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20세기 초는 동아시아 3국이 전통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결정적 시대,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로, 우리가 지금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100년 전 쓰인 소설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닮은꼴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딸을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하는 얼챵즈, 자신보다 어려운 ‘친구’의 고혈을 빠는 후뉴, 손님에게 바가지 요금을 받으며 작은 이익에 기뻐하는 아찡, 3년이나 같은 방을 쓴 동료가 죽었는데도 자기 일과 무관하게 여기는 ‘뚱뚱이’를 통해 현대 사회의 메마르고 일그러진 인간관계에 관해 토론해보자.
샤오푸즈는 샹즈와 후뉴의 신혼 셋집에 사는 인력거꾼 얼챵즈의 딸이다.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군인에게 팔려갔다가 버림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얼챵즈는 딸을 팔아서 받은 돈을 다 날린 것도 모자라 두 동생의 부양의무까지 샤오푸즈에게 떠넘기며 매춘을 종용한다. 그리고 수시로 술값을 뜯어낸다.
고전본문
샤오푸즈는 빈털터리로 돌아왔지만—아버지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게으른지—두 동생을 돌봐야 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 가서 돈을 벌어 동생들에게 밥을 해 준단 말인가? 얼챵즈는 술에 취해 속내를 드러냈다.
“네가 진심으로 동생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너나 할 것 없이 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어쩔 거야. 하루 종일 남들을 위해 소나 말처럼 일하는데 나 먼저 배를 채워야지 빈 속에 어떻게 뛰어다니겠어? 아예 확 대가리 처박고 고꾸라져 뒈져야 좋겠냐? 넌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노닥거리는 거나 다름없어. 있는 몸뚱어리 안 팔고 뒀다 뭐에 써?”
고주망태가 된 아버지와 자기 자신, 그리고 배가 고파 쥐새끼 꼴을 하고 있는 동생들을 보고 있자니 샤오푸즈는 그저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눈물을 흘린다고 아비가 감동할 리도, 배고픈 동생들을 배부르게 해줄 리도 만무했다. 그것보다 실질적인 것을 내놓아야 했다. 결국 동생들을 배부르게 먹이려면 자신의 몸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중략)
얼챵즈는 요즘 들어 집에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딸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기에 문을 들어설 염치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딸을 말릴 방법도 없었다. 자신이 아이들을 양육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마음도 덜 심란하리라 생각하니 집에 오지 않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 그는 딸을 증오했다. 샤오푸즈가 남자라면 이렇게 추잡한 꼴을 보일 필요가 없을 텐데……아니 딸이면 딸이지 왜 하필 내 딸로 태어났단 말인가! 물론 딸이 가엽기도 했다. 몸을 팔아 두 동생을 돌보고 있지 않은가! 미웠다가, 가여웠다가,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도 술 먹을 돈이 없으면 더 이상 딸이 밉지도 가엽지도 않았다. 그는 그 길로 집에 돌아와 딸에게 손을 벌렸다. 이럴 때 딸은 그에게 돈 버는 기계일 뿐이었다. 아버지로서 딸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럴 때면 그도 체면이라는 걸 생각했다. 모두 샤오푸즈를 깔보지 않는가. 아버지인 나도 딸을 용서하지 않아. 그러니까 돈을 내놓으라 하고 욕도 퍼붓는 거야. 그는 마치 사람들더러 들으라고 욕을 퍼붓는 것 같았다. 나는 잘못이 없어. 샤오푸즈가 천성이 뻔뻔한 년이야.
얼챵즈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샤오푸즈는 제대로 대꾸 한 번 못했다. 오히려 후뉴가 나서서 욕을 하고 달래어 그를 쫓아버렸다. 물론 그럴 때마다 얼챵즈의 손엔 약간의 돈이 들려 있게 마련이었다. 이 돈은 결국 그의 술값이 되었다. 멀쩡한 정신이라면 그대로 강에 뛰어들거나 목을 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토론하기
(1) 샤오푸즈에게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며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아직 너무 어려 보호가 필요한 남동생이 둘이나 있다. 내가 만약 샤오푸즈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2) 샤오푸즈와 같은 희생과 불행을 막으려면 사회적으로 어떤 제도나 안전망을 만들 수 있을까?
(3) 비슷한 시기 창작된 라오서의 단편소설 「초승달」을 감상해보자.
