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20세기 초는 동아시아 3국이 전통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결정적 시대,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로, 우리가 지금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100년 전 쓰인 소설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닮은꼴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딸을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하는 얼챵즈, 자신보다 어려운 ‘친구’의 고혈을 빠는 후뉴, 손님에게 바가지 요금을 받으며 작은 이익에 기뻐하는 아찡, 3년이나 같은 방을 쓴 동료가 죽었는데도 자기 일과 무관하게 여기는 ‘뚱뚱이’를 통해 현대 사회의 메마르고 일그러진 인간관계에 관해 토론해보자.
상하이에서 8년 동안 인력거를 끌어온 아찡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일어나 인력거 셋방에서 대양(大洋) 80전을 인력거세 하루 선금으로 내고 인력거를 빌린다. 그는 전란을 피해 외지에서 몰려드는 손님을 여관까지 실어나르며 동료들과 바가지를 요금을 받고는 작은 이익에 기뻐한다.
고전본문
마침 남경서 오는 막차가 새벽에 정거장에 닿았다. 제섭원(齊燮元)이가 노영상(盧永祥)이를 들이친다*고 풍설이 한창 올랐을 때에 이번 차가 아마 마지막 차일는지도 모른다고 소주(蘇州)서 곤산(昆山)서 쓸어 오는 피란민들이 넓은 정거장이 째어져라 하고 밀려 나아왔다. 정거장 정문은 벌써 그동안 각처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의 잃어버린 짐짝으로 가득 채워 교통 단절이 되고 좌우 문으로 쓸려 나오는 군중이 문간에 수직하고 있는** 군인들의 수색을 당하면서 이리 밀치우고 저리 밀치우고 흐늑흐늑 하고 있었다.
아찡은 이 기회를 안 놓치리라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기회만 엿보고 서 있었다. 저편 한구석으로 아니나다를까 늙은 할머니 한 분, 젊은 색시 한 분, 또 돈푼이나 있어 보이는 젊은 사내 하나가 고리짝, 참대 궤짝, 바구니 등 수십 개의 짐짝을 겨우 수색을 마치고 시멘트 길바닥에 쌓아놓고 땀들을 씻고 있었다. 아찡은 곧 그곳으로 뛰어가려고 하다가 ‘이놈아’ 하고 외치는 역전 순사 밑에 쥐 죽은 듯이 한편으로 물러서면서 아까운 듯이 그쪽만을 바라보았다. 짐은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촌닭이 관청으로 온 모양에 두리번두리번하던 젊은 사내가 마침내 짐짝을 여인들에게 잘 보라고 부탁하고 인력거를 부르려 정거장 구외로 나아왔다. 아찡은 인력거를 한 모퉁이에 집어 던지고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벌써 다른 인력거꾼들도 달려와서 이 젊은이를 에워쌌다.
“어데 가시려오? 어데요? 여관에 갈려오?”
젊은이는 어찌해야 좋을는지 모르겠다는 모양으로 한참이나 어릿어릿하다가 겨우 상해 말은 아닌 어떤 사투리로 여관까지 얼마나 가겠느냐고 물었다.
“사마로(四馬路)***까지 가면 육십 전이오”하고 한 인력거꾼이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젊은이는 다시 우물우물하다가
“이십 전에 가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고만두어!”하고 모깃소리만치 중얼거렸다. 인력거꾼 한 서넛이 펄쩍 뛰면서 한꺼번에 외쳤다.
“어디를, 우리 그렇게 에누리 아니 한답니다.”
“그자 촌놈일다. 상해 말도 할 줄 모른다”하고 인력거꾼 하나가 고함을 쳤다. 그들은 이 시골뜨기를 잔뜩 골려먹으려고 그냥 육십 전을 내라고 떠들었다. 얼마 동안에 오고 가는 말이 계속되다가 값은 마침내 매 인력거에 사십 전씩(보통 정가의 4배)에 작정이 되었다. 아찡도 식전 새벽에 이게 왠 떡이냐 하고 새벽 호운(好運)을 웃고 떠들어서 축하하는 동무 인력거꾼들과 섞여서 정거장 구내로 들어가서 고리짝을 한 개 들어 내왔다. 아찡은 큰 고리짝 한 개와 얻어먹다 남았는지 반찬 대가리 싼 조그만 보꾸러미 한 개를 올려놓고 앞장을 서서 줄곧 달음질해 나아갔다.
