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독서(讀書)에 대해 논한 글을 보면, 많은 양의 글을 읽는 다독(多讀)을 특히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안정복은 “책 일만 권을 읽으면 붓 끝에 신기(神氣)가 어린 듯하다.”, “글을 일천번 읽으면 의미가 저절로 드러난다.”, “옛글을 싫증내지 않고 일백 번을 읽는다.”, “만 권의 책을 갖고 있는 것이 백 개의 성(城)을 소유한 것보다 낫다”, “오천 권의 책을 읽지 않은 이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아라” 같은 다독과 관련된 명언들을 소개한 후, 조선 중기의 시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글은 반드시 일만 번을 읽어야 신묘한 경지에 들 수 있다”라고 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말을 새겨 듣고 즉시 두율(杜律; 두보의 율시를 모은 책)을 가져다 1만 3천번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이 때문에 이안눌은 시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날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또 자신과 같이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인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이 죽기 직전에 자신의 손자에게 준 글에 평생 독서한 책의 제목과 읽은 횟수를 밝혀놓았는데, 거기에 따르면, 『중용』 1만 번 이상, 『대학』 5천 번 이상, 『서경』과 『주역』』은 각각 수천 번, 『시경』, 『논어』, 『맹자』는 각각 천여 번씩 읽었다고 되어 있다. 이외에도 『소학』』, 『예기』, 『춘추좌씨전』 등 그가 거론한 책의 종류 및 읽은 횟수는 몹시 많은데, 읽은 횟수가 수십번 이하인 것은 아예 기록하지 않았고, 짧은 글들 역시 기록하지 않았으니, 손자는 이 뜻을 받들어 학업에 전념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대목에 이어 본문의 글이 이어진다.
고전본문
또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이 있다. 자가 자공(子公)으로, 성품은 어리석고 멍청하였으나 글 읽기만은 좋아하여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고문(古文)은 만 번을 채우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는데, 「백이전」(伯夷傳)을 특히 좋아하여 무려 1억 1만 8천 번을 읽었기 때문에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고 이름 붙였고,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효종(孝宗)께서 일찍이 “나이든 나무는 안개 속에 있고 / 가을산엔 소나기 내리네 / 저물녘 강가에 풍랑이 일어나니 / 어부는 서둘러 뱃머리 돌리네”(古木寒煙裏, 秋山白雨邊. 暮江風浪起, 漁子急回船)라고 한 그의 「용호음」(龍湖吟) 절구를 보고, “당나라 사람에게 비겨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하여 칭찬하셨다.
판서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이 그의 묘갈명(墓碣銘)에 쓰기를, “무회씨와 갈천씨의 백성이며 / 맹교와 가도 같은 시를 썼다네 / 80년의 마음가짐 하루와 같아서 / 글 읽은 횟수 억만 번을 채웠다니 기이하고 또 기이하지”(無懷葛天之民, 孟郊賈島之詩. 行心八十年兮如一日, 讀書億萬數兮奇又奇)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진실된 기록이라고 하였다.
안정복, 「상헌수필」중에서
토론하기
(1) 김득신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붙인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2) 이 글은 첫 단락에서 김득신이 독서를 많이 하였다는 사실을 기술하였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임금이 김득신의 시를 극찬하였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글읽기를 좋아하고 많이 하다보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읽기를 많이 하면 글쓰기를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 봅시다.
(3) 전근대 사람들의 글읽기 방법은 소리를 내어 읽는 성독(聲讀)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독서를 할 때 소리를 내어 읽지 않고 조용히 눈으로만 읽습니다. 이 방법을 묵독(默讀)이라고 합니다. 성독과 묵독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각각의 장단점을 비교하여 말해 봅시다.
