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20세기 초는 동아시아 3국이 전통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결정적 시대,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로, 우리가 지금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100년 전 쓰인 소설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닮은꼴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딸을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하는 얼챵즈, 자신보다 어려운 ‘친구’의 고혈을 빠는 후뉴, 손님에게 바가지 요금을 받으며 작은 이익에 기뻐하는 아찡, 3년이나 같은 방을 쓴 동료가 죽었는데도 자기 일과 무관하게 여기는 ‘뚱뚱이’를 통해 현대 사회의 메마르고 일그러진 인간관계에 관해 토론해보자.
상하이에서 8년째 인력거를 끌고 있는 아찡은 새벽부터 손님을 실어나르다 갑자기 오한과 어지럼증을 느끼며 병원에 간다. 하지만 의사는 만나지도 못하고 기독교를 전도하는 신사만 만난다. 아찡은 천당에는 인력거꾼이 없다는 말에 몹시 실망하며, “낮은 데 사람이 위에 가고 위엣사람이 아래로 가지지 않는다”면 굳이 천당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력거도 잃어버린 채 아픈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오다가 불안감에 점을 보는데 ‘큰 액이 들었지만 지금 이 액을 넘기면 큰 낙이 온다’는 점괘를 받는다. 방으로 돌아온 아찡은 정신없이 고꾸라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고전본문
몸이 다시 으슥으슥하고 메스꺼움이 나기 시작했으나 먹은 것이 없어서 게우지는 않았다. 아찡의 눈앞에는 그의 전 생애가 한번 죽 나타났다. 어려서 촌에서 남의 집 심부름하던 것으로부터, 뒷집 닭 채다 먹고 들켜서 석 달을 매 맞으며 징역 하고는 상해로 와서, 공장에 들어갔다가 팔년 전에 인력거를 끌기 시작했다.
팔 년 동안 인력거를 끌던 생각이 났다. 애스톨 하우스 호텔*에서 어떤 서양 신사를 태우고 오 리나 되는 올림픽 극장**까지 가서 동전 열 닢 받고 억울한 김에 동전 두 닢만 더 달라고 조르다가 발길에 차이고 순사에게 얻어맞던 생각이 났다. 또 언젠가는 한 번 밤이 새로 두 시나 되어서 대동여사(大東旅舍)***에서 술이 잔뜩 취해 나오는 꺼우리(高麗人)**** 신사 세 사람을 다른 두 동무와 같이 태우고 법계 보강리*****까지 십 리나 되는 길을 가서 셋이 도합 십 전 은전 한 닢을 받고 어처구니없어서 더 내라고 야료 치다가, 그들은 이들한테 단장으로 죽도록 얻어맞고 머리가 깨어져서 급한 김에 인력거도 내버리고 도망질쳐 나오던 광경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고는 또다시 한번 손님을 태우고 정안사로(靜安寺路)로 가다가 소리도 없이 뒤로 오는 자동차에 떠밀려서 인력거 바수고, 다리 부러진 끝에, 자동차 운전수 발길에 채고 인도인 순사****** 몽둥이에 매 맞던 것도 생각이 났다.
길다면 길고 멀다면 먼 팔 년 동안의 인력거꾼 생활! 작은 일, 큰 일, 눈물 난 일, 한숨 쉰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시 연상이 되어서 그는 엉엉 울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목이 갈한 것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온몸이 쥐 일어서는 것을 감하여 ‘끙’ 소리를 치고 도로 엎어지고서는 다시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종일 인력거를 끌고 새벽에야 집에 돌아와서 아찡의 시체를 발견하고 공부국(工部局)*******에 보고한 뚱뚱이를 따라 공부국에서 순사와 의사가 검시를 하러 이 더러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의사는 방 안에서 검시하고 영국인 순사 부장은 중국인 순사 보호 통역을 세우고 뚱뚱이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서 조그만 수첩에 적어 넣었다.
“아찡이가 언제부터 인력거를 끌었어?”
“글쎄 그도 똑똑히는 모릅니다. 이 집에 같이 있기는 바로 삼 년 전부터입니다. 그때 제가 인력거를 처음 끌기 시작하면서 같이 있게 되었어요.”
