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저자는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 나무 심는 곽탁타의 전기)에서 나무를 재배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곽탁타의 이야기를 빌려 번잡한 정책으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관리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글의 중심적인 내용은 나무를 잘 기르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대한 곽탁타의 대답이다. 곽탁타의 말을 통해 저자는 백성을 돌보는 일을 나무 심는 기술에 빗대어 지나친 집착과 성급함이 나무를 망치듯 과도한 간섭이 백성들의 삶을 망치며, 그 본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둘 때 나무는 잘 자라고 열매를 많이 맺으며 백성들은 풍요롭게 지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글은 803년부터 805년까지 저자가 감찰어사로서 각지의 지방관들의 행정을 감사했던 시기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 곽탁타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개진하기 위해 창조한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고전본문
탁타는 나무 심는 것을 직업으로 하여 모든 장안의 부호가들 중에 관상용으로 심거나 또는 과실을 팔기 위한 자들이 모두 다투어 그에게 나무를 길러달라고 모셔 갔다. 탁타가 심은 것이나 옮겨 심은 것을 보면 나무가 죽는 경우가 없었고, 크고 무성하며 일찍 열매 맺고 번성하였다. 타인 중에 나무를 심는 자들이 비록 엿보고 사모해 본받았으나 그처럼 하지는 못했다.
누군가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나무가 오래 살고 열매를 많이 맺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무의 천성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성정을 다하게 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심어진 나무의 천성은 그 뿌리는 편안히 뻗기를 바라고, 뿌리 주위를 북돋은 흙은 평평하기를 바라고, 그 흙은 오래된 것이기를 바라며, 흙을 다지는 것은 야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 준 다음에는 움직이지도 걱정하지도 말고, 가서는 다시 뒤돌아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심을 때는 자식 돌보듯 하고 놓아둘 때에는 버리듯이 해야 그 천성이 온전해지고 본성이 얻어집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자라는 것을 해치지 않을 뿐이요, 능히 크고 무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열매를 맺히지 못하게 억제하거나 훼손하지 않을 뿐이요, 일찍 열리고 많이 열리게 할 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은 그렇지 않으니, 뿌리가 구부러지게 하고 흙이 바뀌게 하며, 북돋움은 만일 과하지 않으면 모자랍니다. 만약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무를 사랑함이 대단히 크고, 걱정함이 너무 부지런하여 아침에 보고 저녁에 만지고 자리를 뜬 후에 다시 또 돌아봅니다. 심한 자는 껍질에 손톱자국을 내어 그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시험하고, 그 뿌리를 흔들어서 다짐이 성근지 빽빽한지 살펴보아 나무의 천성이 날마다 사라지게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것을 해치는 것이고, 걱정한다고 하지만 실은 원수로 대하는 것입니다.
[출전]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
토론하기
(1) ‘나’를 나무에 빗대어 보자. 나는 본래의 본성이 온전하게 발현된, 울창한 아름드리나무인가, 아니면 본성이 억눌려 가지가 꺾이고 시들어버린 나무인가? 나를 가꿀 책임이 있는, 행동하는 나를 정원사에 빗대어 보자. 나는 곽탁타가 한 것처럼 나를 키워 왔는가, 아니면 곽탁타가 말한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이 한 것처럼 나를 키워 왔는가?
(2)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이 나무를 아침에 보고 저녁에 만지고 자리를 뜬 후에 다시 또 돌아보는 것은 지나친 염려와 집착이고, 껍질에 손톱자국을 내어 그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시험하고, 그 뿌리를 흔들어서 다짐이 성근지 빽빽한지 살펴보는 것은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함이다. 삶의 목표를 향해 정진할 때 이러한 태도와 곽탁타의 태도 중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될까? 나는 어떤 태도를 갖고 싶은가?
