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주인공 ‘이인화’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울로 가게 된다. 오랜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이인화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절감한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속아 노예처럼 외국으로 팔려나가고 있었고, 조선인들에 대한 검열과 감시는 도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이인화는 일본 순사들이 갓난아기를 업은 젊은 여인까지 결박해놓은 모습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고전본문
‘공동묘지다! 구더기가 우글우글하는 공동묘지다!’라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방 안부터 위불없는 공동묘지다. 공동묘지에 있으니까 공동묘지에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구더기가 득시글득시글하는 무덤 속이다. 모두가 구더기다. 너도 구더기, 나도 구더기다. 그 속에서도 진화론적 모든 조건은 한 초 동안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겠지! 생존 경쟁이 있고 자연도태가 있고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고 으르렁댈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구더기의 낱낱이 해체가 되어서 원소가 되고 흙이 되어서 내 입으로 들어가고, 네 코로 들어갔다가 네나 내나 거꾸러지면, 미구에, 또, 구더기가 되어서 원소가 되거나 흙이 될 것이다. 에잇! 뒈져라! 움도 싹도 없이 져버려라! 망할 대로 망해버려라! 사태가 나든지 망해버리든지 양단간에 끝장이 나고 보면 그중에서 혹은 조금이라도 나은 놈이 생길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차가 떠나기 전에 자기 자리로 와서 드러누웠다. 등 너머에 누운 기생의 머리에서 가끔가끔 끼쳐오는 머릿내와 향긋한 기름내 분내를 코로 훅훅 맡아가며 눈을 감고 누웠었다.
‘이것도 구더기 썩는 냄새다!’
염상섭, 『만세전』 중에서
토론하기
(1) 이인화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공동묘지’에 비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이인화는 이 독백에서 ‘진화론’과 ‘순환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서로 반대되는 두 이론이 함께 활용된 의미를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1910년에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고부터 1945년에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기까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식민지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그들에게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 결과 누군가는 잃어버린 국가와 짓밟힌 민족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몸담았고, 누군가는 현실과 타협하고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영달을 추구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어쩌면 현재의 관점에서 독립운동은 미련해보일 수도 있겠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민족(Nation)’을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이라고 명명했듯이, 현대에는 허상으로 치부되는 민족을 위해 가족과 목숨까지도 다 내던지고 그들이 좇았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염상섭의 『만세전』에는 그에 대한 고민과 답이 어느 정도 나와 있다. 『만세전』은 식민지의 문제를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강자와 약자의 문제로 다룬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조선 지식인 이인화에게 있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은 동포에 대한 연민이나 적에 대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다. 철저하고 일방적인 지배 관계가 전제되어있는 식민지에서는 다른 모든 논리가 배제되고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의 흑인 노예처럼 조선인들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행태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갓난아기를 업은 어린 여성에게까지 결박을 씌우는 철저한 강자의 횡포이다. 약자에게는 배려가, 강자에게는 견제가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정의(正義)’라면, 식민지는 처음부터 인간의 정의가 죽어있는 곳이다. “공동묘지”다.
영국의 사상가 스펜서(Herbert Spencer)는 다윈(Charles Darwin)의 생물진화론을 사회 발전에 결부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을 주장하였다. 부강한 국가가 약소한 국가를 지배하여 문명을 주입하고 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이론으로,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등에 의해 소개되어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화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의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득세하는 세계는 이미 정의가 죽은 자리에 세워진 공동묘지였다. 공동묘지 안에서 구더기들은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며 싸운다. 그러나 이 싸움에는 끝이 없다. 살아남는 것이 정의인 “진화론적 조건”에서는, 살아남은 후에 좇아야 할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인화는 이 끔찍한 진화론적 세계를 저주하기 위해 ‘순환론’을 들이댄다. 사회의 선형적 발전을 전제하는 진화론적 논리에, 모든 것이 결국 반복되고 발전은 없다는 순환론적 논리는 일종의 천적이다. 정의가 죽은 채 생존만을 고집하는 구더기들은 결국 흙이 되고 원소가 되어 누군가의 입이나 코로 들어가고, 다시 들끓는 구더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포자기식의 순환론은 답이 될 수 없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논리를 정당하게 ‘반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망해버려라”고 ‘저주’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인화가 분노를 삭이지 못 하고 점점 더 절망에 빠져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끔은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어떤 불의나 악은, 그것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정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불의나 악은 답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인화가 체념한 채 자리에 누워 맡은 “구더기 썩는 냄새”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자신의 냄새다.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정답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 민족’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서, ‘일본 민족’이 아닌 ‘강자’에 맞섬으로써 말이다.
