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이 글은 저자가 조카의 부고를 전해 듣고 쓴 제문(祭文)이다. 글에서 조카 한노성(韓老成)을 ‘십이랑(十二郞)’이라 칭한 것은 그의 항렬이 열두 번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형수의 손에 자랐는데, 조카 역시 여러 사정으로 저자와 함께 크면서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이 글에는 눈앞의 현실에 급급해 조카와 함께 지내는 것을 계속 미룬 것에 대한 자책과 회환, 젊은 사람이 갑자기 요절한 것에 대한 애통함이 드러나며, 앞으로 현실에 급급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겠다는 다짐을 진솔하게 서술했다. 조카에게 직접 말하는 듯한 문체와 자유로운 형식 속에 진실한 감정이 전해지는 천고의 명편이다.
고전본문
모년 모월 모일, 막내 숙부인 나는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칠일 만에야 슬픔을 머금고 정성을 들여 건중(建中)을 시켜 멀리서 제철 음식을 구해 제물을 갖추어 너 십이랑(十二郞)의 영령에 고하노라.
(… 중략 …)
나는 네가 동쪽 지역에서 나와 함께 지내도 그곳 역시 객지인지라 어차피 오래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기 계획을 세우려면 서쪽 지역으로 돌아가 가정을 이룬 다음에 너를 불러오는 것만한 방법이 없었지. 아아! 누가 알았겠느냐! 네가 갑자기 나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리라고! 나와 네가 모두 어려 비록 잠시 떨어져 있기는 해도 결국에는 분명히 오래도록 같이 지낼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너를 버리고 장안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얼마 되지도 않는 봉록을 구했지. 진정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수레 만 대의 큰 봉록을 누리는 공(公)이나 재상 자리라 할지라도 하루도 너를 버리고 그것을 차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중략 …)
누가 알았으랴, 젊은이가 죽고 나이 든 사람이 살며, 건강한 사람이 요절하고 병자가 온전할 줄을! 아아! 이것이 사실인가, 꿈인가? 혹시 전해 온 소식이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닌가? 사실이라면, 우리 형님은 덕이 그렇게 큰데도 후사를 요절케 하셨다는 말인가? 너는 그렇게 순수하고 총명한데도 은택을 입지 못했단 말인가? 젊고 건강한 사람은 요절하고 나이 먹고 쇠약한 사람이 온전하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구나. 꿈이라면, 전해온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맹동야(孟東野)의 편지와 경란(耿蘭)이 전한 소식이 어찌하여 내 곁에 있단 말인가? 아아! 사실이구나. 우리 형님은 덕이 그리 큰데도 그 후사를 요절케 하셨구나! 너처럼 그렇게 순수하고 총명하여 마땅히 가업을 이어야 할 사람이 그 은택을 입을 수가 없었구나! 하늘이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고, 신이란 진정 이해하기 어렵구나! 이치라는 것도 추측하기 어렵고, 수명이란 것도 알 수가 없구나!
(… 중략 …)
이제부터 나는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몇 평의 밭을 이수(伊水)와 영수(潁水) 가에 구하여 내 여생을 보내면서 내 자식과 네 자식을 가르쳐 잘 크기를 바라고, 내 딸과 네 딸을 길러 시집가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뿐이다. 아아! 말은 마쳤으나 슬픔은 끝이 없구나.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 中에서
토론하기
(1) 이 글에서 조카의 죽음으로 인해 저자는 삶의 자세를 바꾸어 ‘이제부터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저자가 이러한 다짐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2)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가치인가?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해설읽기
저자와 조카는 어린 시절을 서로 의지하며 함께 보낸 각별한 사이다. 그러나 장성한 후에는 두 사람이 잠시 같이 지낸 시기도 있으나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 마음처럼 오래 같이 지낼 수는 없었다. 저자는 언젠가 조카를 거두어 함께 지내리라 기약하고 있던 중 맹동야(孟東野)의 편지와 경란(耿蘭)의 보고를 통해 갑작스럽게 조카의 부고를 전해 듣는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저자는 ‘진정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수레 만 대의 큰 봉록을 누리는 공(公)이나 재상 자리라 할지라도 하루도 너를 버리고 그것을 차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하며 후회한다.
이러한 후회와 자책은 글의 마지막에 쓴 앞으로의 각오로 이어진다. 저자는 망자에게 고백하는 듯한 태도로 앞으로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에는 인생에서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저자가 처한 상황에서 관직과 봉록으로 대별되는 사회적 성취와 사랑하는 조카와 함께 지내는 것은 동시에 취할 수 없는 것이었고, 저자는 전자를 먼저, 후자를 나중에 취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조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중에 취하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더 귀하고 중요한 가치였으며, 먼저 취한 것들은 후자를 취하지 못한다면 결국 무의미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을 등지고 살겠다는 말이 아니라 세속적 현달에 급급하기보다는 앞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내 자식과 네 자식을 가르쳐 잘 크기를 바라고, 내 딸과 네 딸을 길러 시집가기를 기다릴 것이다.’라고 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숙명인 죽음을 직시할 때 당장의 이익보다 사랑과 같은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로 다가온다.
