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어느 날, ‘나’는 친구인 ‘김군’이 주간으로 있는 신문사를 찾아간다. 신문사에는 ‘김군’만이 아니라 ‘윤’도 있었다. ‘윤’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 일제가 작가들로 하여금 친일적인 글을 쓰게끔 강요하고 친일적인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도록 만든 것에 반대해 기자 일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버렸다. 반면에 ‘나’는 일제의 강요와 협박,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수사 행태에 큰 두려움을 느껴 친일적인 강연에 참여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윤’은 이러한 ‘나’의 행동이 반민족적이라는 이유로 크게 비난한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이 그때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돌아본다. 아래의 인용문은 일제에 협력하게 된 이후 ‘나’가 겪은 경험의 일부이다.
고전본문
“우리는 시방 앞날이 깜깜합니다. 자꾸만 비관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단박에 대답이 막혔다.
그야 대답을 하기로 들면, 시원히 하여 줄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10여명 이상이나 모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막상 다 미더운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이 자리에서 한 말이 한 집 건너고 두 입 건너 필경엔 경찰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고.
명색이 선배라고 믿고서 그들은 진심의 호소를 하던 것이었다.
모인 전부가 낮에 강연회에도 와서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낮에 강연회에서 지껄인 소리는 본의가 아니고 할 수 없이 그런 것이요, 진심은 그렇지 않거니 이렇게 나를 믿고서 자기네도 진심을 토로함이었었다.
소문이 퍼질까 저어하여, 경찰의 형벌이 두려워, 이 나를 믿고서 와 안기어 고민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의 진심에 대하여 한 가지로 진심이지 못하는 나의 비겁함, 그 용렬스러움.
나는 나 자신이 야속하고 또한 슬펐다.
(…)
“여기 모인 우리 태반이, 징병이나 학병으로 끌려나가야 할 사람입니다. 끌려나가서 개주검을 해야 합니까?”
나는 등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여럿은 먹기를 멈추고, 긴장하여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나가는 데 일본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주장하자면, 피도 좀 흘려야 아니할까요? 피를 흘리면 피의 댓가를 요구할 권리가 생기지 아니합니까?”
“네…… 그렇지만……”
그는 불만한 눈치였다.
그 불만이어 하는 것이 만족하여 하느니보다 얼마나 다행스런지 몰랐다.
이어서 다른 사람이 말을 하였다.
“도무지 차별대우가 아니꺼워서 못 견데겠어요.”
“차별대우를 받지 않도록 우리두 실력을 가져야 하겠지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 사람네보다 떨어지지 않는 수준에 도달해야 하겠지요. 우리 전체가 노력을 해서 그만한 실력을 가지는 다음에야 언감히 우리를 하시*하겠습니까?”
“같은 학교를 같은 해에 일본 아이는 꼴찌루, 조선 사람은 첫찌루 졸업을 했는데, 한날 한시에 들어간 회사에서 월급이 우선 다르지요. 일본 아이는 조금 있으면 승차를 하는데, 조선 사람은 만날 그 자리지요. 실력두 별 수 없잖아요?”
“개인으로는 우리가 일본 사람보다 나을 사람이 있다지만, 전체로야 어디 그렇습니까? 우리 전체가 일본 사람 전체보다 나은, 적어도 같은 수준에 이르도록 실력을 가져야 하고, 그때를 기대려야 하겠지요.”
이 실력론이나 먼저의 피의 댓가의 주장론, 친일파 가운데에서도 제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고, 내선일체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극단파에서 하는 주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친일파는 친일파이면서도 총독부와 군부의 미움과 주목을 받는 패들이었다.
나는 목마른 젊은이들이 바라는 한 그릇의 시원한 냉수를 주는 대신, 그런 친일파의 괴설을 빌어 결국 한 숟갈의 쓰디쓴 소태**를 주고 만 셈이었다.
(…)
잠을 이루지 못해 하는데 이군이 혼자 찾아왔다.
“사람을, 이 사람 저 사람 너무 여럿을 오게 해서 선생님 퍽 거북하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안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군은 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서 사과 겸 변명을 한 후에
“어떡허면 좋겠습니까 선생님?”
하고 침통히 묻는 것이었었다. 징병이며 학병에 대한 것이었었다.(…)
“되도록 나가지 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
말없이 나를 보는 이군의 그 창백한 얼굴은 빛났다. 눈에는 눈물이 피었다. 핀 눈물이 인하여 넘치어흘렀다.
나도 눈가가 뜨거웠다.
* 하시: 남을 얕잡아 낮춤
** 소태: 소태나무의 껍질. 약재로 쓰이는데 맛이 아주 쓰며, 매우 질겨서 미투리 따위의 뒷갱기, 또는 무엇을 동이는 데 쓰인다.
– 채만식, 「민족의 죄인」 중에서
토론하기
(1)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피의 댓가론”과 “실력론”을 평가해보고, 그 한계에 대해 토의해보자.
