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부산 발 신경(新京, 만주국 수도, 지금의 장춘)행 급행열차 식당에 모여 술자리를 하는 네 명의 남자들로부터 시작한다. 광고회사원, 축산회사원, 조선신문 동경지국 기자 등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일본에서 함께 대학을 다닌 동창생이다. 지금 모두 동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연말 휴가를 맞아 귀향하던 중 부산에서 만났다. 술이 얼큰해지자 신문기자 친구는 신경행 열차에 오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며 그에 대해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고 당시 사람들이 부르던 대로 왕백작이라고 칭했다. 신문기자 친구가 왕백작을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 동경에 있는 경찰서 유치장에서였다. 그는 유치장에서 우스꽝스러운 기행으로 주변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지만 예상 밖에 그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도지사로 있었다.
고전본문
어떤 날 밤 나는 잠깐이나마 변소 안에서 그와 함께 몰래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내 방 사람들이 모두 변소에 나갔을 때다. 바로 왕백작은 괴로운 자세로 같은 방 사람들보다 떨어져 혼자 소변대 위에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가서 나란히 서 있었다.
“몸은 괜찮은가.”
“응 고맙네……괜찮어.”
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하나 그 목소리가 듣기에 너무나 가늘고 숨이 괴로워 보이기에 나는 놀라서 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런 즉 그는 아주 뻐기는 듯이 히죽 웃더니
“나는 죠렌*이어서 뭐.”
한다. 그 얼굴은 이상하게도 찔린 듯이 새하얗다.
“언제 나가는가.”
“나야 아마 송국(送局)**일걸.”
그러나마 기운 없는 떨리는 목소리면서도 어쩐지 내심 득의양양한 눈치였다.
“크게 다치는 일인가.”
“나? 헤헤헤 그게야 누구 보구 말할 수 있나 헤헤헤.”
하더니만 그는 별안간 커다란 공허스런 눈을 희번덕이며 목구멍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런데 아나키스트란 무언가?”
“아나키스트라니 거야 말하자면……”하고 나는 그 말문이 막히어 어쩔 줄을 모르며 끝을 못 맺었다. 글쎄 한 3년 전의 일이니까 옛적이라고도 할까. 그 시절에 있어서는 아나키스트도 있기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자 이 왕 백작이 돌연 넘어질 듯이 몸을 비틀거리며 에헤에헤 웃어대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에헤헤 에헤 내가 그것이라우 바루 그것이야.”
그게 너무 엉뚱한 큰 소리였기 때문에 나는 펄쩍 놀라며 옆에 술통 앞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오금을 펴지 못하였다. 간수가 듣지나 않았을까 하여. 어쨌든 이 모양으로 그는 실로 무지하고 광신적이며 또 그리고 곧잘 허풍을 떠는 성질이었다. 그는 병이 중태에 이르렀을 때에도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철창 문 옆에 비스듬히 기대고는 아무 방 사나이 보고라도 말을 걸고 선전하였다.
“아마 결국 나는 아나키스트란 말이야. 무슨 일이 나기만 하면 턱하고 붙들려오거던. 그런데 아마 아나키스트란 무엔지 네 아냐 말이다? 응 그렇지 모를 테지?”그러나 감방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의 말을 곧이 들을려고는 하지 않았다.
…
그리고 그의 범죄라는 것이 또 늘 아주 기괴하였다. 어디서든지 부덕한 사람이 검속된 것을 안다 치면 무슨 생각엔지 그 뒤다름으로 주인공인 사람한테 자못 중대해 보이는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이게 큰일이구나 해서 뛰어가 살펴보면 역시 사나이의 짓인 것이 판명되곤 하였다. 이번만 하더라도 같이 하숙하고 있는 대학생이 무슨 혐의론지 붙들려가자 이어 그 방으로 들어가서 수상해 보이는 서적이며 그 외 증거물 같은 것을 자기 방으로 옮겨다 놓았던 것이다. 형사가 가택 수색을 하러 나가본즉 온통 방안 모습이 달라졌기에 알아보니까 왕백작이 그것을 제 방으로 갔다가 이 모퉁이 저 모퉁이 쌓채이고서 그 가운데 네활개를 펴고 드러누워 있었다. 그래 동행을 요구하니까 그는 벌떡 일어나 덜렁덜렁 따라 나왔다는 것이다.
