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파병, 포로, 탈출, 건주와 등주에서의 타국 생활을 거쳐 드디어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신의 배를 몰래 타고 고향에 도착한 김영철은 귀환의 기쁨을 느끼기는커녕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찾아다니고 생계를 꾸릴 방도가 없어 애를 먹는다. 몇 년 후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결국 패전한 조선은 이번에는 청나라를 위해 명을 치는 전쟁에 동원된다. 만주어와 중국어 모두에 능한 김영철 또한 임경업을 돕기도 하면서 여전히 전쟁에 깊숙이 개입되어 살고 있다.
고전본문
신사년(1641)에 유림이 군대를 이끌고 금주에 갈 때 때 영철은 또 종군하게 되었다. … 이때 오랑캐가 금주를 포위했다. 명나라에서는 10만 군사를 구원병으로 보내 오랑캐와 싸움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유림은 영철을 홍타이지에게 보내 축하 인사를 하게 했다. 아라나는 홍타이지에게 영철의 지난 일을 고하며 벌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켜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영철은 본래 조선 사람인데, 8년 동안은 우리 백성이었고 6년 동안은 등주 백성이었다가 이제 다시 조선 백성이 되었다. 조선 백성 또한 우리 백성이다. 더구나 큰아들이 군중에 있고 작은 아들은 우리 건주에 있으니, 부자가 모두 우리 백성인 셈이다. 저 등주라고 해서 어찌 우리 백성이 될 수 없겠느냐? 내가 천하를 얻음이 이로부터 시작되리니, 이 사람이 온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홍타이지는 영철에게 비단 10필과 몽고말 1필을 하사하였다.
영철은 감사의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아라나에게 주어, 제 목숨을 살려 준 은혜에 보답하고 말을 훔쳤던 죗값을 치렀으면 합니다.”
홍타이지가 말했다.
“영철은 자기 잘못을 알고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라 할 만하구나.”
이에 그 말을 아라나에게 주고, 영철에게는 다시 노새 한 마리를 주었다. 영철은 자기가 타던 말을 득북에게 주며 돌아가 득건에게 주라고 했다.
몇 달 뒤 조선에서 교대할 군대가 오자 영철은 봉황성으로 돌아갔다. 유림이 영철에게 말했다.
“금주에서 네 죗값을 치르기 위해 내놓은 잎담배는 호조의 군수물자니, 네가 갚도록 해라.”
영철이 집으로 돌아와 몇 달이 지나자, 호조에서 관향사에게 공문을 보내 영철에게 은 200냥을 받아 내라고 독촉했다. 영철은 노새를 팔고 가산을 모두 털었지만 겨우 그 절반밖에 낼 수 없었다. 나머지 100냥을 마련할 길이 없어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역시 부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모두 슬피 여겼다. …
영철은 의상, 득상, 득발, 기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자신이 종군하며 겪은 고통을 늘 생각하며 자식들이 같은 고통을 겪을까 두려워했다. 무술년(1658)에 조정에서 자모산성을 고쳐 쌓으며 성을 방비할 병사를 모집했는데, 이에 응한 사람은 군역을 면해 주었다. 영철이 즉시 네 아들과 함께 성으로 들어가 살았으니, 이때 이미 영철의 나이 예순이 넘었다.
영철은 가난 속에서 하릴없이 늙어 가며 가슴속에 불평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성 위에 올라가 북쪽으로 건주를, 남쪽으로 등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노라면 서글픈 생각에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영철은 언젠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처자는 나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처자를 저버렸소. 건주와 등주의 처자들은 죽을 때까지 나를 원망할 터이니 지금 나의 곤궁한 신세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어찌 천벌이 아니겠소. 그렇지만 이국에 있다가 끝내 부모의 나라에 돌아왔으니 또한 무슨 한이 있겠소?”
영철은 20여 년간 성을 지키다가 84세 되던 해에 죽었다.
토론하기
(1) 홍타이지의 말처럼 조선이든 등주이든 건주이든 어디에 살든지 같은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다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무엇이 문제가 될까? 영철은 포로에서 풀려나 건주와 등주에서 정착해 살면서 왜 끊임없이 부모의 나라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2) 영철은 말년에 이르러서도 늘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어 보인다. 영철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영철이 귀환하지 않았다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해설읽기
조선, 후금(청), 명을 떠돌던 영철에게 세 나라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고, 어느 나라에 사는지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영철이 만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영철이 삼국을 떠돈 삶이 자신이 꿈꾸는 제국에서의 삶의 표본이라고 치켜세운다. 조선에서 19년을 살았고, 청나라 땅 건주에서 8년을, 또 명나라 땅인 등주에서 6년을 살았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청나라의 세력권이라 간주되었고, 등주는 곧 청나라에 복속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삼국이 어차피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여기므로 청 황제의 입장에서는 조선출신인지, 건주출신인지, 등주출신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셈이다.