해설읽기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본관은 안동, 자(字)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 또는 귀석산인(龜石山人)이다.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164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시를 잘 지어서 효종(孝宗)으로부터 당시(唐詩)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고, 택당(澤堂) 이식(李植)에게 당대제일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일억이라는 숫자는 전근대에는 십만번을 의미했다고 한다. 따라서 김득신이 「백이전」을 1억 1만 8천번 읽었다는 것은 십만 번 남짓 이 글을 읽었음을 의미한다. 십만 번은 1억 번의 십만 분의 일이지만, 김득신이 한 편의 글을 십만 번 읽은 것은 여전히 대단한 일이다. 안정복이 윗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김득신은 자질이 우수하고 영리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같은 인물이 밤낮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만 번을 채우지 않으면 읽기를 그만 두지 않았다. 글을 소리내어 반복적으로 읽는 것은 그에겐 하나의 습관이자 루틴(routine)이었을 것이다. 이 반복된 습관 덕분에 김득신은 노둔한 자질을 넘어서 훌륭한 성취를 할 수 있었다.
본문의 두 번째 단락에서 김득신의 글을 본 효종은 “당나라 사람에게 비겨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하였다. 시는 당시(唐詩)를 최고로 여기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효종의 이 말은 김득신을 극찬하는 말이다. 이 대목을 그가 어느 누구보다 독서를 많이 한 독서광(讀書狂)이라고 소개한 바로 뒤에 배치한 것을 보면 안정복은 그의 시적 성취의 주된 원인이 광범위한 독서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 활동 가운데 읽기는 쓰기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설명하는데, 김득신의 사례는 이 설명에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본문에 소개된 정보로만 추리해 보면, 김득신은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잘 쓰게 된 사례에 속하기 때문이다.
후배 문인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김득신의 독서에 대한 변증」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백곡(金柏谷)은 「독서기」(讀書記)에서 자기가 읽은 책들의 횟수를 기록하였는데, 「백이전」은 무려 일억 삼천 번을 읽었다고 한다. 사서삼경(四書三經), 사기(史記), 한서(漢書), 장자(莊子), 한유(韓愈)의 문집은 6,7만 번씩 읽은 것도 있고, 적게 읽은 것도 수천 번씩 읽었다고 한다. (…) 그러나 독서를 잘 하는 선비라면 하루에 「백이전」을 백 번은 읽을 것이다. 그렇다면 1년에 3만 6천 번은 읽을 수 있어서 3년을 계산하면 1억 8천 번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병으로 앓는 경우가 있고, 이런저런 일들로 왔다 갔다 하는 일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렇지만 백곡은 독실히 실천을 하는 군자였으니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면서도 아침 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여쭙는 일과 부모의 질병을 잘 보살펴드리고 음식을 봉양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을 테니 4년이 아니고서는 1억 1만 3천 번을 읽을 수 없다. 「백이전」만 해도 이미 4년의 세월이 드는데, 어느 틈에 여러 책을 저렇게 많이 읽었단 말인가.”