“그래 모른단 말이야?”
“네, 네, 아찡이 제 말로는 이 노릇 한 지가 금년까지 팔 년째라구 그러구 합디다요 나리!”
순사 부장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안에서 검시하고 나오는 의사를 향하여 웃으면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무엇 저 죽을 때 되어서 죽었소이다. 팔 년 동안 인력거 끌었다는데요. 남보다 한 일 년 일찍 죽은 셈이지만 지난번 공부국 조사에 보면 인력거 끄는 지 구 년 만에 모두 죽지 않습니까?”
의사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팔 년으로 십 년까지, 매일 과도한 달음질 때문에……”
* 공부국에서 온 일꾼들이 아찡의 시체를 거적에 담아 실어 간 후, 뚱뚱이는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날 오후 두 시에 사람들은 그 뚱뚱이가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력거에 손님을 태우고 에드워드로(路)********로 기운차게 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물론 그가 아까 순사 부장과 의사의 회화(영어로 하기 때문에)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오 년이나 육 년 후에 아찡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을 모르므로 뚱뚱이는 흐르는 땀을 씻으면서 껑충껑충 아스팔트 매끈한 길을 홀로 달아나는 것이었다……마치도 한 백 년도 더 살 것 같이……
* 애스톨 하우스 호텔: 와이탄(外灘) 북단에서 와이바이두교(外白渡橋)로 쑤저우허(蘇州河)를 건넌 곳에 위치한 애스터 하우스 호텔(Astor House Hotel, 중국명 푸장호텔[浦江飯店])로, 영국인이 설립했다. 1882년 7월 중국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으며, 1883년 상하이 최초로 수도가 나오는 등 ‘최초’ 타이틀을 다수 지니고 있다. 1990년 12월 19일 상하이 증권교역소가 이 호텔에서 개업했다. 아인슈타인, 찰리 채플린 등 많은 유명 인사가 묵었던 이 호텔은 2017년 12월 31일자로 폐점하고, 리뉴얼을 거쳐 현재 중국 증권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올림픽 극장: 1914년 스페인 상인이 설립한 극장(중국명 샤링페이커 영화관[夏令配克影戱院]. 샤링페이커(夏令配克)는 올림픽(奧林匹克: Olympic)의 옛 번역이다)으로, 정안사로(靜安寺路, 지금의 난징시로(南京西路) 742호)에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에 첫 번째 ‘3·1독립선언일’ 기념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올림픽 극장은 1951년 상하이시 문화국 관할의 신화영화관[新華電影院]으로 바뀌었다가 1994년 철거되었다.
*** 대동여사(大東旅舍): 난징둥로(南京東路)의 융안(永安)백화점에 있던 호텔 이름. 1921년 1월 1일 안창호 선생이 숙소로 쓰던 이 호텔 안에 있는 대채루(大菜樓)라는 식당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집결한 가운데 신년 축하식이 열렸다.
**** 꺼우리(高麗人): 현대 중국어 발음은 ‘까오리런’. 중국에서 한인을 일컫는 말이다.
***** 법계 보강리: 법계(法界)는 ‘법란서(法蘭西)’ 즉 프랑스조계 지역을 가리키며, 보강리(寶康里)는 지금의 화이하이중로(滙海中路)에 있던 지명이다. 당시 상하이의 한국인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조계에 많이 모여 살았다. 리눙(里弄)은 상하이에서 골목을 가리키는데(베이징의 후퉁(胡同)에 해당), 리눙이라는 골목길을 가운데 두고 일렬로 붙어 있는 2~3층의 주택을 리눙 주택 또는 석고문 주택이라 한다. ~리(里), ~눙(弄), ~팡(坊)으로 끝나는 지명은 이러한 주택을 의미한다. 1853년에 태평천국군이 난징에 수도를 세우고 화중 지방을 점령해나가자 장쑤와 저장 지역의 관료, 지주, 부호들이 상하이의 조계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또한 같은 해 상하이에서 소도회(小刀會)라는 민간결사조직이 봉기하여 현성(懸城)을 점령하고 지현(知縣)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중국인들이 대거 조계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리눙 주택은 몰려드는 피난민을 대거 수용하기 위해 조계에 지어진 건축 양식이었다.