전후맥락
이 글은 저자가 조카의 부고를 전해 듣고 쓴 제문(祭文)이다. 글에서 조카 한노성(韓老成)을 ‘십이랑(十二郞)’이라 칭한 것은 그의 항렬이 열두 번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형수의 손에 자랐는데, 조카 역시 여러 사정으로 저자와 함께 크면서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이 글에는 눈앞의 현실에 급급해 조카와 함께 지내는 것을 계속 미룬 것에 대한 자책과 회환, 젊은 사람이 갑자기 요절한 것에 대한 애통함이 드러나며, 앞으로 현실에 급급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겠다는 다짐을 진솔하게 서술했다. 조카에게 직접 말하는 듯한 문체와 자유로운 형식 속에 진실한 감정이 전해지는 천고의 명편이다.
고전본문
모년 모월 모일, 막내 숙부인 나는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칠일 만에야 슬픔을 머금고 정성을 들여 건중(建中)을 시켜 멀리서 제철 음식을 구해 제물을 갖추어 너 십이랑(十二郞)의 영령에 고하노라.
(… 중략 …)
나는 네가 동쪽 지역에서 나와 함께 지내도 그곳 역시 객지인지라 어차피 오래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기 계획을 세우려면 서쪽 지역으로 돌아가 가정을 이룬 다음에 너를 불러오는 것만한 방법이 없었지. 아아! 누가 알았겠느냐! 네가 갑자기 나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리라고! 나와 네가 모두 어려 비록 잠시 떨어져 있기는 해도 결국에는 분명히 오래도록 같이 지낼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너를 버리고 장안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얼마 되지도 않는 봉록을 구했지. 진정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수레 만 대의 큰 봉록을 누리는 공(公)이나 재상 자리라 할지라도 하루도 너를 버리고 그것을 차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중략 …)
누가 알았으랴, 젊은이가 죽고 나이 든 사람이 살며, 건강한 사람이 요절하고 병자가 온전할 줄을! 아아! 이것이 사실인가, 꿈인가? 혹시 전해 온 소식이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닌가? 사실이라면, 우리 형님은 덕이 그렇게 큰데도 후사를 요절케 하셨다는 말인가? 너는 그렇게 순수하고 총명한데도 은택을 입지 못했단 말인가? 젊고 건강한 사람은 요절하고 나이 먹고 쇠약한 사람이 온전하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구나. 꿈이라면, 전해온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맹동야(孟東野)의 편지와 경란(耿蘭)이 전한 소식이 어찌하여 내 곁에 있단 말인가? 아아! 사실이구나. 우리 형님은 덕이 그리 큰데도 그 후사를 요절케 하셨구나! 너처럼 그렇게 순수하고 총명하여 마땅히 가업을 이어야 할 사람이 그 은택을 입을 수가 없었구나! 하늘이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고, 신이란 진정 이해하기 어렵구나! 이치라는 것도 추측하기 어렵고, 수명이란 것도 알 수가 없구나!
(… 중략 …)
이제부터 나는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몇 평의 밭을 이수(伊水)와 영수(潁水) 가에 구하여 내 여생을 보내면서 내 자식과 네 자식을 가르쳐 잘 크기를 바라고, 내 딸과 네 딸을 길러 시집가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뿐이다. 아아! 말은 마쳤으나 슬픔은 끝이 없구나.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 中에서
토론하기
(1) 이 글에서 조카의 죽음으로 인해 저자는 삶의 자세를 바꾸어 ‘이제부터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저자가 이러한 다짐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2)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가치인가?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해설읽기
저자와 조카는 어린 시절을 서로 의지하며 함께 보낸 각별한 사이다. 그러나 장성한 후에는 두 사람이 잠시 같이 지낸 시기도 있으나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 마음처럼 오래 같이 지낼 수는 없었다. 저자는 언젠가 조카를 거두어 함께 지내리라 기약하고 있던 중 맹동야(孟東野)의 편지와 경란(耿蘭)의 보고를 통해 갑작스럽게 조카의 부고를 전해 듣는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저자는 ‘진정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수레 만 대의 큰 봉록을 누리는 공(公)이나 재상 자리라 할지라도 하루도 너를 버리고 그것을 차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하며 후회한다.
이러한 후회와 자책은 글의 마지막에 쓴 앞으로의 각오로 이어진다. 저자는 망자에게 고백하는 듯한 태도로 앞으로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에는 인생에서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저자가 처한 상황에서 관직과 봉록으로 대별되는 사회적 성취와 사랑하는 조카와 함께 지내는 것은 동시에 취할 수 없는 것이었고, 저자는 전자를 먼저, 후자를 나중에 취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조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중에 취하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더 귀하고 중요한 가치였으며, 먼저 취한 것들은 후자를 취하지 못한다면 결국 무의미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을 등지고 살겠다는 말이 아니라 세속적 현달에 급급하기보다는 앞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내 자식과 네 자식을 가르쳐 잘 크기를 바라고, 내 딸과 네 딸을 길러 시집가기를 기다릴 것이다.’라고 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숙명인 죽음을 직시할 때 당장의 이익보다 사랑과 같은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