사마로에 여관은 여관마다 피란민으로 가득 찼다. 그래 그들은 짐들을 싣고 이 여관 저 여관으로 한참이나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내 어떤 어렵고 조그마한 여관에 가서 남은 방은 없으나 응접실에서 자기로 하고 하루에 방세 이십 원씩 주기로 하여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인력거꾼들은 그동안 여기저기 한참이나 끌려다녔다는 것을 핑계로 해가지고 한참이나 요란스럽게 떠들어서 마침내 매인(每人) 대양(大洋)**** 일 원씩을 떼내었다. 아찡도 그의 왼손바닥에 놓은 번들번들하는 은전 대양 일 원을 눈이 부신 듯이 바라다보면서 저고리 앞자락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씻고 서 있었다.
그가 인력거 채를 되는대로 질질 끌면서 다시 큰 거리로 나아올 때 그는 혼자서
“이게 웬 떡이냐! 꿈에 신수가 궁하면 정말로 신수가 좋은 법이야”하면서 속으로는 좀 있다가 방장에 선술집에 가서 한잔할 기쁨을 예상하면서 그 번들번들하는 큰돈을 허리춤 전대에 잘 간수했다.
* 제섭원(齊燮元, 치셰위안: 1885~1946)과 노영상(盧永祥, 루융샹: 1867~1933)은 각각 장쑤성과 저장성을 통치하던 군벌이다. 치셰위안은 즈리파(直隸派), 루융샹은 안후이파(安徽派)에 속했는데, 상하이의 귀속 문제를 놓고 1924년 9월~10월 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장저전쟁(江浙戰爭)]. 소설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수직(守直)하다: 건물이나 물건 따위를 맡아서 지키다.
*** 사마로(四馬路): ‘마로(馬路)’는 중국어에서 ‘길, 도로’를 뜻하는데, 상하이에서 와이탄(外灘)과 직각을 이루며 동서로 난 큰 길들은 실제로 ‘말이 달리는 길’이었다. 1840년대 와이탄 근처 영국 조계 지역에 경마장이 있었는데, 규모가 작아서 경주로가 짧았기에 경마장 남문에서 시작해 서쪽 내륙으로 곧게 뻗은 길을 새로 만들어 경마를 즐기곤 했다. 이후 더 넓은 부지(지금의 인민공원 근처)로 경마장을 옮긴 후에는 조계의 핵심도로 역할을 했다. 1865년 이후 대마로(大馬路)에는 난징조약을 기념하여 난징로(南京路)라는 이름을 붙였고, 사마로는 남쪽으로 평행하게 난 4번째 길로서 지금의 푸저우로(福州路)를 가리킨다. 사마로는 서점·출판사·신문사와 극장·찻집·공연장이 즐비한 문화의 거리이자, 술집과 기방이 몰려있는 홍등가이기도 했다.
**** 대양(大洋): 청나라 말기 서양의 은화 제도를 모방해서 만든 화폐.
토론하기
(1) 외지에서 온 피난민들에게 바가지요금을 받는 아찡과 동료들의 행위에 대해 토론해보자.
(2) 라오서의 『낙타샹즈』,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등 인력거꾼을 주인공으로 한 다른 작품들을 읽고 비교 토론해보자.
(3) 이 작품은 주요섭이 상하이 유학 시절 발표한 단편소설로, 상하이에서 집필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상하이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 속 상하이와 한국인의 인연을 조사해보자. (예시: 병오박해(1846)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상하이의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조선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갑신정변(1884)의 주역인 김옥균(1851~1894)은 1894년 3월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는 한국의 독립운동사와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해설읽기
「인력거꾼」은 주요섭이 상하이(上海)에서 유학(1921~1927)하던 시절 발표한 단편소설로, 상하이에서 집필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상하이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20세기 초 상하이라는 공간이 한국인에게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논할 때 상하이는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되었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1932.4.29.) 등 한국사에서 특기할만한 사건들이 상하이에서 일어났다. 1910년 8월 합일합병조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후 많은 한인들이 상하이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더욱 많은 한인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상하이를 거쳐 간 문인으로는 주요한, 주요섭 형제 외에도 이광수(주요 체류 기간: 1919.2~1921.4), 현진건(1918~1920), 피천득(1926~1937) 등이 유명하다.