****** 인도인 순사: 상하이의 영국 조계지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출신의 순사가 많았다. 그들은 붉은 두건을 두르고 있어서 중국어로 ‘홍터우 아싼(紅頭阿三)’이라 불렸다.
******* 공부국(工部局): 태평천국의 난과 소도회(小刀會)의 상하이 점령을 계기로 조계지에 중국인이 대거 몰려들자 영국·프랑스·미국은 자위를 명분으로 내세워 조계지에 대한 자치관리를 주장하며 1854년 자치행정기관인 공부국을 설립했다. 1862년 프랑스는 프랑스조계에 단독으로 공동국(公董局)을 설치했다.
******** 에드워드로(路): 중국명 아이둬야로(爱多亚路: Avenue Eduard Ⅶ). 지금의 옌안둥로(延安东路)를 말한다.
토론하기
(1) 3년이나 같은 방을 쓰고 같은 일을 했지만 아찡의 죽음에 무관심한 듯한 룸메 ‘뚱뚱이’의 태도에 관해 토론해보자.
(2) 한국과 중국에 인력거가 처음으로 도입된 시기는 언제인지 조사해보자.
해설읽기
아찡은 『낙타샹즈』의 주인공 샹즈와 같은 농촌 출신으로, 남의 집 심부름을 하다가 상하이로 흘러들어와 빈민굴에 살면서 8년째 인력거를 끌고 있다. 인용문은 아찡이 숨을 거두기 직전 특히 인력거를 끌던 지난 8년간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력거꾼」은 주요섭이 후장대학(滬江大學) 2학년 재학시절에 사회학 교수를 따라 인력거꾼 합숙소 현지조사를 나갔다가, 그들의 열악한 환경에 심한 충격을 받고 쓰게 된 작품이라고 한다. 공부국에서 검시를 나온 영국인 의사와 순사 부장의 대화를 통해 아찡이 “과도한 달음질”로 죽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인력거꾼의 평균 수명이 9년이라는 공부국의 충격적인 통계수치가 제시된다. 주요섭이 현지조사를 나갔다가 쓴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혀 근거 없는 수치는 아닐 것이다.
영국인 의사와 순사 부장은 아찡의 죽음에 조금의 동정도 보내지 않으며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인력거꾼 평균수명보다 1년 정도 먼저 죽긴 했지만 갈 때가 되어 갔다는 식이다. 국적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 그들이야 그렇다 쳐도, 3년이나 같은 방을 쓰고 같은 일을 하는 룸메 ‘뚱뚱이’의 태도 역시 상당히 무덤덤하다. 그는 아찡의 시체가 거적에 실려 나갔는데도 별일 없었다는 듯이 인력거에 손님을 태우고 껑충껑충 아스팔트를 달린다. 그것이 5~6년 후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기왕 다른 직업으로 바꿀 수 없다면 그가 영국인 의사와 순사 부장이 영어로 하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
최초의 인력거는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명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상용화된 것은 메이지 초기 일본에서다. 인력거를 뜻하는 영어 ‘릭샤(rickshaw)’는 일본어 ‘리키샤(力車: りきしゃ)’에서 나온 말이다. 1869년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인력거가 중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1874년의 상하이에서였다. 프랑스인 므나르(Menard)가 일본에서 인력거 300대를 들여와 조계(租界) 지역에서 영업한 것이 그 시초다. 그 후로 인력거는 톈진(天津), 베이징, 한커우(漢口) 등 중국의 다른 도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인력거가 베이징에 첫선을 보인 것은 1886년이었으며, 이후 1950년대까지 도심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한국에는 이보다 늦은 1894년에 인력거가 처음 들어왔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인천에 있는 청나라 영사관과 서울에 있는 일본 공사관 및 영사관 사이에 교섭 사항이 폭주하거나 서울-인천 간을 급히 오갈 일이 많아지자, 일본인 하나야마(花山)가 10대를 수입하여 영락정(永樂町) 2정목(二丁目)(지금의 중구 저동) 북단에 가게를 차리고 경성에서 처음으로 인력거업을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초의 인력거꾼은 전부 일본인을 고용했다는 점이다. 조선인은 인력거를 끄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종종 승객을 전복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후맥락
