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동양에서 의서들은 질병과 탕액을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아니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자연학적 심신(心身) 기술로 되어 있었다. 동의보감은 물론 후반에 질병과 탕액, 침구 등을 자세히 다루지만, 그건 부분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바탕에 우주생성론과 우주론이 깔려 있고, 또 이 거대한 경관과 포개어지는 인간 심신론이 튼실히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의보감 본론의 첫 대목인 「내경편」의 처음에 바로 이 우주론과 심신론이 「신형(身形)」이라는 제목하에 선언처럼 맨 처음에 나와 있는 것이다. 이후에는 이보다 더 구체적인 수준으로 내려가 정(精), 기(氣), 신(神)의 주제로 이어진다.
고전본문
“하늘의 형은 건괘에서 나오니 여기에는 태역, 태초, 태시, 태소가 있다. 태역은 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며, 태초는 기의 시작이며, 태시는 형의 시작이며, 태소는 질의 시작으로, 형과 기가 갖추어진 다음에 숙병이 생긴다. 숙병은 피로가 오래되어 앓는 것이며, 이는 병의 하나로 병은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태역에서부터 시작되고, 병은 태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석가는 “땅, 물, 불, 바람이 서로 화합하여 사람을 이룬다. 근골과 기육은 땅에 속하고, 정, 혈, 진액은 물에 속하며, 호흡과 체온은 불에 속하고 정신과 활동은 바람에 속한다. 그러므로 바람이 그치면 기가 끊어지고, 불이 없어지면 몸이 차가워지고, 물이 마르면 피가 없어지며 땅이 흩어지면 몸이 갈라진다”고 하였다. (…..) 상양자는 “머리카락, 이, 뼈, 손톱은 땅에서 빌고, 콧물, 정, 혈, 진액은 물에서 빌고, 체온과 마르는 것, 열이 나는 것은 불에게서 빌고, 정신과 활동은 바람에게서 빌린 것인데, 이 사대가 잠시 화합하면 사람이 생긴다. 땅의 기운이 왕성하면 뼈가 쇠처럼 굳고, 물의 기운이 왕성하면 정이 구슬같이 맑으며, 불의 기운이 왕성하면 기가 구름같이 무성하고, 바람의 기운이 왕성하면 지혜가 신처럼 오묘하다”고 하였다.
[동의보감] 「내경편」 의 「신형」 도입부 중에서
토론하기
(1) 동양의 고전을 읽으면 서양 고전에 비해 대체로 모르는 단어들이 더 많이 나온다. 이런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를 나누며 비결도 교환해보자.
(2) 태역, 태초, 태시를 거쳐 태소 단계에 이르면 형과 질이 모두 갖추어진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숙병이 생긴다고 한다. 천지가 일정한 체계를 갖추자마자 병이 생긴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3) 석가모니는 인간의 뼈나 살, 머리카락, 손톱, 콧물 같은 게 땅, 물, 불, 바람 등의 요소들로부터 빌어와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미신같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현대과학과 상통하는 면도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어떠한가?
해설읽기
하늘은 모든 것의 처음이니 그 형태는 건, 곤, 감, 리 중 건(乾)에서 나온다. 그중 태역(太易)은 만물의 질료인 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며, 태초는 가장 큰 처음이니 기가 시작된 것이다. 태시는 그 기가 일정한 형태(꼴)을 갖춘 것이며 태소는 외형적인 꼴에 더하여 내적인 성질이나 특징이 조성된 것이다. 이를 현대 과학이 말하는 우주창생론과 상응시켜볼 수 있다. 빅뱅의 순간이 태역이고 태초는 중력이 비롯된 것이며 태시는 이후 강한 핵력, 전자기력, 약학 핵력이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원자와 기본 원소들이 만들어지고 은하와 태양계 등이 생겨나는 것이 태소에 해당할 것이다. 태역에서 태소에 이르는 과정은 동서양은 물론이고 고대와 현대에도 공통되는 전체 우주론이며 가장 기본이 되는 형상론과 질료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형과 기가 갖추어진 순간은 본격적으로 만물이 존재하게 되는 기점인데, 동의보감에 따르면 이 시점이 동시에 병이 생기는 숙병이 생기는 시점이다. 생명체의 탄생과 질병의 탄생이 동시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태역에서부터 시작되고, 병은 태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 것이다.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태역에서 시작되고, 이후 태시와 태초를 거쳐 태소에 이르면 사람이 발생하면서 동시에 질병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병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탄생과 동시에 병의 바탕 혹은 원천이 생긴다. 이것이 오래되면 피로에 의해 마침내 질병으로 발현되기에 이른다. 질병이 이렇게 배치되어 있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일 우주의 기운이 골고루 있다면, 그것은 그냥 우주의 질료로 있을 것이다. 어떤 기운이 좀 많고 어떤 기운은 도리어 부족할 때, 그것은 주변 질료와는 달리 뾰족해지면서 분리되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존재의 탄생인데, 어떤 기운은 과다하고 어떤 부분은 과소하니 이것이 질병의 원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또한 한 존재의 개성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그래서 다 다른지도 모른다.
