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호리카와(堀川: 교토 시내의 지명)의 대영주 가문의 귀중한 가보(家寶)인 지옥변 병풍은 이름 높은 화가 요시히데(良秀)가 그린 것이다. 그는 이 나라 제일의 화가라고 자부하고, 세상의 관례를 무시하는 등 괴팍하고 교만하지만, 외동딸만은 미친 사람처럼 끔찍이 사랑한다. 대영주는 요시히데의 딸을 시녀로 들이고, 요시히데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네댓 번 딸을 돌려달라고 부탁하나 대영주는 듣지 않는다. 이로 인해 요시히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긴 대영주는 갑자기 그에게 지옥변의 병풍을 그리라고 명령하고, 요시히데는 6개월 동안 그림에만 골몰한다. 한편, 어느 날 누군가 요시히데의 딸을 범하려다 그녀의 저항 때문에 실패해 도망친다. (작품에는 범인이 대영주라는 암시가 보인다.) 얼마 후 요시히데는 대영주를 찾아가 자신은 직접 본 것이 아니면 그릴 수 없다며 지옥변에 비단 수레와 함께 불타는 궁녀의 모습을 그려야 하니 수레와 여인을 불태워 달라고 간청하고, 대영주는 이를 기꺼이 허락한다. 며칠 후 대영주는 약속대로 비단 수레가 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 안에는 요시히데의 딸이 타고 있다. 요시히데는 무서움과 슬픔에 가득 차 그 광경을 지켜보고, 얼마 후 그림을 완성한다. 대영주를 포함해 모두가 지옥변의 훌륭함에 감탄하고, 요시히데는 그림을 완성한 이튿날 자살한다.
고전본문
그때의 요시히데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신없이 수레 쪽으로 달려 나가려던 그는 불이 타오름과 동시에 발을 멈추고 역시 팔을 뻗친 채 파고들 것 같은 눈초리로 수레를 휩싼 화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온몸을 비춰 주는 불빛으로 주름투성이의 추한 얼굴이 수염 끝까지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부릅뜬 눈이라든지, 일그러진 입술 언저리라든지, 혹은 그침 없이 씰룩거리는 볼의 경련이라든지, 요시히데의 마음에 번갈아 교차하는 무서움과 슬픔과 놀라움들이 역력히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목이 잘리기 전의 도둑이라도, 혹은 시왕청(十王廳) 앞에 끌려나온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그렇게까지 괴로운 얼굴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 중략 …)
그 불기둥을 눈앞에 보면서 굳어 버린 것처럼 서 있는 요시히데는, ― 이 무슨 괴이한 일일까요. 아까까지는 지옥의 책고(責苦)에 괴로워하는 것 같았던 요시히데가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번뜩임을, 마치 황홀한 법열(法悅)의 빛을 주름투성이인 얼굴 가득 띄우면서 대영주님의 어전인 것도 잊었는지 가슴에 팔짱을 꼭 끼고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아무래도 그의 눈에는 딸이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오로지 아름다운 불길의 빛깔과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여인의 모습이 한없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그런 광경으로 보였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자기 외동딸의 단말마를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때의 요시히데는 왠지 인간으로 생각되지 않는, 꿈에 보는 사자왕(獅子王)의 노여움을 닮은 기괴한 엄숙함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의 불길에 놀라서 울고 떠들며 날아다니는 수많은 밤새들조차 기분 탓인지 요시히데의 모미에보시(귀인‧무사들이 쓰던 길쭉하고 뒤로 굽은 건의 일종) 둘레에는 한 마리도 가까지 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무심한 새의 눈에도 아마 그의 머리 위에 원광처럼 걸려 있는 이상한 위엄이 보였던 것이겠지요.
새마저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들은, 심지어 잡역부까지도 모두 숨을 죽이며 요시히데도 몸을 떨 뿐 기이한 기쁨에 차 있는 것을 마치 생불(生佛)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온통 뒤덮은 수레의 불길과, 그것에 혼을 빼앗긴 채 꼼짝 않고 서 있는 요시히데와―이 무슨 장엄, 이 무슨 큰 환희일까요.
(… 중략 …)
그날 밤 유키게의 고쇼에서 대영주님이 수레를 불태우신 일은 누구의 입에서랄 것도 없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비난을 하는 자도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첫째로 왜 대영주님이 요시히데의 딸을 태워 죽이셨느냐, ― 이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원한에서 그랬다는 소문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영주님의 뜻은 수레를 태우고 사람을 죽여서까지라도 병풍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한 화가의 그릇된 근성을 혼내 줄 심산이셨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대영주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요시히데가 눈앞에서 딸이 타 죽고 있는데도 병풍의 그림을 완성시키려는 목석과 같은 집념이 역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 같습니다. 개중에는 그를 매도하여 그림을 위해서는 부녀간의 천륜마저 저버리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괴물이라고까지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 중략 … : 요시히데는 완성된 지옥변의 병풍을 대영주에게 보이고, 같이 있던 요카와의 스님은 그림을 보고 감탄한다.)