해설읽기
빈민가에서 홀어머니 손에 자란 라오서는 하층민의 삶을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낙타샹즈』 곳곳에는 가난한 이들이 받는 고통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게 나타나 있으며, 하층민 여성들에 대한 연민이 묻어난다. “처녀들은 열예닐곱이 되어도 바지가 없어, 누더기 같은 것을 몸에 두른 채 감옥이나 다를 바 없는 집 안에서 어머니를 도와 부지런히 일을 했다. 뒷간이라도 가려면 마당에 아무도 없는 것을 살핀 후에야 겨우 도둑처럼 밖으로 달려나갔다. 겨우내 그녀들은 태양이나 푸른 하늘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다. 못생긴 처녀들은 장차 자기 어머니의 모든 것을 이어받고, 그나마 얼굴이 반반한 처녀들은 조만간에 부모에게 팔려 ‘행복을 누리러 간다!’는 것을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팔려간 여자들이 행복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샤오푸즈 역시 열아홉에 아버지 얼챵즈에 의해 군인에게 200원에 팔려갔다. 200원이면 새 인력거를 두 대 정도 살 수 있는 돈이다. 식모의 식비와 월급이 한 달에 8~9원이라고 했으니, 사람의 노동력이 지금보다는 훨씬 저렴했던 것을 감안하면, 현재 값어치로 4000만원 정도로 환산할 수 있을까? 어쨌든 무책임하고 게으른 얼챵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의 몸값으로 받은 돈을 전부 탕진했다. 그는 장사를 시작했으나 수완이 없었던 탓에 외상만 늘다가 밑천을 날렸다. 남은 돈으로 새 인력거를 한 대 사서 끌었으나 잡담만 일삼고 체력도 뒷받침되지 않으니 다시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살다가 급기야 부인을 때려죽이게 된다.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처가 식구들을 달래기 위해 인력거를 저당 잡혀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15원을 준다. 해가 바뀌어 인력거를 되찾아올 희망이 없자 그것을 샹즈에게 판 것이다. 간간이 임대 인력거를 끌긴 하지만 자신의 술값을 대기도 부족한 얼챵즈는 돌아온 딸에게 몸을 팔아서라도 동생들을 먹여 살릴 것을 종용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유일한 생산수단은 자신의 몸뚱어리뿐인데, 늙고 병든 얼챵즈는 이제 인력거를 끄는 일이 벅차다. 그리고 샤오푸즈에게는 다른 기술이 없고 젊고 이쁜 육체가 있다. 샤오푸즈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매춘에 나선다. 극한까지 내몰린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 자존심, 체면, 사랑, 가족애 따위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딸을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하며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어오라고 떠미는 얼챵즈의 태도는 황금만능주의의 폐해인가, 가난의 저주인가?
전후맥락
샤오푸즈는 샹즈와 후뉴의 신혼 셋집에 사는 인력거꾼 얼챵즈의 딸이다.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군인에게 팔려갔다가 버림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얼챵즈는 딸을 팔아서 받은 돈을 다 날린 것도 모자라 두 동생의 부양의무까지 샤오푸즈에게 떠넘기며 매춘을 종용한다. 그리고 수시로 술값을 뜯어낸다.
고전본문
샤오푸즈는 빈털터리로 돌아왔지만—아버지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게으른지—두 동생을 돌봐야 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 가서 돈을 벌어 동생들에게 밥을 해 준단 말인가? 얼챵즈는 술에 취해 속내를 드러냈다.
“네가 진심으로 동생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너나 할 것 없이 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어쩔 거야. 하루 종일 남들을 위해 소나 말처럼 일하는데 나 먼저 배를 채워야지 빈 속에 어떻게 뛰어다니겠어? 아예 확 대가리 처박고 고꾸라져 뒈져야 좋겠냐? 넌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노닥거리는 거나 다름없어. 있는 몸뚱어리 안 팔고 뒀다 뭐에 써?”
