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맥락]
인용문 [가]는 [장자] 「산목」 편에 실려 있는 우언의 하나이다. [장자]는 한 편의 내용이 특정 주제에 대해 일관되게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한 편에 속하는 글일지라도 개별적으로 독립된 내용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가] 또한 마찬가지다. 「산목」 편은 [가]를 포함하여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다룬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용문 [나]도 마찬가지이다. 「덕충부」 편에 실려 있는 6편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고전본문]
[가] 양자가 제자들과 함께 송나라로 가다가 여관에 묵게 되었다. 여관 주인에게 첩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예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추하게 생겼는데, 추하게 생긴 여인이 귀하게 여겨지고 예쁜 여자가 천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양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여관 주인이 말했다. “예쁜 여자는 스스로를 예쁘다고 여겨서 나는 그가 예쁜 줄 모르게 되었고, 추한 여인은 스스로를 추하다고 여겨서 나는 그가 추한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양자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잘 기억해 두어라. 현명하게 행하되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버리기만 한다면 어디를 간들 사랑받지 않겠느냐?” – 「산목(山木)」, [장자]
[나]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에 애타타라는 추하게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그와 생활하면 그를 존경하며 떠나지를 못하였고, 여자드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를 보고서는 부모에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애타타 선생님의 첩이 되겠습니다’라며 청하는 이가 십여 명도 더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주장을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늘 사람들과 화합을 이루었을 따름입니다. 그는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는 군주의 지위도 없고, 사람들의 배를 채워줄 만큼 모아 둔 재력도 없습니다. 또한 외모의 추함은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이지요. 남과 화합하되 무언가를 주장하지도 않았고, 명성은 살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남자와 여자들이 그의 앞에 모여들고 있으니 이는 필시 그가 남다른 점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과인이 그를 불러 보니 과연 추함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와 함께 지낸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과인은 그의 사람됨에 마음이 끌렸고, 일 년이 되지 않아 과인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마침 나라에 재상이 없기에 과인은 나라를 그에게 맡기려 하였는데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응답하기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사양하였습니다. 과인은 부끄러웠지만 결국은 그에게 나라를 맡겼습니다만 그는 얼마 안 있다가 과인을 떠났습니다. 과인은 멍하니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이 나라에서 더불어 즐길 이가 사라진 듯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공자가 말하였다. “제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새끼 돼지들이 죽은 어미의 젖을 빨다가는 잠시 후에 놀라서 모두 어미를 버리고 달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을 돌봐주지 않았고 자기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미를 사랑하는 것은 그 형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체를 부리는 것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전쟁을 하다가 죽은 이에게는 그가 사용하던 칼을 함께 묻어주지 않습니다. 다리가 잘린 사람에게는 신발에 대한 애착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그렇게 해야 할 근본적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 지금 애타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미더움을 받고 아무 도움 되는 일 없이도 남과 친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주면서도 그가 받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입니다. 그는 필시 재질이 완전하면서도 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 「덕충부(德充符)」, [장자]
토론하기
(1) [가]에서 예쁜 여인이 푸대접을 받고 추한 여인이 좋은 대접을 받게 된 이유를 헤아려보자. 또한 [나]에서 애타타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믿음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도 헤아려보자.
(2) [가]나 [나]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실현 여부에 대하여 근거를 제시하면서 토론해보자.
(3)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또한 그러한 기준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유가와 도가는 근대 이전 시기 한자권의 사상과 문화를 양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유가가 현실 참여적이고 실용적이며 인간과 사회에 사유의 중점을 두었다면, 도가는 현실 초월적이고 이상적이며 인간 욕망의 해체와 무위자연에 사유의 중점을 두었다. 또한 유가는 공자 등의 성현을 절대적으로 존숭하는 등 절대주의적 진리관을 따랐다면 도가는 성현의 말씀과 소 오줌, 말 똥 사이에는 아무런 우열의 차이가 없다며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추종하였다. 그렇다 보니 유가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주로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구체적, 계몽적인 반면에 도가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주로 탈속적이고 낭만적이며 추상적, 방임적인 경향을 띤다.
