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전>이 처음 시작되는 부분이다.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1618년 명에 선전포고를 하고, 명은 이에 맞서며 조선에 파병을 요구한다. 조선은 강홍립을 오도원수(五道元帥)로 하여 1만3천명을 파병했다. 김영철 또한 이 파병 부대에 속해 있었다.
고전본문
김영철은 평안도 영유현 중종리 사람으로 대대로 무과에 급제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영철은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여 영유현의 무학武學이 되었다.
무오년(1618) 명나라에서 대군을 일으켜 건주의 오랑캐를 토벌하러 나서며 우리나라에 병력 지원을 요구하자, 우리 측에서는 강홍립을 도원수로,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아 2만 군사를 이끌고 가게 하였다. 영철은 종조부 김영화와 함께 좌영장 김응하의 부대원이 되어 선봉에 섰다. 이때의 나이 열아홉 살로, 아직 혼인하지 않은 처지였다. 영철과 그 부친 김여관은 모두 외아들이었다. 출발하기에 이르러 조부 김영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네가 돌아오지 못하면 우리 집안은 대가 끊긴다.”
영철이 말했다.
“꼭 돌아올 겁니다.”
8월에 우리 군대는 창성에 집결했고, 명나라 군대는 요동에 집결했다. 명나라의 경략 양호는 오랑캐 땅에 추위가 일찍 찾아와 남방에서 온 사람과 말이 견디기 어려우므로 봄까지 기다렸다가 정벌을 시작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다.
기미년(1619) 봄 2월, 강홍립이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영마전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류했고, 함께 우모령을 넘어 10여 개의 보루를 격파하고 승세를 타 전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맨 앞에 서고 우리 군대의 좌영左營이 그 다음, 중영中營이 또 그 다음에 섰으며, 우영右營이 맨 뒤의 후군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정예병 수만 명을 아들 귀영가에게 주어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게 하였다. 마침내 오랑캐가 우리 좌영을 치고 들어와 전투가 시작되었다. 김응하는 급히 강홍립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홍립은 응하지 않았다. 김경서 혼자 나아가 싸우다 돌아와 강홍립에게 말했다.
“오랑캐 군대는 극도로 지쳐서 말안장을 껴안고 잠에 빠져 종종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합니다. 제가 대군을 이끌고 가서 협공하면 틀림없이 오랑캐 군대를 깨뜨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강홍립이 주머니에서 밀지를 꺼내 보여주자, 김경서는 기운이 꺾여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김응하는 전사하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오랑캐에게 투항했다.
강홍립은 출정할 때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 투항한 왜인 300명을 뽑아 종군하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누르하치에게 이들을 바쳤다. 누르하치가 몹시 기뻐하며 이튿날 열병閱兵하기로 했다. 이에 왜인들은 누르하치를 암살하고 강홍립을 붙잡아 조선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는데, 그날 밤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왜인 전원이 사살되고 말았다. 우리 병사들은 이를 보고 모두들 분개해 마지않았다. 누르하치는 변란이 일어날까 싶어 우리 병사를 모두 죽이고자 했으나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마침 우리 군대의 장교 한 사람이 지난번 전투에서 오랑캐의 머리를 베어 그릇에 담아 두었는데, 투항하면서 이것이 발견되고 말았다. 누르하치가 크게 노하여 우리 군사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그 중에서 용모와 복장이 준수한 자 400여 명을 따로 뽑아낸 뒤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조선의 양반 출신 장교이다. 내겐 쓸모가 없으니 모두 죽여라!”
김영화 역시 이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영철도 곧 참수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랑캐 장수 아라나阿羅那가 영철을 데리고 앞으로 나서더니 누르하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아우가 전투 중에 죽었는데, 이 사람의 얼굴이 제 아우와 흡사합니다. 목숨을 살려 제가 부릴 수 있게 해 주시길 청합니다.”
누르하치가 허락하고, 아라나에게 중국인 투항자 다섯 사람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
토론하기
(1) 이 글의 배경이 되는 심하전투 (=사르후 전투)에 대해 조사해 보자.
(2) 명분상 명나라를 돕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해 오랑캐를 치는 전쟁에 참가하면서, 강홍립이 오랑캐에 쉽게 투항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전에 계획되어 있던 일이라면, 이런 내용을 참가한 군인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정당한 일일까?
(2) 영철의 할아버지는 출병하는 2대 독자 영철에게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고 말하는 대신, 돌아와서 집안의 대를 이으라고 말한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은 영철의 귀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을까?