다독을 한 김득신도 대단하지만, 그가 「백이전」을 1억 번 넘게 읽는 데 들였던 시간을 계산해 낸 다산 정약용도 보통이 아니다. 성실한 선비라면 「백이전」은 하루에 백 번쯤 읽을 수 있다. 1년이면 3만 6천 번이고, 3년이면 1억 8천 번이다.(앞서 말했듯 이 당시 1억은 요즈음 10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3년 가운데 아파서 글을 못 읽는 날도 있을 수 있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느라 분주하여 못 읽는 날도 있을 수 있다. 또 백곡은 효자이기 때문에 부모를 봉양하느라 들이는 시간은 독서 시간에서 빼야 한다. 그래서 정약용은 「백이전」을 김득신만큼 읽으려면 4년이 걸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김득신이 「백이전」만 읽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고는 이 뒤에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내 생각에 「독서기」는 백곡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작고한 뒤에 누군가 그를 위해 전해 들은 말을 기록한 것 같다.” 정약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김득신이 남긴 시에서 “한유의 문장과 사마천의 사기(史記) 천 번을 읽고서야 /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라는 구절을 들어서 이것이 실제에 가깝다고 하였다. 많게 잡아도 천 번 남짓한 것 아닐까 하는 것이 정약용의 생각인 듯하다. 그리고 여기 나온 한유의 문장과 사마천의 사기 또한 일부의 글을 발췌한 선본(選本)이지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하였다. 축약본을 읽은 것이지 원본을 다 읽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다. 정약용은 김득신의 다독 신화를 그 나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성으로 무장한 그 역시 “이것 또한 장한 일이다.”라는 문장을 문장 끝에 붙임으로써 성실한 독서가 김득신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독서를 많이 하게 되어 문리(文理)가 나는 것은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이상이다. 문리가 난다는 말은 글을 읽는 수준이 높아져서 어떤 글을 앞에 갖다 놓아도 막힘없이 줄줄 읽을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동네에 따라 다르지만, 어디서는 맹자를 삼천 독을 하면 문리가 난다고 하였고, 또 어디서는 맹자의 「이루」장을 백번 읽으면 문리가 난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김득신은 글을 많이 읽어서 글을 더 잘 읽게 되었다는 경지를 넘어서 시를 잘 쓰게 되었다. 당나라 시 사이에 끼워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이라는 임금의 극찬을 들을 정도로. 공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만큼 매력적인 말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 김득신이 똑똑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있고 보면, 다독을 통하여 빼어난 작시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김득신 이야기는 선비들 사이에서 신화(神話)가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신화는 후배들에게 유포되었을 터인데, 다산 정약용이 이 신화를 직접 따져보았다. 그리하여 몇몇 계산과 추측을 통하여 김득신 이야기는 그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과장을 덧붙여 만든 이야기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다만 마지막에는 정약용 역시 김득신을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김득신의 훌륭함은 다산의 합리성을 넘어선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키워드
김득신, 다독, 백이전, 억만재, 효종
전후맥락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독서(讀書)에 대해 논한 글을 보면, 많은 양의 글을 읽는 다독(多讀)을 특히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안정복은 “책 일만 권을 읽으면 붓 끝에 신기(神氣)가 어린 듯하다.”, “글을 일천번 읽으면 의미가 저절로 드러난다.”, “옛글을 싫증내지 않고 일백 번을 읽는다.”, “만 권의 책을 갖고 있는 것이 백 개의 성(城)을 소유한 것보다 낫다”, “오천 권의 책을 읽지 않은 이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아라” 같은 다독과 관련된 명언들을 소개한 후, 조선 중기의 시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글은 반드시 일만 번을 읽어야 신묘한 경지에 들 수 있다”라고 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말을 새겨 듣고 즉시 두율(杜律; 두보의 율시를 모은 책)을 가져다 1만 3천번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이 때문에 이안눌은 시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날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또 자신과 같이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인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이 죽기 직전에 자신의 손자에게 준 글에 평생 독서한 책의 제목과 읽은 횟수를 밝혀놓았는데, 거기에 따르면, 『중용』 1만 번 이상, 『대학』 5천 번 이상, 『서경』과 『주역』』은 각각 수천 번, 『시경』, 『논어』, 『맹자』는 각각 천여 번씩 읽었다고 되어 있다. 이외에도 『소학』』, 『예기』, 『춘추좌씨전』 등 그가 거론한 책의 종류 및 읽은 횟수는 몹시 많은데, 읽은 횟수가 수십번 이하인 것은 아예 기록하지 않았고, 짧은 글들 역시 기록하지 않았으니, 손자는 이 뜻을 받들어 학업에 전념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대목에 이어 본문의 글이 이어진다.
