요직을 담당하면 관중이 한 것만큼 공을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해 묻자, 맹자는 증서曾西라는 사람의 일화를 소개한다. 즉 자신과 자로子路, 또는 자신과 관중 중에서 누가 더 훌륭한가라는 질문을 받자 증서는 자로와 비교되는 것에는 매우 황송해 했지만, 관중과 비교 당하는 것은 매우 불쾌히 여겼다. 관중은 군주의 신임을 오랫동안 독차지했지만 공적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적이 낮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양시楊時 1053-1135는 그것을 말을 모는 것에 비유하며 “자로는 말 모는 것을 법대로 해서 짐승을 잡지 못한 것이고, 관중의 공로는 부정한 방법으로 짐승을 만나서 잡았을 뿐이다”라고 해석한다. 즉 패권을 잡기 위해 올바르지 않은 일도 불사하지 않았고 또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증서, 맹자, 양시처럼 관중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공자의 언급은 “관중은 그릇이 작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다른 사람에게 크게 베풀지 않고, 아끼고 검소하다는 뜻일까? 공자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진의를 잘 알기는 어렵지만, 소식蘇軾 1036-1101은 “관중이 죽고 환공이 죽자 천하는 다시 제나라를 종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관중이 이룩한 공적은 보편적인 질서로 자리 잡지 못하고, 관중과 같은 특출한 재상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공적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혼자 잘난 것일 뿐, 자신의 공업功業을 세상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키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큰 그릇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소홀은 그를 위해 따라 죽었지만,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관중을 어질다仁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공자는 “제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할 때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덕택이니 누가 그 만큼 어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즉 관중이 소홀을 따라 죽었다면 제 환공은 패권을 장악할 수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했을 터이니, 관중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한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에 또 다른 제자 자공子貢은 “환공이 자신이 모시던 공자 규를 죽였는데도 환공을 도와주었으니 어진 사람仁者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관중이 죽지 않은 것은 괜찮지만 원수와 같은 환공을 도운 것은 너무 심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관중이 환공을 도와서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여 천하를 바로 잡았기 때문에 오랑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처럼 큰일을 하는 사람이 “필부匹夫·필부匹婦들이 작은 신의를 위해 도랑에 목매어 죽는 것”처럼 자결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는가라고 묻는다.
공자의 이 말은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즉 세상에 큰 공功을 세웠다면 전후에 행한 잘못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예컨대 무력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국가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면 쿠데타 경력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인류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라면 외국군이 자기 나라를 침략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외국군대에 협력하는 것쯤은 눈감아 줘도 되는 것일까? 적어도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는 죄와 벌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다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 판단은 쉽지 않다. 그런데 공功이 있다면 과過를 어느 정도 용서하고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이 경고한 것처럼 “자기 임금을 배반하고 그 원수를 섬기는 자들이 모두 자신을 관중에 비교하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도 있다. 그들은 관중과 같은 공을 세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원래는 관중과 같은 포부를 가지고 배신했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때 친일을 했던 사람이 자신은 ‘더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변명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키워드
관중, 규, 소백, 소홀, 제양공, 포숙아
전후맥락
기원전 686년, 포숙아는 제 양공이 시해되기 전 이미 제 양공의 무도無道함을 보면서 장차 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공자 소백을 데리고 이웃 거나라로 망명한다. 자규를 모시던 관중과 소홀은 반란이 일어난 후 노나라로 피한다. 거나라와 노나라는 소백과 자규의 외가이기도 하다. 또 제나라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노 장공은 자기 나라에 와 있던 공자 규를 제 나라에 입국시켜 제 임금으로 세우려 했지만, 제나라와 거리상 더 가까운 거나라에 있던 소백이 먼저 제 나라에 들어가 군주의 자리에 올라 제 환공이 된다. 노 장공은 자신이 지지한 공자 규가 임금이 되기를 바라여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크게 패한다. 이때 공자 규와 관중, 소홀이 제환공 측의 포로가 된다.
고전본문
당초 제 양공재위 기원전 698~686이 군주가 되었을 때 언행이 상도를 벗어나니, 포숙아鮑叔牙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들을 방종하게 만들고 있어, 장차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고 하고서, 공자 소백小白을 모시고 거莒나라로 도망하였다. [공손 무지公孫 無知 등이 양공을 시해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관중과 소홀召忽은 공자 규糾를 모시고 노나라로 도망하였다.
9년 봄에 옹름雍廩이 공손 무지를 죽였다. 노 장공이 제 대부와 기蔇에서 결맹했는데, 이는 제나라에 임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름에 노 장공이 제나라를 치고 공자 규를 제나라 임금으로 들여보내려 했는데, 소백이 거나라에서 먼저 제나라로 들어갔다.
가을에 노 군대가 제 군대와 간시乾時에서 싸웠는데 노 군대가 대패하였다. 노 장공은 수레를 잃고서 다른 수레를 타고 돌아왔다. 진자秦子 · 양자梁子가 장공의 깃발을 가지고 사잇길로 피해 제 군대를 유인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모두 제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포숙아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말했다.
