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각각 소설의 2부, 4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남편인 세중이 아닌 은수를 중점으로 전개된다. 2부에서 은수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방황을 반복하면서 유년기에 출생의 비밀이 어떻게 밝혀졌는지 떠올린다. 사촌과 다툼 끝에 이 집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은 은수는, 집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잃은 듯한 감각에 방황을 시작한다. 이 때문에 철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활발한 어린아이가 빠르게 철이 들은 것으로 오해받지만, 실상 그녀의 내면은 공허하면서도 혼란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은수는 결혼 직전에야 어머니에게 출생의 비밀을 물어보는데, 어머니는 전쟁고아라는 사실만 알려줄 뿐 그 이상의 참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은수는 내면에 자리한 혼란이 생겨난 까닭이 출생의 비밀이 전부가 아님을 뒤늦게 깨닫고, 결혼 이후 방황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 번째 장면은 4부에서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세중에게서 이혼을 통보받고 집에서 칩거하던 은수는 아들 승일을 데리고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방문한다. 그 곳에서 기억에 자리한 원초적 장면, 햇볓 가득한 마당과 나뒹굴고 있던 검정 고무신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찾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어머니의 집에 돌아온 은수는 기다리고 있던 세중에게 승일을 빼앗기고, 어머니에게 자신이 기억하는 장면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고전본문
그 뒤로 은수의 머리를 끈질기게 사로잡기 시작한 것은,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방도 자신의 방이 아니었고 자신이 현재 먹고 있는 밥도 자기의 밥이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은 또한 언제나 임시로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철이 들려면 하루 만에도 든다더니…… 얼굴에 손톱자국이 가실 날 없이 사나운 계집애인 은수가 점차 말이 없고 온순하게 숨어들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놀랍고 대견해했다.
그러나 은수는 가끔 깊은 밤 이불을 들쓰고 어린애답지 않게 소리 죽여 울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낳고 또 버린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마치 기억에서 완벽히 떨어져 나간 유아기의 어느 부분, 혹은 상기도 그녀의 가슴속에 깜깜하게 묻힌 단단한 바위를 헤집으려는 노력과도 같았다.
최초의 그녀의 기억은 이 층으로 오르는 어둑신하고 가파른 나무 계단과 하얗게 햇빛이 쏟아지는 마당에 나뒹굴고 있던 두짝의 작은 검정 고무신이었다.
아마 네댓 살 때였을 것이다. 그 이전의 일은 검은 휘장으로 가려진 듯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다 방심하고 있는 순간에 예기치 않게 익숙한 분위기로 찾아오기도 하고 거대한 빙산의 한 모서리처럼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도 연약하고 희미한 것이어서, 그녀가 잡으려고 손만 내밀어도 다시 형체 없이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볕바른 마당에 던져졌던 검정 고무신의 기억은 곧바로 그녀가 서울로 이사 올 무렵까지 살았던 항구 도시의 목조 왜식집으로 이어졌다.
이불을 들쓰고 누워 울던 마음에 가득한 원망과 미움과 그리움은 해가 갈수록 스러지고,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안타까움과 갈증만 앙상히 남아 한 자락 스쳐가는 바람에도 펄럭이며 함께 흐르곤 했다.
(중략)
물론 어머니에게 자신이 누구인가, 누구였던가를 따져 물으려 작정했을 때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장차 남편이 될 세중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그래서 세상과 자신의 생을 직시하여 당당히 정직하게 맞서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끝내 세중에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 즉 선량하고 소심한 편인 그에게 공연한 또 하나의 편견을 심어줄 따름이 아닌가 하는 것은 변명만은 아니었다. ‘전쟁 통에 부모 잃은 아이는 너뿐이 아니었다’라는 어머니의 말대로 평범한 사실 앞에, 남몰래 키워왔던 자신의 운명에 대한 비장함 따위는 응석이 아니었던가. 무엇보다도 현실은 과거를 보상할 수 없다는, 과거의 사실로 인해 현실은 변명되고 보호되지 않는다는 명료한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때 없이 등을 밀리듯 보이지 않는 바람의 손길에 잡히듯 집을 떠나 헤매게 하던 자신의 고아 의식은 현실을, 삶을, 삶의 권태를 열정을 견뎌낼 수 없었던 자의 핑계였던가.
