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어느 날, ‘나’는 친구인 ‘김군’이 주간으로 있는 신문사를 찾아간다. 신문사에는 ‘김군’만이 아니라 ‘윤’도 있었다. ‘윤’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 일제가 작가들로 하여금 친일적인 글을 쓰게끔 강요하고 친일적인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도록 만든 것에 반대해 기자 일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버렸다. 반면에 ‘나’는 일제의 강요와 협박을 못 이겨 친일적인 강연에 참여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윤’은 이러한 ‘나’의 행동을 크게 비난하며, 민족 반역자들을 죄다 숙청해버려야 한다고 날을 세운다. 이를 지켜보던 ‘김군’은 ‘윤’에게 비난받는 ‘나’를 방어해주기 위해 윤군의 행동을 나무란다. ‘김’의 관점에서 볼 때, 친일하지 않은 ‘윤’의 행동은 훌륭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윤’이 금수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전본문
“그렇다면 걸 재산적 운명이라구나 할는지, 내가 결백할 수가 없다는 건 가난했기 때문이요, 자네가 결백할 수가 있었다는 건 부자집 아들이었기 때문이요, 그것밖엔 더 있나? 자네와 나와를 비교 대조해서 볼 땐 적어두 그렇잖아? 물론 가난하다구서 절개를 팔아먹었다는 것이 부꾸런 노릇이냐 부꾸런 노릇이지. 또 오늘이라두 민족의 심판을 받는다면, 지은 죄만치 복죄할 각오가 없는 배두 아니구. 그렇지만 자네같이 단지 부자 아버질 둔 덕분에 팔아먹지 아니할 수가 있었다는 절개두 와락 자랑거린 아닐 성부르이.”
“그건 진부한 형식논리요 결국은 억담. 월급쟁이가 반드시 신문사 밥만 먹어야 한다는 법은 있던가? 신문기자 말구 달리 얼마던지 월급쟁이질을 할 자리가 있지 않아?”
“가령? 은행원?”
“은행이던지, 보통 영리회사던지.”
“은행은 대일협력 아니하구서 초연했던가?”
“하다못해 땅은 못 파먹어?”
(…) “신문기자가 신문을 맨드는 건 대일협력이구, 농민이 농사해서 별 공출해서 왜놈과 왜놈의 병정이 배불리 먹구 전쟁을 하게 한 건 대일협력이 아닌가?”
“지도자와 피지도자라는 차이가 있지 않아? 신문은 대일협력을 시키구 농민은 따라가구 한 그 차이가 적은 차일까?”
“농민들이 벼 공출을 한 것이나, 젊운 사람들이 지원병과 학병에 나간 것이나 완전히 조선 사람 선배랄지 지도자의 말만을 듣구서 비로소 공출을 하구 병정에 나가구 한 거라면 지식칭의 대일 협력자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죄다 목을 잘라야지. 그렇지만 여보게 윤군. 농민 만명더러 일일이 물어본다구 하세. 구장과 면직원의 등쌀에, 순사들이 들끌어나와 뒤져가구 숨겨 둔 걸 내놓라고 유치장에다 가두구서 때리구 하는 바람에 공출을 했느냐, 모모한 사람이 연설루, 소설루, 신문에서 공출을 해야 한다구 하는 말을 듣구 그런가보다 여기구서 자진해 공출을 했느냐. 아주 곧이곧대루 대답을 하라구. 한다면 모르면 모르되, 나는 구장이나 면직원의 등쌀에, 순사와 형벌이 무서워서 억지루 공출을 낸 것이 아니라 어떤 조선 양반의 강연을 듣구 옳게 여겨서, 어떤 소설을 읽구 감동이 돼서, 아모 때의 신문을 보구 좋게 생각이 들어서, 그래 우러나는 마음으루 공출을 했소, 대답할 농민은 만 명에 한 명두 어려우리. 지원병이나 학병두 역시 같은 대답일 것이구…… 도대체가 당년의 조선 사람들이, 더우기 청년들이 대일협력을 하구 댕기는 지도자란 위인들이 하는 소릴 신용을 한 줄 아나? 신용은 고사요, 자네 말 마따나 개도야지만두 못 알았더라네. 그런 지도자들 명색들의 말을 듣구서 공출을 했을 게 어딨으며,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나갔을 게 어딨어? 왜놈이나 공관리들의 강제에 못 이겨 했기 아니면, 저이는 저이대루 호신지책으로 한 거지.”
