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우계시서(愚溪詩序)」는 작자가 영주사마로 폄적되었을 때 쓴 것으로, 주변의 여덟 가지 경관에 ‘우’자를 넣어 이름을 지은 이유와 소감을 밝혔다. 작자는 자신이 ‘우계(愚溪)’라 명명한 계곡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연결시켜 전개함으로써 계곡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으며, 전편에서 ‘우’자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읽는 재미를 주었다. 이 글은 언뜻 보기에는 단지 우계에 대해 쓴 것으로 보이나, 저자는 치밀한 전개를 통해 작품 말미에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드러냈다. 즉, 우계에 자신을 빗대어 어리석다는 획일적인 가치 판단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나아가 우계의 숨겨진 효용을 논함으로써 글쓰기의 가치를 드러냈다. 우계와 마찬가지로 저자 자신이 글쓰기를 통해 ‘만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온갖 모습을 잘 표현한다’고 한 것은 그의 창작론을 함축한 구절로 자주 인용된다. 그가 표명한 우계의 효용 및 문장 창작론은 예술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고전본문
내 어리석음 때문에 죄를 지어 소수(瀟水) 가에 귀양 왔는데, 이 계곡을 아껴 2,3리 들어간 곳에서 특히 아름다운 곳을 찾아 집을 지었다. (… 중략 …) 지금 내가 이 계곡에 집을 짓고는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이 지방 사람들도 계곡의 이름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니 이름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우계(愚溪)’라고 바꾸었다.
(… 중략 …)
무릇 물은 지혜로운 이가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 이 계곡만이 유독 어리석다고 욕을 당하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대체로 물길이 매우 낮은 곳에 있어서 관개하는 데 쓸 수 없고, 또 물길이 급하고 돌출한 바위가 많아 큰 배가 드나들 수 없으며, 유심(幽深)한 곳에 있는 데다 얕고 좁아서 교룡도 하찮게 여겨 구름과 비를 일으킬 수 없어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니, 나를 꼭 닮았다. 그러니 모욕하여 어리석다고 불러도 되는 것이다.
(… 중략 …)
지금 나는 도(道)가 시행되는 때인데도 이치를 어기고 일을 그르쳤으니, 어리석기로 나만한 이가 없다. 그리하여 천하에 아무와도 다툼이 없이 이 계곡을 나 혼자 차지하고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계곡은 비록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지만, 만물을 잘 비추며 맑고 깨끗하며 종(鐘)이나 경쇠를 치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즐거워 웃고 애모하여 즐겨 떠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나는 비록 세속에 어울리지 못하지만 퍽이나 글 쓰는 일로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만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온갖 모습을 잘 표현하니 어느 것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리석은 문장으로 어리석은 계곡을 노래하노라니 아득히 서로 어긋남이 없고 혼연히 융화되어 혼돈 상태를 초월하고, 허공과 융화되어 고요히 나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
「우계시서(愚溪詩序)」中에서
토론하기
(1) 인용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 우계의 효용은 무엇일까? 우계를 예술에 대한 비유로 본다면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2) 화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비록 세속에 어울리지 못하지만 퍽이나 글 쓰는 일로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만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온갖 모습을 잘 표현하니, 어느 것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자부한다. 예술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 가치와 자신만의 진정한 가치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이야기해 보자.