상하이에서 8년째 인력거를 끌고 있는 아찡은 새벽부터 손님을 실어나르다 갑자기 오한과 어지럼증을 느끼며 병원에 간다. 하지만 의사는 만나지도 못하고 기독교를 전도하는 신사만 만난다. 아찡은 천당에는 인력거꾼이 없다는 말에 몹시 실망하며, “낮은 데 사람이 위에 가고 위엣사람이 아래로 가지지 않는다”면 굳이 천당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력거도 잃어버린 채 아픈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오다가 불안감에 점을 보는데 ‘큰 액이 들었지만 지금 이 액을 넘기면 큰 낙이 온다’는 점괘를 받는다. 방으로 돌아온 아찡은 정신없이 고꾸라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고전본문
몸이 다시 으슥으슥하고 메스꺼움이 나기 시작했으나 먹은 것이 없어서 게우지는 않았다. 아찡의 눈앞에는 그의 전 생애가 한번 죽 나타났다. 어려서 촌에서 남의 집 심부름하던 것으로부터, 뒷집 닭 채다 먹고 들켜서 석 달을 매 맞으며 징역 하고는 상해로 와서, 공장에 들어갔다가 팔년 전에 인력거를 끌기 시작했다.
팔 년 동안 인력거를 끌던 생각이 났다. 애스톨 하우스 호텔*에서 어떤 서양 신사를 태우고 오 리나 되는 올림픽 극장**까지 가서 동전 열 닢 받고 억울한 김에 동전 두 닢만 더 달라고 조르다가 발길에 차이고 순사에게 얻어맞던 생각이 났다. 또 언젠가는 한 번 밤이 새로 두 시나 되어서 대동여사(大東旅舍)***에서 술이 잔뜩 취해 나오는 꺼우리(高麗人)**** 신사 세 사람을 다른 두 동무와 같이 태우고 법계 보강리*****까지 십 리나 되는 길을 가서 셋이 도합 십 전 은전 한 닢을 받고 어처구니없어서 더 내라고 야료 치다가, 그들은 이들한테 단장으로 죽도록 얻어맞고 머리가 깨어져서 급한 김에 인력거도 내버리고 도망질쳐 나오던 광경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고는 또다시 한번 손님을 태우고 정안사로(靜安寺路)로 가다가 소리도 없이 뒤로 오는 자동차에 떠밀려서 인력거 바수고, 다리 부러진 끝에, 자동차 운전수 발길에 채고 인도인 순사****** 몽둥이에 매 맞던 것도 생각이 났다.
길다면 길고 멀다면 먼 팔 년 동안의 인력거꾼 생활! 작은 일, 큰 일, 눈물 난 일, 한숨 쉰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시 연상이 되어서 그는 엉엉 울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목이 갈한 것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온몸이 쥐 일어서는 것을 감하여 ‘끙’ 소리를 치고 도로 엎어지고서는 다시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종일 인력거를 끌고 새벽에야 집에 돌아와서 아찡의 시체를 발견하고 공부국(工部局)*******에 보고한 뚱뚱이를 따라 공부국에서 순사와 의사가 검시를 하러 이 더러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의사는 방 안에서 검시하고 영국인 순사 부장은 중국인 순사 보호 통역을 세우고 뚱뚱이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서 조그만 수첩에 적어 넣었다.
“아찡이가 언제부터 인력거를 끌었어?”
“글쎄 그도 똑똑히는 모릅니다. 이 집에 같이 있기는 바로 삼 년 전부터입니다. 그때 제가 인력거를 처음 끌기 시작하면서 같이 있게 되었어요.”
“그래 모른단 말이야?”
“네, 네, 아찡이 제 말로는 이 노릇 한 지가 금년까지 팔 년째라구 그러구 합디다요 나리!”