조선의 독립을 꿈꾸던 이들은 중국의 신해혁명에서 희망의 불씨를 감지하고 일본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1870년대 이후 일찌감치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용이했던 중국 동북 지방(만주)과 러시아 연해지방(연해주)이 선호되었으나, 점차 상하이가 조선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조선과 가깝고 미국이나 유럽을 왕래하기 좋은 교통의 요지였던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하이에 있는 ‘조계(租界)’라는 곳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1842년 아편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어 광저우(廣州), 푸저우(福州), 샤먼(厦門), 닝보(寧波), 상하이 다섯 곳의 항구를 개항하는 한편, 최초로 상하이 등지에 외국인 특별통치구역을 뜻하는 조계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영국(1843), 프랑스(1845), 미국(1848) 조계가 차례로 세워졌고, 나중에 영·프·미의 조계 행정을 통일한 ‘공공조계(1854)’와 다시 프랑스가 독립운영을 주장한 ‘프랑스조계’(1861)로 재편되었다.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상하이 조계지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균형 하에 독립운동을 위한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군벌과 국민당을 비판하여 신변의 위협을 받았던 작가 루쉰(魯迅, 1881~1936)이 상하이에 정착했던 것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근거지를 두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상하이의 조계지는 군벌 할거, 내전, 항일전쟁 등으로 혼란한 중국 정세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인력거꾼」에는 상하이 뒷골목의 이른 아침 풍경과 인력거꾼의 바가지 상술 등 유학생 주요섭이 관찰한 상하이의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인용문은 당시 실제로 장쑤성과 저장성을 통치하던 군벌인 제섭원(齊燮元)과 노영상(盧永祥)을 언급하며, 그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배경으로 제시한다. 전란을 피해 외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정거장은 북새통을 이룬다. 『낙타샹즈』의 주인공 샹즈는 군벌들의 전쟁통에 3년 동안 고생해서 간신히 장만한 인력거를 군인에게 빼앗겼다(셀묶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셀 1-2 참조). 아찡은 피난민을 실어나르며 잠시 작은 이익을 취하긴 하지만, 그 역시 빈민굴에 살며 인력거를 끌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인생이다. 베이징과 상하이라는 공간을 넘어 1920~30년대 군벌들의 혼전으로 당시 민중들이 고통받기는 매한가지였다.
주인공 아찡은 대양(大洋) 80전을 인력거세 하루 선금으로 내고 인력거 셋방에서 인력거를 빌린다. 그는 간밤의 꿈이 뒤숭숭한 것이 일진이 사나울 것만 같다. 그런데 동료들과 외지에서 온 피난민에게 바가지를 씌우며 뜻밖의 작은 이익에 기뻐한다. “이게 웬 떡이냐! 꿈에 신수가 궁하면 정말로 신수가 좋은 법이야.” 이 대목은 마치 「운수 좋은 날」의 오마주같은 느낌을 준다.******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는 아내를 잃고, 「인력거꾼」의 아찡은 운수가 좋았던 날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죽는다. 작품의 말미에 아찡이 “과도한 달음질”로 죽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인력거꾼의 평균 수명이 9년이라는 공부국의 통계 수치가 제시된다. 인력거를 끄는 일은 건강을 해칠 정도로 체력 소모가 큰 노동이었다. 낙타샹즈에서도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한 사람은 건강하게 성장하기 힘들고, 10년 넘게 인력거를 끈 나이 든 사람은 근육이 쇠잔해져서 인력거를 끌다 길에서 고꾸라져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아찡과 동료들을 정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하기엔 도시 빈민으로 살아가는 인력거꾼의 고단한 삶에 먼저 동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고된 삶의 무게에 짓눌리다 보면 사람들은 돈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지기 쉽다. 또한 힘겨운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운, 요행을 바라게 된다. 매주 로또 당첨을 꿈꾸는 오늘날의 소시민처럼 아찡 또한 ‘운’ 밖에 기댈 곳이 없는, 가난 속에서 무력한 개인일 뿐이다.
***** 한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 198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3일로 제정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일을 둘러싸고 역사학계에서는 논란이 많았다. 국호와 임시헌장이 발표되고 국무원이 선임된 날이 4월 11일이므로 이날이 수립일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채택되어 2019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일이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변경되었다.