고주망태가 된 아버지와 자기 자신, 그리고 배가 고파 쥐새끼 꼴을 하고 있는 동생들을 보고 있자니 샤오푸즈는 그저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눈물을 흘린다고 아비가 감동할 리도, 배고픈 동생들을 배부르게 해줄 리도 만무했다. 그것보다 실질적인 것을 내놓아야 했다. 결국 동생들을 배부르게 먹이려면 자신의 몸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중략)
얼챵즈는 요즘 들어 집에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딸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기에 문을 들어설 염치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딸을 말릴 방법도 없었다. 자신이 아이들을 양육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마음도 덜 심란하리라 생각하니 집에 오지 않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 그는 딸을 증오했다. 샤오푸즈가 남자라면 이렇게 추잡한 꼴을 보일 필요가 없을 텐데……아니 딸이면 딸이지 왜 하필 내 딸로 태어났단 말인가! 물론 딸이 가엽기도 했다. 몸을 팔아 두 동생을 돌보고 있지 않은가! 미웠다가, 가여웠다가,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도 술 먹을 돈이 없으면 더 이상 딸이 밉지도 가엽지도 않았다. 그는 그 길로 집에 돌아와 딸에게 손을 벌렸다. 이럴 때 딸은 그에게 돈 버는 기계일 뿐이었다. 아버지로서 딸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럴 때면 그도 체면이라는 걸 생각했다. 모두 샤오푸즈를 깔보지 않는가. 아버지인 나도 딸을 용서하지 않아. 그러니까 돈을 내놓으라 하고 욕도 퍼붓는 거야. 그는 마치 사람들더러 들으라고 욕을 퍼붓는 것 같았다. 나는 잘못이 없어. 샤오푸즈가 천성이 뻔뻔한 년이야.
얼챵즈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샤오푸즈는 제대로 대꾸 한 번 못했다. 오히려 후뉴가 나서서 욕을 하고 달래어 그를 쫓아버렸다. 물론 그럴 때마다 얼챵즈의 손엔 약간의 돈이 들려 있게 마련이었다. 이 돈은 결국 그의 술값이 되었다. 멀쩡한 정신이라면 그대로 강에 뛰어들거나 목을 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토론하기
(1) 샤오푸즈에게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며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아직 너무 어려 보호가 필요한 남동생이 둘이나 있다. 내가 만약 샤오푸즈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2) 샤오푸즈와 같은 희생과 불행을 막으려면 사회적으로 어떤 제도나 안전망을 만들 수 있을까?
(3) 비슷한 시기 창작된 라오서의 단편소설 「초승달」을 감상해보자.
해설읽기
빈민가에서 홀어머니 손에 자란 라오서는 하층민의 삶을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낙타샹즈』 곳곳에는 가난한 이들이 받는 고통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게 나타나 있으며, 하층민 여성들에 대한 연민이 묻어난다. “처녀들은 열예닐곱이 되어도 바지가 없어, 누더기 같은 것을 몸에 두른 채 감옥이나 다를 바 없는 집 안에서 어머니를 도와 부지런히 일을 했다. 뒷간이라도 가려면 마당에 아무도 없는 것을 살핀 후에야 겨우 도둑처럼 밖으로 달려나갔다. 겨우내 그녀들은 태양이나 푸른 하늘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다. 못생긴 처녀들은 장차 자기 어머니의 모든 것을 이어받고, 그나마 얼굴이 반반한 처녀들은 조만간에 부모에게 팔려 ‘행복을 누리러 간다!’는 것을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팔려간 여자들이 행복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샤오푸즈 역시 열아홉에 아버지 얼챵즈에 의해 군인에게 200원에 팔려갔다. 200원이면 새 인력거를 두 대 정도 살 수 있는 돈이다. 식모의 식비와 월급이 한 달에 8~9원이라고 했으니, 사람의 노동력이 지금보다는 훨씬 저렴했던 것을 감안하면, 현재 값어치로 4000만원 정도로 환산할 수 있을까? 어쨌든 무책임하고 게으른 얼챵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의 몸값으로 받은 돈을 전부 탕진했다. 그는 장사를 시작했으나 수완이 없었던 탓에 외상만 늘다가 밑천을 날렸다. 남은 돈으로 새 인력거를 한 대 사서 끌었으나 잡담만 일삼고 체력도 뒷받침되지 않으니 다시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살다가 급기야 부인을 때려죽이게 된다.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처가 식구들을 달래기 위해 인력거를 저당 잡혀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15원을 준다. 해가 바뀌어 인력거를 되찾아올 희망이 없자 그것을 샹즈에게 판 것이다. 간간이 임대 인력거를 끌긴 하지만 자신의 술값을 대기도 부족한 얼챵즈는 돌아온 딸에게 몸을 팔아서라도 동생들을 먹여 살릴 것을 종용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유일한 생산수단은 자신의 몸뚱어리뿐인데, 늙고 병든 얼챵즈는 이제 인력거를 끄는 일이 벅차다. 그리고 샤오푸즈에게는 다른 기술이 없고 젊고 이쁜 육체가 있다. 샤오푸즈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매춘에 나선다. 극한까지 내몰린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 자존심, 체면, 사랑, 가족애 따위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딸을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하며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어오라고 떠미는 얼챵즈의 태도는 황금만능주의의 폐해인가, 가난의 저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