순사 부장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안에서 검시하고 나오는 의사를 향하여 웃으면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무엇 저 죽을 때 되어서 죽었소이다. 팔 년 동안 인력거 끌었다는데요. 남보다 한 일 년 일찍 죽은 셈이지만 지난번 공부국 조사에 보면 인력거 끄는 지 구 년 만에 모두 죽지 않습니까?”
의사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팔 년으로 십 년까지, 매일 과도한 달음질 때문에……”
* 공부국에서 온 일꾼들이 아찡의 시체를 거적에 담아 실어 간 후, 뚱뚱이는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날 오후 두 시에 사람들은 그 뚱뚱이가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력거에 손님을 태우고 에드워드로(路)********로 기운차게 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물론 그가 아까 순사 부장과 의사의 회화(영어로 하기 때문에)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오 년이나 육 년 후에 아찡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을 모르므로 뚱뚱이는 흐르는 땀을 씻으면서 껑충껑충 아스팔트 매끈한 길을 홀로 달아나는 것이었다……마치도 한 백 년도 더 살 것 같이……
* 애스톨 하우스 호텔: 와이탄(外灘) 북단에서 와이바이두교(外白渡橋)로 쑤저우허(蘇州河)를 건넌 곳에 위치한 애스터 하우스 호텔(Astor House Hotel, 중국명 푸장호텔[浦江飯店])로, 영국인이 설립했다. 1882년 7월 중국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으며, 1883년 상하이 최초로 수도가 나오는 등 ‘최초’ 타이틀을 다수 지니고 있다. 1990년 12월 19일 상하이 증권교역소가 이 호텔에서 개업했다. 아인슈타인, 찰리 채플린 등 많은 유명 인사가 묵었던 이 호텔은 2017년 12월 31일자로 폐점하고, 리뉴얼을 거쳐 현재 중국 증권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올림픽 극장: 1914년 스페인 상인이 설립한 극장(중국명 샤링페이커 영화관[夏令配克影戱院]. 샤링페이커(夏令配克)는 올림픽(奧林匹克: Olympic)의 옛 번역이다)으로, 정안사로(靜安寺路, 지금의 난징시로(南京西路) 742호)에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에 첫 번째 ‘3·1독립선언일’ 기념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올림픽 극장은 1951년 상하이시 문화국 관할의 신화영화관[新華電影院]으로 바뀌었다가 1994년 철거되었다.
*** 대동여사(大東旅舍): 난징둥로(南京東路)의 융안(永安)백화점에 있던 호텔 이름. 1921년 1월 1일 안창호 선생이 숙소로 쓰던 이 호텔 안에 있는 대채루(大菜樓)라는 식당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집결한 가운데 신년 축하식이 열렸다.
**** 꺼우리(高麗人): 현대 중국어 발음은 ‘까오리런’. 중국에서 한인을 일컫는 말이다.
***** 법계 보강리: 법계(法界)는 ‘법란서(法蘭西)’ 즉 프랑스조계 지역을 가리키며, 보강리(寶康里)는 지금의 화이하이중로(滙海中路)에 있던 지명이다. 당시 상하이의 한국인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조계에 많이 모여 살았다. 리눙(里弄)은 상하이에서 골목을 가리키는데(베이징의 후퉁(胡同)에 해당), 리눙이라는 골목길을 가운데 두고 일렬로 붙어 있는 2~3층의 주택을 리눙 주택 또는 석고문 주택이라 한다. ~리(里), ~눙(弄), ~팡(坊)으로 끝나는 지명은 이러한 주택을 의미한다. 1853년에 태평천국군이 난징에 수도를 세우고 화중 지방을 점령해나가자 장쑤와 저장 지역의 관료, 지주, 부호들이 상하이의 조계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또한 같은 해 상하이에서 소도회(小刀會)라는 민간결사조직이 봉기하여 현성(懸城)을 점령하고 지현(知縣)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중국인들이 대거 조계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리눙 주택은 몰려드는 피난민을 대거 수용하기 위해 조계에 지어진 건축 양식이었다.
