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주인공 쉰은 20년 만에 고향을 방문한다. 고향 집을 정리하고 남아 있는 어머니와 조카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미 쇠락하고 삭막하게 변해있다. 어머니는 객지 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돈이 될 만한 살림도구를 처분하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인사차 찾아와 물건들을 빼돌리기 일쑤다. 이때 집안이 쇠락하기 이전 자기 집의 머슴의 아들이던 룬투가 쉰을 보러 찾아온다. 룬투는 머슴의 아들이었지만 비슷한 또래라서 친하게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낸 동무이다.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는 먹고 사는 일에 찌든 초라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더 이상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르는 룬투와 쉰 사이에는 어색함만 흐른다. 룬투는 향로와 촛대 등 몇 개의 가재도구를 챙겼다. 드디어 고향집을 떠나는 날이다. 쉰과 어머니, 조카는 배에 올라타 옛집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본다.
고전본문
어머니와 훙얼은 모두 잠이 들었다. 나도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배 밑바닥에 부딪치는 잔잔한 물소리를 들으며, 난 내가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룬투와 나는 이미 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로 이어져 있다. 훙얼이 바로 쉐이성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난 그 애들이 또다시 나와 같은 단절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마음을 잇기 위해 모두 나처럼 괴롭게 이곳저곳 떠도는 생활을 하는 것도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이 모두 룬투처럼 괴롭고 힘들어서 마비된 것 같은 생활을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괴로워하면서 생활을 포기하고 방탕하게 사는 것도 역시 바라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마땅히 새로운 생활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아직 경험해본 일이 없는 그런 생활 말이다!
나는 희망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를 속으로 우습게 여겼다. 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희망 역시 내가 직접 만들어낸 또 하나의 우상이 아닌가? 단지 그의 희망이 보다 현실에 가깝고 절박한 것인 반면, 나의 희망은 더 막연하고 아득하게 멀다는 차이일 뿐이다.
망연해진 내 눈앞에 멀리 파란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짙푸른 하늘 위엔 둥그런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디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다. 본디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토론하기
(1)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가? 무엇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2)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해설읽기
주인공 쉰은 20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이미 몰락할 대로 몰락한 집안이며, 고향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조카만이 살고 있다. 고향 동네 풍경도 역시 초라하고 피폐한 풍경이다. 주인공이 왜 고향을 떠났는지 지금은 도시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는지 소설에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출세를 했다거나 생활이 넉넉하다거나 하지는 않아 보인다. 고향에 돌아온 이유는 고향집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조카를 데려가기 위해서이다. “고향과 작별하기 위해” 돌아온 귀향길이지만, 고향 풍경은 낯설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 자신이 뛰어놀던 고향의 모습이 변한 것에 울컥하지만, 고향은 원래 발전이 없었고 생기를 잃은 황폐한 모습이었다고 고쳐 생각한다. 옛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르면서 정겨운 마음이 살짝 생겨나다가도 그들의 거칠고 속물스런 행동에 기분이 상한다.
어머니로부터 어린 시절 집안이 건재했을 때 자기 집 머슴의 아들이었던 룬투가 집에 들러 자신의 소식을 묻곤 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듣는다. 만난다. 10대 초반에 잠깐이지만 룬투에게 오소리를 잡는 법을 배우면서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으며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갖고있다. 드디어 룬투가 집을 방문하는데, 쉰보다 몇 살 많은 룬투는 쉰을 ‘나으리’라고 부르며 존대한다. 둘 사이에는 이미 두터운 장벽이 세워져 있다. 그의 얼굴은 “숱한 주름살이 새겨져 있지만, 석상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많은 자식들, 흉작, 가혹한 세금, 군인, 도적,관리, 향신 그런 모든 것들이 그를 괴롭혀서 그를 장승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는 괴로움을 토로하고 표현할 방도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룬투는 처리해야 할 가산 중에서 탁자, 의자, 저울, 재 그리고 향로와 촛대를 골라서 가져가기로 했다.