해설읽기
이 글은 세상에 쓰이지 못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하며, 넓게는 예술 활동의 의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먼저, 인용한 글에서는 세속적 가치와 순수한 미(美)가 대립되고 있다. 계곡이 가질 수 있는 세속적 가치는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효용으로, 이는 글의 전반부에 서술되어 있다. 즉, 물길이 높은 곳에 위치하면 전답의 관개에 활용할 수 있고, 유속이 적당하고 물길이 평탄하면 운수(運輸)에 활용할 수 있고, 수량이 많고 개방된 곳에 있으면 강수에 도움이 된다. 이런 조건을 갖춘 계곡은 쓸모가 있는 것이다. 우계의 경우 여기에 해당되지 않아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며, 따라서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글의 후반에는 앞서 살펴본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쓸모와는 다른 측면에서 우계가 갖는 효용이 서술되어 있다. “만물을 잘 비추며 맑고 깨끗하며 종(鐘)이나 경쇠를 치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즐거워 웃고 애모하여 즐겨 떠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우계가 갖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감상자에게 주는 즐거움과 위로를 서술한 것이다. 그들(유람하는 사람들)이 “즐겨 떠나가지 못”하는 것은 이처럼 우계 나름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우계가 갖는 이와 같은 효용은 예술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한다. 예술 작품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즉각적인 쓸모를 제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내재된 아름다움, 혹은 감상자가 그것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들에게 미적 쾌감을 선사한다. 또한, 창작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예술이 주는 치유의 기능에서 예술의 가치를 찾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읽어 보면 저자는 우계에 대한 글을 창작하면서 스스로 치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평가가 아닌 자신의 숨겨진 가치를 스스로 찾고 이를 글로 표현하면서 치유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술 창작 자체가 치유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예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우계가 나름의 효용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며, 세상에 실용적인 이로움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해서 예술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인용한 구절에서 “만물을 깨끗이 씻어낸다”는 것은 ‘만물의 깨끗하고 맑은 면을 찾아낸다’는 뜻으로 심미활동을 통해 대상으로부터 미(美)를 발견하는 작업을 은유하며, “온갖 모습을 잘 표현한다”는 것은 가장 적당한 수단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창작 활동의 심미안과 표현력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을 ‘세속에 어울리는 것’과 병치함으로써 세속적‧실용적 가치 추구와 예술적‧심미적 가치 추구의 대립을 표현했다. 또, “어느 것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득히 서로 어긋남이 없고 혼연히 융화되어, 혼돈 상태를 초월하고 허공과 융화되어 고요히 나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서술에는 세속적 가치와 합치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한 저자의 자부심과 만족이 담겨 있다.
저자는 정치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폄적당한 상황에서 이 글을 썼다. 정치적 포부가 좌절당했기 때문에 저자는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니, 나를 꼭 닮았다.”, “어리석기로 나만한 이가 없다.”고 하며 자신을 ‘어리석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저자는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계(愚溪)’라는 이름을 얻은 계곡에 나름대로의 효용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마찬가지로 세상에 쓰이지 못해 어리석다고 자조하는 자신에게도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암시했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더욱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며, 더 이상 획일적인 가치 판단에 근거에 개인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저자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는 바와 같이 우계에 대해 ‘어리석다’고 단정 짓는 것이 섣부른 판단인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든 세상에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이로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세상의 시선이나 평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갖췄을 때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의미 있다고 여겨 선택한 가치를 굳건히 추구해 나갈 수 있다.
키워드
무용, 미의 추구, 미적 쾌감, 세속적 가치, 실용주의, 어리석음, 예술, 창작, 효용
전후맥락
「우계시서(愚溪詩序)」는 작자가 영주사마로 폄적되었을 때 쓴 것으로, 주변의 여덟 가지 경관에 ‘우’자를 넣어 이름을 지은 이유와 소감을 밝혔다. 작자는 자신이 ‘우계(愚溪)’라 명명한 계곡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연결시켜 전개함으로써 계곡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으며, 전편에서 ‘우’자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읽는 재미를 주었다. 이 글은 언뜻 보기에는 단지 우계에 대해 쓴 것으로 보이나, 저자는 치밀한 전개를 통해 작품 말미에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드러냈다. 즉, 우계에 자신을 빗대어 어리석다는 획일적인 가치 판단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나아가 우계의 숨겨진 효용을 논함으로써 글쓰기의 가치를 드러냈다. 우계와 마찬가지로 저자 자신이 글쓰기를 통해 ‘만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온갖 모습을 잘 표현한다’고 한 것은 그의 창작론을 함축한 구절로 자주 인용된다. 그가 표명한 우계의 효용 및 문장 창작론은 예술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고전본문
내 어리석음 때문에 죄를 지어 소수(瀟水) 가에 귀양 왔는데, 이 계곡을 아껴 2,3리 들어간 곳에서 특히 아름다운 곳을 찾아 집을 지었다. (… 중략 …) 지금 내가 이 계곡에 집을 짓고는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이 지방 사람들도 계곡의 이름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니 이름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우계(愚溪)’라고 바꾸었다.
(… 중략 …)
무릇 물은 지혜로운 이가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 이 계곡만이 유독 어리석다고 욕을 당하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대체로 물길이 매우 낮은 곳에 있어서 관개하는 데 쓸 수 없고, 또 물길이 급하고 돌출한 바위가 많아 큰 배가 드나들 수 없으며, 유심(幽深)한 곳에 있는 데다 얕고 좁아서 교룡도 하찮게 여겨 구름과 비를 일으킬 수 없어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니, 나를 꼭 닮았다. 그러니 모욕하여 어리석다고 불러도 되는 것이다.