****** 인력거꾼을 주인공으로 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은 1924년 6월 《개벽》에 발표되었고, 「인력거꾼」은 이로부터 약 1년 뒤인 1925년 4월 《개벽》에 발표되었다. 재학 시절은 겹치지 않지만 현진건과 주요섭 모두 후장대학(滬江大學)을 졸업했다.
전후맥락
상하이에서 8년 동안 인력거를 끌어온 아찡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일어나 인력거 셋방에서 대양(大洋) 80전을 인력거세 하루 선금으로 내고 인력거를 빌린다. 그는 전란을 피해 외지에서 몰려드는 손님을 여관까지 실어나르며 동료들과 바가지를 요금을 받고는 작은 이익에 기뻐한다.
고전본문
마침 남경서 오는 막차가 새벽에 정거장에 닿았다. 제섭원(齊燮元)이가 노영상(盧永祥)이를 들이친다*고 풍설이 한창 올랐을 때에 이번 차가 아마 마지막 차일는지도 모른다고 소주(蘇州)서 곤산(昆山)서 쓸어 오는 피란민들이 넓은 정거장이 째어져라 하고 밀려 나아왔다. 정거장 정문은 벌써 그동안 각처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의 잃어버린 짐짝으로 가득 채워 교통 단절이 되고 좌우 문으로 쓸려 나오는 군중이 문간에 수직하고 있는** 군인들의 수색을 당하면서 이리 밀치우고 저리 밀치우고 흐늑흐늑 하고 있었다.
아찡은 이 기회를 안 놓치리라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기회만 엿보고 서 있었다. 저편 한구석으로 아니나다를까 늙은 할머니 한 분, 젊은 색시 한 분, 또 돈푼이나 있어 보이는 젊은 사내 하나가 고리짝, 참대 궤짝, 바구니 등 수십 개의 짐짝을 겨우 수색을 마치고 시멘트 길바닥에 쌓아놓고 땀들을 씻고 있었다. 아찡은 곧 그곳으로 뛰어가려고 하다가 ‘이놈아’ 하고 외치는 역전 순사 밑에 쥐 죽은 듯이 한편으로 물러서면서 아까운 듯이 그쪽만을 바라보았다. 짐은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촌닭이 관청으로 온 모양에 두리번두리번하던 젊은 사내가 마침내 짐짝을 여인들에게 잘 보라고 부탁하고 인력거를 부르려 정거장 구외로 나아왔다. 아찡은 인력거를 한 모퉁이에 집어 던지고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벌써 다른 인력거꾼들도 달려와서 이 젊은이를 에워쌌다.
“어데 가시려오? 어데요? 여관에 갈려오?”
젊은이는 어찌해야 좋을는지 모르겠다는 모양으로 한참이나 어릿어릿하다가 겨우 상해 말은 아닌 어떤 사투리로 여관까지 얼마나 가겠느냐고 물었다.
“사마로(四馬路)***까지 가면 육십 전이오”하고 한 인력거꾼이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젊은이는 다시 우물우물하다가
“이십 전에 가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고만두어!”하고 모깃소리만치 중얼거렸다. 인력거꾼 한 서넛이 펄쩍 뛰면서 한꺼번에 외쳤다.
“어디를, 우리 그렇게 에누리 아니 한답니다.”
“그자 촌놈일다. 상해 말도 할 줄 모른다”하고 인력거꾼 하나가 고함을 쳤다. 그들은 이 시골뜨기를 잔뜩 골려먹으려고 그냥 육십 전을 내라고 떠들었다. 얼마 동안에 오고 가는 말이 계속되다가 값은 마침내 매 인력거에 사십 전씩(보통 정가의 4배)에 작정이 되었다. 아찡도 식전 새벽에 이게 왠 떡이냐 하고 새벽 호운(好運)을 웃고 떠들어서 축하하는 동무 인력거꾼들과 섞여서 정거장 구내로 들어가서 고리짝을 한 개 들어 내왔다. 아찡은 큰 고리짝 한 개와 얻어먹다 남았는지 반찬 대가리 싼 조그만 보꾸러미 한 개를 올려놓고 앞장을 서서 줄곧 달음질해 나아갔다.