장자는 이러한 경향성을 지닌 도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고 장자에는 도가 사상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담론이 실려 있다. 시비(是非, 옳고 그름)・선악(善惡, 선과 악)・진위(眞僞, 참과 거짓)・호오(好惡, 좋음과 싫음)・이해(利害, 이로움과 해로움) 판단 등 인식의 상대성 문제는 그 중 하나로 장자 곳곳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졌다. 인용문 [가], [나]는 인식의 상대성 문제 가운데 미추(美醜, 아름다움과 추함) 판단에 관하여 다루었다.
장자는 기본적으로 시비나 선악, 진위, 호오, 미추, 이해 같이 서로 대립적인 관계의 절대성을 부정하였다. 가령 언제 어디서나 옳다거나 역으로 언제 어디서나 틀리다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여겼다. 선악이나 진위, 호오, 미추, 이해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백・청・적・황・흑의 오색이 영롱하게 펼쳐져 있으면 시각적으로 아름답다고 인식한다. 궁・상・각・치・우 다섯 음이 조화를 이루면 청각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런데 장자는 바로 그 오색의 영롱함과 오음의 조화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먹먹해진다고 한다. 오색의 영롱함과 오음의 조화에 눈과 귀가 멀어 그 외의 다른 것을 다 아름답지 못하다고 간주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색의 영롱함과 오음의 조화가 미추를 판단하는 데 유일무이한 기준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이로움과 해로움도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장자는 이러한 일화를 소개했다. 이름난 목수인 장석이라는 이가 제나라로 가다가 어느 사당에 있는 참나무를 보았다. 뻗은 가지가 수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했고 줄기의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가지 위에서는 산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이 자라 있었다. 이 나무를 베면 십여 척의 배를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장석은 이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함께 가던 제자가 이렇게 훌륭한 재목을 본 적이 없는데 선생님께서는 왜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석이 대답했다. “이 참나무는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으며 그릇을 만들면 곧 깨져버린다.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려 못쓰게 되고 기둥을 만들면 쉬이 좀이 슨다. 재목이 될 만한 나무가 아니다. 쓸데가 없어서 그처럼 오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장석의 꿈에 이 참나무가 나타나서 장석을 꾸짖었다. 내용인즉, 과일나무처럼 인간에게 유익한 나무는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휘어지는 등 줄곧 인간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중간에 일찍 죽게 된다. 반면에 참나무 자신은 인간에게 쓸데가 없었기에 줄기와 가지를 한껏 펼쳐내며 오랫동안 살 수 있었음이니, 쓸데가 있었으면 이렇게 오래 살며 이리도 크게 자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나무에게는 해로운 것이며, 인간에게 무익한 것이 나무에게는 이로운 것이 된다. 결국 이롭다, 해롭다라는 판단은 입장을 달리하게 되면 이렇듯 뒤집혀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장자는 이처럼 시비나 선악, 진위, 호오 등도 입장을 달리하면 그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나에게는 옳고, 선하고, 참되고, 좋은 것이 나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남에게는 정반대로 그르고, 악하고, 거짓되고, 나쁜 것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여관 주인의 두 첩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적어도 당사자와 양자 및 그 제자들에게는 미추 판단이 공통되었기 때문이다. 애타타의 추함도 그렇다. 그러나 여관 주인에게 두 첩이 객관적으로 지닌 아름다움과 추함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첩들이나 양자 일행의 미추에 대한 판단은 그들 입장에서의 판단인 것이지 여관 주인 입장에서의 판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타타의 추함에 대한 판단이 외모를 기준으로 볼 때는 성립된다고 해도 이를테면 인격과 같은 내면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볼 때는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미추와 호오 판단은 별개일 수 있다. 곧 여관 주인의 두 첩에 대한 호오 판단, 애타타에 대한 사람들의 호오 판단은 객관적이 미추 판단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오 판단뿐만이 아니라 시비 판단이나 진위 판단, 선악 판단, 이해 판단 등도 미추에 대한 객관적 판단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과연 현실에서도 그러할까라는 물음을 던져볼 필요는 있다. 미추 판단에 의해 호오, 시비, 진위, 선악, 이해 판단 등이 영향을 받는 일이 오히려 더 많이 그리고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기에 그러하다.