그 이후 그 화가를 나쁘게 말하는 자는 적어도 저택 안에는 거의 한명도 없었습니다. 누구나 저 병풍을 보는 자는 평소에 아무리 요시히데를 미워했더라도 이상하게 엄숙한 마음으로 감동을 받아 염열지옥의 대고간(大苦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일까요.
토론하기
(1) 완벽한 <지옥변>을 완성하는 것이 딸의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눈앞에서 딸이 타 죽고 있는데도 병풍의 그림을 완성시키려는 목석과 같은” 요시히데의 집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작품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해 보자.
(2) 살인을 옹호하거나 범죄를 미화하는 등 도덕적 규범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 예술과 도덕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 어느 쪽을 옹호할 것인가?
(3) 예술가도 일반인과 똑같이 사회 규범을 준수해야 할까? 예술가가 윤리적으로 그릇된 행동을 했을 때 규범에 저항하는 나름의 예술적 표현 행위이므로 관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해설읽기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요시히데의 집념은 딸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황홀한 법열(法悅)의 빛”을 띠며 지켜보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마치 생불(生佛)이라도 보는 것처럼” “기괴한 엄숙함”마저 느낀다. 화자 역시 이에 대해 “이 무슨 장엄, 이 무슨 큰 환희일까요.”라고 하며 요시히데의 예술에 대한 집념을 미화했다. 인용한 대목에서 묘사된 요시히데의 태도와 이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요시히데가 결국 완벽한 지옥변 병풍을 완성해 이를 본 사람을 탄복시켰다는 이야기는 세속의 권력과 도덕의 한계를 초월한 예술의 승리를 선포함으로써 작자의 예술지상주의 입장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회 통념에서 보자면 딸을 죽게 놔둔다는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든 반인륜적 행위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아무리 신의 경지에 이른 예술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살인을 금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 규범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견해이다.
이 글을 읽은 후에 예술 완성을 위해 몰두하는 요시히데의 집념을 이해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예술과 윤리의 관계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고, 반대로 요시히데의 태도에 반대함으로써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 규범과 관례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립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예술과 도덕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예술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입장으로는 미적 가치와 선의 가치의 관련성을 낮게 바라보는 예술지상주의와 미적 가치와 선의 가치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도덕주의가 있다. 예술지상주의에서는 예술의 목적은 예술 자체 및 미(美)에 있으며, 수용자에게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거나 하는 등 모든 효용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도덕주의에서 예술의 목적은 사회적으로 바른 행동과 덕성을 표현함으로써 수용자에게 이를 장려하는 데 있으며, 예술이 가진 미와 선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제공함으로써 도덕적 향상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자는 이 작품을 창작했던 즈음에 “예술에 봉사하는 이상, 우리들의 작품이 주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술적 감격이어야만 한다.”고 선언하며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했고, 작품에 보이는 요시히데의 예술을 향한 집념에는 작자의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살인을 옹호하거나 범죄를 미화하지는 않았지만, 윤리 규범의 선을 넘어선 예술가의 형상을 미화했다는 점에서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학생들은 이 작품에 대한 각자의 감상을 나눔으로써 미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 생각해 보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술가에게 일반인과 똑같이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찬반양론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예술가도 사회의 구성원인 이상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도덕적 규율과 관례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과 예술가에게 일반인들과 똑같은 도덕적 규율과 관례의 속박을 부여한다면 이는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 예술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사회의 도덕적 규율과 사회 관습이든 절대적이지 않으며, 이에 저항함으로써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것 역시 예술의 기능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한편, 양 극단에서 벗어나 절충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예술인의 표현 영역에서의 자유는 존중하되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법의 테두리는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완성된 지옥변을 본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화가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림을 위해서는 부녀간의 천륜마저 저버리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괴물”이라고 비난했더라도 막상 그의 작품을 보고나서는 그에 대한 비난이 희석된 것이다. 학생들은 요시히데의 지옥도 병풍을 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누면서 예술가에게 어느 정도로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키워드