“자네 논법대루 하자면, 그럼 친일파나 민족반역잔 한 놈두 없구 말겠네나그려?”
“지금 이 방 안에만 해두 사람이 셋이 모인 가운데 둘이 민족반역잔데 없어?”
“처단할 놈 말야.”
“많지. 그렇지만 벌이라는 건 그 범죄가 끼친 영향을 참작하구 범죄자의 정상을 참작하구, 그리구 범죄 이후의 심리와 행동을 참작하구, 그래가지구 처단에 경중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자네 같을래서야 3천만 가운데 장정의 태반은 죽이자구 할 테니, 그야말루 뿔을 바루잡으려다가 솔 죽이는 격이 아니겠는가?”
“웬만한 놈은 죄다 쓸어 숙청은 해야지, 관대했다간 건국에 큰 방해야. 38 이북에서 하듯기 해야만 해. 그리구 난 누가 무슨 말을 하거나, 그 비루하구 얌체빠지구 뻔뻔스럽구 한 인간성 그게 싫여. 소름이 끼치두룩 싫구 얄미워. 그런 것들과 조선 사람이라는 이름을 같이한다는 것꺼지두 욕스럽구 불쾌해.”
김군은 노상히 김군 자신의 일제 시대에 신문이나 맨들었다는 실상 문제 이하의 대일협력 사실을 구구히 발명하자는 의사라느니보다도, 하도 민망하던 나머지, 그의 두루춘풍식의 처세법을 잠시 훼절을 하고, 나를 위해 윤에게 싸움을 걸었던 것이었었다.
그러나 김군의 대일협력자에 대한 변호는 윤의 말이 아니라도, 억지엣 형식논리에 기울어진, 그래서 대체가 모두 옹색스럽고 공극투성이였었다.
가사, 완전히 변호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피고 격인 내가 우선
“아니 검사의 논고가 옳고, 변호인의 주장은 아모 소용도 없어.”
이런 심리상태인데야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중에서
토론하기
(1) ‘김’이나 ‘나’가 식민지 시기에 했던 행위를 ‘친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친일’이라고 볼 수 있다면, 혹은 ‘친일’이라고 볼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친일 행위’를 판단하는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보자.
(2) ‘김’에 따르면 ‘윤’이 친일 행위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부자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며 ‘윤’의 절개를 별 것 아닌 것인 양 말한다. 이러한 ‘김’의 주장은 정당할까?
(3) 북한에서는 친일 행위자를 단순히 처벌하는 수준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적 권리까지 박탈하였다. 예를 들어 친일 행위의 이력이 있는 사람은 북한에서 투표를 할 수도 없고 공직에 진출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처벌 방식은 온당할까?