한편, 석가모니는 땅, 물, 불, 바람이 서로 화합하여 사람을 이룬다고 했는데, 이 네 요소는 고대 서양에서도 4대 요소로 꼽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현대 과학도 세상의 물질이 모두 우주의 기본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신체 또한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양쪽 다 우주 전체를 대우주, 우리 몸을 소우주로 본다는 점에서 더 그러하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그런 연유로 인해 우리의 뼈와 살, 호흡, 체온, 정신과 활동이 모두 4대 원소에 속하고 그래서 그들과 함께 연루되며 연동된다. 그렇지만 현대과학은 그런 식으로까지 일체화시키는 것은 미신이라고 본다.
“사대(四大)가 잠시 화합하면 사람이 생긴다.”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이란 4대 원소가 잠시 화합한 것일 뿐이니, 머잖아 분해되고 풀리면 사람 자체도 풀리고 해체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죽은 다음의 내세나 구천에서 떠도는 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윤회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서양의 경우 종교 개혁을 거치고도 근대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가 본격화된 이후에야 품을 수 있었던 생각인데,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런 견해를 갖고 있었다. 동의보감 내경편의 본론이 「신형(身形)」, 즉 몸의 형태에 대해 말하면서 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몸의 형태에 대해 말한다면서 우주의 태역부터 시작하니 매우 장대하고도 다소 황당해 보이기도 한다. 현대 의학의 교과서가 제 1장 제목을 「인간의 몸」이라 해놓고, 빅뱅과 우주의 탄생부터 이야길 시작하는 격이다.
의학이 인간의 신체를 우주 탄생과 오버랩시켜서 이해하고 기술하는 의학, 그럴 경우 인간관도 달라지고 질병과 치료에 대한 견해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 전체가 위기를 맞은 이 시기에 우리가 전통과 고전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이런 사고방식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키워드
건괘(乾卦), 기, 사대(四大), 태소(太素), 태시(太始), 태역(太易), 태초
전후맥락
동양에서 의서들은 질병과 탕액을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아니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자연학적 심신(心身) 기술로 되어 있었다. 동의보감은 물론 후반에 질병과 탕액, 침구 등을 자세히 다루지만, 그건 부분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바탕에 우주생성론과 우주론이 깔려 있고, 또 이 거대한 경관과 포개어지는 인간 심신론이 튼실히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의보감 본론의 첫 대목인 「내경편」의 처음에 바로 이 우주론과 심신론이 「신형(身形)」이라는 제목하에 선언처럼 맨 처음에 나와 있는 것이다. 이후에는 이보다 더 구체적인 수준으로 내려가 정(精), 기(氣), 신(神)의 주제로 이어진다.
고전본문
“하늘의 형은 건괘에서 나오니 여기에는 태역, 태초, 태시, 태소가 있다. 태역은 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며, 태초는 기의 시작이며, 태시는 형의 시작이며, 태소는 질의 시작으로, 형과 기가 갖추어진 다음에 숙병이 생긴다. 숙병은 피로가 오래되어 앓는 것이며, 이는 병의 하나로 병은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태역에서부터 시작되고, 병은 태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석가는 “땅, 물, 불, 바람이 서로 화합하여 사람을 이룬다. 근골과 기육은 땅에 속하고, 정, 혈, 진액은 물에 속하며, 호흡과 체온은 불에 속하고 정신과 활동은 바람에 속한다. 그러므로 바람이 그치면 기가 끊어지고, 불이 없어지면 몸이 차가워지고, 물이 마르면 피가 없어지며 땅이 흩어지면 몸이 갈라진다”고 하였다. (…..) 상양자는 “머리카락, 이, 뼈, 손톱은 땅에서 빌고, 콧물, 정, 혈, 진액은 물에서 빌고, 체온과 마르는 것, 열이 나는 것은 불에게서 빌고, 정신과 활동은 바람에게서 빌린 것인데, 이 사대가 잠시 화합하면 사람이 생긴다. 땅의 기운이 왕성하면 뼈가 쇠처럼 굳고, 물의 기운이 왕성하면 정이 구슬같이 맑으며, 불의 기운이 왕성하면 기가 구름같이 무성하고, 바람의 기운이 왕성하면 지혜가 신처럼 오묘하다”고 하였다.