해설읽기
이 글은 본래 작자 유종원이 잘못된 나무 기르는 방법을 가지고 잘못된 정책을 비난하려고 쓴 것이다. 곽탁타에게 나무 기르는 비결을 물었던 사람은 이 글의 후반부에서 다시 “그대의 방법을 관청의 다스림에 옮기는 것이 가하겠는가?”라고 묻고, 곽탁타는 나무와 나무 심는 사람의 관계를 백성과 관리에 적용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관리들의 행태를 풍자한다. 글은 이러한 곽탁타의 말을 관원의 경계로 삼았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이 글에 나오는 나무 심는 비결은 백성을 다스리는 일 외에도 사회의 여러 관계에 적용해 볼 수도 있다. 특히 부모의 자녀 양육법, 교사의 지도법 등에 적용하여 자녀나 학생들이 본성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지 지나치게 간섭하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는 깨우침을 줄 수 있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누군가를 키우고 보살피는 입장보다는 양육이나 교육의 대상이 되는 일이 더 일반적이므로 이 글이 주는 깨우침이 금방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학생들이 자신을 위정자나 부모, 교사의 입장으로 설정해 볼 수도 있지만, 내가 주체가 되어 키우고 보살피는 대상으로 ‘나’ 자신을 나무에 빗대어 봄으로써 이 글을 더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다듬어 나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는 정상적인 사회화 혹은 교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나치게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억제하는 경우도 많다. 나무의 가지를 꺾고 뿌리를 끊는 것처럼 이는 자신의 성장을 저해하는 일이다. 혹은 자기 자신은 본성이 발현되도록 북돋워 주고 싶어도 주변 사람이나 미디어 환경이 이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혐오에 빠진다. 자신이 선망하는 주변 사람을 모방하거나, 미디어에서 접한 우상을 좇아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청소년기에는 아직 자아가 확고하게 자리 잡지 않은 시기여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학생들은 이 글을 통해 나를 가꿀 책임이 있는, 행동하는 나를 정원사에 빗대어 보고, 내가 ‘나’라는 나무를 어떻게 가꾸어 왔는지 돌아볼 수 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억누르거나 감추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던 학생들도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져 보고 앞으로의 삶의 태도를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은 나무가 잘 자라는지 지나치게 집착하고 빨리 과실을 열리기를 바라며 조급한 마음에 오히려 나무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데 이는 나무가 잘 자라기를 바라고 결실이 빨리 맺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바람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올바른 과정에 대한 탐구 없이 성과에만 목맨다면 결국 과정을 그르쳐 성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편에는 곡식이 빨리 자다도록 하려고 싹을 뽑아 올렸다가 도리어 모두 말라 죽게 했다는 농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빨리 가려고 서두르면 오히려 도달하지 못한다는 교훈은 목표를 간절히 원할수록 더더욱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되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관조하고 기다리는 일도 필요하다. 곽탁타는 나무를 심을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 후에는 내버려 둔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해 준 다음에는 움직이지도 걱정하지도 말고, 가서는 다시 뒤돌아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심을 때는 자식 돌보듯 하고 놓아둘 때에는 버리듯이 해야 그 천성이 온전해지고 본성이 얻어집니다.” 목표를 향해 정진할 때 ‘다른 나무 심는 자들’처럼 부지런하게 수고하는 것보다 곽탁타처럼 걱정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렵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조급함과 집착은 쉽고, 관조와 기다림은 어렵다.
개인에게 점점 더 빠른 성과를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조급함’은 ‘열심’으로, ‘집착’은 ‘적극성’으로 쉽게 둔갑한다. 관조와 기다림의 미덕을 잃어버리기 쉬운 지금, 학생들은 이 글을 통해 각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을 재정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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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맥락
저자는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 나무 심는 곽탁타의 전기)에서 나무를 재배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곽탁타의 이야기를 빌려 번잡한 정책으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관리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글의 중심적인 내용은 나무를 잘 기르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대한 곽탁타의 대답이다. 곽탁타의 말을 통해 저자는 백성을 돌보는 일을 나무 심는 기술에 빗대어 지나친 집착과 성급함이 나무를 망치듯 과도한 간섭이 백성들의 삶을 망치며, 그 본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둘 때 나무는 잘 자라고 열매를 많이 맺으며 백성들은 풍요롭게 지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글은 803년부터 805년까지 저자가 감찰어사로서 각지의 지방관들의 행정을 감사했던 시기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 곽탁타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개진하기 위해 창조한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고전본문
탁타는 나무 심는 것을 직업으로 하여 모든 장안의 부호가들 중에 관상용으로 심거나 또는 과실을 팔기 위한 자들이 모두 다투어 그에게 나무를 길러달라고 모셔 갔다. 탁타가 심은 것이나 옮겨 심은 것을 보면 나무가 죽는 경우가 없었고, 크고 무성하며 일찍 열매 맺고 번성하였다. 타인 중에 나무를 심는 자들이 비록 엿보고 사모해 본받았으나 그처럼 하지는 못했다.
누군가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나무가 오래 살고 열매를 많이 맺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무의 천성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성정을 다하게 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심어진 나무의 천성은 그 뿌리는 편안히 뻗기를 바라고, 뿌리 주위를 북돋은 흙은 평평하기를 바라고, 그 흙은 오래된 것이기를 바라며, 흙을 다지는 것은 야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 준 다음에는 움직이지도 걱정하지도 말고, 가서는 다시 뒤돌아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심을 때는 자식 돌보듯 하고 놓아둘 때에는 버리듯이 해야 그 천성이 온전해지고 본성이 얻어집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자라는 것을 해치지 않을 뿐이요, 능히 크고 무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열매를 맺히지 못하게 억제하거나 훼손하지 않을 뿐이요, 일찍 열리고 많이 열리게 할 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은 그렇지 않으니, 뿌리가 구부러지게 하고 흙이 바뀌게 하며, 북돋움은 만일 과하지 않으면 모자랍니다. 만약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무를 사랑함이 대단히 크고, 걱정함이 너무 부지런하여 아침에 보고 저녁에 만지고 자리를 뜬 후에 다시 또 돌아봅니다. 심한 자는 껍질에 손톱자국을 내어 그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시험하고, 그 뿌리를 흔들어서 다짐이 성근지 빽빽한지 살펴보아 나무의 천성이 날마다 사라지게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것을 해치는 것이고, 걱정한다고 하지만 실은 원수로 대하는 것입니다.