고전본문
또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이 있다. 자가 자공(子公)으로, 성품은 어리석고 멍청하였으나 글 읽기만은 좋아하여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고문(古文)은 만 번을 채우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는데, 「백이전」(伯夷傳)을 특히 좋아하여 무려 1억 1만 8천 번을 읽었기 때문에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고 이름 붙였고,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효종(孝宗)께서 일찍이 “나이든 나무는 안개 속에 있고 / 가을산엔 소나기 내리네 / 저물녘 강가에 풍랑이 일어나니 / 어부는 서둘러 뱃머리 돌리네”(古木寒煙裏, 秋山白雨邊. 暮江風浪起, 漁子急回船)라고 한 그의 「용호음」(龍湖吟) 절구를 보고, “당나라 사람에게 비겨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하여 칭찬하셨다.
판서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이 그의 묘갈명(墓碣銘)에 쓰기를, “무회씨와 갈천씨의 백성이며 / 맹교와 가도 같은 시를 썼다네 / 80년의 마음가짐 하루와 같아서 / 글 읽은 횟수 억만 번을 채웠다니 기이하고 또 기이하지”(無懷葛天之民, 孟郊賈島之詩. 行心八十年兮如一日, 讀書億萬數兮奇又奇)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진실된 기록이라고 하였다.
안정복, 「상헌수필」중에서
토론하기
(1) 김득신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붙인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2) 이 글은 첫 단락에서 김득신이 독서를 많이 하였다는 사실을 기술하였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임금이 김득신의 시를 극찬하였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글읽기를 좋아하고 많이 하다보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읽기를 많이 하면 글쓰기를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 봅시다.
(3) 전근대 사람들의 글읽기 방법은 소리를 내어 읽는 성독(聲讀)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독서를 할 때 소리를 내어 읽지 않고 조용히 눈으로만 읽습니다. 이 방법을 묵독(默讀)이라고 합니다. 성독과 묵독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각각의 장단점을 비교하여 말해 봅시다.
해설읽기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본관은 안동, 자(字)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 또는 귀석산인(龜石山人)이다.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164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시를 잘 지어서 효종(孝宗)으로부터 당시(唐詩)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고, 택당(澤堂) 이식(李植)에게 당대제일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일억이라는 숫자는 전근대에는 십만번을 의미했다고 한다. 따라서 김득신이 「백이전」을 1억 1만 8천번 읽었다는 것은 십만 번 남짓 이 글을 읽었음을 의미한다. 십만 번은 1억 번의 십만 분의 일이지만, 김득신이 한 편의 글을 십만 번 읽은 것은 여전히 대단한 일이다. 안정복이 윗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김득신은 자질이 우수하고 영리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같은 인물이 밤낮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만 번을 채우지 않으면 읽기를 그만 두지 않았다. 글을 소리내어 반복적으로 읽는 것은 그에겐 하나의 습관이자 루틴(routine)이었을 것이다. 이 반복된 습관 덕분에 김득신은 노둔한 자질을 넘어서 훌륭한 성취를 할 수 있었다.
본문의 두 번째 단락에서 김득신의 글을 본 효종은 “당나라 사람에게 비겨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하였다. 시는 당시(唐詩)를 최고로 여기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효종의 이 말은 김득신을 극찬하는 말이다. 이 대목을 그가 어느 누구보다 독서를 많이 한 독서광(讀書狂)이라고 소개한 바로 뒤에 배치한 것을 보면 안정복은 그의 시적 성취의 주된 원인이 광범위한 독서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 활동 가운데 읽기는 쓰기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설명하는데, 김득신의 사례는 이 설명에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본문에 소개된 정보로만 추리해 보면, 김득신은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잘 쓰게 된 사례에 속하기 때문이다.
