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기원전 99년 한무제는 흉노 전쟁을 계획하면서 이사장군 이광리와 인우장군 공손오를 중심으로 군대를 편제했다. 이릉은 이사장군의 수송 부대에 배속되었지만, 5천 보병을 이끌고 선우를 공격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무제에게 제안하고 허락을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우의 군대에 포위되어 죽을 각오로 싸웠지만, 결국 포로가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릉이 전쟁의 패배와 함께 죽지 않고 항복했다는 사실을 듣고 놀란다. 얼마 전 이릉이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을 때는 이릉을 칭찬했으나 패배와 항복 소식에는 이릉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때 이릉의 행동을 옹호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전본문
1.
이릉이 항복한 곳은 변경으로부터 백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변경 요새에서 황제에게 패배 소식을 보고했다. 황제는 이릉이 전사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릉의 어머니와 부인을 부른 뒤에 관상가를 시켜 그들의 관상을 보게 했다. 그러나 이릉이 사망했다는 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뒤에 이릉이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자 황제가 아주 심하게 노하여 이릉을 칭찬했던 진보락을 질책했다. 진보락은 자결했다. 신하들이 모두 이릉에게 죄가 있다고 하자 황제가 태사령 사마천에 물어보았다. 사마천이 이릉을 적극 변호했다.
“이릉은 부모를 효로 섬겼고 선비와 신의로 교류했으며, 언제나 떨쳐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급한 일을 해결하려고 애썼습니다. 평소에 품덕을 쌓았으니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의 풍모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투에 나가 한번 패하자 자신과 식구들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신하들이 제멋대로 이릉의 패배를 부풀리고 있는데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릉은 오천이 못 되는 보병을 데리고 전마의 기량이 우세한 흉노 땅에 깊이 들어가 흉노 기병 수만 명을 짓밟고 눌렀으나, 적군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돌볼 겨를도 없이 활시위를 당길 줄 아는 자들이면 모두 동원되어 이릉의 군대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천 리의 각지를 옮겨 다니며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길이 막히자 군사들은 활과 쇠뇌의 시위에 겨눌 화살이 없는 채로 시퍼런 칼날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래도 후퇴하지 않고 북쪽에 있는 적과 사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릉의 지휘로 군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비록 옛적의 명장이라 할지라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릉이 비록 패배를 당했다고는 하나, 그 전까지 흉노의 수많은 병력을 격파시킨 것은 천하에 드러내어 표창할 만한 일입니다. 이자가 죽지 않았으니 적당한 시기가 오면 공을 세워 자신의 죄를 씻고 한나라 조정에 보답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는 애초에 이사장군으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고 이릉은 이사장군의 보조 역할이나 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릉이 선우의 군대와 맞닥뜨려 싸웠기 때문에 이사장군은 공을 별로 세우지 못했다. 황제가 모함과 비방으로 이사장군을 헐뜯고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사마천을 궁형으로 다스렸다.
<한서-이광·소건전>중에서
2.
이리하여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뒤 [나]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당하여 감옥에 갇혔다. 나는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은 망가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구나!”라며 깊이 깊이 탄식했다. 그러나 물러나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시』나 『서』의 뜻이 함축적인 것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표출하고 싶어서였다. 문왕은 갇힌 상태에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곤경에 빠져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쫓겨나서 『이소』를 썼고, 좌구명은 눈을 잃은 뒤에 『국어』를 지었다. 손빈은 발이 잘리는 빈각이란 형벌을 당하고도 『병법』을 남겼으며, 여불위는 촉으로 쫓겨났지만 세상에 『여람』을 남겼다.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혀서 「세난」과 「고분」편을 저술했다. 『시경』 300편의 시들도 대개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그 무엇이 맺혀 있었지만 그것을 밝힐 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일을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사기-태사공자서> 중에서
토론하기
1. 사마천이 이릉을 옹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2. 어느 날 갑자기 치욕스러운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자결이나 은거를 택하지 않고, <사기>를 쓰는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3. 자신이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기원전 99년 흉노 정벌에서 이사장군 이광리의 군대에 물자를 수송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던 이릉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이릉은 5천 보병을 가지고 고비 사막 깊숙이 진군하겠다는 무리한 출정계획을 세워 한무제에게 출정을 요청했다. 애초 무리한 계획이었지만, 실패해 5천 보병을 잃는 것이 큰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무제는 이릉의 부탁을 들어준다.