해설읽기
위의 인용문은 식민지 시기의 친일 행위자들에 대한 숙청의 정당성 문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윤’은 친일 행위자를 모조리 숙청해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친일을 했든 강요에 못 이겨서 친일을 했든 민족 반역자이기는 모두 마찬가지이며, 이들과 한 공기를 마시며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윤’의 주장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개진된 것이 아니다. 주인공인 ‘나’와 ‘김’처럼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서, 혹은 다른 방식으로는 먹고 살 도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던 사람들의 면전에다 대고 민족 반역자 숙청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윤’이 강경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은 결백하기 때문이다. ‘윤’은 일제로부터의 압박을 받자마자 신문 기자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윤’은 친일 행위를 하지 않은 채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점에 대해 ‘윤’은 얼마쯤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김’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우선 ‘김’은 친일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윤’의 행적이 ‘충분히 시험받지 못한 것’일 뿐이지 않냐고 반문한다. ‘김’이 보기에 ‘윤’은 친일적인 글을 쓰지 않고 낙향했다는 것뿐이지, 특별히 일본의 식민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썼던 사람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고향에 내려가 살 수 있었던 것도 부자인 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윤’의 절개가 남들에 비해 특별히 대단해서는 아니다. 신문기자인 ‘김’ 자신이 학병 참여를 독려하고,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등의 잘못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윤’보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형편이 허락지 못해서다. 금수저로 태어난 ‘윤’과 다르게 흙수저였던 ‘김’은 신문기자 노릇을 하지 않고는 가족의 생활을 지탱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김’의 주장에 대해 ‘윤’은 발끈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신문기자 노릇을 하느라 친일적인 글을 써야 했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그럼 신문 기자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았나? ‘김’은 은행원을 할 수도 있었고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다. 하고 많은 선택지 가운데 ‘김’이 선택한 것은 결국 ‘신문기자’였다. 신문기자가 되면 친일적인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김’은 신문기자를 택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잘 났다고 친일을 정당화하느냐고 ‘김’은 힐난한다. 하지만 ‘김’의 생각은 다르다. 은행원은 친일을 안 했을 것 같은가? 농부는 친일을 안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은행원이 되면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농부였다면 일본의 병사들이 먹을 군량미를 제공해야 했다. 윤에 따르면 신문기자들은 친일을 하자고 선동이나 하고 다녔던 반면,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식량을 공출했어야 하는 상황이므로 둘 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농부들은 신문기자의 친일적 신문기사나 지식층의 친일 강연회를 믿고서 식량을 내놓은 게 아니다. 어차피 서로 제 살 길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인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신문기자와 같은 지식층만 유다른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이 자신의 반민족 행위에 대해 떳떳하다는 것은 아니다. ‘김’은 자기 자신 역시 ‘민족 반역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 친일이기는 하지만 민족 앞에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이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할 생각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강한 처벌을 받을 생각도 없다.
인간이 짓는 죄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범죄가 실질적으로 사회에 끼친 해악이 얼마나 되는지를 고려해야 하고, 범죄자의 정상을 참작해야 하고, 반성을 하고 있는지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고려 없이, 어디까지가 ‘친일’이고 어디까지가 ‘반일’인지가 명확하지도 않은 채 단순히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만으로 친일 행위자를 숙청하자는 주장은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것이 ‘김’의 생각이다. 게다가 앞에서 말했듯이, ‘윤’은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대다수의 흙수저 서민들의 경우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일제가 강요하는 바에 따르지 않으면 심대한 불이익을 받아 생존에 위협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김’과 ‘윤’의 설전을 모두 들은 ‘나’가 말하듯 ‘김’의 변호가 아무리 그럴싸 하더라도 자신들이 친일을 했다는 그 사실만큼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윤’과 ‘김’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와 같은 설전은 식민지 시기의 친일 행위라는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자아낸다. 도대체 무엇을 ‘친일’로 규정할 것인가? ‘친일’로 규정한 행위를 범한 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상당히 현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 북한에서는 식민지기 친일파에 대한 숙청이 광범위하게,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남한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남한에서는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 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활동했으나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당대 정권의 방해 등에 의해 결국엔 친일 청산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일련의 우여곡절 끝에 친일파 및 친일 잔재 청산의 법률적 원칙을 마련하여 대대적인 청산의 과정을 겪었다. 남북한 사이의 이러한 역사적 차이를 근거삼아 어떤 이들은 남한의 역사가 올바르지 못한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에 따라 특정 정당이나 집단을 친일로 낙인찍는 광경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친일’이란 무엇인지, 친일한 자를 ‘숙청’하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위의 인용문을 통해 미루어보듯 단순하지 않은 문제이다. 많은 이들이 인용문에서 ‘윤’이 말하는 것처럼 북한의 친일 청산을 일종의 ‘친일파 청소’와 같은 과격한 과정이기만 했던 듯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북한에서조차 ‘친일’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에 따라 누구를 처벌해야 좋을지, 처벌의 방식은 어떠해야 할지, ‘친일’을 한 사람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줘야 할지에 대한 합의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시점에서 과거인들의 ‘친일’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 혹은 ‘친일행위’를 했던 과거인들로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제도나 관습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할 때, 우리는 ‘친일’을 성급하게 낙인 찍기보다 그 문제의 복잡성을 먼저 헤아려보아야 할 것이다.