사마로에 여관은 여관마다 피란민으로 가득 찼다. 그래 그들은 짐들을 싣고 이 여관 저 여관으로 한참이나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내 어떤 어렵고 조그마한 여관에 가서 남은 방은 없으나 응접실에서 자기로 하고 하루에 방세 이십 원씩 주기로 하여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인력거꾼들은 그동안 여기저기 한참이나 끌려다녔다는 것을 핑계로 해가지고 한참이나 요란스럽게 떠들어서 마침내 매인(每人) 대양(大洋)**** 일 원씩을 떼내었다. 아찡도 그의 왼손바닥에 놓은 번들번들하는 은전 대양 일 원을 눈이 부신 듯이 바라다보면서 저고리 앞자락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씻고 서 있었다.
그가 인력거 채를 되는대로 질질 끌면서 다시 큰 거리로 나아올 때 그는 혼자서
“이게 웬 떡이냐! 꿈에 신수가 궁하면 정말로 신수가 좋은 법이야”하면서 속으로는 좀 있다가 방장에 선술집에 가서 한잔할 기쁨을 예상하면서 그 번들번들하는 큰돈을 허리춤 전대에 잘 간수했다.
* 제섭원(齊燮元, 치셰위안: 1885~1946)과 노영상(盧永祥, 루융샹: 1867~1933)은 각각 장쑤성과 저장성을 통치하던 군벌이다. 치셰위안은 즈리파(直隸派), 루융샹은 안후이파(安徽派)에 속했는데, 상하이의 귀속 문제를 놓고 1924년 9월~10월 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장저전쟁(江浙戰爭)]. 소설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수직(守直)하다: 건물이나 물건 따위를 맡아서 지키다.
*** 사마로(四馬路): ‘마로(馬路)’는 중국어에서 ‘길, 도로’를 뜻하는데, 상하이에서 와이탄(外灘)과 직각을 이루며 동서로 난 큰 길들은 실제로 ‘말이 달리는 길’이었다. 1840년대 와이탄 근처 영국 조계 지역에 경마장이 있었는데, 규모가 작아서 경주로가 짧았기에 경마장 남문에서 시작해 서쪽 내륙으로 곧게 뻗은 길을 새로 만들어 경마를 즐기곤 했다. 이후 더 넓은 부지(지금의 인민공원 근처)로 경마장을 옮긴 후에는 조계의 핵심도로 역할을 했다. 1865년 이후 대마로(大馬路)에는 난징조약을 기념하여 난징로(南京路)라는 이름을 붙였고, 사마로는 남쪽으로 평행하게 난 4번째 길로서 지금의 푸저우로(福州路)를 가리킨다. 사마로는 서점·출판사·신문사와 극장·찻집·공연장이 즐비한 문화의 거리이자, 술집과 기방이 몰려있는 홍등가이기도 했다.
**** 대양(大洋): 청나라 말기 서양의 은화 제도를 모방해서 만든 화폐.
토론하기
(1) 외지에서 온 피난민들에게 바가지요금을 받는 아찡과 동료들의 행위에 대해 토론해보자.
(2) 라오서의 『낙타샹즈』,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등 인력거꾼을 주인공으로 한 다른 작품들을 읽고 비교 토론해보자.
(3) 이 작품은 주요섭이 상하이 유학 시절 발표한 단편소설로, 상하이에서 집필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상하이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 속 상하이와 한국인의 인연을 조사해보자. (예시: 병오박해(1846)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상하이의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조선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갑신정변(1884)의 주역인 김옥균(1851~1894)은 1894년 3월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는 한국의 독립운동사와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해설읽기
「인력거꾼」은 주요섭이 상하이(上海)에서 유학(1921~1927)하던 시절 발표한 단편소설로, 상하이에서 집필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상하이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20세기 초 상하이라는 공간이 한국인에게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논할 때 상하이는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되었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1932.4.29.) 등 한국사에서 특기할만한 사건들이 상하이에서 일어났다. 1910년 8월 합일합병조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후 많은 한인들이 상하이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더욱 많은 한인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상하이를 거쳐 간 문인으로는 주요한, 주요섭 형제 외에도 이광수(주요 체류 기간: 1919.2~1921.4), 현진건(1918~1920), 피천득(1926~1937) 등이 유명하다.