[출전]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
토론하기
(1) ‘나’를 나무에 빗대어 보자. 나는 본래의 본성이 온전하게 발현된, 울창한 아름드리나무인가, 아니면 본성이 억눌려 가지가 꺾이고 시들어버린 나무인가? 나를 가꿀 책임이 있는, 행동하는 나를 정원사에 빗대어 보자. 나는 곽탁타가 한 것처럼 나를 키워 왔는가, 아니면 곽탁타가 말한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이 한 것처럼 나를 키워 왔는가?
(2)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이 나무를 아침에 보고 저녁에 만지고 자리를 뜬 후에 다시 또 돌아보는 것은 지나친 염려와 집착이고, 껍질에 손톱자국을 내어 그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시험하고, 그 뿌리를 흔들어서 다짐이 성근지 빽빽한지 살펴보는 것은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함이다. 삶의 목표를 향해 정진할 때 이러한 태도와 곽탁타의 태도 중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될까? 나는 어떤 태도를 갖고 싶은가?
해설읽기
이 글은 본래 작자 유종원이 잘못된 나무 기르는 방법을 가지고 잘못된 정책을 비난하려고 쓴 것이다. 곽탁타에게 나무 기르는 비결을 물었던 사람은 이 글의 후반부에서 다시 “그대의 방법을 관청의 다스림에 옮기는 것이 가하겠는가?”라고 묻고, 곽탁타는 나무와 나무 심는 사람의 관계를 백성과 관리에 적용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관리들의 행태를 풍자한다. 글은 이러한 곽탁타의 말을 관원의 경계로 삼았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이 글에 나오는 나무 심는 비결은 백성을 다스리는 일 외에도 사회의 여러 관계에 적용해 볼 수도 있다. 특히 부모의 자녀 양육법, 교사의 지도법 등에 적용하여 자녀나 학생들이 본성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지 지나치게 간섭하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는 깨우침을 줄 수 있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누군가를 키우고 보살피는 입장보다는 양육이나 교육의 대상이 되는 일이 더 일반적이므로 이 글이 주는 깨우침이 금방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학생들이 자신을 위정자나 부모, 교사의 입장으로 설정해 볼 수도 있지만, 내가 주체가 되어 키우고 보살피는 대상으로 ‘나’ 자신을 나무에 빗대어 봄으로써 이 글을 더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다듬어 나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는 정상적인 사회화 혹은 교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나치게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억제하는 경우도 많다. 나무의 가지를 꺾고 뿌리를 끊는 것처럼 이는 자신의 성장을 저해하는 일이다. 혹은 자기 자신은 본성이 발현되도록 북돋워 주고 싶어도 주변 사람이나 미디어 환경이 이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혐오에 빠진다. 자신이 선망하는 주변 사람을 모방하거나, 미디어에서 접한 우상을 좇아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청소년기에는 아직 자아가 확고하게 자리 잡지 않은 시기여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학생들은 이 글을 통해 나를 가꿀 책임이 있는, 행동하는 나를 정원사에 빗대어 보고, 내가 ‘나’라는 나무를 어떻게 가꾸어 왔는지 돌아볼 수 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억누르거나 감추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던 학생들도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져 보고 앞으로의 삶의 태도를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은 나무가 잘 자라는지 지나치게 집착하고 빨리 과실을 열리기를 바라며 조급한 마음에 오히려 나무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데 이는 나무가 잘 자라기를 바라고 결실이 빨리 맺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바람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올바른 과정에 대한 탐구 없이 성과에만 목맨다면 결국 과정을 그르쳐 성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편에는 곡식이 빨리 자다도록 하려고 싹을 뽑아 올렸다가 도리어 모두 말라 죽게 했다는 농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빨리 가려고 서두르면 오히려 도달하지 못한다는 교훈은 목표를 간절히 원할수록 더더욱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되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관조하고 기다리는 일도 필요하다. 곽탁타는 나무를 심을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 후에는 내버려 둔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해 준 다음에는 움직이지도 걱정하지도 말고, 가서는 다시 뒤돌아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심을 때는 자식 돌보듯 하고 놓아둘 때에는 버리듯이 해야 그 천성이 온전해지고 본성이 얻어집니다.” 목표를 향해 정진할 때 ‘다른 나무 심는 자들’처럼 부지런하게 수고하는 것보다 곽탁타처럼 걱정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렵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조급함과 집착은 쉽고, 관조와 기다림은 어렵다.
개인에게 점점 더 빠른 성과를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조급함’은 ‘열심’으로, ‘집착’은 ‘적극성’으로 쉽게 둔갑한다. 관조와 기다림의 미덕을 잃어버리기 쉬운 지금, 학생들은 이 글을 통해 각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을 재정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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