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이언진(李彦瑱, 1740~1766)은 역관(譯官) 출신의 시인으로 27세에 요절하였다. 그래서 종종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816)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남들보다 일찍 삶을 마감한 사람은 재주를 꽃피울 겨를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재주가 일찍 사라져버린 것은 슬픈 일이나 우리는 이언진의 「호동거실」(衚衕居室)에서 그의 170편 연작시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시절 그가 품었던 도전 정신, 세상에 대한 자신감과 패기(覇氣) 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할 만하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이 점을 확인해 보기로 한다.
고전본문
이름 하나는 우상(虞裳), 또 하나는 해탕(蟹湯)
나는 나와 벗하지 남을 사귀지 않지.
시인으로는 이백(李白)과 성이 똑같고
화가로는 왕유(王維)의 후신(後身)이지.
[출전]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의 「호동거실(衚衕居室)」 중에서
토론하기
(1) “나는 나와 벗하지 남을 사귀지 않지.”라는 구절에서 이 시의 화자(話者)의 성격이 어떤 사람일지 추측해 봅시다.
(2) 다음은 김광석(金光石, 1964~1996)이라는 가수가 부른 「나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본문과 「나무」의 가사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눈부신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소
누구 하나 나를 찾지도 기다리지도 않소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좋소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소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소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하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 하오
.
해설읽기
우상(虞裳)은 이언진의 자(字)이고 해탕(蟹湯)은 호(號)이다. 이언진의 ‘언진’은 명(名), 즉 이름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처럼, 명(名), 호(號), 자(字) 등 자신을 드러내는 호칭이 많았다. 마치 현대인들이 웹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아이디가 여러 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호가 해탕이라고 하였지만 이언진은 송목관(松穆館)이라는 호도 사용하였다. 뒤에서 설명하겠으나 이언진의 글이 모여 있는 문집 이름이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인데, 제목의 송목관이 바로 이언진의 또 다른 호이다. 우상은 순임금의 치마라는 뜻인데, 우(虞)나라의 성군(聖君)인 순임금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느라 하는 일 없이 치마만 드리운 채 앉아 있어도 나라가 절로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해탕은 찻물을 끓일 때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방울을 가리키는데, 일종의 소멸감이나 존재의 덧없음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이언진의 자 우상과 호 해탕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1행에서는 이처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소개를 하였고, 2행에서는 자신의 벗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언진의 벗은 그것이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언진은 자신을 벗하지 남을 사귀지 않는다. 왜인가? 한미한 역관 출신이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벗으로 끼워주지 않았던 것인가? 자신이 먼저 그 사대부들과 벗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언진은 자신과 사귀고 있다. 자신이 아닌 벗과의 교유가 단절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언진의 딱한 처지에 공감할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이 같은 선언이 상당히 도전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남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전근대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공자가 말한 “남이 날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문사들끼리 모인 사회에서 나의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남의 시선과 그들의 인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언진은 자신은 스스로 벗삼을 뿐이지 남과 사귀지 않는다고 하였다. 굳이 남의 인정이 필요치 않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같은 도도함은 3행, 4행으로도 이어진다. 이언진은 시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시인으로서 자신은 이백과 성이 같고, 그림은 왕유가 다시 태어난 후신이다. 이백과의 공통점을 같은 이씨라는 데서 찾고 있지만, 사실 시를 짓는 실력이 그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의 표현이고, 그림은 왕유가 환생했다고 할 만큼 훌륭하다고 하고 있다. 2행에서 나는 나와 사귀지 남을 벗삼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3, 4행에 와서 비로소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자신이 시와 그림에 있어서 이백과 왕유에게 필적할 만하기 때문에, 굳이 자신을 알아줄 벗이 필요한 것인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시는 도도한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자신감은 청년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다. 사회화(社會化)가 덜 된 상태의 소년 내지 청년의 자신감을 이언진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같은 선언이 안쓰러운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당시 조선 사회는 타인의 인정 없이 자신만의 빼어남으로는 발신(發身)하기가 몹시 어려웠기 때문이다. 역관 이언진의 진가를 인정해 준 이는 남인 문사 이용휴(李用休, 1708~1782)였다. 그가 이언진을 제자로 거두어서 글공부를 시켰고, 그의 글실력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763년 일본으로 떠난 계미통신사절을 압물통사(押物通事)로 수행하고 나서 일본인들과 필담을 주고받는 자리에서이다. 이 통신사행 이후 연암 박지원이 이언진의 사후에 쓴 「우상전」(虞裳傳)이라는 글을 통하여 그는 불멸할 수 있었다. 생전에 실력에 걸맞은 주목을 받지 못한 이언진은 사후에 더 유명해졌다.