(3) 17세기든, 20세기든 국민/군인의 의무 때문에 남의 나라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개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해설읽기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지역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우선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에서 조선, 일본, 명이 싸웠다. 이어 건주의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 명을 공격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았던 조선은 명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1619년 3월 만주 심하(深河)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후금의 군대와 싸웠지만 크게 패하였고, 강홍립이 이끈 조선군은 잇따른 패전으로 투항했다.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후금은 청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묘년(1627)과 병자년(1637)에 조선을 공격해 항복을 받고 돌아간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은 이후 명의 남은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요녕성의 개주와 금주 등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이때 조선의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파병하여 청을 도와야 했다.
1600년생인 김영철의 일생은 위의 전쟁 대부분을 관통한다. 김영철이 그의 작은 할아버지와 함께 출병하는 소설의 첫 장면은 위의 1619년의 심하전투와 관련된 출병 장면이다. 1619년의 전쟁을 우리는 심하(深河)전투라고 부르며, 중국은 사르후(薩爾滸)전투라고 부른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후금은 명실상부하게 명을 대체하는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했다. 명의 편에 섰던 조선은 후금(청)의 위협을 받으며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된다.
전쟁 장면 묘사에서 등장하는 강홍립, 김경서, 김응하 등은 모두 역사상의 실제 인물이며, 전투 과정에서 강홍립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왕으로부터 받은 듯한 밀지를 꺼내 보이 것도 정사나 야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당시 후금이 힘을 키워 명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던 광해군은 이 전투에 섣불리 개입한다면 향후 후금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이라 예상하고 출병하는 군대의 대장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비밀리에 주문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전 계획에도 불구하고 1만 3천명의 조선 군대 중에서 8,9천 명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했고, 남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었다. 포로들은 일부는 살해되거나 현지에 남았고 또 일부는 탈출을 시도했다.
소설 속의 김영철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사례이다. 포로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누르하치는 양반 출신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죽이게 했다. 함께 파병된 김영철의 작은 할아버지는 이 때 목숨을 잃었지만, 영철은 극적으로 살아남아 오랑캐 장수 아라나에게 전리품으로 하사된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라나 집에서의 생활과 새로운 가족, 탈출, 등주에서의 생활과 결혼, 귀국으로 이어진다. 영철의 귀국 후 삶이 행복하지 않았기에 소설을 읽으면서 영철이 탈출에 탈출을 거듭하며 기어코 조선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되묻게 된다. 소설의 첫 장면인 영철 조부의 말은 그 동력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2대 독자인 영철이 돌아오지 않으면 집안의 대가 끊어지므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할까?
다른 한편 13년만의 귀국이 끝이 아니었다. 병자호란 이후 가도, 개주, 금주 등에서 청이 수행하는 전쟁을 돕기 위해 조선의 군대가 파병되고, 김영철 또한 거기에 소속되어 계속 떠돌아야 했다. 김영철은 열아홉 살 때부터 20여 년간 조선이 아닌 다른 나라들끼리 싸우는 전쟁에 휘말려 그의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전투에 참여하다가, 포로로 잡혔다가, 또 탈출을 하다가 죽을 뻔한 한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귀국 이후에는 만주어와 중국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파병 군대를 따라나서야 했다. 말년에는 전쟁의 공포에 시달렸다. 변방의 성을 짓는 일을 하면 군인으로 차출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20년간 성을 지으며 숨어 살았다.
영철이 하급 군인이 아니었다면, 영철이 북방지역 사람이 아니었다면, 영철이 1600년이 아니라 한 세대 뒤인 1630년에 태어났다면 연이은 전쟁에 차출되어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면 이 모든 불행이 영철 개인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까닭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1619년의 전투에 영철은 왜 참여해야 했을까? 1627년과 37년에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또 1641-42년에 개주와 금주의 전투에 차출되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김영철 개인이 혹은 조선의 군대가 파병을 피할 방법은 없었을까?
약 300년 뒤에도 이런 문제는 반복되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차출되어야 했던 식민지 조선인은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나서도 세계의 두 강대국 간의 이념적 대립의 한편에 서서 싸워야 했고, 다시 또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1619년의 심하전투, 1637년의 병자호란, 1640-41년의 개주와 금주 전투에 참여한 17세기의 김영철은 1941년의 태평양전쟁, 1950년의 한국전쟁, 1960년의 베트남전쟁에 참여한 20세기의 또 다른 누구일 것이다.