[출전] 김사량,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죠렌: 단골을 뜻하는 일본어
**송국: 검찰에 송치됨
토론하기
(1) 도지사 아버지를 둔 왕백작이 사상범을 자처하면서 유치장을 드나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주변에서 혹은 소설이나 영화, 웹툰 등에서 왕백작과 같은 캐릭터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기이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설읽기
왕백작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투성이다. 점심때면 특고실로 불려나가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 먹고 신문과 잡지도 자유롭게 읽는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신문기자인 내가 확인한 바로는 모찌떡 하나를 위해 변소 청소에 열심인 비굴한 모습이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을 사상가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것이다. 변소에서 우연히 얘기하며 건강을 묻는 신문기자 나의 물음에 자신은 유치장의 단골 손님이라 건강 따위야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한다. 그 말투에는 우쭐대는 느낌이 묻어 있다. 곧 검찰로 송치될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도 ‘내심 득의양양’한 눈치이다. 자신이 사상범으로서 유치장을 자주 드나들며 조만간 기소될 거라는 사실에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역력하다.
그는 사상가를 자처하지만, 자신이 자처하는 사상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신문기자인 나에게 자신이 바로 아나키스트라며 고백하기도 하고, 또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나키스트임을 선전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하고 있는 아나키스트란 “무슨 일이 나기만 하면 턱하고 붙들려오는”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수십 차례 경찰서에 붙들려 왔다. 아나키스트의 진의를 잘 알지 못하는 왕백작은 진짜 사상범인 신문기자에게 아나키스트가 무엇인지를 슬쩍 물어보기도 한다. 아나키즘은 1910년대와 20년대에 유행했던 사상이고 30년대 후반인 지금은 더 이상 위험하지도 불온하지도 않은 사상이다.
그런데 그가 잡혀온 이유가 매우 이상하다. 일례로 같은 하숙집의 대학생이 불온사상 혐의로 붙잡혀 가면 그의 집에 들어가서 수상한 책 같은 것들을 자기 방에 옮겨다 놓는다. 그러고는 형사가 올 무렵이면 옮겨놓은 물건을 잘 보이게 놓아둔다. 형사가 동행을 요구하면 옳다구나 하고 따라나서는 것이다. 실로 그의 행동은 당시의 사상범들과 자신을 연루시키고 유치장에 갇히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단지 사상가인척 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상범이 되어 유치장에 갇히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것은 멋지고 폼 나는 행동이므로 하는 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왕백작이 어떤 삶을 동경했는지, 어떻게 살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알 수 없다. 정신분열에 가깝지만 그가 흉내 내고 척하고 싶었던 사람들을 미루어 본다면 당시 식민 제국의 폭력에 대해 ‘사상’을 가지고 저항하는 사람을 영웅시했을 것이다. 아울러 식민지 제국의 폭력에 희생되고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동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웅시하고 동경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과 실제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렇게 살기도 어렵거니와 주류와 다수의 ‘문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희화화될 뿐이다. ‘유행에 뒤처지고 철지난’ 아나키스라고 조롱받는 것처럼.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의 배경이 된 1930년대 말 40년대 초는 중일전쟁의 시작과 함께 일본 제국이 전시체제로 돌입한 시대이다. 아나키즘이든, 민족자결주의든, 사회주의든 사상을 근거로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행동은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시대에 반하는 행동으로 치부되었다. 어찌 보면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나라도 정부도 없는데, 아나키스트를 주창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왕백작이 아나키스트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의 삶의 방식은 이미 시대의 표준에서 벗어났으므로 세상과의 소통은 불가능하고 이해받지 못한 그의 행동은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왕백작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인물로 상정하고 있지만, 그 또한 세상이 기이하다. 식민 제국은 식민지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전쟁을 일으켜 사회를 전시체제로 만들었다. 게다가 삶의 터전을 잃고 절망의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 식민 제국이 건설한 괴뢰국인 만주국으로 이주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만주로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희망을 얘기하지만, 왕백작에게는 통곡의 대상의 절망의 현장이다.
