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는 한유가 반곡(盤谷)에서 은거하는 이원(李愿, ?~825)에게 써 준 증서(贈序: 송별할 때 썼던 여러 편의 시를 후에 책으로 엮으면서 붙인 서문)이다. 글은 세 단락으로 나뉘는데, 첫 단락에서는 반곡의 지리와 명칭의 유래를 말했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이원의 말을 빌려 뜻을 이룬 사람과 은거하는 사람, 그리고 권세 있는 자에게 빌붙어 공명을 쫓는 사람의 삶의 모습과 은거하고자 하는 이원의 뜻을 말했다. 세 번째 단락은 이원을 전송하는 시로, 여기에는 은거하는 삶의 자족과 평강에 대한 선망이 담겨 있다.
고전본문
(반곡에서 은거하는 이원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대장부라 칭하는 사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익과 혜택이 그로부터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니 명성이 세상에 빛나지요. 조정에 앉아 여러 관리들을 나오거나 물러나도록 하며 천자(天子)를 보좌하여 명령을 내립니다. 조정 밖에 있을 때는 깃발을 세우고 활과 화살을 나열하고서 무사들이 앞에서 호령하며 길을 열고, 따르는 이들이 길을 메우며, 시중드는 사람들이 제각각 물건을 받쳐 들고 길 양쪽 가에서 분주합니다. 그가 기쁘면 상이 내려지고 화나면 형벌이 내려지지요. 재주 있는 자와 준걸들이 그 앞에 가득하여 고금을 논하고 그의 성덕을 칭찬하니 귀에 거슬리지가 않습니다. 눈썹이 둥글고 볼이 도톰한 여인들은 고운 목소리와 날렵한 몸매에 외모도 빼어나고 머리도 총명하며 가벼운 옷자락을 날리고 긴 소매로 얼굴을 가린답니다. 흰 분을 바르고 검푸른 눈썹을 그린 미녀들이 죽 늘어선 방마다 한가로이 지내면서 총애를 다투며 그에게 의지하고, 미모를 다투며 그의 사랑을 얻으려 하지요. 이는 천자에게 인정받아 당세에 권세를 잡은 대장부들이 하는 일들로, 나는 이것이 싫어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운명에 달려 있어서 요행으로 얻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곤궁하게 지내며 들에 거주하고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무성한 나무 아래 앉아 하루를 보내고 맑은 샘물에 씻어 스스로를 깨끗이 하며, 산에서 채취하여 맛있는 나물을 먹을 수 있고 강에서 낚시질하여 생선을 먹을 수 있습니다. 기거함에 정해진 시간이 없어 편한 대로 하면 되지요. 면전에서 칭찬을 듣는 것보다는 뒤에서 헐뜯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나으며, 몸에 즐거움이 있는 것보다는 마음에 근심이 없는 것이 낫습니다. 직위에 맞는 수레와 의복에 얽매이지 않고 칼과 톱의 형벌이 가해지지 않으며,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지 혼란한지를 알지 못하고 축출과 승진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은 대장부로서 당시에 때를 만나지 못한 자가 하는 일들로, 나는 이것을 행하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관대작의 문 앞에서 안부를 살피며 권세의 길에서 분주하니, 눈치를 보느라 발은 나아가려다가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입은 말하려다가 머뭇거리며,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급기야 법률에 저촉되어 주륙을 당하기도 합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요행을 바라며 죽은 뒤에야 그치는 자는 그 인품이 현명한 것일까요, 현명하지 못한 것일까요?”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 중에서
토론하기
(1) 이 글에 나오는 세 가지 삶의 모습을 정리하고, 이에 대한 화자의 관점을 파악해본 후, 각각의 삶에 대해 글에서 다루지 않은 이면의 모습을 자신의 시각에서 그려보자.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어떤 모습인지 이야기해 보자.
(2) “천자에게 인정받아 당세에 권세를 잡은 대장부”의 삶에 대해 화자는 자신이 그런 삶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운명에 달려 있어서 요행으로 얻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고, 은거하는 삶을 선택했다. 화자의 판단과 선택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해 보자.
해설읽기
이 글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이 나온다. 첫째는 천자에게 인정받아 권세를 잡은 대장부들의 삶, 즉 성공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고, 둘째는 때를 만나지 못한 자들의 곤궁하지만 자연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사는 삶이며, 셋째는 부귀영화를 좇으며 분주한 삶이다.