[앞뒤 맥락]
인용문 [가]는 [장자] 「산목」 편에 실려 있는 우언의 하나이다. [장자]는 한 편의 내용이 특정 주제에 대해 일관되게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한 편에 속하는 글일지라도 개별적으로 독립된 내용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가] 또한 마찬가지다. 「산목」 편은 [가]를 포함하여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다룬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용문 [나]도 마찬가지이다. 「덕충부」 편에 실려 있는 6편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고전본문]
[가] 양자가 제자들과 함께 송나라로 가다가 여관에 묵게 되었다. 여관 주인에게 첩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예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추하게 생겼는데, 추하게 생긴 여인이 귀하게 여겨지고 예쁜 여자가 천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양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여관 주인이 말했다. “예쁜 여자는 스스로를 예쁘다고 여겨서 나는 그가 예쁜 줄 모르게 되었고, 추한 여인은 스스로를 추하다고 여겨서 나는 그가 추한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양자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잘 기억해 두어라. 현명하게 행하되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버리기만 한다면 어디를 간들 사랑받지 않겠느냐?” – 「산목(山木)」, [장자]
[나]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에 애타타라는 추하게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그와 생활하면 그를 존경하며 떠나지를 못하였고, 여자드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를 보고서는 부모에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애타타 선생님의 첩이 되겠습니다’라며 청하는 이가 십여 명도 더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주장을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늘 사람들과 화합을 이루었을 따름입니다. 그는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는 군주의 지위도 없고, 사람들의 배를 채워줄 만큼 모아 둔 재력도 없습니다. 또한 외모의 추함은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이지요. 남과 화합하되 무언가를 주장하지도 않았고, 명성은 살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남자와 여자들이 그의 앞에 모여들고 있으니 이는 필시 그가 남다른 점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과인이 그를 불러 보니 과연 추함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와 함께 지낸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과인은 그의 사람됨에 마음이 끌렸고, 일 년이 되지 않아 과인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마침 나라에 재상이 없기에 과인은 나라를 그에게 맡기려 하였는데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응답하기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사양하였습니다. 과인은 부끄러웠지만 결국은 그에게 나라를 맡겼습니다만 그는 얼마 안 있다가 과인을 떠났습니다. 과인은 멍하니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이 나라에서 더불어 즐길 이가 사라진 듯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공자가 말하였다. “제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새끼 돼지들이 죽은 어미의 젖을 빨다가는 잠시 후에 놀라서 모두 어미를 버리고 달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을 돌봐주지 않았고 자기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미를 사랑하는 것은 그 형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체를 부리는 것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전쟁을 하다가 죽은 이에게는 그가 사용하던 칼을 함께 묻어주지 않습니다. 다리가 잘린 사람에게는 신발에 대한 애착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그렇게 해야 할 근본적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 지금 애타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미더움을 받고 아무 도움 되는 일 없이도 남과 친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주면서도 그가 받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입니다. 그는 필시 재질이 완전하면서도 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 「덕충부(德充符)」, [장자]
토론하기
(1) [가]에서 예쁜 여인이 푸대접을 받고 추한 여인이 좋은 대접을 받게 된 이유를 헤아려보자. 또한 [나]에서 애타타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믿음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도 헤아려보자.
(2) [가]나 [나]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실현 여부에 대하여 근거를 제시하면서 토론해보자.
(3)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또한 그러한 기준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유가와 도가는 근대 이전 시기 한자권의 사상과 문화를 양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유가가 현실 참여적이고 실용적이며 인간과 사회에 사유의 중점을 두었다면, 도가는 현실 초월적이고 이상적이며 인간 욕망의 해체와 무위자연에 사유의 중점을 두었다. 또한 유가는 공자 등의 성현을 절대적으로 존숭하는 등 절대주의적 진리관을 따랐다면 도가는 성현의 말씀과 소 오줌, 말 똥 사이에는 아무런 우열의 차이가 없다며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추종하였다. 그렇다 보니 유가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주로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구체적, 계몽적인 반면에 도가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주로 탈속적이고 낭만적이며 추상적, 방임적인 경향을 띤다.