(중략)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피가 더께로 엉긴 무릎과 부르터서 물집 잡힌 작은 발에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이젠 걱정 마라. 나랑 내일 네 집에 가보자. 그러나 정작 집을 나선 것은 시가전이 멎고 적군이 완전히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아이는 햇볕 가득한 마당에 부옇게 먼지를 쓰고 나뒹구는 두짝의 검정 고무신만을 멀거니 바라볼 뿐 절대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이를 남겨두고 안으로 들어가 그 여자는 부엌 앞에 쓰러진 여자와 다락 층계에 엎어진 남자, 마루에 엎드려 있는 여자아이의, 이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이 부패한 시체를 보았다.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어떻게 해서 어린 너 혼자 살아남아 우리 집까지 그 먼 길을 걸어왔는지, 누가 데려다주었는지, 종내 나는 알 길이 없었지만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 후로도 그 일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했다. 식량을 훔치러 도둑이 들었거니, 추측해보았을 뿐이지. 그런 일은 드물지 않았단다. 전쟁 때였고 피란 못 간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도 모두 부황기로 누렇게 부어 있었지. 너를 맡아 기르며 네가 그날 집에서 있었던 일을 비롯해서 네 부모, 늘 붙어 있던 쌍둥이 자매, 집의 기억을 완전히 잊은 것을 나는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온전히 내 자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 탓만은 아니었다. 그 끔찍한 장면을 보았다는 업(業)을 지니고 평생을 어찌 편안히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기진한 듯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출전] 오정희, 『바람의 넋』
토론하기
(1) 본문에서 은수의 방황이 시작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2) 결말에서 밝혀진 어머니의 비밀을 통해, 은수의 방황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설읽기
「바람의 넋」 2부와 4부는 작품 밖 서술자가 은수의 입장을 서술한다. 1부에서 집으로 돌아왔던 은수는 다시금 가출하는데, 그 과정은 보통의 외출로 시작했다가 자신의 내면이 떠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너무나도 멀리 와버린 것으로 그려진다. 은수는 어린 시절 자신과 다툰 사촌이 홧김에 자신이 고아임을 말해버린 순간 자신의 내적 방황이 시작되었음을 회상한다. 늘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했던 은수는 세중과의 결혼이 결정된 후에야 어머니에게 출생의 비밀을 묻는데, 어머니는 은수가 사실 친구의 딸이었으며 전쟁고아라서 데려오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는 그 시절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딸을 위로하고, 은수는 어머니가 누구보다도 자신을 위해주는 어머니였음을,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이 그리 특이하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켠에는 설명되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 이를 두고 은수는 지금까지 느껴온 ‘고아 의식’이 “현실을, 삶을, 삶의 권태를 열정을 견뎌낼 수 없었던 자의 핑계였던가”라고 스스로 질문한다. 즉 출생의 비밀이 자신이 겪어온 방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방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2부에서는 은수가 계속해서 곱씹던 기억 속의 원초적 장면, 즉 햇볕 가득한 마당과 나뒹굴고 있던 검정 고무신의 풍경은 해명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4부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은수는 세중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혼 통보를 받고 어머니의 집에 칩거하고 있었다. 은수는 이전까지는 세중에게 속마음을 제대로 이야기한 적 없었지만, 이제 솔직하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고 방황하는 동안 겪었던 일들을 밝혀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은수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은행에서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 세중을 보고 배신감을 느끼며 발걸음을 돌린다. 그녀는 승일이를 유치원으로 데리러 가고, 아이를 남편의 집에 데려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어머니와 대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길로 새고 만다. 계획 없이 도착한 서울역에서 어릴 적에 살았던 항구 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아이와 함께 도시를 떠돌아다닌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기억나는 공간을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도시는 이미 바뀐 지 오래다.
세중은 은수 어머니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에게 화를 낸 뒤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 버린다. 은수가 유예되었다고 생각한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다. 은수는 어머니와 단둘이 남은 뒤에야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장면에 관해 물어본다. 사실 은수는 전쟁 도중 자신의 집을 습격한 도적들에게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현장에 있었고, 그 원초적 장면은 그 직후에 뇌리에 남은 것이다. 은수에게는 쌍둥이 자매가 있었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무신은 그 아이의 것이었다. 은수는 홀로 지금의 어머니가 사는 집까지 걸어갔고, 어머니는 이후 뒤늦게 현장을 찾아간 뒤 은수가 겪은 일을 짐작했을 뿐이다.