물론 이런 국경 없는 삶에 대한 이상이 자신이 천하를 소유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국적과 국경을 침략자의 입장에서 무력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한 개인이 삶의 터전을 확장하고 넘어설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국적과 국경을 넘어설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영철의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말은, 조선인과 결혼해 조선인 아이를 낳으라는 말일 터이다. 그렇지만 영철은 이미 건주에서 여진족 여인과 결혼해 득북과 득건을 낳았고, 또 등주에서 명나라 여인과 결혼해 득달과 득길을 낳았다. 네 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그는 대를 이은 것이 아니다. 국적과 국경을 넘어설 수 없었기에 건주와 등주에 정착하고서도 영철은 미래의 가족을 위해 현재의 가족을 버리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영철도, 영철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의미를 부여했던 부모의 나라는 영철을 위해 무엇을 해 주었을까? 영철 19세부터 남의 나라 전쟁에서 싸워야 했고, 비밀리에 진행된 심하전투의 계획을 하급 군인들은 알 길이 없어 투항 전에 이미 무수히 많은 동료 군인들이 죽었고, 포로가 되어서도 나라의 도움은 없었다. 운이 좋게 목숨을 구했지만, 오랑캐 땅에서의 탈출은 온전히 김영철의 몫이었다. 귀환 후에는 어떤가? 청의 요청으로 가도와 개주 등에 남은 명나라 군대를 토벌하는 군대에 차출되어 공을 세우지만, 건주시절의 주인을 만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담뱃잎을 속전으로 바치고 풀려나지만 귀국 후에 그 돈은 호조에 다시 갚아야 했다.
김영철의 출병이 끝난 것은 청이 명을 확실히 굴복시키고 중원의 패자가 된 다음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열아홉 살 이래 20년간 출병을 반복했던 김영철은 언제 또 출병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또 조선에서 얻은 네 명의 아들 또한 자신의 신산한 삶을 반복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다. 평안도의 자모산성을 수축하는데 참여하면 군역이 면제된다는 사실 알고 그곳에 지원한다. 그의 나이 이미 예순이 넘었을 때이다. 그리고는 20여 년간 성을 쌓고 지키는 일을 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영철은 태어날 때부터 ‘백성’으로서 져야 하는 의무를 다했지만 국가는 영철을 지켜준 적이 없다. 영철의 집안이 대대로 무과에 급제했다고는 하지만, 영철은 서북 지방 출신이라 출세 길이 막혔고 또 하급 군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충’의 이념과는 무관하게 먹고 살기 위해 하급 군인으로서 혹은 양인으로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병했을 것이다. 부모의 나라에 돌아와 조상의 대를 잇는다는 유가 지식인들의 이념에 충실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영철의 귀환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처음 건주에서는 포로로 잡힌 ‘오랑캐’ 땅 사람들과의 결혼이기에 저어하는 부분이 있었다 해도, 등주에서의 결혼은 명나라 사람이고 은인으로 여긴 전유태의 누이였으며 재산을 불리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시기였다. 우연히 만난 고향 사람이 전해준 부모님과 조부모님 소식에 울컥하여 갑작스레 귀환을 결심했다. 그렇지만 돌아와서 그가 경험한 것은 후금이나 명에서의 삶보다 더 열악하고 고통스런 삶이었다. 영철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는 건주든 등주든 정착해서 잘 살고 있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언어와 문화가 낯설어 불편한 점도 있었겠지만 차츰 익숙해졌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부모와 조부모를 봉양하고,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라고 믿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동시에 처자식을 부양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함께 살아가는 것도 필부의 당연한 삶이었다. 두 영역이 충돌한다면 어떤 것을 중심에 두고 선택해야 할까?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한 가지가 충족되었을 때 실현되지 못한 다른 한 가지는 마음의 공백을 가져오고, 부족한 곳을 향해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영철의 회한은 건주나 등주에 남았든, 조선에 돌아왔든 결코 해소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키워드
건주, 금주, 김영철, 등주, 오랑캐, 이산가족, 자모산성, 전쟁, 조선, 홍타이지, 회한한
전후맥락
파병, 포로, 탈출, 건주와 등주에서의 타국 생활을 거쳐 드디어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신의 배를 몰래 타고 고향에 도착한 김영철은 귀환의 기쁨을 느끼기는커녕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찾아다니고 생계를 꾸릴 방도가 없어 애를 먹는다. 몇 년 후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결국 패전한 조선은 이번에는 청나라를 위해 명을 치는 전쟁에 동원된다. 만주어와 중국어 모두에 능한 김영철 또한 임경업을 돕기도 하면서 여전히 전쟁에 깊숙이 개입되어 살고 있다.
