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나’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창수’의 집에서 하숙을 한다. 창수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신문에 날 정도로 유명세가 있지만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이런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돈을 못 버는 것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업조차 변변히 이뤄지는 게 아닌 상황을 지켜보면서, 하숙을 하고 있는 ‘나’는 창수에게 차라리 고향인 시골로 내려가서 마름 노릇이라도 하며 잘 살아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창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고전본문
“…… 하여간 그러한 자세한 이론이라든지 실제 문제는, 지금 별안간 이야기를 한댔자, 예비 지식이 없이는 알지 못하지마는, 소위 마름이라는 것은 소작인에게 대한 이중 착취일세. 다시 말하면 지주가 착취를 하는데 그 중간에 서서 또 한 꺼풀을 벗겨 먹는 것일세. 하고 보니까 내 땅을 내가 파먹재도 힘이 부치고 밑천도 없는 형편인데, 남의 소작인 노릇을 하여 이중착취를 당하고는 살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렇다고 마름 노릇을 해서 지주의 주구가 되어 가면서 소작인의 피의 구문(口文)*을 얻어먹고야 앉을 수 있나! 그러니까 이래저래 시골로도 못 가는 걸세 그려” 하며 주인은 일단 끊었던 말을 다시 끄내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하지만 창수씨의 주장은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거든 먹지 말라 하지 않았소? 그리고 지금의 소작제도나 그들의 생활을 우선 개량하고 향상하게 하여야 한다 하지 않았소?” 하고 나도 한 마디 하여보려고 밥술을 멈추며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래 어떻단 말이야?” 하며 주인은 어린아이의 대담한 논박을 귀염삼아 들으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창수씨부터 다시 고향에 가서 자기 손으로 땅을 파서, 자기도 먹고 처자도 길러야 할 게 아니오. 그리고 마름이 이중착취라고 배척만 말고, 창수씨가 마름이 되어서 그런 폐단을 고쳐가도록 하는 것이 결국은 소작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겠소? 창수씨가 아니 한다면, 창수씨가 할 자리를 다른 지독한 놈이 할 게 아니오? 창수씨가 할 자리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마는……” 하며 나도 웃어버렸다. 주인도 픽 웃으면서
“그도 그럴 듯은 하지만……” 하고 입을 닥친다.
“그도 그러하지만―이 아니라, 창수씨부터 실행을 해야, 자기 생활이나 우선 안정을 해놓고나야 남의 일도 할 힘이 뻗지 않겠소. 가령 당신이 지금 당신의 아들이나 누가 벌어다가 주는 것을 먹으면서 당신의 사업을 한다 하면, 그것도 이중착취인가 무엇인가 하는 게 아니오?! 그는 그렇다 하고, 하여간 같은 이중착취고 보면 촌에 가서 마름이고 무엇이고 하면서, 정말 소작인들을 직접 가르치고 당신의 의견이나 주의를 펼쳐놓는 것이 정말 일다운 일이 아니겠소? 나는 그 주의라는 것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러고 보면 왜 이런 서울에서, 마치 담안에 앉아서 막대기를 내어 휘두르는 것 같은 일을 하면서 붙들려 가고 밥을 굶고 할 것이 뭐 있느냐는 말이오?” 하며, 나는 자기 말에 대한 자신은 없으나마 이렇게 공격을 하여 보았다.
*구문(口文): 흥정을 붙여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염상섭의 「밥」중에서
토론하기
(1) 당신이 ‘창수’의 입장이라면 ‘나’의 조언을 따르겠는가?
(2) 학생들을 서열화하고 지나친 경쟁을 만들어내는 오늘날의 입시제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나중에 선생님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①입시제도가 부당하긴 하지만 지금의 교육제도에 순응하면서 서열화와 경쟁 분위기를 조금 낮춰보기 위한 노력을 한다. ②부당한 교육제도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교육철학이 담긴 대안학교를 설립한다. 둘 중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 이야기하고 그 이유를 말해보자.