키워드
벗, 왕유, 우상, 이백, 이언진, 이용휴, 해탕
전후맥락
이언진(李彦瑱, 1740~1766)은 역관(譯官) 출신의 시인으로 27세에 요절하였다. 그래서 종종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816)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남들보다 일찍 삶을 마감한 사람은 재주를 꽃피울 겨를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재주가 일찍 사라져버린 것은 슬픈 일이나 우리는 이언진의 「호동거실」(衚衕居室)에서 그의 170편 연작시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시절 그가 품었던 도전 정신, 세상에 대한 자신감과 패기(覇氣) 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할 만하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이 점을 확인해 보기로 한다.
고전본문
이름 하나는 우상(虞裳), 또 하나는 해탕(蟹湯)
나는 나와 벗하지 남을 사귀지 않지.
시인으로는 이백(李白)과 성이 똑같고
화가로는 왕유(王維)의 후신(後身)이지.
[출전]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의 「호동거실(衚衕居室)」 중에서
토론하기
(1) “나는 나와 벗하지 남을 사귀지 않지.”라는 구절에서 이 시의 화자(話者)의 성격이 어떤 사람일지 추측해 봅시다.
(2) 다음은 김광석(金光石, 1964~1996)이라는 가수가 부른 「나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본문과 「나무」의 가사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눈부신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소
누구 하나 나를 찾지도 기다리지도 않소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좋소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소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소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하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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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읽기
우상(虞裳)은 이언진의 자(字)이고 해탕(蟹湯)은 호(號)이다. 이언진의 ‘언진’은 명(名), 즉 이름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처럼, 명(名), 호(號), 자(字) 등 자신을 드러내는 호칭이 많았다. 마치 현대인들이 웹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아이디가 여러 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호가 해탕이라고 하였지만 이언진은 송목관(松穆館)이라는 호도 사용하였다. 뒤에서 설명하겠으나 이언진의 글이 모여 있는 문집 이름이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인데, 제목의 송목관이 바로 이언진의 또 다른 호이다. 우상은 순임금의 치마라는 뜻인데, 우(虞)나라의 성군(聖君)인 순임금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느라 하는 일 없이 치마만 드리운 채 앉아 있어도 나라가 절로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해탕은 찻물을 끓일 때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방울을 가리키는데, 일종의 소멸감이나 존재의 덧없음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이언진의 자 우상과 호 해탕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1행에서는 이처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소개를 하였고, 2행에서는 자신의 벗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언진의 벗은 그것이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언진은 자신을 벗하지 남을 사귀지 않는다. 왜인가? 한미한 역관 출신이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벗으로 끼워주지 않았던 것인가? 자신이 먼저 그 사대부들과 벗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언진은 자신과 사귀고 있다. 자신이 아닌 벗과의 교유가 단절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언진의 딱한 처지에 공감할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이 같은 선언이 상당히 도전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남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전근대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공자가 말한 “남이 날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문사들끼리 모인 사회에서 나의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남의 시선과 그들의 인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언진은 자신은 스스로 벗삼을 뿐이지 남과 사귀지 않는다고 하였다. 굳이 남의 인정이 필요치 않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같은 도도함은 3행, 4행으로도 이어진다. 이언진은 시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시인으로서 자신은 이백과 성이 같고, 그림은 왕유가 다시 태어난 후신이다. 이백과의 공통점을 같은 이씨라는 데서 찾고 있지만, 사실 시를 짓는 실력이 그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의 표현이고, 그림은 왕유가 환생했다고 할 만큼 훌륭하다고 하고 있다. 2행에서 나는 나와 사귀지 남을 벗삼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3, 4행에 와서 비로소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자신이 시와 그림에 있어서 이백과 왕유에게 필적할 만하기 때문에, 굳이 자신을 알아줄 벗이 필요한 것인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시는 도도한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자신감은 청년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다. 사회화(社會化)가 덜 된 상태의 소년 내지 청년의 자신감을 이언진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같은 선언이 안쓰러운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당시 조선 사회는 타인의 인정 없이 자신만의 빼어남으로는 발신(發身)하기가 몹시 어려웠기 때문이다. 역관 이언진의 진가를 인정해 준 이는 남인 문사 이용휴(李用休, 1708~1782)였다. 그가 이언진을 제자로 거두어서 글공부를 시켰고, 그의 글실력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763년 일본으로 떠난 계미통신사절을 압물통사(押物通事)로 수행하고 나서 일본인들과 필담을 주고받는 자리에서이다. 이 통신사행 이후 연암 박지원이 이언진의 사후에 쓴 「우상전」(虞裳傳)이라는 글을 통하여 그는 불멸할 수 있었다. 생전에 실력에 걸맞은 주목을 받지 못한 이언진은 사후에 더 유명해졌다.
키워드
벗, 왕유, 우상, 이백, 이언진, 이용휴, 해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