고전본문
신사년(1641)에 유림이 군대를 이끌고 금주에 갈 때 때 영철은 또 종군하게 되었다. … 이때 오랑캐가 금주를 포위했다. 명나라에서는 10만 군사를 구원병으로 보내 오랑캐와 싸움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유림은 영철을 홍타이지에게 보내 축하 인사를 하게 했다. 아라나는 홍타이지에게 영철의 지난 일을 고하며 벌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켜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영철은 본래 조선 사람인데, 8년 동안은 우리 백성이었고 6년 동안은 등주 백성이었다가 이제 다시 조선 백성이 되었다. 조선 백성 또한 우리 백성이다. 더구나 큰아들이 군중에 있고 작은 아들은 우리 건주에 있으니, 부자가 모두 우리 백성인 셈이다. 저 등주라고 해서 어찌 우리 백성이 될 수 없겠느냐? 내가 천하를 얻음이 이로부터 시작되리니, 이 사람이 온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홍타이지는 영철에게 비단 10필과 몽고말 1필을 하사하였다.
영철은 감사의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아라나에게 주어, 제 목숨을 살려 준 은혜에 보답하고 말을 훔쳤던 죗값을 치렀으면 합니다.”
홍타이지가 말했다.
“영철은 자기 잘못을 알고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라 할 만하구나.”
이에 그 말을 아라나에게 주고, 영철에게는 다시 노새 한 마리를 주었다. 영철은 자기가 타던 말을 득북에게 주며 돌아가 득건에게 주라고 했다.
몇 달 뒤 조선에서 교대할 군대가 오자 영철은 봉황성으로 돌아갔다. 유림이 영철에게 말했다.
“금주에서 네 죗값을 치르기 위해 내놓은 잎담배는 호조의 군수물자니, 네가 갚도록 해라.”
영철이 집으로 돌아와 몇 달이 지나자, 호조에서 관향사에게 공문을 보내 영철에게 은 200냥을 받아 내라고 독촉했다. 영철은 노새를 팔고 가산을 모두 털었지만 겨우 그 절반밖에 낼 수 없었다. 나머지 100냥을 마련할 길이 없어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역시 부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모두 슬피 여겼다. …
영철은 의상, 득상, 득발, 기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자신이 종군하며 겪은 고통을 늘 생각하며 자식들이 같은 고통을 겪을까 두려워했다. 무술년(1658)에 조정에서 자모산성을 고쳐 쌓으며 성을 방비할 병사를 모집했는데, 이에 응한 사람은 군역을 면해 주었다. 영철이 즉시 네 아들과 함께 성으로 들어가 살았으니, 이때 이미 영철의 나이 예순이 넘었다.
영철은 가난 속에서 하릴없이 늙어 가며 가슴속에 불평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성 위에 올라가 북쪽으로 건주를, 남쪽으로 등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노라면 서글픈 생각에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영철은 언젠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처자는 나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처자를 저버렸소. 건주와 등주의 처자들은 죽을 때까지 나를 원망할 터이니 지금 나의 곤궁한 신세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어찌 천벌이 아니겠소. 그렇지만 이국에 있다가 끝내 부모의 나라에 돌아왔으니 또한 무슨 한이 있겠소?”
영철은 20여 년간 성을 지키다가 84세 되던 해에 죽었다.