장자는 이러한 경향성을 지닌 도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고 장자에는 도가 사상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담론이 실려 있다. 시비(是非, 옳고 그름)・선악(善惡, 선과 악)・진위(眞僞, 참과 거짓)・호오(好惡, 좋음과 싫음)・이해(利害, 이로움과 해로움) 판단 등 인식의 상대성 문제는 그 중 하나로 장자 곳곳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졌다. 인용문 [가], [나]는 인식의 상대성 문제 가운데 미추(美醜, 아름다움과 추함) 판단에 관하여 다루었다.
장자는 기본적으로 시비나 선악, 진위, 호오, 미추, 이해 같이 서로 대립적인 관계의 절대성을 부정하였다. 가령 언제 어디서나 옳다거나 역으로 언제 어디서나 틀리다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여겼다. 선악이나 진위, 호오, 미추, 이해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백・청・적・황・흑의 오색이 영롱하게 펼쳐져 있으면 시각적으로 아름답다고 인식한다. 궁・상・각・치・우 다섯 음이 조화를 이루면 청각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런데 장자는 바로 그 오색의 영롱함과 오음의 조화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먹먹해진다고 한다. 오색의 영롱함과 오음의 조화에 눈과 귀가 멀어 그 외의 다른 것을 다 아름답지 못하다고 간주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색의 영롱함과 오음의 조화가 미추를 판단하는 데 유일무이한 기준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이로움과 해로움도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장자는 이러한 일화를 소개했다. 이름난 목수인 장석이라는 이가 제나라로 가다가 어느 사당에 있는 참나무를 보았다. 뻗은 가지가 수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했고 줄기의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가지 위에서는 산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이 자라 있었다. 이 나무를 베면 십여 척의 배를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장석은 이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함께 가던 제자가 이렇게 훌륭한 재목을 본 적이 없는데 선생님께서는 왜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석이 대답했다. “이 참나무는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으며 그릇을 만들면 곧 깨져버린다.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려 못쓰게 되고 기둥을 만들면 쉬이 좀이 슨다. 재목이 될 만한 나무가 아니다. 쓸데가 없어서 그처럼 오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장석의 꿈에 이 참나무가 나타나서 장석을 꾸짖었다. 내용인즉, 과일나무처럼 인간에게 유익한 나무는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휘어지는 등 줄곧 인간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중간에 일찍 죽게 된다. 반면에 참나무 자신은 인간에게 쓸데가 없었기에 줄기와 가지를 한껏 펼쳐내며 오랫동안 살 수 있었음이니, 쓸데가 있었으면 이렇게 오래 살며 이리도 크게 자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나무에게는 해로운 것이며, 인간에게 무익한 것이 나무에게는 이로운 것이 된다. 결국 이롭다, 해롭다라는 판단은 입장을 달리하게 되면 이렇듯 뒤집혀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장자는 이처럼 시비나 선악, 진위, 호오 등도 입장을 달리하면 그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나에게는 옳고, 선하고, 참되고, 좋은 것이 나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남에게는 정반대로 그르고, 악하고, 거짓되고, 나쁜 것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여관 주인의 두 첩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적어도 당사자와 양자 및 그 제자들에게는 미추 판단이 공통되었기 때문이다. 애타타의 추함도 그렇다. 그러나 여관 주인에게 두 첩이 객관적으로 지닌 아름다움과 추함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첩들이나 양자 일행의 미추에 대한 판단은 그들 입장에서의 판단인 것이지 여관 주인 입장에서의 판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타타의 추함에 대한 판단이 외모를 기준으로 볼 때는 성립된다고 해도 이를테면 인격과 같은 내면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볼 때는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미추와 호오 판단은 별개일 수 있다. 곧 여관 주인의 두 첩에 대한 호오 판단, 애타타에 대한 사람들의 호오 판단은 객관적이 미추 판단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오 판단뿐만이 아니라 시비 판단이나 진위 판단, 선악 판단, 이해 판단 등도 미추에 대한 객관적 판단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과연 현실에서도 그러할까라는 물음을 던져볼 필요는 있다. 미추 판단에 의해 호오, 시비, 진위, 선악, 이해 판단 등이 영향을 받는 일이 오히려 더 많이 그리고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기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