(2) ‘나’는 강요에 못 이겨 친일적인 발언을 하고 만 자기 자신에 대해 심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당신이 ‘나’의 동료라면 자책하고 있는 ‘나’에게 뭐라고 말해줄 수 있겠는가?
해설읽기
위의 인용문은 일제 말기의 상황에서 식민지인들이 겪을 수 있었던 윤리적 딜레마의 일단을 보여준다. 중일전쟁이 발발(1937)한 이후,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였다. 한편으로는 농공업 생산물들을 공출해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제 징용, 학병 차출 등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 일본은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전쟁 참여를 독려할 필요를 느꼈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친일적인 문학 작품과 논설문을 발표하도록 강요했던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나’ 역시 이러한 역사적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모든 지식인들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력한 ‘영리한 사람’도 있었고, “핍박을 받을 용기가 없어 일본 사람에게 복종”한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외국으로 망명을 하거나 지하에 숨어 목숨을 건 투쟁을 하기도 했다.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시골로 숨어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사정이 여의치 못했던 ‘나’는 쭈뼛쭈뼛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 어느 지방에 내려가 어린 학생들을 향해 일본 군대에 학병으로 동참하라는 강연회까지 하기에 이른다. 진심은 아니었지만 ‘나’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물든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나’의 강연을 들으러 나온 학생들이라고 해서 ‘나’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강연회에서는 친일적인 발언을 쏟아댔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을 했을 뿐, 진심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학생들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 학생들은 절박하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세월이 이토록이나 암담할 때, 제국주의 군대의 학병이 되어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아니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일본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가. 어느 길이든지 간에 선택을 하게 된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방에 거주하여 지식인을 만날 기회를 가지기 어려웠던 어린 학생들은 그것이 절박하도록 궁금했다.
하지만 ‘나’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마땅치 않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금방 소문이 돌 것이다. 소문이 돌면 경찰도 알게 될 것이다. 경찰이 알게 되면 잡혀 들어가 큰 고초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지 못하는 대신, ‘친일적인 말 가운데 가장 올바른 말’을 해주게 된다. 친일이면 다 같은 친일이지 친일 발언 가운데 가장 올바른 말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피의 댓가의 주장론”과 “실력론”이었다. “피의 댓가의 주장론”이란 일본 제국의 병사로서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그 대가로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진정한 일본 시민으로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그들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전쟁에 나가기만을 바랐다. 따라서,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앞으로 일본인과 동일한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는 들어주고 싶지 않은 요구였다. 같은 학교를 다녔어도, 일본인 학생보다 성적이 더 좋았어도, 일본인들의 월급이 더 높았고 조선인들은 멸시를 당하는 현실이었다. 조선인을 2등 국민 취급해왔던 일제였으니 전쟁에 참여해주는 대신 동등한 시민권을 달라는 조선인들의 ‘딜’은 달갑게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용문에서 보듯, “피의 댓가의 주장론”은 일본조차 달갑게 생각하는 주장이 아니기는 했다. ‘나’가 두 번째로 주장한 “실력론” 역시 마찬가지다. 일단 일본에 대항하지 말고 실력을 기르자는 주장이었던 만큼, 미래의 언젠가 실력을 쌓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항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나’가 할 수 있는 발언의 최대치였다. 그 나름으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리를 다한 것이었지만,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어쨌든 친일은 친일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잘못 말했다가 경찰에 불려가 고초를 당할 것이 두려웠던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학생 하나는 자리를 파한 뒤 ‘나’에게 와 넌지시 말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불편했겠지만 다들 믿을 만한 사람이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학병이나 징병으로 참여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묻는다. 학생의 마지막 물음에 대해 ‘나’는 꼭꼭 숨겨두었던 속내를 밝힌다. “되도록 나가지 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식민지로부터 해방된지도 어느덧 80년을 넘어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식민지기를 친일과 반일로 나누어 쉽게 생각하곤 한다. 마치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에 붙어 일신의 안위와 사리사욕을 채우던 친일파들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던 독립운동가들이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식민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 속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반일을 말했다가는 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하고 목숨마저 잃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고고하게 아무 말도 안 하자니 그것도 잘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았고, 일단 생계가 어려워지기도 했다. 그러니 겉으로는 친일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저항을 꿈꾸는 이들도 있었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속으로만 울음을 삼키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일제에 따르는 것처럼 말하면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자신들만이 일등 국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식민지기는 친일과 반일의 두 진영으로 쉽게 나눠버릴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친일이면서도 친일 아닌, 반일이면서도 반일 아닌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이 모여 있던 끔찍한 진창과도 같은 시기였던 것이다.