드디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는 날이다. 전송하러 오고 또 가산을 나눠 가지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두부집 서시’라고 불리는 여자가 룬투가 가지고 가기로 한 물건들에서 그릇을 찾아내며 룬투가 숨겨서 가져가려 했다고 비난한다. 쉰은 듣고 모른척 한다. 배를 타고 올라 옛집이 멀어지는 것을 본다. 고향도 점점 작아진다. 이것을 바라보는 쉰은 아무런 미련도 느끼지 않는다. 도시에서 지낸 자신의 삶도 팍팍했지만 이곳 고향 사람들의 모습은 과거보다도 못한 삶이다. 힘든 살림살이는 너나 할 것 없이 남의 물건을 집어가는 일을 예삿일로 만들고,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은 괴팍하고 거칠고 황폐하다. 어떤 자극과 변화도 일어지 않을것 같다.
이들에게 변화의 기대와 희망이란 기껏해야 향로와 촛대를 켜놓고 소원을 비는 것이다.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한 룬투는 희망을 갖고 싶다는 표현일지 모른다. 과연 그런 것으로 희망이 생겨나고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생각하며 피식 웃음이 난다. 그렇지만 나 자신은 어떤가? 어머니와 조카와 함께 고향집을 정리하고 오지만 도시로 이들을 데려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 이들 또한 도시에서 별다를 바 없는 팍팍한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알기에 나의 막연한 희망도 룬투의 희망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희망이란 애초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일까? 희망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 것일까? 쉰은 희망을 길에 비유한다. 길은 애초 땅에 있었던 게 아니다. 어딘가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걷고 또 걷다보니 좁은 오솔길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점차 넓어지고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그곳으로 다니게 된 것이다. 소문으로만 들은 미지의 그곳을 가고 싶다는 희망만으로는 그 장소에 도달할 수 없다. 당장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하고 발자국을 남겨 다른 이도 내 발자국을 따라 올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이도 더 깊이 패인 발자국을 따라 오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길을 내며 계속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본 적이 없는 ‘그곳’에 도달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될 것이다. 마음속 희망이 아닌, 길 위의 한 걸음이 소중한 이유이다.
키워드
고향, 근현대중국, 길, 절망, 희망
전후맥락
주인공 쉰은 20년 만에 고향을 방문한다. 고향 집을 정리하고 남아 있는 어머니와 조카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미 쇠락하고 삭막하게 변해있다. 어머니는 객지 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돈이 될 만한 살림도구를 처분하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인사차 찾아와 물건들을 빼돌리기 일쑤다. 이때 집안이 쇠락하기 이전 자기 집의 머슴의 아들이던 룬투가 쉰을 보러 찾아온다. 룬투는 머슴의 아들이었지만 비슷한 또래라서 친하게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낸 동무이다.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는 먹고 사는 일에 찌든 초라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더 이상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르는 룬투와 쉰 사이에는 어색함만 흐른다. 룬투는 향로와 촛대 등 몇 개의 가재도구를 챙겼다. 드디어 고향집을 떠나는 날이다. 쉰과 어머니, 조카는 배에 올라타 옛집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본다.
고전본문
어머니와 훙얼은 모두 잠이 들었다. 나도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배 밑바닥에 부딪치는 잔잔한 물소리를 들으며, 난 내가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룬투와 나는 이미 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로 이어져 있다. 훙얼이 바로 쉐이성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난 그 애들이 또다시 나와 같은 단절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마음을 잇기 위해 모두 나처럼 괴롭게 이곳저곳 떠도는 생활을 하는 것도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이 모두 룬투처럼 괴롭고 힘들어서 마비된 것 같은 생활을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괴로워하면서 생활을 포기하고 방탕하게 사는 것도 역시 바라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마땅히 새로운 생활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아직 경험해본 일이 없는 그런 생활 말이다!
나는 희망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를 속으로 우습게 여겼다. 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희망 역시 내가 직접 만들어낸 또 하나의 우상이 아닌가? 단지 그의 희망이 보다 현실에 가깝고 절박한 것인 반면, 나의 희망은 더 막연하고 아득하게 멀다는 차이일 뿐이다.