키워드
민족, 식민지, 처벌, 친일, 해방
전후맥락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어느 날, ‘나’는 친구인 ‘김군’이 주간으로 있는 신문사를 찾아간다. 신문사에는 ‘김군’만이 아니라 ‘윤’도 있었다. ‘윤’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 일제가 작가들로 하여금 친일적인 글을 쓰게끔 강요하고 친일적인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도록 만든 것에 반대해 기자 일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버렸다. 반면에 ‘나’는 일제의 강요와 협박을 못 이겨 친일적인 강연에 참여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윤’은 이러한 ‘나’의 행동을 크게 비난하며, 민족 반역자들을 죄다 숙청해버려야 한다고 날을 세운다. 이를 지켜보던 ‘김군’은 ‘윤’에게 비난받는 ‘나’를 방어해주기 위해 윤군의 행동을 나무란다. ‘김’의 관점에서 볼 때, 친일하지 않은 ‘윤’의 행동은 훌륭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윤’이 금수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전본문
“그렇다면 걸 재산적 운명이라구나 할는지, 내가 결백할 수가 없다는 건 가난했기 때문이요, 자네가 결백할 수가 있었다는 건 부자집 아들이었기 때문이요, 그것밖엔 더 있나? 자네와 나와를 비교 대조해서 볼 땐 적어두 그렇잖아? 물론 가난하다구서 절개를 팔아먹었다는 것이 부꾸런 노릇이냐 부꾸런 노릇이지. 또 오늘이라두 민족의 심판을 받는다면, 지은 죄만치 복죄할 각오가 없는 배두 아니구. 그렇지만 자네같이 단지 부자 아버질 둔 덕분에 팔아먹지 아니할 수가 있었다는 절개두 와락 자랑거린 아닐 성부르이.”
“그건 진부한 형식논리요 결국은 억담. 월급쟁이가 반드시 신문사 밥만 먹어야 한다는 법은 있던가? 신문기자 말구 달리 얼마던지 월급쟁이질을 할 자리가 있지 않아?”
“가령? 은행원?”
“은행이던지, 보통 영리회사던지.”
“은행은 대일협력 아니하구서 초연했던가?”
“하다못해 땅은 못 파먹어?”
(…) “신문기자가 신문을 맨드는 건 대일협력이구, 농민이 농사해서 별 공출해서 왜놈과 왜놈의 병정이 배불리 먹구 전쟁을 하게 한 건 대일협력이 아닌가?”
“지도자와 피지도자라는 차이가 있지 않아? 신문은 대일협력을 시키구 농민은 따라가구 한 그 차이가 적은 차일까?”
“농민들이 벼 공출을 한 것이나, 젊운 사람들이 지원병과 학병에 나간 것이나 완전히 조선 사람 선배랄지 지도자의 말만을 듣구서 비로소 공출을 하구 병정에 나가구 한 거라면 지식칭의 대일 협력자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죄다 목을 잘라야지. 그렇지만 여보게 윤군. 농민 만명더러 일일이 물어본다구 하세. 구장과 면직원의 등쌀에, 순사들이 들끌어나와 뒤져가구 숨겨 둔 걸 내놓라고 유치장에다 가두구서 때리구 하는 바람에 공출을 했느냐, 모모한 사람이 연설루, 소설루, 신문에서 공출을 해야 한다구 하는 말을 듣구 그런가보다 여기구서 자진해 공출을 했느냐. 아주 곧이곧대루 대답을 하라구. 한다면 모르면 모르되, 나는 구장이나 면직원의 등쌀에, 순사와 형벌이 무서워서 억지루 공출을 낸 것이 아니라 어떤 조선 양반의 강연을 듣구 옳게 여겨서, 어떤 소설을 읽구 감동이 돼서, 아모 때의 신문을 보구 좋게 생각이 들어서, 그래 우러나는 마음으루 공출을 했소, 대답할 농민은 만 명에 한 명두 어려우리. 지원병이나 학병두 역시 같은 대답일 것이구…… 도대체가 당년의 조선 사람들이, 더우기 청년들이 대일협력을 하구 댕기는 지도자란 위인들이 하는 소릴 신용을 한 줄 아나? 신용은 고사요, 자네 말 마따나 개도야지만두 못 알았더라네. 그런 지도자들 명색들의 말을 듣구서 공출을 했을 게 어딨으며,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나갔을 게 어딨어? 왜놈이나 공관리들의 강제에 못 이겨 했기 아니면, 저이는 저이대루 호신지책으로 한 거지.”