키워드
민족, 식민지, 실력론, 죄인, 해
전후맥락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어느 날, ‘나’는 친구인 ‘김군’이 주간으로 있는 신문사를 찾아간다. 신문사에는 ‘김군’만이 아니라 ‘윤’도 있었다. ‘윤’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 일제가 작가들로 하여금 친일적인 글을 쓰게끔 강요하고 친일적인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도록 만든 것에 반대해 기자 일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버렸다. 반면에 ‘나’는 일제의 강요와 협박,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수사 행태에 큰 두려움을 느껴 친일적인 강연에 참여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윤’은 이러한 ‘나’의 행동이 반민족적이라는 이유로 크게 비난한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이 그때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돌아본다. 아래의 인용문은 일제에 협력하게 된 이후 ‘나’가 겪은 경험의 일부이다.
고전본문
“우리는 시방 앞날이 깜깜합니다. 자꾸만 비관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단박에 대답이 막혔다.
그야 대답을 하기로 들면, 시원히 하여 줄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10여명 이상이나 모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막상 다 미더운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이 자리에서 한 말이 한 집 건너고 두 입 건너 필경엔 경찰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고.
명색이 선배라고 믿고서 그들은 진심의 호소를 하던 것이었다.
모인 전부가 낮에 강연회에도 와서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낮에 강연회에서 지껄인 소리는 본의가 아니고 할 수 없이 그런 것이요, 진심은 그렇지 않거니 이렇게 나를 믿고서 자기네도 진심을 토로함이었었다.
소문이 퍼질까 저어하여, 경찰의 형벌이 두려워, 이 나를 믿고서 와 안기어 고민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의 진심에 대하여 한 가지로 진심이지 못하는 나의 비겁함, 그 용렬스러움.
나는 나 자신이 야속하고 또한 슬펐다.
(…)
“여기 모인 우리 태반이, 징병이나 학병으로 끌려나가야 할 사람입니다. 끌려나가서 개주검을 해야 합니까?”
나는 등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여럿은 먹기를 멈추고, 긴장하여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나가는 데 일본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주장하자면, 피도 좀 흘려야 아니할까요? 피를 흘리면 피의 댓가를 요구할 권리가 생기지 아니합니까?”
“네…… 그렇지만……”
그는 불만한 눈치였다.
그 불만이어 하는 것이 만족하여 하느니보다 얼마나 다행스런지 몰랐다.
이어서 다른 사람이 말을 하였다.
“도무지 차별대우가 아니꺼워서 못 견데겠어요.”
“차별대우를 받지 않도록 우리두 실력을 가져야 하겠지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 사람네보다 떨어지지 않는 수준에 도달해야 하겠지요. 우리 전체가 노력을 해서 그만한 실력을 가지는 다음에야 언감히 우리를 하시*하겠습니까?”
“같은 학교를 같은 해에 일본 아이는 꼴찌루, 조선 사람은 첫찌루 졸업을 했는데, 한날 한시에 들어간 회사에서 월급이 우선 다르지요. 일본 아이는 조금 있으면 승차를 하는데, 조선 사람은 만날 그 자리지요. 실력두 별 수 없잖아요?”
“개인으로는 우리가 일본 사람보다 나을 사람이 있다지만, 전체로야 어디 그렇습니까? 우리 전체가 일본 사람 전체보다 나은, 적어도 같은 수준에 이르도록 실력을 가져야 하고, 그때를 기대려야 하겠지요.”
이 실력론이나 먼저의 피의 댓가의 주장론, 친일파 가운데에서도 제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고, 내선일체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극단파에서 하는 주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친일파는 친일파이면서도 총독부와 군부의 미움과 주목을 받는 패들이었다.
나는 목마른 젊은이들이 바라는 한 그릇의 시원한 냉수를 주는 대신, 그런 친일파의 괴설을 빌어 결국 한 숟갈의 쓰디쓴 소태**를 주고 만 셈이었다.
(…)
잠을 이루지 못해 하는데 이군이 혼자 찾아왔다.
“사람을, 이 사람 저 사람 너무 여럿을 오게 해서 선생님 퍽 거북하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안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군은 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서 사과 겸 변명을 한 후에
“어떡허면 좋겠습니까 선생님?”
하고 침통히 묻는 것이었었다. 징병이며 학병에 대한 것이었었다.(…)
“되도록 나가지 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
말없이 나를 보는 이군의 그 창백한 얼굴은 빛났다. 눈에는 눈물이 피었다. 핀 눈물이 인하여 넘치어흘렀다.
나도 눈가가 뜨거웠다.
* 하시: 남을 얕잡아 낮춤
** 소태: 소태나무의 껍질. 약재로 쓰이는데 맛이 아주 쓰며, 매우 질겨서 미투리 따위의 뒷갱기, 또는 무엇을 동이는 데 쓰인다.
– 채만식, 「민족의 죄인」 중에서
토론하기
(1)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피의 댓가론”과 “실력론”을 평가해보고, 그 한계에 대해 토의해보자.