후배 문인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김득신의 독서에 대한 변증」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백곡(金柏谷)은 「독서기」(讀書記)에서 자기가 읽은 책들의 횟수를 기록하였는데, 「백이전」은 무려 일억 삼천 번을 읽었다고 한다. 사서삼경(四書三經), 사기(史記), 한서(漢書), 장자(莊子), 한유(韓愈)의 문집은 6,7만 번씩 읽은 것도 있고, 적게 읽은 것도 수천 번씩 읽었다고 한다. (…) 그러나 독서를 잘 하는 선비라면 하루에 「백이전」을 백 번은 읽을 것이다. 그렇다면 1년에 3만 6천 번은 읽을 수 있어서 3년을 계산하면 1억 8천 번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병으로 앓는 경우가 있고, 이런저런 일들로 왔다 갔다 하는 일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렇지만 백곡은 독실히 실천을 하는 군자였으니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면서도 아침 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여쭙는 일과 부모의 질병을 잘 보살펴드리고 음식을 봉양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을 테니 4년이 아니고서는 1억 1만 3천 번을 읽을 수 없다. 「백이전」만 해도 이미 4년의 세월이 드는데, 어느 틈에 여러 책을 저렇게 많이 읽었단 말인가.”
다독을 한 김득신도 대단하지만, 그가 「백이전」을 1억 번 넘게 읽는 데 들였던 시간을 계산해 낸 다산 정약용도 보통이 아니다. 성실한 선비라면 「백이전」은 하루에 백 번쯤 읽을 수 있다. 1년이면 3만 6천 번이고, 3년이면 1억 8천 번이다.(앞서 말했듯 이 당시 1억은 요즈음 10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3년 가운데 아파서 글을 못 읽는 날도 있을 수 있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느라 분주하여 못 읽는 날도 있을 수 있다. 또 백곡은 효자이기 때문에 부모를 봉양하느라 들이는 시간은 독서 시간에서 빼야 한다. 그래서 정약용은 「백이전」을 김득신만큼 읽으려면 4년이 걸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김득신이 「백이전」만 읽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고는 이 뒤에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내 생각에 「독서기」는 백곡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작고한 뒤에 누군가 그를 위해 전해 들은 말을 기록한 것 같다.” 정약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김득신이 남긴 시에서 “한유의 문장과 사마천의 사기(史記) 천 번을 읽고서야 /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라는 구절을 들어서 이것이 실제에 가깝다고 하였다. 많게 잡아도 천 번 남짓한 것 아닐까 하는 것이 정약용의 생각인 듯하다. 그리고 여기 나온 한유의 문장과 사마천의 사기 또한 일부의 글을 발췌한 선본(選本)이지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하였다. 축약본을 읽은 것이지 원본을 다 읽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다. 정약용은 김득신의 다독 신화를 그 나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성으로 무장한 그 역시 “이것 또한 장한 일이다.”라는 문장을 문장 끝에 붙임으로써 성실한 독서가 김득신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독서를 많이 하게 되어 문리(文理)가 나는 것은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이상이다. 문리가 난다는 말은 글을 읽는 수준이 높아져서 어떤 글을 앞에 갖다 놓아도 막힘없이 줄줄 읽을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동네에 따라 다르지만, 어디서는 맹자를 삼천 독을 하면 문리가 난다고 하였고, 또 어디서는 맹자의 「이루」장을 백번 읽으면 문리가 난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김득신은 글을 많이 읽어서 글을 더 잘 읽게 되었다는 경지를 넘어서 시를 잘 쓰게 되었다. 당나라 시 사이에 끼워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이라는 임금의 극찬을 들을 정도로. 공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만큼 매력적인 말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 김득신이 똑똑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있고 보면, 다독을 통하여 빼어난 작시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김득신 이야기는 선비들 사이에서 신화(神話)가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신화는 후배들에게 유포되었을 터인데, 다산 정약용이 이 신화를 직접 따져보았다. 그리하여 몇몇 계산과 추측을 통하여 김득신 이야기는 그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과장을 덧붙여 만든 이야기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다만 마지막에는 정약용 역시 김득신을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김득신의 훌륭함은 다산의 합리성을 넘어선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키워드
김득신, 다독, 백이전, 억만재, 효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