저항과 협력의 이분법에 비추어 볼 때 왕백작은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한다. 적극적으로 저항한 적도 없고, 적극적으로 협력한 적도 없다. 식민 제국에 협력하여 제국인으로 살든지, 아니면 식민 제국에 반하고 저항하는 삶을 살든지. 그 시대의 바깥에 있는 후대의 사람들은 이런 두 가지 삶을 유형화하고 평가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두 가지 삶의 유형이 명확히 분리되기는 어렵다. 왕백작이 기괴한 발음으로 일본어와 조선어를 섞어 쓰는 것처럼, 저항과 협력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기는 쉽지 않다.
식민지 시기 김사량의 작품은 대부분 일본어로 쓰였지만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는 조선어로 창작되었고, 일본어로 번역되어 <Q백작>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두 번째 창작집 <고향>에 수록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Q백작은 루쉰의 아Q를 연상시킨다. 일본의 평론가들도 Q백작과 아Q와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호평했다. 그렇지만 왕백작은 아Q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 아큐는 계몽의 대상이고, 아큐를 계몽해야 하는 사람마저도 계몽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루쉰이 <아Q정전>을 썼을 때의 문제의식이다. 이중 삼중의 계몽의 과제를 갖고 있지만, 목표는 명확하다.
왕백작에게는 시대에 부합하며 시대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계몽의 힘에 장악되지 않는 것이 목표이다. 그는 식민 제국이 추진하는 전시 체제에 잘 부합되는 인간으로 계몽되고 싶지 않다. 갱생하여 광명의 시대에 걸 맞는 인간으로 개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개조되지 않은 반계몽의 인간으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 삶의 의지는 있으나 방향은 없다. 요컨대 그의 기행은 동력은 있으나 방향성을 상실한 힘의 움직임이다. 방향성을 상실한 힘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고 늘 사람들의 예상치를 벗어난다.
키워드
광인,식민지, 아나키스트, 왕백작, 유치장, 정신 분열
전후맥락
소설은 부산 발 신경(新京, 만주국 수도, 지금의 장춘)행 급행열차 식당에 모여 술자리를 하는 네 명의 남자들로부터 시작한다. 광고회사원, 축산회사원, 조선신문 동경지국 기자 등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일본에서 함께 대학을 다닌 동창생이다. 지금 모두 동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연말 휴가를 맞아 귀향하던 중 부산에서 만났다. 술이 얼큰해지자 신문기자 친구는 신경행 열차에 오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며 그에 대해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고 당시 사람들이 부르던 대로 왕백작이라고 칭했다. 신문기자 친구가 왕백작을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 동경에 있는 경찰서 유치장에서였다. 그는 유치장에서 우스꽝스러운 기행으로 주변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지만 예상 밖에 그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도지사로 있었다.
고전본문
어떤 날 밤 나는 잠깐이나마 변소 안에서 그와 함께 몰래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내 방 사람들이 모두 변소에 나갔을 때다. 바로 왕백작은 괴로운 자세로 같은 방 사람들보다 떨어져 혼자 소변대 위에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가서 나란히 서 있었다.
“몸은 괜찮은가.”
“응 고맙네……괜찮어.”
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하나 그 목소리가 듣기에 너무나 가늘고 숨이 괴로워 보이기에 나는 놀라서 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런 즉 그는 아주 뻐기는 듯이 히죽 웃더니
“나는 죠렌*이어서 뭐.”
한다. 그 얼굴은 이상하게도 찔린 듯이 새하얗다.
“언제 나가는가.”
“나야 아마 송국(送局)**일걸.”
그러나마 기운 없는 떨리는 목소리면서도 어쩐지 내심 득의양양한 눈치였다.
“크게 다치는 일인가.”
“나? 헤헤헤 그게야 누구 보구 말할 수 있나 헤헤헤.”
하더니만 그는 별안간 커다란 공허스런 눈을 희번덕이며 목구멍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런데 아나키스트란 무언가?”