키워드
전쟁
전후맥락
<김영철전>이 처음 시작되는 부분이다.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1618년 명에 선전포고를 하고, 명은 이에 맞서며 조선에 파병을 요구한다. 조선은 강홍립을 오도원수(五道元帥)로 하여 1만3천명을 파병했다. 김영철 또한 이 파병 부대에 속해 있었다.
고전본문
김영철은 평안도 영유현 중종리 사람으로 대대로 무과에 급제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영철은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여 영유현의 무학武學이 되었다.
무오년(1618) 명나라에서 대군을 일으켜 건주의 오랑캐를 토벌하러 나서며 우리나라에 병력 지원을 요구하자, 우리 측에서는 강홍립을 도원수로,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아 2만 군사를 이끌고 가게 하였다. 영철은 종조부 김영화와 함께 좌영장 김응하의 부대원이 되어 선봉에 섰다. 이때의 나이 열아홉 살로, 아직 혼인하지 않은 처지였다. 영철과 그 부친 김여관은 모두 외아들이었다. 출발하기에 이르러 조부 김영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네가 돌아오지 못하면 우리 집안은 대가 끊긴다.”
영철이 말했다.
“꼭 돌아올 겁니다.”
8월에 우리 군대는 창성에 집결했고, 명나라 군대는 요동에 집결했다. 명나라의 경략 양호는 오랑캐 땅에 추위가 일찍 찾아와 남방에서 온 사람과 말이 견디기 어려우므로 봄까지 기다렸다가 정벌을 시작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다.
기미년(1619) 봄 2월, 강홍립이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영마전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류했고, 함께 우모령을 넘어 10여 개의 보루를 격파하고 승세를 타 전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맨 앞에 서고 우리 군대의 좌영左營이 그 다음, 중영中營이 또 그 다음에 섰으며, 우영右營이 맨 뒤의 후군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정예병 수만 명을 아들 귀영가에게 주어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게 하였다. 마침내 오랑캐가 우리 좌영을 치고 들어와 전투가 시작되었다. 김응하는 급히 강홍립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홍립은 응하지 않았다. 김경서 혼자 나아가 싸우다 돌아와 강홍립에게 말했다.
“오랑캐 군대는 극도로 지쳐서 말안장을 껴안고 잠에 빠져 종종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합니다. 제가 대군을 이끌고 가서 협공하면 틀림없이 오랑캐 군대를 깨뜨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강홍립이 주머니에서 밀지를 꺼내 보여주자, 김경서는 기운이 꺾여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김응하는 전사하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오랑캐에게 투항했다.
강홍립은 출정할 때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 투항한 왜인 300명을 뽑아 종군하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누르하치에게 이들을 바쳤다. 누르하치가 몹시 기뻐하며 이튿날 열병閱兵하기로 했다. 이에 왜인들은 누르하치를 암살하고 강홍립을 붙잡아 조선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는데, 그날 밤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왜인 전원이 사살되고 말았다. 우리 병사들은 이를 보고 모두들 분개해 마지않았다. 누르하치는 변란이 일어날까 싶어 우리 병사를 모두 죽이고자 했으나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마침 우리 군대의 장교 한 사람이 지난번 전투에서 오랑캐의 머리를 베어 그릇에 담아 두었는데, 투항하면서 이것이 발견되고 말았다. 누르하치가 크게 노하여 우리 군사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그 중에서 용모와 복장이 준수한 자 400여 명을 따로 뽑아낸 뒤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조선의 양반 출신 장교이다. 내겐 쓸모가 없으니 모두 죽여라!”
김영화 역시 이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영철도 곧 참수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랑캐 장수 아라나阿羅那가 영철을 데리고 앞으로 나서더니 누르하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아우가 전투 중에 죽었는데, 이 사람의 얼굴이 제 아우와 흡사합니다. 목숨을 살려 제가 부릴 수 있게 해 주시길 청합니다.”
누르하치가 허락하고, 아라나에게 중국인 투항자 다섯 사람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
토론하기
(1) 이 글의 배경이 되는 심하전투 (=사르후 전투)에 대해 조사해 보자.
(2) 명분상 명나라를 돕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해 오랑캐를 치는 전쟁에 참가하면서, 강홍립이 오랑캐에 쉽게 투항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전에 계획되어 있던 일이라면, 이런 내용을 참가한 군인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정당한 일일까?
(2) 영철의 할아버지는 출병하는 2대 독자 영철에게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고 말하는 대신, 돌아와서 집안의 대를 이으라고 말한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은 영철의 귀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을까?