해설읽기
위의 인용문은 1920년대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와 한 평범한 일반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변변한 일자리 하나 없이 궁핍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일다운 일을 해서 먹을 것이나마 잘 챙겨먹고 사는 게 어떻냐는 ‘나’의 관점에 대해 창수는 찬성할 수 없다.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도 부끄러운 데다가, 이미 하던 사업을 이제 와서 팽개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상과 맞지 않아서 고향으로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사상’과 맞지 않아서 고향에 내려갈 수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창수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고향인 시골에 내려가서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세 가지다. 1)지주, 2)마름, 3)소작인. 창수의 처지에 땅 주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는 것은 마름과 소작인뿐인데 ‘착취적인 제도’에 동의할 수 없는 창수는 이 일들을 하고 싶지 않다. 사전을 보면 ‘착취’란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함을 뜻한다. 농사 일에서는 땅 주인인 ‘지주’가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다. ‘소작인’의 경우, 땅 주인은 아니지만 소작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지주의 땅에 대한 경작권을 부여받아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는 실질적으로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 거두어들인 곡식을 아무런 노동 없이 취득하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창수가 지적하다시피 당시의 소작제도 하에는 이른바 ‘마름’이라는 ‘중간관리자’가 있었다. ‘마름’은 지주의 대리인으로서 ①소작인으로부터 소작료를 거두어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②소작인을 선정하거나 해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③또, 농사가 잘 되고 못 되고에 따라 소작료율을 어느 정도씩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마름이 중요한 권한과 역할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소작 농민의 입장에서는 마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추가적인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하다는 원성이 자자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창수가 ‘착취’나 ‘이중착취’와 같은 말을 쓰면서 시골로 돌아가는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와 같은 농촌 현실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창수의 생각은 이 작품이 쓰여진 1920년대 후반의 농촌 현실을 생각해볼 때 타당하다.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강제병합된 이후 조선시대부터 소작인이 가지고 있었던 권리들이 크게 약화되면서 소작권을 둘러싼 경쟁이 소작인들 사이에서 이전보다 훨씬 치열해졌다. 그러다보니 소작료도 지속적으로 상승해서 1920년대 후반이 되면 지주에게 전체 생산량의 60%가 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수준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마름에게까지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으니 소작농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분배의 정의’를 중요시하는 창수로서는 착취하기도 싫고 착취를 당하기도 싫었을 테니 차라리 서울에 남아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는 게 나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생각도 타당하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창수는 ‘착취’가 싫답시고 서울에서 별다른 효과도 없어 보이는 독립운동을 하며 정작 식구들이 굶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무능력한 가장일 뿐이다. ‘착취’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이라면, 창수처럼 다른 식구들이 벌어다 주는 돈만 받아먹으며 아무 득도 없어 보이는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착취인 것은 마찬가지일 수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창수가 차라리 ‘착한 마름’이 되는 편이 보다 합리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농촌의 소작제도와 ‘마름’의 폐해가 그렇게나 심각하다면 차라리 ‘착한 마름’이 되어서 폐단을 고쳐가는 게 낫지 방구석에 앉아서 훈수나 두면 무엇하냐는 것이다. 창수가 착한 마름이 된다면, 오히려 1) 가족들을 굶기지 않고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고, 2) 현실의 소작인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실질적으로 개선해줄 수도 있으며, 3) 소작인들이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자각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나’와 ‘창수’의 대립을 통해 우리는 ‘나’가 말하는 대로 착한 관리자가 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언뜻 본다면 ‘창수’의 주장은 이론적으로만 옳고 실질적으로는 별 다른 효용이 없어 보인다. 