도덕, 도덕주의, 사회 규범, 예술, 예술과 도덕, 예술 지상주의, 유미주의, 퇴폐주의
전후맥락
호리카와(堀川: 교토 시내의 지명)의 대영주 가문의 귀중한 가보(家寶)인 지옥변 병풍은 이름 높은 화가 요시히데(良秀)가 그린 것이다. 그는 이 나라 제일의 화가라고 자부하고, 세상의 관례를 무시하는 등 괴팍하고 교만하지만, 외동딸만은 미친 사람처럼 끔찍이 사랑한다. 대영주는 요시히데의 딸을 시녀로 들이고, 요시히데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네댓 번 딸을 돌려달라고 부탁하나 대영주는 듣지 않는다. 이로 인해 요시히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긴 대영주는 갑자기 그에게 지옥변의 병풍을 그리라고 명령하고, 요시히데는 6개월 동안 그림에만 골몰한다. 한편, 어느 날 누군가 요시히데의 딸을 범하려다 그녀의 저항 때문에 실패해 도망친다. (작품에는 범인이 대영주라는 암시가 보인다.) 얼마 후 요시히데는 대영주를 찾아가 자신은 직접 본 것이 아니면 그릴 수 없다며 지옥변에 비단 수레와 함께 불타는 궁녀의 모습을 그려야 하니 수레와 여인을 불태워 달라고 간청하고, 대영주는 이를 기꺼이 허락한다. 며칠 후 대영주는 약속대로 비단 수레가 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 안에는 요시히데의 딸이 타고 있다. 요시히데는 무서움과 슬픔에 가득 차 그 광경을 지켜보고, 얼마 후 그림을 완성한다. 대영주를 포함해 모두가 지옥변의 훌륭함에 감탄하고, 요시히데는 그림을 완성한 이튿날 자살한다.
고전본문
그때의 요시히데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신없이 수레 쪽으로 달려 나가려던 그는 불이 타오름과 동시에 발을 멈추고 역시 팔을 뻗친 채 파고들 것 같은 눈초리로 수레를 휩싼 화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온몸을 비춰 주는 불빛으로 주름투성이의 추한 얼굴이 수염 끝까지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부릅뜬 눈이라든지, 일그러진 입술 언저리라든지, 혹은 그침 없이 씰룩거리는 볼의 경련이라든지, 요시히데의 마음에 번갈아 교차하는 무서움과 슬픔과 놀라움들이 역력히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목이 잘리기 전의 도둑이라도, 혹은 시왕청(十王廳) 앞에 끌려나온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그렇게까지 괴로운 얼굴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 중략 …)
그 불기둥을 눈앞에 보면서 굳어 버린 것처럼 서 있는 요시히데는, ― 이 무슨 괴이한 일일까요. 아까까지는 지옥의 책고(責苦)에 괴로워하는 것 같았던 요시히데가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번뜩임을, 마치 황홀한 법열(法悅)의 빛을 주름투성이인 얼굴 가득 띄우면서 대영주님의 어전인 것도 잊었는지 가슴에 팔짱을 꼭 끼고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아무래도 그의 눈에는 딸이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오로지 아름다운 불길의 빛깔과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여인의 모습이 한없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그런 광경으로 보였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자기 외동딸의 단말마를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때의 요시히데는 왠지 인간으로 생각되지 않는, 꿈에 보는 사자왕(獅子王)의 노여움을 닮은 기괴한 엄숙함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의 불길에 놀라서 울고 떠들며 날아다니는 수많은 밤새들조차 기분 탓인지 요시히데의 모미에보시(귀인‧무사들이 쓰던 길쭉하고 뒤로 굽은 건의 일종) 둘레에는 한 마리도 가까지 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무심한 새의 눈에도 아마 그의 머리 위에 원광처럼 걸려 있는 이상한 위엄이 보였던 것이겠지요.
새마저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들은, 심지어 잡역부까지도 모두 숨을 죽이며 요시히데도 몸을 떨 뿐 기이한 기쁨에 차 있는 것을 마치 생불(生佛)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온통 뒤덮은 수레의 불길과, 그것에 혼을 빼앗긴 채 꼼짝 않고 서 있는 요시히데와―이 무슨 장엄, 이 무슨 큰 환희일까요.
(… 중략 …)
그날 밤 유키게의 고쇼에서 대영주님이 수레를 불태우신 일은 누구의 입에서랄 것도 없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비난을 하는 자도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첫째로 왜 대영주님이 요시히데의 딸을 태워 죽이셨느냐, ― 이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원한에서 그랬다는 소문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영주님의 뜻은 수레를 태우고 사람을 죽여서까지라도 병풍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한 화가의 그릇된 근성을 혼내 줄 심산이셨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대영주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요시히데가 눈앞에서 딸이 타 죽고 있는데도 병풍의 그림을 완성시키려는 목석과 같은 집념이 역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 같습니다. 개중에는 그를 매도하여 그림을 위해서는 부녀간의 천륜마저 저버리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괴물이라고까지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 중략 … : 요시히데는 완성된 지옥변의 병풍을 대영주에게 보이고, 같이 있던 요카와의 스님은 그림을 보고 감탄한다.)