결말에서 은수는 밤길에 홀로 떠도는 소녀의 형상과 마주하고, ‘하염없는 그리움 잠재우고 이제는 돌아오라’라고 말을 걸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은수가 내적 방황을 끝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소녀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닫힌 결말로 보기가 어렵다. 또한 어머니와의 대화 장면 도중 은수의 과거가 서술되는 장면은 온전히 어머니의 입을 빌려 서술되는 게 아니라, 아예 전지적 시점에서 구성된 장면이 제시된다. 이는 전쟁의 충격이 은수의 방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은수가 누군가가 온전히 구성한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키워드
가정, 감정, 내면, 부부, 여성, 일탈, 전쟁, 트라우마
전후맥락
각각 소설의 2부, 4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남편인 세중이 아닌 은수를 중점으로 전개된다. 2부에서 은수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방황을 반복하면서 유년기에 출생의 비밀이 어떻게 밝혀졌는지 떠올린다. 사촌과 다툼 끝에 이 집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은 은수는, 집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잃은 듯한 감각에 방황을 시작한다. 이 때문에 철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활발한 어린아이가 빠르게 철이 들은 것으로 오해받지만, 실상 그녀의 내면은 공허하면서도 혼란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은수는 결혼 직전에야 어머니에게 출생의 비밀을 물어보는데, 어머니는 전쟁고아라는 사실만 알려줄 뿐 그 이상의 참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은수는 내면에 자리한 혼란이 생겨난 까닭이 출생의 비밀이 전부가 아님을 뒤늦게 깨닫고, 결혼 이후 방황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 번째 장면은 4부에서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세중에게서 이혼을 통보받고 집에서 칩거하던 은수는 아들 승일을 데리고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방문한다. 그 곳에서 기억에 자리한 원초적 장면, 햇볓 가득한 마당과 나뒹굴고 있던 검정 고무신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찾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어머니의 집에 돌아온 은수는 기다리고 있던 세중에게 승일을 빼앗기고, 어머니에게 자신이 기억하는 장면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고전본문
그 뒤로 은수의 머리를 끈질기게 사로잡기 시작한 것은,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방도 자신의 방이 아니었고 자신이 현재 먹고 있는 밥도 자기의 밥이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은 또한 언제나 임시로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철이 들려면 하루 만에도 든다더니…… 얼굴에 손톱자국이 가실 날 없이 사나운 계집애인 은수가 점차 말이 없고 온순하게 숨어들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놀랍고 대견해했다.
그러나 은수는 가끔 깊은 밤 이불을 들쓰고 어린애답지 않게 소리 죽여 울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낳고 또 버린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마치 기억에서 완벽히 떨어져 나간 유아기의 어느 부분, 혹은 상기도 그녀의 가슴속에 깜깜하게 묻힌 단단한 바위를 헤집으려는 노력과도 같았다.
최초의 그녀의 기억은 이 층으로 오르는 어둑신하고 가파른 나무 계단과 하얗게 햇빛이 쏟아지는 마당에 나뒹굴고 있던 두짝의 작은 검정 고무신이었다.
아마 네댓 살 때였을 것이다. 그 이전의 일은 검은 휘장으로 가려진 듯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다 방심하고 있는 순간에 예기치 않게 익숙한 분위기로 찾아오기도 하고 거대한 빙산의 한 모서리처럼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도 연약하고 희미한 것이어서, 그녀가 잡으려고 손만 내밀어도 다시 형체 없이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볕바른 마당에 던져졌던 검정 고무신의 기억은 곧바로 그녀가 서울로 이사 올 무렵까지 살았던 항구 도시의 목조 왜식집으로 이어졌다.
이불을 들쓰고 누워 울던 마음에 가득한 원망과 미움과 그리움은 해가 갈수록 스러지고,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안타까움과 갈증만 앙상히 남아 한 자락 스쳐가는 바람에도 펄럭이며 함께 흐르곤 했다.
(중략)
물론 어머니에게 자신이 누구인가, 누구였던가를 따져 물으려 작정했을 때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장차 남편이 될 세중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그래서 세상과 자신의 생을 직시하여 당당히 정직하게 맞서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끝내 세중에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 즉 선량하고 소심한 편인 그에게 공연한 또 하나의 편견을 심어줄 따름이 아닌가 하는 것은 변명만은 아니었다. ‘전쟁 통에 부모 잃은 아이는 너뿐이 아니었다’라는 어머니의 말대로 평범한 사실 앞에, 남몰래 키워왔던 자신의 운명에 대한 비장함 따위는 응석이 아니었던가. 무엇보다도 현실은 과거를 보상할 수 없다는, 과거의 사실로 인해 현실은 변명되고 보호되지 않는다는 명료한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때 없이 등을 밀리듯 보이지 않는 바람의 손길에 잡히듯 집을 떠나 헤매게 하던 자신의 고아 의식은 현실을, 삶을, 삶의 권태를 열정을 견뎌낼 수 없었던 자의 핑계였던가.