[동의보감] 「내경편」 의 「신형」 도입부 중에서
토론하기
(1) 동양의 고전을 읽으면 서양 고전에 비해 대체로 모르는 단어들이 더 많이 나온다. 이런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를 나누며 비결도 교환해보자.
(2) 태역, 태초, 태시를 거쳐 태소 단계에 이르면 형과 질이 모두 갖추어진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숙병이 생긴다고 한다. 천지가 일정한 체계를 갖추자마자 병이 생긴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3) 석가모니는 인간의 뼈나 살, 머리카락, 손톱, 콧물 같은 게 땅, 물, 불, 바람 등의 요소들로부터 빌어와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미신같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현대과학과 상통하는 면도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어떠한가?
해설읽기
하늘은 모든 것의 처음이니 그 형태는 건, 곤, 감, 리 중 건(乾)에서 나온다. 그중 태역(太易)은 만물의 질료인 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며, 태초는 가장 큰 처음이니 기가 시작된 것이다. 태시는 그 기가 일정한 형태(꼴)을 갖춘 것이며 태소는 외형적인 꼴에 더하여 내적인 성질이나 특징이 조성된 것이다. 이를 현대 과학이 말하는 우주창생론과 상응시켜볼 수 있다. 빅뱅의 순간이 태역이고 태초는 중력이 비롯된 것이며 태시는 이후 강한 핵력, 전자기력, 약학 핵력이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원자와 기본 원소들이 만들어지고 은하와 태양계 등이 생겨나는 것이 태소에 해당할 것이다. 태역에서 태소에 이르는 과정은 동서양은 물론이고 고대와 현대에도 공통되는 전체 우주론이며 가장 기본이 되는 형상론과 질료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형과 기가 갖추어진 순간은 본격적으로 만물이 존재하게 되는 기점인데, 동의보감에 따르면 이 시점이 동시에 병이 생기는 숙병이 생기는 시점이다. 생명체의 탄생과 질병의 탄생이 동시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태역에서부터 시작되고, 병은 태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 것이다.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태역에서 시작되고, 이후 태시와 태초를 거쳐 태소에 이르면 사람이 발생하면서 동시에 질병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병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탄생과 동시에 병의 바탕 혹은 원천이 생긴다. 이것이 오래되면 피로에 의해 마침내 질병으로 발현되기에 이른다. 질병이 이렇게 배치되어 있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일 우주의 기운이 골고루 있다면, 그것은 그냥 우주의 질료로 있을 것이다. 어떤 기운이 좀 많고 어떤 기운은 도리어 부족할 때, 그것은 주변 질료와는 달리 뾰족해지면서 분리되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존재의 탄생인데, 어떤 기운은 과다하고 어떤 부분은 과소하니 이것이 질병의 원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또한 한 존재의 개성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그래서 다 다른지도 모른다.
한편, 석가모니는 땅, 물, 불, 바람이 서로 화합하여 사람을 이룬다고 했는데, 이 네 요소는 고대 서양에서도 4대 요소로 꼽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현대 과학도 세상의 물질이 모두 우주의 기본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신체 또한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양쪽 다 우주 전체를 대우주, 우리 몸을 소우주로 본다는 점에서 더 그러하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그런 연유로 인해 우리의 뼈와 살, 호흡, 체온, 정신과 활동이 모두 4대 원소에 속하고 그래서 그들과 함께 연루되며 연동된다. 그렇지만 현대과학은 그런 식으로까지 일체화시키는 것은 미신이라고 본다.
“사대(四大)가 잠시 화합하면 사람이 생긴다.”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이란 4대 원소가 잠시 화합한 것일 뿐이니, 머잖아 분해되고 풀리면 사람 자체도 풀리고 해체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죽은 다음의 내세나 구천에서 떠도는 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윤회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서양의 경우 종교 개혁을 거치고도 근대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가 본격화된 이후에야 품을 수 있었던 생각인데,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런 견해를 갖고 있었다. 동의보감 내경편의 본론이 「신형(身形)」, 즉 몸의 형태에 대해 말하면서 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몸의 형태에 대해 말한다면서 우주의 태역부터 시작하니 매우 장대하고도 다소 황당해 보이기도 한다. 현대 의학의 교과서가 제 1장 제목을 「인간의 몸」이라 해놓고, 빅뱅과 우주의 탄생부터 이야길 시작하는 격이다.
의학이 인간의 신체를 우주 탄생과 오버랩시켜서 이해하고 기술하는 의학, 그럴 경우 인간관도 달라지고 질병과 치료에 대한 견해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 전체가 위기를 맞은 이 시기에 우리가 전통과 고전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이런 사고방식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키워드
건괘(乾卦), 기, 사대(四大), 태소(太素), 태시(太始), 태역(太易), 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