****** 인도인 순사: 상하이의 영국 조계지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출신의 순사가 많았다. 그들은 붉은 두건을 두르고 있어서 중국어로 ‘홍터우 아싼(紅頭阿三)’이라 불렸다.
******* 공부국(工部局): 태평천국의 난과 소도회(小刀會)의 상하이 점령을 계기로 조계지에 중국인이 대거 몰려들자 영국·프랑스·미국은 자위를 명분으로 내세워 조계지에 대한 자치관리를 주장하며 1854년 자치행정기관인 공부국을 설립했다. 1862년 프랑스는 프랑스조계에 단독으로 공동국(公董局)을 설치했다.
******** 에드워드로(路): 중국명 아이둬야로(爱多亚路: Avenue Eduard Ⅶ). 지금의 옌안둥로(延安东路)를 말한다.
토론하기
(1) 3년이나 같은 방을 쓰고 같은 일을 했지만 아찡의 죽음에 무관심한 듯한 룸메 ‘뚱뚱이’의 태도에 관해 토론해보자.
(2) 한국과 중국에 인력거가 처음으로 도입된 시기는 언제인지 조사해보자.
해설읽기
아찡은 『낙타샹즈』의 주인공 샹즈와 같은 농촌 출신으로, 남의 집 심부름을 하다가 상하이로 흘러들어와 빈민굴에 살면서 8년째 인력거를 끌고 있다. 인용문은 아찡이 숨을 거두기 직전 특히 인력거를 끌던 지난 8년간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력거꾼」은 주요섭이 후장대학(滬江大學) 2학년 재학시절에 사회학 교수를 따라 인력거꾼 합숙소 현지조사를 나갔다가, 그들의 열악한 환경에 심한 충격을 받고 쓰게 된 작품이라고 한다. 공부국에서 검시를 나온 영국인 의사와 순사 부장의 대화를 통해 아찡이 “과도한 달음질”로 죽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인력거꾼의 평균 수명이 9년이라는 공부국의 충격적인 통계수치가 제시된다. 주요섭이 현지조사를 나갔다가 쓴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혀 근거 없는 수치는 아닐 것이다.
영국인 의사와 순사 부장은 아찡의 죽음에 조금의 동정도 보내지 않으며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인력거꾼 평균수명보다 1년 정도 먼저 죽긴 했지만 갈 때가 되어 갔다는 식이다. 국적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 그들이야 그렇다 쳐도, 3년이나 같은 방을 쓰고 같은 일을 하는 룸메 ‘뚱뚱이’의 태도 역시 상당히 무덤덤하다. 그는 아찡의 시체가 거적에 실려 나갔는데도 별일 없었다는 듯이 인력거에 손님을 태우고 껑충껑충 아스팔트를 달린다. 그것이 5~6년 후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기왕 다른 직업으로 바꿀 수 없다면 그가 영국인 의사와 순사 부장이 영어로 하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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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력거는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명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상용화된 것은 메이지 초기 일본에서다. 인력거를 뜻하는 영어 ‘릭샤(rickshaw)’는 일본어 ‘리키샤(力車: りきしゃ)’에서 나온 말이다. 1869년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인력거가 중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1874년의 상하이에서였다. 프랑스인 므나르(Menard)가 일본에서 인력거 300대를 들여와 조계(租界) 지역에서 영업한 것이 그 시초다. 그 후로 인력거는 톈진(天津), 베이징, 한커우(漢口) 등 중국의 다른 도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인력거가 베이징에 첫선을 보인 것은 1886년이었으며, 이후 1950년대까지 도심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한국에는 이보다 늦은 1894년에 인력거가 처음 들어왔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인천에 있는 청나라 영사관과 서울에 있는 일본 공사관 및 영사관 사이에 교섭 사항이 폭주하거나 서울-인천 간을 급히 오갈 일이 많아지자, 일본인 하나야마(花山)가 10대를 수입하여 영락정(永樂町) 2정목(二丁目)(지금의 중구 저동) 북단에 가게를 차리고 경성에서 처음으로 인력거업을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초의 인력거꾼은 전부 일본인을 고용했다는 점이다. 조선인은 인력거를 끄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종종 승객을 전복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