정말이지 ‘나’가 말하는 대로 ‘착한 마름’이 되어 농촌 현실의 개선에 힘쓰면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중요한 문제가 있다. 창수 혼자 ‘착한 마름’이 된다 한들, 착취적인 소작 제도 자체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선에는 여전히 수많은 지주와 마름들이 있고 수많은 소작농들이 있다. 창수가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들 전체적인 식민지 현실을 개선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지지부진하더라도 창수처럼 서울에 남아 독립운동이 활기를 얻을 수 있는 방략을 모색해보는 것이 민족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선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마름’은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므로 지주의 이익을 배반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아무리 창수가 좋은 뜻을 가지고 착취적인 소작 제도를 개선해보려 한들 지주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배반하면 바로 마름 자리에서 해고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창수는 ‘나’의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글쎄, 김군 말도 일리가 있기는 있어! 하지만 세상 일이란 그렇게 우리들이 마주 말하듯이 되는 건 아니니까…… 하여간 같은 일에도, 사람따라 다른 것이니까 천편일률로는 안 되는 게지!……”
키워드
농촌, 마름, 소작인, 착취
전후맥락
나’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창수’의 집에서 하숙을 한다. 창수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신문에 날 정도로 유명세가 있지만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이런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돈을 못 버는 것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업조차 변변히 이뤄지는 게 아닌 상황을 지켜보면서, 하숙을 하고 있는 ‘나’는 창수에게 차라리 고향인 시골로 내려가서 마름 노릇이라도 하며 잘 살아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창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고전본문
“…… 하여간 그러한 자세한 이론이라든지 실제 문제는, 지금 별안간 이야기를 한댔자, 예비 지식이 없이는 알지 못하지마는, 소위 마름이라는 것은 소작인에게 대한 이중 착취일세. 다시 말하면 지주가 착취를 하는데 그 중간에 서서 또 한 꺼풀을 벗겨 먹는 것일세. 하고 보니까 내 땅을 내가 파먹재도 힘이 부치고 밑천도 없는 형편인데, 남의 소작인 노릇을 하여 이중착취를 당하고는 살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렇다고 마름 노릇을 해서 지주의 주구가 되어 가면서 소작인의 피의 구문(口文)*을 얻어먹고야 앉을 수 있나! 그러니까 이래저래 시골로도 못 가는 걸세 그려” 하며 주인은 일단 끊었던 말을 다시 끄내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하지만 창수씨의 주장은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거든 먹지 말라 하지 않았소? 그리고 지금의 소작제도나 그들의 생활을 우선 개량하고 향상하게 하여야 한다 하지 않았소?” 하고 나도 한 마디 하여보려고 밥술을 멈추며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래 어떻단 말이야?” 하며 주인은 어린아이의 대담한 논박을 귀염삼아 들으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창수씨부터 다시 고향에 가서 자기 손으로 땅을 파서, 자기도 먹고 처자도 길러야 할 게 아니오. 그리고 마름이 이중착취라고 배척만 말고, 창수씨가 마름이 되어서 그런 폐단을 고쳐가도록 하는 것이 결국은 소작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겠소? 창수씨가 아니 한다면, 창수씨가 할 자리를 다른 지독한 놈이 할 게 아니오? 창수씨가 할 자리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마는……” 하며 나도 웃어버렸다. 주인도 픽 웃으면서
“그도 그럴 듯은 하지만……” 하고 입을 닥친다.
“그도 그러하지만―이 아니라, 창수씨부터 실행을 해야, 자기 생활이나 우선 안정을 해놓고나야 남의 일도 할 힘이 뻗지 않겠소. 가령 당신이 지금 당신의 아들이나 누가 벌어다가 주는 것을 먹으면서 당신의 사업을 한다 하면, 그것도 이중착취인가 무엇인가 하는 게 아니오?! 그는 그렇다 하고, 하여간 같은 이중착취고 보면 촌에 가서 마름이고 무엇이고 하면서, 정말 소작인들을 직접 가르치고 당신의 의견이나 주의를 펼쳐놓는 것이 정말 일다운 일이 아니겠소? 나는 그 주의라는 것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러고 보면 왜 이런 서울에서, 마치 담안에 앉아서 막대기를 내어 휘두르는 것 같은 일을 하면서 붙들려 가고 밥을 굶고 할 것이 뭐 있느냐는 말이오?” 하며, 나는 자기 말에 대한 자신은 없으나마 이렇게 공격을 하여 보았다.
*구문(口文): 흥정을 붙여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염상섭의 「밥」중에서
토론하기
(1) 당신이 ‘창수’의 입장이라면 ‘나’의 조언을 따르겠는가?
(2) 학생들을 서열화하고 지나친 경쟁을 만들어내는 오늘날의 입시제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나중에 선생님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①입시제도가 부당하긴 하지만 지금의 교육제도에 순응하면서 서열화와 경쟁 분위기를 조금 낮춰보기 위한 노력을 한다. ②부당한 교육제도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교육철학이 담긴 대안학교를 설립한다. 둘 중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 이야기하고 그 이유를 말해보자.