(… 중략 …)
지금 나는 도(道)가 시행되는 때인데도 이치를 어기고 일을 그르쳤으니, 어리석기로 나만한 이가 없다. 그리하여 천하에 아무와도 다툼이 없이 이 계곡을 나 혼자 차지하고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계곡은 비록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지만, 만물을 잘 비추며 맑고 깨끗하며 종(鐘)이나 경쇠를 치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즐거워 웃고 애모하여 즐겨 떠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나는 비록 세속에 어울리지 못하지만 퍽이나 글 쓰는 일로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만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온갖 모습을 잘 표현하니 어느 것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리석은 문장으로 어리석은 계곡을 노래하노라니 아득히 서로 어긋남이 없고 혼연히 융화되어 혼돈 상태를 초월하고, 허공과 융화되어 고요히 나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
「우계시서(愚溪詩序)」中에서
토론하기
(1) 인용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 우계의 효용은 무엇일까? 우계를 예술에 대한 비유로 본다면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2) 화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비록 세속에 어울리지 못하지만 퍽이나 글 쓰는 일로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만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온갖 모습을 잘 표현하니, 어느 것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자부한다. 예술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 가치와 자신만의 진정한 가치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이야기해 보자.
해설읽기
이 글은 세상에 쓰이지 못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하며, 넓게는 예술 활동의 의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먼저, 인용한 글에서는 세속적 가치와 순수한 미(美)가 대립되고 있다. 계곡이 가질 수 있는 세속적 가치는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효용으로, 이는 글의 전반부에 서술되어 있다. 즉, 물길이 높은 곳에 위치하면 전답의 관개에 활용할 수 있고, 유속이 적당하고 물길이 평탄하면 운수(運輸)에 활용할 수 있고, 수량이 많고 개방된 곳에 있으면 강수에 도움이 된다. 이런 조건을 갖춘 계곡은 쓸모가 있는 것이다. 우계의 경우 여기에 해당되지 않아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며, 따라서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글의 후반에는 앞서 살펴본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쓸모와는 다른 측면에서 우계가 갖는 효용이 서술되어 있다. “만물을 잘 비추며 맑고 깨끗하며 종(鐘)이나 경쇠를 치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즐거워 웃고 애모하여 즐겨 떠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우계가 갖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감상자에게 주는 즐거움과 위로를 서술한 것이다. 그들(유람하는 사람들)이 “즐겨 떠나가지 못”하는 것은 이처럼 우계 나름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우계가 갖는 이와 같은 효용은 예술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한다. 예술 작품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즉각적인 쓸모를 제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내재된 아름다움, 혹은 감상자가 그것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들에게 미적 쾌감을 선사한다. 또한, 창작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예술이 주는 치유의 기능에서 예술의 가치를 찾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읽어 보면 저자는 우계에 대한 글을 창작하면서 스스로 치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평가가 아닌 자신의 숨겨진 가치를 스스로 찾고 이를 글로 표현하면서 치유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술 창작 자체가 치유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예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우계가 나름의 효용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며, 세상에 실용적인 이로움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해서 예술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인용한 구절에서 “만물을 깨끗이 씻어낸다”는 것은 ‘만물의 깨끗하고 맑은 면을 찾아낸다’는 뜻으로 심미활동을 통해 대상으로부터 미(美)를 발견하는 작업을 은유하며, “온갖 모습을 잘 표현한다”는 것은 가장 적당한 수단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창작 활동의 심미안과 표현력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을 ‘세속에 어울리는 것’과 병치함으로써 세속적‧실용적 가치 추구와 예술적‧심미적 가치 추구의 대립을 표현했다. 또, “어느 것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득히 서로 어긋남이 없고 혼연히 융화되어, 혼돈 상태를 초월하고 허공과 융화되어 고요히 나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서술에는 세속적 가치와 합치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한 저자의 자부심과 만족이 담겨 있다.
저자는 정치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폄적당한 상황에서 이 글을 썼다. 정치적 포부가 좌절당했기 때문에 저자는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니, 나를 꼭 닮았다.”, “어리석기로 나만한 이가 없다.”고 하며 자신을 ‘어리석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저자는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계(愚溪)’라는 이름을 얻은 계곡에 나름대로의 효용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마찬가지로 세상에 쓰이지 못해 어리석다고 자조하는 자신에게도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암시했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더욱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며, 더 이상 획일적인 가치 판단에 근거에 개인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저자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는 바와 같이 우계에 대해 ‘어리석다’고 단정 짓는 것이 섣부른 판단인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든 세상에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이로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세상의 시선이나 평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갖췄을 때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의미 있다고 여겨 선택한 가치를 굳건히 추구해 나갈 수 있다.
키워드
무용, 미의 추구, 미적 쾌감, 세속적 가치, 실용주의, 어리석음, 예술, 창작, 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