망연해진 내 눈앞에 멀리 파란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짙푸른 하늘 위엔 둥그런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디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다. 본디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토론하기
(1)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가? 무엇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2)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해설읽기
주인공 쉰은 20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이미 몰락할 대로 몰락한 집안이며, 고향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조카만이 살고 있다. 고향 동네 풍경도 역시 초라하고 피폐한 풍경이다. 주인공이 왜 고향을 떠났는지 지금은 도시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는지 소설에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출세를 했다거나 생활이 넉넉하다거나 하지는 않아 보인다. 고향에 돌아온 이유는 고향집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조카를 데려가기 위해서이다. “고향과 작별하기 위해” 돌아온 귀향길이지만, 고향 풍경은 낯설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 자신이 뛰어놀던 고향의 모습이 변한 것에 울컥하지만, 고향은 원래 발전이 없었고 생기를 잃은 황폐한 모습이었다고 고쳐 생각한다. 옛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르면서 정겨운 마음이 살짝 생겨나다가도 그들의 거칠고 속물스런 행동에 기분이 상한다.
어머니로부터 어린 시절 집안이 건재했을 때 자기 집 머슴의 아들이었던 룬투가 집에 들러 자신의 소식을 묻곤 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듣는다. 만난다. 10대 초반에 잠깐이지만 룬투에게 오소리를 잡는 법을 배우면서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으며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갖고있다. 드디어 룬투가 집을 방문하는데, 쉰보다 몇 살 많은 룬투는 쉰을 ‘나으리’라고 부르며 존대한다. 둘 사이에는 이미 두터운 장벽이 세워져 있다. 그의 얼굴은 “숱한 주름살이 새겨져 있지만, 석상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많은 자식들, 흉작, 가혹한 세금, 군인, 도적,관리, 향신 그런 모든 것들이 그를 괴롭혀서 그를 장승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는 괴로움을 토로하고 표현할 방도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룬투는 처리해야 할 가산 중에서 탁자, 의자, 저울, 재 그리고 향로와 촛대를 골라서 가져가기로 했다.
드디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는 날이다. 전송하러 오고 또 가산을 나눠 가지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두부집 서시’라고 불리는 여자가 룬투가 가지고 가기로 한 물건들에서 그릇을 찾아내며 룬투가 숨겨서 가져가려 했다고 비난한다. 쉰은 듣고 모른척 한다. 배를 타고 올라 옛집이 멀어지는 것을 본다. 고향도 점점 작아진다. 이것을 바라보는 쉰은 아무런 미련도 느끼지 않는다. 도시에서 지낸 자신의 삶도 팍팍했지만 이곳 고향 사람들의 모습은 과거보다도 못한 삶이다. 힘든 살림살이는 너나 할 것 없이 남의 물건을 집어가는 일을 예삿일로 만들고,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은 괴팍하고 거칠고 황폐하다. 어떤 자극과 변화도 일어지 않을것 같다.
이들에게 변화의 기대와 희망이란 기껏해야 향로와 촛대를 켜놓고 소원을 비는 것이다.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한 룬투는 희망을 갖고 싶다는 표현일지 모른다. 과연 그런 것으로 희망이 생겨나고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생각하며 피식 웃음이 난다. 그렇지만 나 자신은 어떤가? 어머니와 조카와 함께 고향집을 정리하고 오지만 도시로 이들을 데려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 이들 또한 도시에서 별다를 바 없는 팍팍한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알기에 나의 막연한 희망도 룬투의 희망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희망이란 애초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일까? 희망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 것일까? 쉰은 희망을 길에 비유한다. 길은 애초 땅에 있었던 게 아니다. 어딘가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걷고 또 걷다보니 좁은 오솔길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점차 넓어지고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그곳으로 다니게 된 것이다. 소문으로만 들은 미지의 그곳을 가고 싶다는 희망만으로는 그 장소에 도달할 수 없다. 당장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하고 발자국을 남겨 다른 이도 내 발자국을 따라 올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이도 더 깊이 패인 발자국을 따라 오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길을 내며 계속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본 적이 없는 ‘그곳’에 도달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될 것이다. 마음속 희망이 아닌, 길 위의 한 걸음이 소중한 이유이다.
키워드
고향, 근현대중국, 길, 절망,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