해설읽기
위의 인용문은 1920년대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와 한 평범한 일반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변변한 일자리 하나 없이 궁핍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일다운 일을 해서 먹을 것이나마 잘 챙겨먹고 사는 게 어떻냐는 ‘나’의 관점에 대해 창수는 찬성할 수 없다.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도 부끄러운 데다가, 이미 하던 사업을 이제 와서 팽개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상과 맞지 않아서 고향으로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사상’과 맞지 않아서 고향에 내려갈 수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창수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고향인 시골에 내려가서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세 가지다. 1)지주, 2)마름, 3)소작인. 창수의 처지에 땅 주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는 것은 마름과 소작인뿐인데 ‘착취적인 제도’에 동의할 수 없는 창수는 이 일들을 하고 싶지 않다. 사전을 보면 ‘착취’란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함을 뜻한다. 농사 일에서는 땅 주인인 ‘지주’가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다. ‘소작인’의 경우, 땅 주인은 아니지만 소작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지주의 땅에 대한 경작권을 부여받아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는 실질적으로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 거두어들인 곡식을 아무런 노동 없이 취득하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창수가 지적하다시피 당시의 소작제도 하에는 이른바 ‘마름’이라는 ‘중간관리자’가 있었다. ‘마름’은 지주의 대리인으로서 ①소작인으로부터 소작료를 거두어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②소작인을 선정하거나 해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③또, 농사가 잘 되고 못 되고에 따라 소작료율을 어느 정도씩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마름이 중요한 권한과 역할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소작 농민의 입장에서는 마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추가적인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하다는 원성이 자자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창수가 ‘착취’나 ‘이중착취’와 같은 말을 쓰면서 시골로 돌아가는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와 같은 농촌 현실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창수의 생각은 이 작품이 쓰여진 1920년대 후반의 농촌 현실을 생각해볼 때 타당하다.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강제병합된 이후 조선시대부터 소작인이 가지고 있었던 권리들이 크게 약화되면서 소작권을 둘러싼 경쟁이 소작인들 사이에서 이전보다 훨씬 치열해졌다. 그러다보니 소작료도 지속적으로 상승해서 1920년대 후반이 되면 지주에게 전체 생산량의 60%가 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수준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마름에게까지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으니 소작농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분배의 정의’를 중요시하는 창수로서는 착취하기도 싫고 착취를 당하기도 싫었을 테니 차라리 서울에 남아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는 게 나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생각도 타당하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창수는 ‘착취’가 싫답시고 서울에서 별다른 효과도 없어 보이는 독립운동을 하며 정작 식구들이 굶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무능력한 가장일 뿐이다. ‘착취’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이라면, 창수처럼 다른 식구들이 벌어다 주는 돈만 받아먹으며 아무 득도 없어 보이는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착취인 것은 마찬가지일 수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창수가 차라리 ‘착한 마름’이 되는 편이 보다 합리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농촌의 소작제도와 ‘마름’의 폐해가 그렇게나 심각하다면 차라리 ‘착한 마름’이 되어서 폐단을 고쳐가는 게 낫지 방구석에 앉아서 훈수나 두면 무엇하냐는 것이다. 창수가 착한 마름이 된다면, 오히려 1) 가족들을 굶기지 않고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고, 2) 현실의 소작인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실질적으로 개선해줄 수도 있으며, 3) 소작인들이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자각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나’와 ‘창수’의 대립을 통해 우리는 ‘나’가 말하는 대로 착한 관리자가 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언뜻 본다면 ‘창수’의 주장은 이론적으로만 옳고 실질적으로는 별 다른 효용이 없어 보인다. 정말이지 ‘나’가 말하는 대로 ‘착한 마름’이 되어 농촌 현실의 개선에 힘쓰면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중요한 문제가 있다. 창수 혼자 ‘착한 마름’이 된다 한들, 착취적인 소작 제도 자체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선에는 여전히 수많은 지주와 마름들이 있고 수많은 소작농들이 있다. 창수가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들 전체적인 식민지 현실을 개선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지지부진하더라도 창수처럼 서울에 남아 독립운동이 활기를 얻을 수 있는 방략을 모색해보는 것이 민족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선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마름’은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므로 지주의 이익을 배반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아무리 창수가 좋은 뜻을 가지고 착취적인 소작 제도를 개선해보려 한들 지주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배반하면 바로 마름 자리에서 해고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창수는 ‘나’의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글쎄, 김군 말도 일리가 있기는 있어! 하지만 세상 일이란 그렇게 우리들이 마주 말하듯이 되는 건 아니니까…… 하여간 같은 일에도, 사람따라 다른 것이니까 천편일률로는 안 되는 게지!……”
키워드
농촌, 마름, 소작인, 착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