“자네 논법대루 하자면, 그럼 친일파나 민족반역잔 한 놈두 없구 말겠네나그려?”
“지금 이 방 안에만 해두 사람이 셋이 모인 가운데 둘이 민족반역잔데 없어?”
“처단할 놈 말야.”
“많지. 그렇지만 벌이라는 건 그 범죄가 끼친 영향을 참작하구 범죄자의 정상을 참작하구, 그리구 범죄 이후의 심리와 행동을 참작하구, 그래가지구 처단에 경중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자네 같을래서야 3천만 가운데 장정의 태반은 죽이자구 할 테니, 그야말루 뿔을 바루잡으려다가 솔 죽이는 격이 아니겠는가?”
“웬만한 놈은 죄다 쓸어 숙청은 해야지, 관대했다간 건국에 큰 방해야. 38 이북에서 하듯기 해야만 해. 그리구 난 누가 무슨 말을 하거나, 그 비루하구 얌체빠지구 뻔뻔스럽구 한 인간성 그게 싫여. 소름이 끼치두룩 싫구 얄미워. 그런 것들과 조선 사람이라는 이름을 같이한다는 것꺼지두 욕스럽구 불쾌해.”
김군은 노상히 김군 자신의 일제 시대에 신문이나 맨들었다는 실상 문제 이하의 대일협력 사실을 구구히 발명하자는 의사라느니보다도, 하도 민망하던 나머지, 그의 두루춘풍식의 처세법을 잠시 훼절을 하고, 나를 위해 윤에게 싸움을 걸었던 것이었었다.
그러나 김군의 대일협력자에 대한 변호는 윤의 말이 아니라도, 억지엣 형식논리에 기울어진, 그래서 대체가 모두 옹색스럽고 공극투성이였었다.
가사, 완전히 변호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피고 격인 내가 우선
“아니 검사의 논고가 옳고, 변호인의 주장은 아모 소용도 없어.”
이런 심리상태인데야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중에서
토론하기
(1) ‘김’이나 ‘나’가 식민지 시기에 했던 행위를 ‘친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친일’이라고 볼 수 있다면, 혹은 ‘친일’이라고 볼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친일 행위’를 판단하는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보자.
(2) ‘김’에 따르면 ‘윤’이 친일 행위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부자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며 ‘윤’의 절개를 별 것 아닌 것인 양 말한다. 이러한 ‘김’의 주장은 정당할까?
(3) 북한에서는 친일 행위자를 단순히 처벌하는 수준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적 권리까지 박탈하였다. 예를 들어 친일 행위의 이력이 있는 사람은 북한에서 투표를 할 수도 없고 공직에 진출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처벌 방식은 온당할까?