키워드
만세전, 민족, 사회진화론, 순환론, 식민지, 염상섭, 일본, 정의, 조선
전후맥락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주인공 ‘이인화’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울로 가게 된다. 오랜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이인화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절감한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속아 노예처럼 외국으로 팔려나가고 있었고, 조선인들에 대한 검열과 감시는 도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이인화는 일본 순사들이 갓난아기를 업은 젊은 여인까지 결박해놓은 모습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고전본문
‘공동묘지다! 구더기가 우글우글하는 공동묘지다!’라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방 안부터 위불없는 공동묘지다. 공동묘지에 있으니까 공동묘지에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구더기가 득시글득시글하는 무덤 속이다. 모두가 구더기다. 너도 구더기, 나도 구더기다. 그 속에서도 진화론적 모든 조건은 한 초 동안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겠지! 생존 경쟁이 있고 자연도태가 있고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고 으르렁댈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구더기의 낱낱이 해체가 되어서 원소가 되고 흙이 되어서 내 입으로 들어가고, 네 코로 들어갔다가 네나 내나 거꾸러지면, 미구에, 또, 구더기가 되어서 원소가 되거나 흙이 될 것이다. 에잇! 뒈져라! 움도 싹도 없이 져버려라! 망할 대로 망해버려라! 사태가 나든지 망해버리든지 양단간에 끝장이 나고 보면 그중에서 혹은 조금이라도 나은 놈이 생길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차가 떠나기 전에 자기 자리로 와서 드러누웠다. 등 너머에 누운 기생의 머리에서 가끔가끔 끼쳐오는 머릿내와 향긋한 기름내 분내를 코로 훅훅 맡아가며 눈을 감고 누웠었다.
‘이것도 구더기 썩는 냄새다!’
염상섭, 『만세전』 중에서
토론하기
(1) 이인화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공동묘지’에 비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이인화는 이 독백에서 ‘진화론’과 ‘순환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서로 반대되는 두 이론이 함께 활용된 의미를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1910년에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고부터 1945년에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기까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식민지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그들에게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 결과 누군가는 잃어버린 국가와 짓밟힌 민족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몸담았고, 누군가는 현실과 타협하고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영달을 추구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어쩌면 현재의 관점에서 독립운동은 미련해보일 수도 있겠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민족(Nation)’을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이라고 명명했듯이, 현대에는 허상으로 치부되는 민족을 위해 가족과 목숨까지도 다 내던지고 그들이 좇았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염상섭의 『만세전』에는 그에 대한 고민과 답이 어느 정도 나와 있다. 『만세전』은 식민지의 문제를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강자와 약자의 문제로 다룬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조선 지식인 이인화에게 있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은 동포에 대한 연민이나 적에 대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다. 철저하고 일방적인 지배 관계가 전제되어있는 식민지에서는 다른 모든 논리가 배제되고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의 흑인 노예처럼 조선인들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행태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갓난아기를 업은 어린 여성에게까지 결박을 씌우는 철저한 강자의 횡포이다. 약자에게는 배려가, 강자에게는 견제가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정의(正義)’라면, 식민지는 처음부터 인간의 정의가 죽어있는 곳이다. “공동묘지”다.
영국의 사상가 스펜서(Herbert Spencer)는 다윈(Charles Darwin)의 생물진화론을 사회 발전에 결부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을 주장하였다. 부강한 국가가 약소한 국가를 지배하여 문명을 주입하고 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이론으로,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등에 의해 소개되어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화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의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득세하는 세계는 이미 정의가 죽은 자리에 세워진 공동묘지였다. 공동묘지 안에서 구더기들은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며 싸운다. 그러나 이 싸움에는 끝이 없다. 살아남는 것이 정의인 “진화론적 조건”에서는, 살아남은 후에 좇아야 할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인화는 이 끔찍한 진화론적 세계를 저주하기 위해 ‘순환론’을 들이댄다. 사회의 선형적 발전을 전제하는 진화론적 논리에, 모든 것이 결국 반복되고 발전은 없다는 순환론적 논리는 일종의 천적이다. 정의가 죽은 채 생존만을 고집하는 구더기들은 결국 흙이 되고 원소가 되어 누군가의 입이나 코로 들어가고, 다시 들끓는 구더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포자기식의 순환론은 답이 될 수 없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논리를 정당하게 ‘반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망해버려라”고 ‘저주’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인화가 분노를 삭이지 못 하고 점점 더 절망에 빠져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끔은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어떤 불의나 악은, 그것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정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불의나 악은 답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인화가 체념한 채 자리에 누워 맡은 “구더기 썩는 냄새”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자신의 냄새다.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정답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 민족’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서, ‘일본 민족’이 아닌 ‘강자’에 맞섬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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