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전본문
(배경 : 윤기의 친구 한 명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는데, 그를 핍박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구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옥중의 친구는 평소에 윤기가 믿고 존중하는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그가 윤기에게 글을 보내 수령에게 석방을 청하는 청원서를 올려주기를 부탁했다. 이에 윤기는 글을 써서 초고를 가까운 친척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가 글을 다 읽고는 화를 내며 글을 잘 못 썼다고 말하며 글을 잘 쓴다고 유명한 사람에게 부탁할 것을 요구했다. 마침 옆에 있던 사람이 이를 보고, 바로 그 사람이 쓴 글이라고 둘러대었다. 그 친척은 한참 후에 이런 좋은 글을 자신이 놓칠 뻔했다고 말하고, 청원서를 내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아, 사사로운 마음은 참으로 털끝만큼도 마음속에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심이 한번 끼어들고 나면 서시(西施) 같은 절세미인도 무염(無鹽) 같은 추녀로 보이고, 도척(盜跖) 같은 도적도 백이(伯夷) 같은 군자로 보이게 됩니다. 눈이 남과 달라서도 아니고 마음이 사람들과 달라서도 아니고, 사심 하나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무수히 벌어지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는 위아래가 뒤바뀌고 온 세상이 제자리를 잃어서, 사물 하나 사건 하나도 본래대로 평가되는 것이 없게 되니,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글은 한 편의 문장일 뿐입니다만, 제 글이라 생각하고 보면 좋지 않고, 갑의 글이라 생각하고 보면 볼수록 좋아지니, 이는 우눌(虞訥, ?~?)이 장솔(張率, 475~527)을 깎아내리고 심약(沈約, 441~513)에게 아첨한 방식이었습니다. 글이 순간 탈바꿈해서도 아니고 눈이 잠깐 사이에 바뀌어서도 아니라 오직 보는 자세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글 자체의 좋고 나쁨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글쓴이의 유명하고 유명하지 않음에 따를 뿐이니, 식자(識者)의 입장에서 보면 비웃음을 당한다고 수치스러울 것도 없고 칭찬을 받는다고 영광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글쓴이의 명성을 기준으로 글을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余出而語傍人曰, 甚矣, 私意之不可容一毫於方寸間也. 私意一加, 則西子可變而爲無塩, 盜跖可化而爲伯夷. 非其眼之異於人也, 非其心之殊乎衆也, 由一私意, 做出來無限不好底光景. 甚至於冠屨倒置乾坤失位, 無一物一事得其本色者矣, 其不祥孰大焉. 此文固一箇文也, 視之以吾之文則不可, 視之以某甲之文則愈視而愈好, 此虞訥所以詆於張率而媚於沈約也. 非其文之幻於卽地也, 非其眼之更於俄頃也. 所以視之者然也. 然則文之好否, 果何與乎. 亦由於有名與無名而已矣. 自識者觀之, 則其見笑不足羞, 其見詡不足榮, 而抑世之不以名爲眼者, 其幾人哉.
토론하기
1. ‘친척’이 처음에는 윤기의 청원서를 제출하고 싶어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같은 청원서를 올리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2. 같은 내용을 말했는데도 자신의 견해는 무시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은 받아들여진 경험이 있는가? 혹은 같은 주장임에도 자신이 다른 사람 A의 견해는 무시하고 다른 사람 B의 견해는 받아들였던 경험이 있는가? 상황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때 자신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해보자.
3. 윤기의 청원서처럼, 작품을 탄생시킨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 무엇이 평가를 달라지게 하였을지 그 이유에 대해 토의해보자. 아울러 피카소, 뒤샹, 히든싱어의 사례를 참고해 여러분은 뛰어난 예술가의 일반적인 작품과 평범한 예술가의 뛰어난 작품 중 어떤 작품에 더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하는지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같은 글인데도 글쓴이의 이름값에 따라 글이 다르게 평가되는 현실을 지적한 대목이다. 인용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윤기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지인 한 사람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그의 지인을 괴롭히려는 사람은 많았지만, 수감된 인물의 친우와 친척들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할 뿐 어떤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어느 날, 윤기는 수감된 지인에게 고을 수령 앞으로 올릴 청원서 한 장을 써줄 것을 부탁받았다. 윤기는 이에 글을 쓰고 수령에게 올리기 전에 그 지인의 친척에게 감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 친척은 처음에는 윤기의 청원서를 제대로 평가해주지도 않다가 옆에 있던 사람이 글솜씨로 유명한 사람이 지은 글이라고 속여 말하자 그제야 태도를 바꾸어 글을 찬양하고 청원서를 올릴 것을 동의했다.