이릉은 부대를 이끌고 흉노의 본진 근처까지 침투해 싸우고 본진의 전투를 위해 중요한 정보도 한나라에 보내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그러나 흉노 선우가 이끄는 3만 기병에게 포위되고, 무기도 없이 계곡으로 숨어들면서 결국 패배한다.
패배는 어찌 보면 자명한 일이었다. 그동안의 승리와 성과가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 전쟁의 주력 군대인 이사장군 이광리의 대군도 참패했는데, 5천 보병의 작은 부대인 이능의 군대가 승리를 얻어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패배 소식이 곧 한나라 조정에 전해졌다. 무제는 이릉의 부대는 패배했지만 선전했다고 여겼을 터이고, 이릉은 전사하거나 자결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들려온 소식은 이릉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무제가 이릉이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왜일까? 패배한 장수가 자결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것일 꼭 불문율은 아니었다. 패배의 분심을 이용해 이후 더 큰 승리가 기대되기도 한다. 이릉 자신이 자원하여 무리한 계획을 실행했지만, 한무제는 이릉의 출정 즈음에 노박덕이라는 사람의 편지 때문에 이릉을 오해하여 그의 부대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 거린 것일 수 있다. 자신이 돕지 않아 패배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이릉이 자기에게 원한을 가질지 모른다는 얄팍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여하튼 한무제는 크게 노하였고, 주위의 신하들도 모두 이릉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릉의 부대가 선전하고 또 흉노의 정보를 탐문해 보냈을 때에는 이릉을 추켜세우던 사람들이었다.
이때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간 5천의 보병으로 고군분투한 이릉의 성과와 노고를 생각한다면 비록 패했더라도 표창할 일이며, 포로로 잡혀있더라도 고국을 위해 뭔가 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무제를 비롯해 모든 이들이 놀랐다. 한나라 조정에서 입으로만 싸우고 있던 이들은 뭔가 궁색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이릉을 위한 변호는 이릉에 앞서 수만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출정해 성과를 내지 못한 이광리에 대한 모함으로 간주되고, 한무제는 그를 무망(誣罔)죄로 다스리고 부형에 명했다. 그는 바로 동아시아 역사서의 백미인 <사기>를 쓴 사마천이다.
부형은 궁형으로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치욕스러운 형벌이다. 옛날 중국에서 신체에 해를 입히던 형별로는 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경(黥)이나 묵(墨), 발꿈치를 자르는 비(剕), 코를 베는 의(劓), 생식기를 자르는 궁(宮)이 있었다. 앞의 세 개는 한무제의 조부인 한문제 때 폐지되었으나, 궁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어떻게 그 모욕감을 견딜 수 있었을까?
당시는 사마천이 40대 후반의 나이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사기> 편찬에 착수한지 5-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무자비한 일이 자신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다. 적어도 조정에 앉아서 오랑캐 땅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싸우다가 패전한 장수와 병사들을 가볍게 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릉을 변호한 것뿐인데, 그 결과는 결코 헤쳐 나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자결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치욕을 안고 죽을 것인가, 살아갈 것인가? 산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한동안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지만, 사마천에게는 역사를 짓는 일이 필생의 과제였다. 아버지가 남긴 말씀이 있어서 매진하기는 했지만, 가야할 길이 멀었다. 그렇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고, 한창 논술의 묘미에 빠져있었을 터이다. 이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이것에 이 일에 의지한다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더 이상 현실의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정을 나누며 살아갈 수 없다면, 역사 속의 인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그들과 그들의 사건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기>는 사마천이 궁형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서 쓴 책이며, 동시에 쓰고 또 쓰다 보니 살아남은 자신을 발견하게 해 준 책이었을 것이다.