“아나키스트라니 거야 말하자면……”하고 나는 그 말문이 막히어 어쩔 줄을 모르며 끝을 못 맺었다. 글쎄 한 3년 전의 일이니까 옛적이라고도 할까. 그 시절에 있어서는 아나키스트도 있기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자 이 왕 백작이 돌연 넘어질 듯이 몸을 비틀거리며 에헤에헤 웃어대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에헤헤 에헤 내가 그것이라우 바루 그것이야.”
그게 너무 엉뚱한 큰 소리였기 때문에 나는 펄쩍 놀라며 옆에 술통 앞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오금을 펴지 못하였다. 간수가 듣지나 않았을까 하여. 어쨌든 이 모양으로 그는 실로 무지하고 광신적이며 또 그리고 곧잘 허풍을 떠는 성질이었다. 그는 병이 중태에 이르렀을 때에도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철창 문 옆에 비스듬히 기대고는 아무 방 사나이 보고라도 말을 걸고 선전하였다.
“아마 결국 나는 아나키스트란 말이야. 무슨 일이 나기만 하면 턱하고 붙들려오거던. 그런데 아마 아나키스트란 무엔지 네 아냐 말이다? 응 그렇지 모를 테지?”그러나 감방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의 말을 곧이 들을려고는 하지 않았다.
…
그리고 그의 범죄라는 것이 또 늘 아주 기괴하였다. 어디서든지 부덕한 사람이 검속된 것을 안다 치면 무슨 생각엔지 그 뒤다름으로 주인공인 사람한테 자못 중대해 보이는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이게 큰일이구나 해서 뛰어가 살펴보면 역시 사나이의 짓인 것이 판명되곤 하였다. 이번만 하더라도 같이 하숙하고 있는 대학생이 무슨 혐의론지 붙들려가자 이어 그 방으로 들어가서 수상해 보이는 서적이며 그 외 증거물 같은 것을 자기 방으로 옮겨다 놓았던 것이다. 형사가 가택 수색을 하러 나가본즉 온통 방안 모습이 달라졌기에 알아보니까 왕백작이 그것을 제 방으로 갔다가 이 모퉁이 저 모퉁이 쌓채이고서 그 가운데 네활개를 펴고 드러누워 있었다. 그래 동행을 요구하니까 그는 벌떡 일어나 덜렁덜렁 따라 나왔다는 것이다.
[출전] 김사량,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죠렌: 단골을 뜻하는 일본어
**송국: 검찰에 송치됨
토론하기
(1) 도지사 아버지를 둔 왕백작이 사상범을 자처하면서 유치장을 드나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주변에서 혹은 소설이나 영화, 웹툰 등에서 왕백작과 같은 캐릭터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기이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설읽기
왕백작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투성이다. 점심때면 특고실로 불려나가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 먹고 신문과 잡지도 자유롭게 읽는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신문기자인 내가 확인한 바로는 모찌떡 하나를 위해 변소 청소에 열심인 비굴한 모습이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을 사상가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것이다. 변소에서 우연히 얘기하며 건강을 묻는 신문기자 나의 물음에 자신은 유치장의 단골 손님이라 건강 따위야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한다. 그 말투에는 우쭐대는 느낌이 묻어 있다. 곧 검찰로 송치될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도 ‘내심 득의양양’한 눈치이다. 자신이 사상범으로서 유치장을 자주 드나들며 조만간 기소될 거라는 사실에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역력하다.
그는 사상가를 자처하지만, 자신이 자처하는 사상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신문기자인 나에게 자신이 바로 아나키스트라며 고백하기도 하고, 또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나키스트임을 선전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하고 있는 아나키스트란 “무슨 일이 나기만 하면 턱하고 붙들려오는”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수십 차례 경찰서에 붙들려 왔다. 아나키스트의 진의를 잘 알지 못하는 왕백작은 진짜 사상범인 신문기자에게 아나키스트가 무엇인지를 슬쩍 물어보기도 한다. 아나키즘은 1910년대와 20년대에 유행했던 사상이고 30년대 후반인 지금은 더 이상 위험하지도 불온하지도 않은 사상이다.