이 사건을 겪고 윤기가 소회를 정리한 내용에서 주목되는 점은, 비록 윤기가 직접적으로 이어서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내용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윤기는 똑같은 글이라도 자신이 저자로 소개될 때와 유명한 문인이 글쓴이로 소개될 때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범할 법한 태도라고 말한다. 즉, 일반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와닿는 것은 ‘이름’이기에, 내용보다 이름이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글쓴이가 유명한 문인이라는 인식만으로 다른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는 권위가 충분히 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윤기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슬퍼하거나 주눅들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름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말에 ‘식자의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울 것도 영광스러워할 것도 없다’고 서술할 뿐이었다. 왜 그는, 식자들은 이름에 연연하지 않은 것일까. 급격하게 바뀌어가는 사회 여건 속에서 자신들만은 이름과 실질을 일치시키려는 유학의 이상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키워드
권위, 실질, 이름값, 이중성,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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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윤기의 친구 한 명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는데, 그를 핍박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구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옥중의 친구는 평소에 윤기가 믿고 존중하는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그가 윤기에게 글을 보내 수령에게 석방을 청하는 청원서를 올려주기를 부탁했다. 이에 윤기는 글을 써서 초고를 가까운 친척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가 글을 다 읽고는 화를 내며 글을 잘 못 썼다고 말하며 글을 잘 쓴다고 유명한 사람에게 부탁할 것을 요구했다. 마침 옆에 있던 사람이 이를 보고, 바로 그 사람이 쓴 글이라고 둘러대었다. 그 친척은 한참 후에 이런 좋은 글을 자신이 놓칠 뻔했다고 말하고, 청원서를 내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아, 사사로운 마음은 참으로 털끝만큼도 마음속에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심이 한번 끼어들고 나면 서시(西施) 같은 절세미인도 무염(無鹽) 같은 추녀로 보이고, 도척(盜跖) 같은 도적도 백이(伯夷) 같은 군자로 보이게 됩니다. 눈이 남과 달라서도 아니고 마음이 사람들과 달라서도 아니고, 사심 하나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무수히 벌어지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는 위아래가 뒤바뀌고 온 세상이 제자리를 잃어서, 사물 하나 사건 하나도 본래대로 평가되는 것이 없게 되니,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글은 한 편의 문장일 뿐입니다만, 제 글이라 생각하고 보면 좋지 않고, 갑의 글이라 생각하고 보면 볼수록 좋아지니, 이는 우눌(虞訥, ?~?)이 장솔(張率, 475~527)을 깎아내리고 심약(沈約, 441~513)에게 아첨한 방식이었습니다. 글이 순간 탈바꿈해서도 아니고 눈이 잠깐 사이에 바뀌어서도 아니라 오직 보는 자세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글 자체의 좋고 나쁨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글쓴이의 유명하고 유명하지 않음에 따를 뿐이니, 식자(識者)의 입장에서 보면 비웃음을 당한다고 수치스러울 것도 없고 칭찬을 받는다고 영광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글쓴이의 명성을 기준으로 글을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余出而語傍人曰, 甚矣, 私意之不可容一毫於方寸間也. 私意一加, 則西子可變而爲無塩, 盜跖可化而爲伯夷. 非其眼之異於人也, 非其心之殊乎衆也, 由一私意, 做出來無限不好底光景. 甚至於冠屨倒置乾坤失位, 無一物一事得其本色者矣, 其不祥孰大焉. 此文固一箇文也, 視之以吾之文則不可, 視之以某甲之文則愈視而愈好, 此虞訥所以詆於張率而媚於沈約也. 非其文之幻於卽地也, 非其眼之更於俄頃也. 所以視之者然也. 然則文之好否, 果何與乎. 亦由於有名與無名而已矣. 自識者觀之, 則其見笑不足羞, 其見詡不足榮, 而抑世之不以名爲眼者, 其幾人哉.
토론하기
1. ‘친척’이 처음에는 윤기의 청원서를 제출하고 싶어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같은 청원서를 올리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2. 같은 내용을 말했는데도 자신의 견해는 무시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은 받아들여진 경험이 있는가? 혹은 같은 주장임에도 자신이 다른 사람 A의 견해는 무시하고 다른 사람 B의 견해는 받아들였던 경험이 있는가? 상황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때 자신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해보자.
3. 윤기의 청원서처럼, 작품을 탄생시킨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 무엇이 평가를 달라지게 하였을지 그 이유에 대해 토의해보자. 아울러 피카소, 뒤샹, 히든싱어의 사례를 참고해 여러분은 뛰어난 예술가의 일반적인 작품과 평범한 예술가의 뛰어난 작품 중 어떤 작품에 더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하는지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같은 글인데도 글쓴이의 이름값에 따라 글이 다르게 평가되는 현실을 지적한 대목이다. 인용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윤기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지인 한 사람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그의 지인을 괴롭히려는 사람은 많았지만, 수감된 인물의 친우와 친척들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할 뿐 어떤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어느 날, 윤기는 수감된 지인에게 고을 수령 앞으로 올릴 청원서 한 장을 써줄 것을 부탁받았다. 윤기는 이에 글을 쓰고 수령에게 올리기 전에 그 지인의 친척에게 감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 친척은 처음에는 윤기의 청원서를 제대로 평가해주지도 않다가 옆에 있던 사람이 글솜씨로 유명한 사람이 지은 글이라고 속여 말하자 그제야 태도를 바꾸어 글을 찬양하고 청원서를 올릴 것을 동의했다.
이 사건을 겪고 윤기가 소회를 정리한 내용에서 주목되는 점은, 비록 윤기가 직접적으로 이어서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내용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윤기는 똑같은 글이라도 자신이 저자로 소개될 때와 유명한 문인이 글쓴이로 소개될 때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범할 법한 태도라고 말한다. 즉, 일반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와닿는 것은 ‘이름’이기에, 내용보다 이름이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글쓴이가 유명한 문인이라는 인식만으로 다른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는 권위가 충분히 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윤기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슬퍼하거나 주눅들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름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말에 ‘식자의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울 것도 영광스러워할 것도 없다’고 서술할 뿐이었다. 왜 그는, 식자들은 이름에 연연하지 않은 것일까. 급격하게 바뀌어가는 사회 여건 속에서 자신들만은 이름과 실질을 일치시키려는 유학의 이상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키워드
권위, 실질, 이름값, 이중성,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