키워드
사기, 사마천, 이릉, 한무제, 흉노
전후맥락
기원전 99년 한무제는 흉노 전쟁을 계획하면서 이사장군 이광리와 인우장군 공손오를 중심으로 군대를 편제했다. 이릉은 이사장군의 수송 부대에 배속되었지만, 5천 보병을 이끌고 선우를 공격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무제에게 제안하고 허락을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우의 군대에 포위되어 죽을 각오로 싸웠지만, 결국 포로가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릉이 전쟁의 패배와 함께 죽지 않고 항복했다는 사실을 듣고 놀란다. 얼마 전 이릉이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을 때는 이릉을 칭찬했으나 패배와 항복 소식에는 이릉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때 이릉의 행동을 옹호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전본문
1.
이릉이 항복한 곳은 변경으로부터 백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변경 요새에서 황제에게 패배 소식을 보고했다. 황제는 이릉이 전사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릉의 어머니와 부인을 부른 뒤에 관상가를 시켜 그들의 관상을 보게 했다. 그러나 이릉이 사망했다는 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뒤에 이릉이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자 황제가 아주 심하게 노하여 이릉을 칭찬했던 진보락을 질책했다. 진보락은 자결했다. 신하들이 모두 이릉에게 죄가 있다고 하자 황제가 태사령 사마천에 물어보았다. 사마천이 이릉을 적극 변호했다.
“이릉은 부모를 효로 섬겼고 선비와 신의로 교류했으며, 언제나 떨쳐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급한 일을 해결하려고 애썼습니다. 평소에 품덕을 쌓았으니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의 풍모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투에 나가 한번 패하자 자신과 식구들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신하들이 제멋대로 이릉의 패배를 부풀리고 있는데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릉은 오천이 못 되는 보병을 데리고 전마의 기량이 우세한 흉노 땅에 깊이 들어가 흉노 기병 수만 명을 짓밟고 눌렀으나, 적군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돌볼 겨를도 없이 활시위를 당길 줄 아는 자들이면 모두 동원되어 이릉의 군대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천 리의 각지를 옮겨 다니며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길이 막히자 군사들은 활과 쇠뇌의 시위에 겨눌 화살이 없는 채로 시퍼런 칼날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래도 후퇴하지 않고 북쪽에 있는 적과 사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릉의 지휘로 군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비록 옛적의 명장이라 할지라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릉이 비록 패배를 당했다고는 하나, 그 전까지 흉노의 수많은 병력을 격파시킨 것은 천하에 드러내어 표창할 만한 일입니다. 이자가 죽지 않았으니 적당한 시기가 오면 공을 세워 자신의 죄를 씻고 한나라 조정에 보답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는 애초에 이사장군으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고 이릉은 이사장군의 보조 역할이나 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릉이 선우의 군대와 맞닥뜨려 싸웠기 때문에 이사장군은 공을 별로 세우지 못했다. 황제가 모함과 비방으로 이사장군을 헐뜯고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사마천을 궁형으로 다스렸다.
<한서-이광·소건전>중에서
2.
이리하여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뒤 [나]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당하여 감옥에 갇혔다. 나는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은 망가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구나!”라며 깊이 깊이 탄식했다. 그러나 물러나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시』나 『서』의 뜻이 함축적인 것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표출하고 싶어서였다. 문왕은 갇힌 상태에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곤경에 빠져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쫓겨나서 『이소』를 썼고, 좌구명은 눈을 잃은 뒤에 『국어』를 지었다. 손빈은 발이 잘리는 빈각이란 형벌을 당하고도 『병법』을 남겼으며, 여불위는 촉으로 쫓겨났지만 세상에 『여람』을 남겼다.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혀서 「세난」과 「고분」편을 저술했다. 『시경』 300편의 시들도 대개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그 무엇이 맺혀 있었지만 그것을 밝힐 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일을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사기-태사공자서> 중에서
토론하기
1. 사마천이 이릉을 옹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2. 어느 날 갑자기 치욕스러운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자결이나 은거를 택하지 않고, <사기>를 쓰는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3. 자신이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기원전 99년 흉노 정벌에서 이사장군 이광리의 군대에 물자를 수송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던 이릉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이릉은 5천 보병을 가지고 고비 사막 깊숙이 진군하겠다는 무리한 출정계획을 세워 한무제에게 출정을 요청했다. 애초 무리한 계획이었지만, 실패해 5천 보병을 잃는 것이 큰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무제는 이릉의 부탁을 들어준다.