“자규는 친족이니 바라건대 노 임금께서 그를 죽이시고, 관중과 소홀은 원수이니 넘겨주시면 기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노나라가] 공자 규를 죽였다. 소홀은 공자 규를 따라 죽었다. 관중은 제나라의 포로가 되기를 요청하였고, 포숙이 넘겨받아 당부堂阜에서 그를 풀어주었다.
포숙이 돌아가서 제 환공(소백)에게 “관중은 나라를 다스리는 재능이 고혜高傒보다 뛰어나니, 그를 재상으로 삼으소서.”라고 고하니, 환공이 그의 말을 따랐다.
토론하기
1. 관중이 소홀처럼 주군을 따라 죽지 않을 수는 있지만, 자기 주군의 원수였던 제 환공의 정권에서 재상으로 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까?
2. 관중과 포숙아 두 사람 중에 한 명을 스승으로 모신다면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가? 그 이유를 얘기해 보자.
3. 이글에 등장한 인물들을 나열해 보자. 드라마나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은가? 인물의 캐리커쳐를 직접 그려보아도 좋다.
해설읽기
(일부 수정 예정. 독립 셀로 있다가, 제출 전에 ‘한마음 두마음’ 셀묶음에 넣음)
이 기사는 <춘추좌전>의 노 장공 8년과 9년(기원전 686-685년)에 기록되어 있다. 변하지 않는 참된 우정의 대명사인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과 포숙아가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명의 주요 인물이다. 관중과 포숙아의 일은 <사기 열전>에도 실려 있지만, <좌전>의 이 부분은 관중과 포숙아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고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어, 그들 각각의 성격과 모습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태도 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보기 좋다.
관중은 역사가나 사상가들이 즐겨 언급하는 인물들 중의 한 명이다. 제 환공이 패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보좌한 춘추시대 최고의 재상이라서가 아니라,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학자마다 관중에 대한 호불호가 다를 뿐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도 관중의 이미지에 대한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맹자의 제자인 공손추가 맹자에게 제 나라에서 요직을 담당하면 관중이 한 것만큼 공을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해 묻자, 맹자는 증서曾西라는 사람의 일화를 소개한다. 즉 자신과 자로子路, 또는 자신과 관중 중에서 누가 더 훌륭한가라는 질문을 받자 증서는 자로와 비교되는 것에는 매우 황송해 했지만, 관중과 비교 당하는 것은 매우 불쾌히 여겼다. 관중은 군주의 신임을 오랫동안 독차지했지만 공적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적이 낮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양시楊時 1053-1135는 그것을 말을 모는 것에 비유하며 “자로는 말 모는 것을 법대로 해서 짐승을 잡지 못한 것이고, 관중의 공로는 부정한 방법으로 짐승을 만나서 잡았을 뿐이다”라고 해석한다. 즉 패권을 잡기 위해 올바르지 않은 일도 불사하지 않았고 또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증서, 맹자, 양시처럼 관중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공자의 언급은 “관중은 그릇이 작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다른 사람에게 크게 베풀지 않고, 아끼고 검소하다는 뜻일까? 공자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진의를 잘 알기는 어렵지만, 소식蘇軾 1036-1101은 “관중이 죽고 환공이 죽자 천하는 다시 제나라를 종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관중이 이룩한 공적은 보편적인 질서로 자리 잡지 못하고, 관중과 같은 특출한 재상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공적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혼자 잘난 것일 뿐, 자신의 공업功業을 세상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키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큰 그릇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소홀은 그를 위해 따라 죽었지만,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관중을 어질다仁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공자는 “제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할 때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덕택이니 누가 그 만큼 어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즉 관중이 소홀을 따라 죽었다면 제 환공은 패권을 장악할 수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했을 터이니, 관중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한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에 또 다른 제자 자공子貢은 “환공이 자신이 모시던 공자 규를 죽였는데도 환공을 도와주었으니 어진 사람仁者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관중이 죽지 않은 것은 괜찮지만 원수와 같은 환공을 도운 것은 너무 심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관중이 환공을 도와서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여 천하를 바로 잡았기 때문에 오랑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처럼 큰일을 하는 사람이 “필부匹夫·필부匹婦들이 작은 신의를 위해 도랑에 목매어 죽는 것”처럼 자결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는가라고 묻는다.
공자의 이 말은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즉 세상에 큰 공功을 세웠다면 전후에 행한 잘못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예컨대 무력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국가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면 쿠데타 경력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인류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라면 외국군이 자기 나라를 침략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외국군대에 협력하는 것쯤은 눈감아 줘도 되는 것일까? 적어도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는 죄와 벌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다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 판단은 쉽지 않다. 그런데 공功이 있다면 과過를 어느 정도 용서하고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이 경고한 것처럼 “자기 임금을 배반하고 그 원수를 섬기는 자들이 모두 자신을 관중에 비교하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도 있다. 그들은 관중과 같은 공을 세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원래는 관중과 같은 포부를 가지고 배신했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때 친일을 했던 사람이 자신은 ‘더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변명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