화자(이 글의 저자는 한유이지만 인용 단락은 이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는 첫 번째 삶에 대해서 비난하지도 칭송하지도 않으며, 다만 “나는 이것이 싫어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운명에 달려 있어서 요행으로 얻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이러한 삶에 대한 선망과 체념이 담겨 있다. 두 번째 삶에 대해서 화자는 “면전에서 칭찬을 듣는 것보다는 뒤에서 헐뜯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나으며, 몸에 즐거움이 있는 것보다는 마음에 근심이 없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고 “나는 이것을 행하렵니다.”라고 함으로써 이러한 삶이 첫 번째 삶이나 세 번째 삶보다 낫다는 판단을 드러냈다. 세 번째 삶에 대해서 화자는 현명하지 못한 삶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분수에 맞지 않는 요행을 바라며 죽은 뒤에야 그치는 자는 그 인품이 현명한 것일까요, 현명하지 못한 것일까요?”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나서는 각각의 삶의 모습에 대해 글에서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화자와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삶에는 성공의 결과만 드러나 있고 거기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고통과 희생이 따랐을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은 화자가 모르거나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단지 운이 안 따라 주어서 그런 삶을 추구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기 두려워서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두 번째 삶에 대해 이 글에서는 좋은 점만을 다뤘지만 그 이면에 생활의 불편함, 가족들의 고통, 사람들의 멸시가 있을 수 있다. “뒤에서 헐뜯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무능하고 비겁함을 헐뜯는 자가 있을 수 있고, “마음에 근심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단지 그러한 근심을 외면한 것일 수 있다. 세 번째 삶에 대해서도 화자와는 다른 각도로 생각할 수 있다. 글에서 다룬 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고, 사실 분주히 노력하는 당사자의 진심은 순수한 것일 수 있다. 그의 분주함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희생일 수도,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분투일 수도 있다. 학생들은 상상력을 발휘해 글 이면의 삶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신은 그 가운데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또 ‘천자에게 인정받는 일은 운명에 달려 있다’는 화자의 판단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 동의하는 입장에서는 삶에서 운명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삶에는 분명히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한 인생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불운이나 횡재는 사람이 뭔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타인의 평가와 인정이 중요한 분야일수록 운이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예를 들면, 정계, 연예계, 예술계에서 성공하려면 실력은 기본이고 운이 따라줘야 한다. 이 글에서 말한 천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천자의 눈 밖에 날 수도 있고, 그의 신임을 얻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일에는 무도 운이 작용한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삶에서 운명보다 인간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 천자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끝까지 의지를 가졌기에 성공한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제한적이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고,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 의지를 가진 이를 운명이 돕느냐 돕지 않느냐는 나중의 문제다. 운명보다 인간의 의지가 선행하는 것이다.
이어서 화자의 선택에 대해서도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 ‘운명에 달려 있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최선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화자와 같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은거를 선택한 화자에게 동의하는 학생들은 오랜 세월 분투노력했음에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는 운명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니, 포기하고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할 것이다. 화자에게 동의하지 않는 학생들은 끝까지 해보기 전에는 운명이 내 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고, 결과가 어떻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전후맥락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는 한유가 반곡(盤谷)에서 은거하는 이원(李愿, ?~825)에게 써 준 증서(贈序: 송별할 때 썼던 여러 편의 시를 후에 책으로 엮으면서 붙인 서문)이다. 글은 세 단락으로 나뉘는데, 첫 단락에서는 반곡의 지리와 명칭의 유래를 말했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이원의 말을 빌려 뜻을 이룬 사람과 은거하는 사람, 그리고 권세 있는 자에게 빌붙어 공명을 쫓는 사람의 삶의 모습과 은거하고자 하는 이원의 뜻을 말했다. 세 번째 단락은 이원을 전송하는 시로, 여기에는 은거하는 삶의 자족과 평강에 대한 선망이 담겨 있다.
고전본문
(반곡에서 은거하는 이원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대장부라 칭하는 사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익과 혜택이 그로부터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니 명성이 세상에 빛나지요. 조정에 앉아 여러 관리들을 나오거나 물러나도록 하며 천자(天子)를 보좌하여 명령을 내립니다. 조정 밖에 있을 때는 깃발을 세우고 활과 화살을 나열하고서 무사들이 앞에서 호령하며 길을 열고, 따르는 이들이 길을 메우며, 시중드는 사람들이 제각각 물건을 받쳐 들고 길 양쪽 가에서 분주합니다. 그가 기쁘면 상이 내려지고 화나면 형벌이 내려지지요. 재주 있는 자와 준걸들이 그 앞에 가득하여 고금을 논하고 그의 성덕을 칭찬하니 귀에 거슬리지가 않습니다. 눈썹이 둥글고 볼이 도톰한 여인들은 고운 목소리와 날렵한 몸매에 외모도 빼어나고 머리도 총명하며 가벼운 옷자락을 날리고 긴 소매로 얼굴을 가린답니다. 흰 분을 바르고 검푸른 눈썹을 그린 미녀들이 죽 늘어선 방마다 한가로이 지내면서 총애를 다투며 그에게 의지하고, 미모를 다투며 그의 사랑을 얻으려 하지요. 이는 천자에게 인정받아 당세에 권세를 잡은 대장부들이 하는 일들로, 나는 이것이 싫어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운명에 달려 있어서 요행으로 얻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곤궁하게 지내며 들에 거주하고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무성한 나무 아래 앉아 하루를 보내고 맑은 샘물에 씻어 스스로를 깨끗이 하며, 산에서 채취하여 맛있는 나물을 먹을 수 있고 강에서 낚시질하여 생선을 먹을 수 있습니다. 기거함에 정해진 시간이 없어 편한 대로 하면 되지요. 면전에서 칭찬을 듣는 것보다는 뒤에서 헐뜯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나으며, 몸에 즐거움이 있는 것보다는 마음에 근심이 없는 것이 낫습니다. 직위에 맞는 수레와 의복에 얽매이지 않고 칼과 톱의 형벌이 가해지지 않으며,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지 혼란한지를 알지 못하고 축출과 승진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은 대장부로서 당시에 때를 만나지 못한 자가 하는 일들로, 나는 이것을 행하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관대작의 문 앞에서 안부를 살피며 권세의 길에서 분주하니, 눈치를 보느라 발은 나아가려다가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입은 말하려다가 머뭇거리며,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급기야 법률에 저촉되어 주륙을 당하기도 합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요행을 바라며 죽은 뒤에야 그치는 자는 그 인품이 현명한 것일까요, 현명하지 못한 것일까요?”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 중에서
토론하기
(1) 이 글에 나오는 세 가지 삶의 모습을 정리하고, 이에 대한 화자의 관점을 파악해본 후, 각각의 삶에 대해 글에서 다루지 않은 이면의 모습을 자신의 시각에서 그려보자.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어떤 모습인지 이야기해 보자.