토론하기
(1) 홍타이지의 말처럼 조선이든 등주이든 건주이든 어디에 살든지 같은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다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무엇이 문제가 될까? 영철은 포로에서 풀려나 건주와 등주에서 정착해 살면서 왜 끊임없이 부모의 나라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2) 영철은 말년에 이르러서도 늘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어 보인다. 영철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영철이 귀환하지 않았다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해설읽기
조선, 후금(청), 명을 떠돌던 영철에게 세 나라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고, 어느 나라에 사는지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영철이 만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영철이 삼국을 떠돈 삶이 자신이 꿈꾸는 제국에서의 삶의 표본이라고 치켜세운다. 조선에서 19년을 살았고, 청나라 땅 건주에서 8년을, 또 명나라 땅인 등주에서 6년을 살았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청나라의 세력권이라 간주되었고, 등주는 곧 청나라에 복속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삼국이 어차피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여기므로 청 황제의 입장에서는 조선출신인지, 건주출신인지, 등주출신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셈이다.
물론 이런 국경 없는 삶에 대한 이상이 자신이 천하를 소유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국적과 국경을 침략자의 입장에서 무력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한 개인이 삶의 터전을 확장하고 넘어설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국적과 국경을 넘어설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영철의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말은, 조선인과 결혼해 조선인 아이를 낳으라는 말일 터이다. 그렇지만 영철은 이미 건주에서 여진족 여인과 결혼해 득북과 득건을 낳았고, 또 등주에서 명나라 여인과 결혼해 득달과 득길을 낳았다. 네 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그는 대를 이은 것이 아니다. 국적과 국경을 넘어설 수 없었기에 건주와 등주에 정착하고서도 영철은 미래의 가족을 위해 현재의 가족을 버리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영철도, 영철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의미를 부여했던 부모의 나라는 영철을 위해 무엇을 해 주었을까? 영철 19세부터 남의 나라 전쟁에서 싸워야 했고, 비밀리에 진행된 심하전투의 계획을 하급 군인들은 알 길이 없어 투항 전에 이미 무수히 많은 동료 군인들이 죽었고, 포로가 되어서도 나라의 도움은 없었다. 운이 좋게 목숨을 구했지만, 오랑캐 땅에서의 탈출은 온전히 김영철의 몫이었다. 귀환 후에는 어떤가? 청의 요청으로 가도와 개주 등에 남은 명나라 군대를 토벌하는 군대에 차출되어 공을 세우지만, 건주시절의 주인을 만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담뱃잎을 속전으로 바치고 풀려나지만 귀국 후에 그 돈은 호조에 다시 갚아야 했다.
김영철의 출병이 끝난 것은 청이 명을 확실히 굴복시키고 중원의 패자가 된 다음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열아홉 살 이래 20년간 출병을 반복했던 김영철은 언제 또 출병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또 조선에서 얻은 네 명의 아들 또한 자신의 신산한 삶을 반복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다. 평안도의 자모산성을 수축하는데 참여하면 군역이 면제된다는 사실 알고 그곳에 지원한다. 그의 나이 이미 예순이 넘었을 때이다. 그리고는 20여 년간 성을 쌓고 지키는 일을 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영철은 태어날 때부터 ‘백성’으로서 져야 하는 의무를 다했지만 국가는 영철을 지켜준 적이 없다. 영철의 집안이 대대로 무과에 급제했다고는 하지만, 영철은 서북 지방 출신이라 출세 길이 막혔고 또 하급 군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충’의 이념과는 무관하게 먹고 살기 위해 하급 군인으로서 혹은 양인으로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병했을 것이다. 부모의 나라에 돌아와 조상의 대를 잇는다는 유가 지식인들의 이념에 충실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영철의 귀환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처음 건주에서는 포로로 잡힌 ‘오랑캐’ 땅 사람들과의 결혼이기에 저어하는 부분이 있었다 해도, 등주에서의 결혼은 명나라 사람이고 은인으로 여긴 전유태의 누이였으며 재산을 불리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시기였다. 우연히 만난 고향 사람이 전해준 부모님과 조부모님 소식에 울컥하여 갑작스레 귀환을 결심했다. 그렇지만 돌아와서 그가 경험한 것은 후금이나 명에서의 삶보다 더 열악하고 고통스런 삶이었다. 영철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는 건주든 등주든 정착해서 잘 살고 있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언어와 문화가 낯설어 불편한 점도 있었겠지만 차츰 익숙해졌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부모와 조부모를 봉양하고,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라고 믿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동시에 처자식을 부양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함께 살아가는 것도 필부의 당연한 삶이었다. 두 영역이 충돌한다면 어떤 것을 중심에 두고 선택해야 할까?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한 가지가 충족되었을 때 실현되지 못한 다른 한 가지는 마음의 공백을 가져오고, 부족한 곳을 향해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영철의 회한은 건주나 등주에 남았든, 조선에 돌아왔든 결코 해소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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