그 이후 그 화가를 나쁘게 말하는 자는 적어도 저택 안에는 거의 한명도 없었습니다. 누구나 저 병풍을 보는 자는 평소에 아무리 요시히데를 미워했더라도 이상하게 엄숙한 마음으로 감동을 받아 염열지옥의 대고간(大苦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일까요.
토론하기
(1) 완벽한 <지옥변>을 완성하는 것이 딸의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눈앞에서 딸이 타 죽고 있는데도 병풍의 그림을 완성시키려는 목석과 같은” 요시히데의 집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작품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해 보자.
(2) 살인을 옹호하거나 범죄를 미화하는 등 도덕적 규범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 예술과 도덕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 어느 쪽을 옹호할 것인가?
(3) 예술가도 일반인과 똑같이 사회 규범을 준수해야 할까? 예술가가 윤리적으로 그릇된 행동을 했을 때 규범에 저항하는 나름의 예술적 표현 행위이므로 관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해설읽기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요시히데의 집념은 딸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황홀한 법열(法悅)의 빛”을 띠며 지켜보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마치 생불(生佛)이라도 보는 것처럼” “기괴한 엄숙함”마저 느낀다. 화자 역시 이에 대해 “이 무슨 장엄, 이 무슨 큰 환희일까요.”라고 하며 요시히데의 예술에 대한 집념을 미화했다. 인용한 대목에서 묘사된 요시히데의 태도와 이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요시히데가 결국 완벽한 지옥변 병풍을 완성해 이를 본 사람을 탄복시켰다는 이야기는 세속의 권력과 도덕의 한계를 초월한 예술의 승리를 선포함으로써 작자의 예술지상주의 입장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회 통념에서 보자면 딸을 죽게 놔둔다는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든 반인륜적 행위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아무리 신의 경지에 이른 예술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살인을 금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 규범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견해이다.
이 글을 읽은 후에 예술 완성을 위해 몰두하는 요시히데의 집념을 이해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예술과 윤리의 관계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고, 반대로 요시히데의 태도에 반대함으로써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 규범과 관례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립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예술과 도덕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예술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입장으로는 미적 가치와 선의 가치의 관련성을 낮게 바라보는 예술지상주의와 미적 가치와 선의 가치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도덕주의가 있다. 예술지상주의에서는 예술의 목적은 예술 자체 및 미(美)에 있으며, 수용자에게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거나 하는 등 모든 효용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도덕주의에서 예술의 목적은 사회적으로 바른 행동과 덕성을 표현함으로써 수용자에게 이를 장려하는 데 있으며, 예술이 가진 미와 선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제공함으로써 도덕적 향상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자는 이 작품을 창작했던 즈음에 “예술에 봉사하는 이상, 우리들의 작품이 주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술적 감격이어야만 한다.”고 선언하며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했고, 작품에 보이는 요시히데의 예술을 향한 집념에는 작자의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살인을 옹호하거나 범죄를 미화하지는 않았지만, 윤리 규범의 선을 넘어선 예술가의 형상을 미화했다는 점에서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학생들은 이 작품에 대한 각자의 감상을 나눔으로써 미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 생각해 보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술가에게 일반인과 똑같이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찬반양론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예술가도 사회의 구성원인 이상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도덕적 규율과 관례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과 예술가에게 일반인들과 똑같은 도덕적 규율과 관례의 속박을 부여한다면 이는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 예술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사회의 도덕적 규율과 사회 관습이든 절대적이지 않으며, 이에 저항함으로써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것 역시 예술의 기능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한편, 양 극단에서 벗어나 절충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예술인의 표현 영역에서의 자유는 존중하되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법의 테두리는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완성된 지옥변을 본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화가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림을 위해서는 부녀간의 천륜마저 저버리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괴물”이라고 비난했더라도 막상 그의 작품을 보고나서는 그에 대한 비난이 희석된 것이다. 학생들은 요시히데의 지옥도 병풍을 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누면서 예술가에게 어느 정도로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키워드
도덕, 도덕주의, 사회 규범, 예술, 예술과 도덕, 예술 지상주의, 유미주의, 퇴폐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