(2) “천자에게 인정받아 당세에 권세를 잡은 대장부”의 삶에 대해 화자는 자신이 그런 삶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운명에 달려 있어서 요행으로 얻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고, 은거하는 삶을 선택했다. 화자의 판단과 선택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해 보자.
해설읽기
이 글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이 나온다. 첫째는 천자에게 인정받아 권세를 잡은 대장부들의 삶, 즉 성공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고, 둘째는 때를 만나지 못한 자들의 곤궁하지만 자연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사는 삶이며, 셋째는 부귀영화를 좇으며 분주한 삶이다.
화자(이 글의 저자는 한유이지만 인용 단락은 이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는 첫 번째 삶에 대해서 비난하지도 칭송하지도 않으며, 다만 “나는 이것이 싫어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운명에 달려 있어서 요행으로 얻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이러한 삶에 대한 선망과 체념이 담겨 있다. 두 번째 삶에 대해서 화자는 “면전에서 칭찬을 듣는 것보다는 뒤에서 헐뜯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나으며, 몸에 즐거움이 있는 것보다는 마음에 근심이 없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고 “나는 이것을 행하렵니다.”라고 함으로써 이러한 삶이 첫 번째 삶이나 세 번째 삶보다 낫다는 판단을 드러냈다. 세 번째 삶에 대해서 화자는 현명하지 못한 삶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분수에 맞지 않는 요행을 바라며 죽은 뒤에야 그치는 자는 그 인품이 현명한 것일까요, 현명하지 못한 것일까요?”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나서는 각각의 삶의 모습에 대해 글에서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화자와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삶에는 성공의 결과만 드러나 있고 거기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고통과 희생이 따랐을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은 화자가 모르거나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단지 운이 안 따라 주어서 그런 삶을 추구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기 두려워서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두 번째 삶에 대해 이 글에서는 좋은 점만을 다뤘지만 그 이면에 생활의 불편함, 가족들의 고통, 사람들의 멸시가 있을 수 있다. “뒤에서 헐뜯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무능하고 비겁함을 헐뜯는 자가 있을 수 있고, “마음에 근심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단지 그러한 근심을 외면한 것일 수 있다. 세 번째 삶에 대해서도 화자와는 다른 각도로 생각할 수 있다. 글에서 다룬 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고, 사실 분주히 노력하는 당사자의 진심은 순수한 것일 수 있다. 그의 분주함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희생일 수도,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분투일 수도 있다. 학생들은 상상력을 발휘해 글 이면의 삶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신은 그 가운데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또 ‘천자에게 인정받는 일은 운명에 달려 있다’는 화자의 판단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 동의하는 입장에서는 삶에서 운명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삶에는 분명히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한 인생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불운이나 횡재는 사람이 뭔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타인의 평가와 인정이 중요한 분야일수록 운이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예를 들면, 정계, 연예계, 예술계에서 성공하려면 실력은 기본이고 운이 따라줘야 한다. 이 글에서 말한 천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천자의 눈 밖에 날 수도 있고, 그의 신임을 얻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일에는 무도 운이 작용한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삶에서 운명보다 인간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 천자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끝까지 의지를 가졌기에 성공한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제한적이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고,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 의지를 가진 이를 운명이 돕느냐 돕지 않느냐는 나중의 문제다. 운명보다 인간의 의지가 선행하는 것이다.
이어서 화자의 선택에 대해서도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 ‘운명에 달려 있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최선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화자와 같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은거를 선택한 화자에게 동의하는 학생들은 오랜 세월 분투노력했음에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는 운명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니, 포기하고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할 것이다. 화자에게 동의하지 않는 학생들은 끝까지 해보기 전에는 운명이 내 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고, 결과가 어떻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