이릉은 부대를 이끌고 흉노의 본진 근처까지 침투해 싸우고 본진의 전투를 위해 중요한 정보도 한나라에 보내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그러나 흉노 선우가 이끄는 3만 기병에게 포위되고, 무기도 없이 계곡으로 숨어들면서 결국 패배한다.
패배는 어찌 보면 자명한 일이었다. 그동안의 승리와 성과가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 전쟁의 주력 군대인 이사장군 이광리의 대군도 참패했는데, 5천 보병의 작은 부대인 이능의 군대가 승리를 얻어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패배 소식이 곧 한나라 조정에 전해졌다. 무제는 이릉의 부대는 패배했지만 선전했다고 여겼을 터이고, 이릉은 전사하거나 자결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들려온 소식은 이릉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무제가 이릉이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왜일까? 패배한 장수가 자결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것일 꼭 불문율은 아니었다. 패배의 분심을 이용해 이후 더 큰 승리가 기대되기도 한다. 이릉 자신이 자원하여 무리한 계획을 실행했지만, 한무제는 이릉의 출정 즈음에 노박덕이라는 사람의 편지 때문에 이릉을 오해하여 그의 부대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 거린 것일 수 있다. 자신이 돕지 않아 패배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이릉이 자기에게 원한을 가질지 모른다는 얄팍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여하튼 한무제는 크게 노하였고, 주위의 신하들도 모두 이릉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릉의 부대가 선전하고 또 흉노의 정보를 탐문해 보냈을 때에는 이릉을 추켜세우던 사람들이었다.
이때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간 5천의 보병으로 고군분투한 이릉의 성과와 노고를 생각한다면 비록 패했더라도 표창할 일이며, 포로로 잡혀있더라도 고국을 위해 뭔가 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무제를 비롯해 모든 이들이 놀랐다. 한나라 조정에서 입으로만 싸우고 있던 이들은 뭔가 궁색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이릉을 위한 변호는 이릉에 앞서 수만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출정해 성과를 내지 못한 이광리에 대한 모함으로 간주되고, 한무제는 그를 무망(誣罔)죄로 다스리고 부형에 명했다. 그는 바로 동아시아 역사서의 백미인 <사기>를 쓴 사마천이다.
부형은 궁형으로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치욕스러운 형벌이다. 옛날 중국에서 신체에 해를 입히던 형별로는 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경(黥)이나 묵(墨), 발꿈치를 자르는 비(剕), 코를 베는 의(劓), 생식기를 자르는 궁(宮)이 있었다. 앞의 세 개는 한무제의 조부인 한문제 때 폐지되었으나, 궁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어떻게 그 모욕감을 견딜 수 있었을까?
당시는 사마천이 40대 후반의 나이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사기> 편찬에 착수한지 5-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무자비한 일이 자신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다. 적어도 조정에 앉아서 오랑캐 땅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싸우다가 패전한 장수와 병사들을 가볍게 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릉을 변호한 것뿐인데, 그 결과는 결코 헤쳐 나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자결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치욕을 안고 죽을 것인가, 살아갈 것인가? 산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한동안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지만, 사마천에게는 역사를 짓는 일이 필생의 과제였다. 아버지가 남긴 말씀이 있어서 매진하기는 했지만, 가야할 길이 멀었다. 그렇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고, 한창 논술의 묘미에 빠져있었을 터이다. 이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이것에 이 일에 의지한다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더 이상 현실의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정을 나누며 살아갈 수 없다면, 역사 속의 인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그들과 그들의 사건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기>는 사마천이 궁형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서 쓴 책이며, 동시에 쓰고 또 쓰다 보니 살아남은 자신을 발견하게 해 준 책이었을 것이다.
키워드
사기, 사마천, 이릉, 한무제, 흉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