(중략)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피가 더께로 엉긴 무릎과 부르터서 물집 잡힌 작은 발에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이젠 걱정 마라. 나랑 내일 네 집에 가보자. 그러나 정작 집을 나선 것은 시가전이 멎고 적군이 완전히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아이는 햇볕 가득한 마당에 부옇게 먼지를 쓰고 나뒹구는 두짝의 검정 고무신만을 멀거니 바라볼 뿐 절대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이를 남겨두고 안으로 들어가 그 여자는 부엌 앞에 쓰러진 여자와 다락 층계에 엎어진 남자, 마루에 엎드려 있는 여자아이의, 이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이 부패한 시체를 보았다.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어떻게 해서 어린 너 혼자 살아남아 우리 집까지 그 먼 길을 걸어왔는지, 누가 데려다주었는지, 종내 나는 알 길이 없었지만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 후로도 그 일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했다. 식량을 훔치러 도둑이 들었거니, 추측해보았을 뿐이지. 그런 일은 드물지 않았단다. 전쟁 때였고 피란 못 간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도 모두 부황기로 누렇게 부어 있었지. 너를 맡아 기르며 네가 그날 집에서 있었던 일을 비롯해서 네 부모, 늘 붙어 있던 쌍둥이 자매, 집의 기억을 완전히 잊은 것을 나는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온전히 내 자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 탓만은 아니었다. 그 끔찍한 장면을 보았다는 업(業)을 지니고 평생을 어찌 편안히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기진한 듯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출전] 오정희, 『바람의 넋』
토론하기
(1) 본문에서 은수의 방황이 시작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2) 결말에서 밝혀진 어머니의 비밀을 통해, 은수의 방황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설읽기
「바람의 넋」 2부와 4부는 작품 밖 서술자가 은수의 입장을 서술한다. 1부에서 집으로 돌아왔던 은수는 다시금 가출하는데, 그 과정은 보통의 외출로 시작했다가 자신의 내면이 떠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너무나도 멀리 와버린 것으로 그려진다. 은수는 어린 시절 자신과 다툰 사촌이 홧김에 자신이 고아임을 말해버린 순간 자신의 내적 방황이 시작되었음을 회상한다. 늘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했던 은수는 세중과의 결혼이 결정된 후에야 어머니에게 출생의 비밀을 묻는데, 어머니는 은수가 사실 친구의 딸이었으며 전쟁고아라서 데려오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는 그 시절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딸을 위로하고, 은수는 어머니가 누구보다도 자신을 위해주는 어머니였음을,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이 그리 특이하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켠에는 설명되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 이를 두고 은수는 지금까지 느껴온 ‘고아 의식’이 “현실을, 삶을, 삶의 권태를 열정을 견뎌낼 수 없었던 자의 핑계였던가”라고 스스로 질문한다. 즉 출생의 비밀이 자신이 겪어온 방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방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2부에서는 은수가 계속해서 곱씹던 기억 속의 원초적 장면, 즉 햇볕 가득한 마당과 나뒹굴고 있던 검정 고무신의 풍경은 해명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4부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은수는 세중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혼 통보를 받고 어머니의 집에 칩거하고 있었다. 은수는 이전까지는 세중에게 속마음을 제대로 이야기한 적 없었지만, 이제 솔직하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고 방황하는 동안 겪었던 일들을 밝혀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은수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은행에서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 세중을 보고 배신감을 느끼며 발걸음을 돌린다. 그녀는 승일이를 유치원으로 데리러 가고, 아이를 남편의 집에 데려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어머니와 대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길로 새고 만다. 계획 없이 도착한 서울역에서 어릴 적에 살았던 항구 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아이와 함께 도시를 떠돌아다닌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기억나는 공간을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도시는 이미 바뀐 지 오래다.
세중은 은수 어머니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에게 화를 낸 뒤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 버린다. 은수가 유예되었다고 생각한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다. 은수는 어머니와 단둘이 남은 뒤에야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장면에 관해 물어본다. 사실 은수는 전쟁 도중 자신의 집을 습격한 도적들에게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현장에 있었고, 그 원초적 장면은 그 직후에 뇌리에 남은 것이다. 은수에게는 쌍둥이 자매가 있었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무신은 그 아이의 것이었다. 은수는 홀로 지금의 어머니가 사는 집까지 걸어갔고, 어머니는 이후 뒤늦게 현장을 찾아간 뒤 은수가 겪은 일을 짐작했을 뿐이다.
결말에서 은수는 밤길에 홀로 떠도는 소녀의 형상과 마주하고, ‘하염없는 그리움 잠재우고 이제는 돌아오라’라고 말을 걸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은수가 내적 방황을 끝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소녀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닫힌 결말로 보기가 어렵다. 또한 어머니와의 대화 장면 도중 은수의 과거가 서술되는 장면은 온전히 어머니의 입을 빌려 서술되는 게 아니라, 아예 전지적 시점에서 구성된 장면이 제시된다. 이는 전쟁의 충격이 은수의 방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은수가 누군가가 온전히 구성한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키워드
가정, 감정, 내면, 부부, 여성, 일탈, 전쟁, 트라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