그런데 그가 잡혀온 이유가 매우 이상하다. 일례로 같은 하숙집의 대학생이 불온사상 혐의로 붙잡혀 가면 그의 집에 들어가서 수상한 책 같은 것들을 자기 방에 옮겨다 놓는다. 그러고는 형사가 올 무렵이면 옮겨놓은 물건을 잘 보이게 놓아둔다. 형사가 동행을 요구하면 옳다구나 하고 따라나서는 것이다. 실로 그의 행동은 당시의 사상범들과 자신을 연루시키고 유치장에 갇히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단지 사상가인척 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상범이 되어 유치장에 갇히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것은 멋지고 폼 나는 행동이므로 하는 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왕백작이 어떤 삶을 동경했는지, 어떻게 살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알 수 없다. 정신분열에 가깝지만 그가 흉내 내고 척하고 싶었던 사람들을 미루어 본다면 당시 식민 제국의 폭력에 대해 ‘사상’을 가지고 저항하는 사람을 영웅시했을 것이다. 아울러 식민지 제국의 폭력에 희생되고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동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웅시하고 동경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과 실제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렇게 살기도 어렵거니와 주류와 다수의 ‘문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희화화될 뿐이다. ‘유행에 뒤처지고 철지난’ 아나키스라고 조롱받는 것처럼.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의 배경이 된 1930년대 말 40년대 초는 중일전쟁의 시작과 함께 일본 제국이 전시체제로 돌입한 시대이다. 아나키즘이든, 민족자결주의든, 사회주의든 사상을 근거로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행동은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시대에 반하는 행동으로 치부되었다. 어찌 보면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나라도 정부도 없는데, 아나키스트를 주창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왕백작이 아나키스트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의 삶의 방식은 이미 시대의 표준에서 벗어났으므로 세상과의 소통은 불가능하고 이해받지 못한 그의 행동은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왕백작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인물로 상정하고 있지만, 그 또한 세상이 기이하다. 식민 제국은 식민지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전쟁을 일으켜 사회를 전시체제로 만들었다. 게다가 삶의 터전을 잃고 절망의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 식민 제국이 건설한 괴뢰국인 만주국으로 이주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만주로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희망을 얘기하지만, 왕백작에게는 통곡의 대상의 절망의 현장이다.
저항과 협력의 이분법에 비추어 볼 때 왕백작은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한다. 적극적으로 저항한 적도 없고, 적극적으로 협력한 적도 없다. 식민 제국에 협력하여 제국인으로 살든지, 아니면 식민 제국에 반하고 저항하는 삶을 살든지. 그 시대의 바깥에 있는 후대의 사람들은 이런 두 가지 삶을 유형화하고 평가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두 가지 삶의 유형이 명확히 분리되기는 어렵다. 왕백작이 기괴한 발음으로 일본어와 조선어를 섞어 쓰는 것처럼, 저항과 협력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기는 쉽지 않다.
식민지 시기 김사량의 작품은 대부분 일본어로 쓰였지만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는 조선어로 창작되었고, 일본어로 번역되어 <Q백작>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두 번째 창작집 <고향>에 수록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Q백작은 루쉰의 아Q를 연상시킨다. 일본의 평론가들도 Q백작과 아Q와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호평했다. 그렇지만 왕백작은 아Q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 아큐는 계몽의 대상이고, 아큐를 계몽해야 하는 사람마저도 계몽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루쉰이 <아Q정전>을 썼을 때의 문제의식이다. 이중 삼중의 계몽의 과제를 갖고 있지만, 목표는 명확하다.
왕백작에게는 시대에 부합하며 시대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계몽의 힘에 장악되지 않는 것이 목표이다. 그는 식민 제국이 추진하는 전시 체제에 잘 부합되는 인간으로 계몽되고 싶지 않다. 갱생하여 광명의 시대에 걸 맞는 인간으로 개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개조되지 않은 반계몽의 인간으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 삶의 의지는 있으나 방향은 없다. 요컨대 그의 기행은 동력은 있으나 방향성을 상실한 힘의 움직임이다. 방향성을 상실한 힘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고 늘 사람들의 예상치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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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식민지, 아나키스트, 왕백작, 유치장, 정신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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