조선의 독립을 꿈꾸던 이들은 중국의 신해혁명에서 희망의 불씨를 감지하고 일본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1870년대 이후 일찌감치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용이했던 중국 동북 지방(만주)과 러시아 연해지방(연해주)이 선호되었으나, 점차 상하이가 조선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조선과 가깝고 미국이나 유럽을 왕래하기 좋은 교통의 요지였던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하이에 있는 ‘조계(租界)’라는 곳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1842년 아편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어 광저우(廣州), 푸저우(福州), 샤먼(厦門), 닝보(寧波), 상하이 다섯 곳의 항구를 개항하는 한편, 최초로 상하이 등지에 외국인 특별통치구역을 뜻하는 조계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영국(1843), 프랑스(1845), 미국(1848) 조계가 차례로 세워졌고, 나중에 영·프·미의 조계 행정을 통일한 ‘공공조계(1854)’와 다시 프랑스가 독립운영을 주장한 ‘프랑스조계’(1861)로 재편되었다.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상하이 조계지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균형 하에 독립운동을 위한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군벌과 국민당을 비판하여 신변의 위협을 받았던 작가 루쉰(魯迅, 1881~1936)이 상하이에 정착했던 것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근거지를 두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상하이의 조계지는 군벌 할거, 내전, 항일전쟁 등으로 혼란한 중국 정세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인력거꾼」에는 상하이 뒷골목의 이른 아침 풍경과 인력거꾼의 바가지 상술 등 유학생 주요섭이 관찰한 상하이의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인용문은 당시 실제로 장쑤성과 저장성을 통치하던 군벌인 제섭원(齊燮元)과 노영상(盧永祥)을 언급하며, 그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배경으로 제시한다. 전란을 피해 외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정거장은 북새통을 이룬다. 『낙타샹즈』의 주인공 샹즈는 군벌들의 전쟁통에 3년 동안 고생해서 간신히 장만한 인력거를 군인에게 빼앗겼다(셀묶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셀 1-2 참조). 아찡은 피난민을 실어나르며 잠시 작은 이익을 취하긴 하지만, 그 역시 빈민굴에 살며 인력거를 끌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인생이다. 베이징과 상하이라는 공간을 넘어 1920~30년대 군벌들의 혼전으로 당시 민중들이 고통받기는 매한가지였다.
주인공 아찡은 대양(大洋) 80전을 인력거세 하루 선금으로 내고 인력거 셋방에서 인력거를 빌린다. 그는 간밤의 꿈이 뒤숭숭한 것이 일진이 사나울 것만 같다. 그런데 동료들과 외지에서 온 피난민에게 바가지를 씌우며 뜻밖의 작은 이익에 기뻐한다. “이게 웬 떡이냐! 꿈에 신수가 궁하면 정말로 신수가 좋은 법이야.” 이 대목은 마치 「운수 좋은 날」의 오마주같은 느낌을 준다.******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는 아내를 잃고, 「인력거꾼」의 아찡은 운수가 좋았던 날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죽는다. 작품의 말미에 아찡이 “과도한 달음질”로 죽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인력거꾼의 평균 수명이 9년이라는 공부국의 통계 수치가 제시된다. 인력거를 끄는 일은 건강을 해칠 정도로 체력 소모가 큰 노동이었다. 낙타샹즈에서도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한 사람은 건강하게 성장하기 힘들고, 10년 넘게 인력거를 끈 나이 든 사람은 근육이 쇠잔해져서 인력거를 끌다 길에서 고꾸라져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아찡과 동료들을 정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하기엔 도시 빈민으로 살아가는 인력거꾼의 고단한 삶에 먼저 동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고된 삶의 무게에 짓눌리다 보면 사람들은 돈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지기 쉽다. 또한 힘겨운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운, 요행을 바라게 된다. 매주 로또 당첨을 꿈꾸는 오늘날의 소시민처럼 아찡 또한 ‘운’ 밖에 기댈 곳이 없는, 가난 속에서 무력한 개인일 뿐이다.
***** 한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 198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3일로 제정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일을 둘러싸고 역사학계에서는 논란이 많았다. 국호와 임시헌장이 발표되고 국무원이 선임된 날이 4월 11일이므로 이날이 수립일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채택되어 2019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일이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변경되었다.
****** 인력거꾼을 주인공으로 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은 1924년 6월 《개벽》에 발표되었고, 「인력거꾼」은 이로부터 약 1년 뒤인 1925년 4월 《개벽》에 발표되었다. 재학 시절은 겹치지 않지만 현진건과 주요섭 모두 후장대학(滬江大學)을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