(2) ‘나’는 강요에 못 이겨 친일적인 발언을 하고 만 자기 자신에 대해 심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당신이 ‘나’의 동료라면 자책하고 있는 ‘나’에게 뭐라고 말해줄 수 있겠는가?
해설읽기
위의 인용문은 일제 말기의 상황에서 식민지인들이 겪을 수 있었던 윤리적 딜레마의 일단을 보여준다. 중일전쟁이 발발(1937)한 이후,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였다. 한편으로는 농공업 생산물들을 공출해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제 징용, 학병 차출 등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 일본은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전쟁 참여를 독려할 필요를 느꼈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친일적인 문학 작품과 논설문을 발표하도록 강요했던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나’ 역시 이러한 역사적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모든 지식인들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력한 ‘영리한 사람’도 있었고, “핍박을 받을 용기가 없어 일본 사람에게 복종”한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외국으로 망명을 하거나 지하에 숨어 목숨을 건 투쟁을 하기도 했다.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시골로 숨어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사정이 여의치 못했던 ‘나’는 쭈뼛쭈뼛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 어느 지방에 내려가 어린 학생들을 향해 일본 군대에 학병으로 동참하라는 강연회까지 하기에 이른다. 진심은 아니었지만 ‘나’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물든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나’의 강연을 들으러 나온 학생들이라고 해서 ‘나’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강연회에서는 친일적인 발언을 쏟아댔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을 했을 뿐, 진심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학생들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 학생들은 절박하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세월이 이토록이나 암담할 때, 제국주의 군대의 학병이 되어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아니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일본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가. 어느 길이든지 간에 선택을 하게 된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방에 거주하여 지식인을 만날 기회를 가지기 어려웠던 어린 학생들은 그것이 절박하도록 궁금했다.
하지만 ‘나’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마땅치 않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금방 소문이 돌 것이다. 소문이 돌면 경찰도 알게 될 것이다. 경찰이 알게 되면 잡혀 들어가 큰 고초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지 못하는 대신, ‘친일적인 말 가운데 가장 올바른 말’을 해주게 된다. 친일이면 다 같은 친일이지 친일 발언 가운데 가장 올바른 말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피의 댓가의 주장론”과 “실력론”이었다. “피의 댓가의 주장론”이란 일본 제국의 병사로서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그 대가로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진정한 일본 시민으로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그들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전쟁에 나가기만을 바랐다. 따라서,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앞으로 일본인과 동일한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는 들어주고 싶지 않은 요구였다. 같은 학교를 다녔어도, 일본인 학생보다 성적이 더 좋았어도, 일본인들의 월급이 더 높았고 조선인들은 멸시를 당하는 현실이었다. 조선인을 2등 국민 취급해왔던 일제였으니 전쟁에 참여해주는 대신 동등한 시민권을 달라는 조선인들의 ‘딜’은 달갑게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용문에서 보듯, “피의 댓가의 주장론”은 일본조차 달갑게 생각하는 주장이 아니기는 했다. ‘나’가 두 번째로 주장한 “실력론” 역시 마찬가지다. 일단 일본에 대항하지 말고 실력을 기르자는 주장이었던 만큼, 미래의 언젠가 실력을 쌓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항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나’가 할 수 있는 발언의 최대치였다. 그 나름으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리를 다한 것이었지만,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어쨌든 친일은 친일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잘못 말했다가 경찰에 불려가 고초를 당할 것이 두려웠던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학생 하나는 자리를 파한 뒤 ‘나’에게 와 넌지시 말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불편했겠지만 다들 믿을 만한 사람이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학병이나 징병으로 참여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묻는다. 학생의 마지막 물음에 대해 ‘나’는 꼭꼭 숨겨두었던 속내를 밝힌다. “되도록 나가지 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식민지로부터 해방된지도 어느덧 80년을 넘어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식민지기를 친일과 반일로 나누어 쉽게 생각하곤 한다. 마치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에 붙어 일신의 안위와 사리사욕을 채우던 친일파들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던 독립운동가들이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식민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 속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반일을 말했다가는 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하고 목숨마저 잃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고고하게 아무 말도 안 하자니 그것도 잘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았고, 일단 생계가 어려워지기도 했다. 그러니 겉으로는 친일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저항을 꿈꾸는 이들도 있었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속으로만 울음을 삼키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일제에 따르는 것처럼 말하면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자신들만이 일등 국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식민지기는 친일과 반일의 두 진영으로 쉽게 나눠버릴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친일이면서도 친일 아닌, 반일이면서도 반일 아닌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이 모여 있던 끔찍한 진창과도 같은 시기였던 것이다.
키워드
민족, 식민지, 실력론, 죄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