(3) 17세기든, 20세기든 국민/군인의 의무 때문에 남의 나라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개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해설읽기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지역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우선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에서 조선, 일본, 명이 싸웠다. 이어 건주의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 명을 공격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았던 조선은 명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1619년 3월 만주 심하(深河)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후금의 군대와 싸웠지만 크게 패하였고, 강홍립이 이끈 조선군은 잇따른 패전으로 투항했다.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후금은 청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묘년(1627)과 병자년(1637)에 조선을 공격해 항복을 받고 돌아간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은 이후 명의 남은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요녕성의 개주와 금주 등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이때 조선의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파병하여 청을 도와야 했다.
1600년생인 김영철의 일생은 위의 전쟁 대부분을 관통한다. 김영철이 그의 작은 할아버지와 함께 출병하는 소설의 첫 장면은 위의 1619년의 심하전투와 관련된 출병 장면이다. 1619년의 전쟁을 우리는 심하(深河)전투라고 부르며, 중국은 사르후(薩爾滸)전투라고 부른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후금은 명실상부하게 명을 대체하는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했다. 명의 편에 섰던 조선은 후금(청)의 위협을 받으며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된다.
전쟁 장면 묘사에서 등장하는 강홍립, 김경서, 김응하 등은 모두 역사상의 실제 인물이며, 전투 과정에서 강홍립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왕으로부터 받은 듯한 밀지를 꺼내 보이 것도 정사나 야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당시 후금이 힘을 키워 명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던 광해군은 이 전투에 섣불리 개입한다면 향후 후금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이라 예상하고 출병하는 군대의 대장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비밀리에 주문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전 계획에도 불구하고 1만 3천명의 조선 군대 중에서 8,9천 명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했고, 남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었다. 포로들은 일부는 살해되거나 현지에 남았고 또 일부는 탈출을 시도했다.
소설 속의 김영철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사례이다. 포로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누르하치는 양반 출신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죽이게 했다. 함께 파병된 김영철의 작은 할아버지는 이 때 목숨을 잃었지만, 영철은 극적으로 살아남아 오랑캐 장수 아라나에게 전리품으로 하사된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라나 집에서의 생활과 새로운 가족, 탈출, 등주에서의 생활과 결혼, 귀국으로 이어진다. 영철의 귀국 후 삶이 행복하지 않았기에 소설을 읽으면서 영철이 탈출에 탈출을 거듭하며 기어코 조선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되묻게 된다. 소설의 첫 장면인 영철 조부의 말은 그 동력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2대 독자인 영철이 돌아오지 않으면 집안의 대가 끊어지므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할까?
다른 한편 13년만의 귀국이 끝이 아니었다. 병자호란 이후 가도, 개주, 금주 등에서 청이 수행하는 전쟁을 돕기 위해 조선의 군대가 파병되고, 김영철 또한 거기에 소속되어 계속 떠돌아야 했다. 김영철은 열아홉 살 때부터 20여 년간 조선이 아닌 다른 나라들끼리 싸우는 전쟁에 휘말려 그의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전투에 참여하다가, 포로로 잡혔다가, 또 탈출을 하다가 죽을 뻔한 한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귀국 이후에는 만주어와 중국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파병 군대를 따라나서야 했다. 말년에는 전쟁의 공포에 시달렸다. 변방의 성을 짓는 일을 하면 군인으로 차출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20년간 성을 지으며 숨어 살았다.
영철이 하급 군인이 아니었다면, 영철이 북방지역 사람이 아니었다면, 영철이 1600년이 아니라 한 세대 뒤인 1630년에 태어났다면 연이은 전쟁에 차출되어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면 이 모든 불행이 영철 개인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까닭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1619년의 전투에 영철은 왜 참여해야 했을까? 1627년과 37년에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또 1641-42년에 개주와 금주의 전투에 차출되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김영철 개인이 혹은 조선의 군대가 파병을 피할 방법은 없었을까?
약 300년 뒤에도 이런 문제는 반복되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차출되어야 했던 식민지 조선인은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나서도 세계의 두 강대국 간의 이념적 대립의 한편에 서서 싸워야 했고, 다시 또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1619년의 심하전투, 1637년의 병자호란, 1640-41년의 개주와 금주 전투에 참여한 17세기의 김영철은 1941년의 태평양전쟁, 1950년의 한국전쟁, 1960년의 베트남전쟁에 참여한 20세기의 또 다른 누구일 것이다.
키워드
전쟁
관련 콘텐츠가 없습니다.
고전 매트릭스
(08826)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1 대림국제관(137-2동) 5층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