해설읽기
위의 인용문은 식민지 시기의 친일 행위자들에 대한 숙청의 정당성 문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윤’은 친일 행위자를 모조리 숙청해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친일을 했든 강요에 못 이겨서 친일을 했든 민족 반역자이기는 모두 마찬가지이며, 이들과 한 공기를 마시며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윤’의 주장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개진된 것이 아니다. 주인공인 ‘나’와 ‘김’처럼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서, 혹은 다른 방식으로는 먹고 살 도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던 사람들의 면전에다 대고 민족 반역자 숙청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윤’이 강경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은 결백하기 때문이다. ‘윤’은 일제로부터의 압박을 받자마자 신문 기자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윤’은 친일 행위를 하지 않은 채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점에 대해 ‘윤’은 얼마쯤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김’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우선 ‘김’은 친일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윤’의 행적이 ‘충분히 시험받지 못한 것’일 뿐이지 않냐고 반문한다. ‘김’이 보기에 ‘윤’은 친일적인 글을 쓰지 않고 낙향했다는 것뿐이지, 특별히 일본의 식민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썼던 사람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고향에 내려가 살 수 있었던 것도 부자인 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윤’의 절개가 남들에 비해 특별히 대단해서는 아니다. 신문기자인 ‘김’ 자신이 학병 참여를 독려하고,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등의 잘못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윤’보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형편이 허락지 못해서다. 금수저로 태어난 ‘윤’과 다르게 흙수저였던 ‘김’은 신문기자 노릇을 하지 않고는 가족의 생활을 지탱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김’의 주장에 대해 ‘윤’은 발끈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신문기자 노릇을 하느라 친일적인 글을 써야 했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그럼 신문 기자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았나? ‘김’은 은행원을 할 수도 있었고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다. 하고 많은 선택지 가운데 ‘김’이 선택한 것은 결국 ‘신문기자’였다. 신문기자가 되면 친일적인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김’은 신문기자를 택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잘 났다고 친일을 정당화하느냐고 ‘김’은 힐난한다. 하지만 ‘김’의 생각은 다르다. 은행원은 친일을 안 했을 것 같은가? 농부는 친일을 안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은행원이 되면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농부였다면 일본의 병사들이 먹을 군량미를 제공해야 했다. 윤에 따르면 신문기자들은 친일을 하자고 선동이나 하고 다녔던 반면,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식량을 공출했어야 하는 상황이므로 둘 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농부들은 신문기자의 친일적 신문기사나 지식층의 친일 강연회를 믿고서 식량을 내놓은 게 아니다. 어차피 서로 제 살 길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인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신문기자와 같은 지식층만 유다른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이 자신의 반민족 행위에 대해 떳떳하다는 것은 아니다. ‘김’은 자기 자신 역시 ‘민족 반역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 친일이기는 하지만 민족 앞에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이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할 생각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강한 처벌을 받을 생각도 없다.
인간이 짓는 죄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범죄가 실질적으로 사회에 끼친 해악이 얼마나 되는지를 고려해야 하고, 범죄자의 정상을 참작해야 하고, 반성을 하고 있는지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고려 없이, 어디까지가 ‘친일’이고 어디까지가 ‘반일’인지가 명확하지도 않은 채 단순히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만으로 친일 행위자를 숙청하자는 주장은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것이 ‘김’의 생각이다. 게다가 앞에서 말했듯이, ‘윤’은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대다수의 흙수저 서민들의 경우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일제가 강요하는 바에 따르지 않으면 심대한 불이익을 받아 생존에 위협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김’과 ‘윤’의 설전을 모두 들은 ‘나’가 말하듯 ‘김’의 변호가 아무리 그럴싸 하더라도 자신들이 친일을 했다는 그 사실만큼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윤’과 ‘김’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와 같은 설전은 식민지 시기의 친일 행위라는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자아낸다. 도대체 무엇을 ‘친일’로 규정할 것인가? ‘친일’로 규정한 행위를 범한 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상당히 현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 북한에서는 식민지기 친일파에 대한 숙청이 광범위하게,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남한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남한에서는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 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활동했으나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당대 정권의 방해 등에 의해 결국엔 친일 청산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일련의 우여곡절 끝에 친일파 및 친일 잔재 청산의 법률적 원칙을 마련하여 대대적인 청산의 과정을 겪었다. 남북한 사이의 이러한 역사적 차이를 근거삼아 어떤 이들은 남한의 역사가 올바르지 못한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에 따라 특정 정당이나 집단을 친일로 낙인찍는 광경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친일’이란 무엇인지, 친일한 자를 ‘숙청’하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위의 인용문을 통해 미루어보듯 단순하지 않은 문제이다. 많은 이들이 인용문에서 ‘윤’이 말하는 것처럼 북한의 친일 청산을 일종의 ‘친일파 청소’와 같은 과격한 과정이기만 했던 듯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북한에서조차 ‘친일’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에 따라 누구를 처벌해야 좋을지, 처벌의 방식은 어떠해야 할지, ‘친일’을 한 사람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줘야 할지에 대한 합의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시점에서 과거인들의 ‘친일’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 혹은 ‘친일행위’를 했던 과거인들로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제도나 관습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할 때, 우리는 ‘친일’을 성급하게 낙인 찍기보다 그 문제의 복잡성을 먼저 헤아려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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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식민지, 처벌, 친일, 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