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최칠칠전」은 『금릉집』권6 ‘잡저(雜著)’ 편에 실려 있다. 조선 후기 중인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최북(崔北)에 대하여 그의 기행을 중심으로 일대기를 간략하게 서술한 글이다. 최북은 한양 출신으로 시서화를 겸비한 직업화가로 이름 높았으며, 당시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이익, 이용휴, 이광사, 강세황 같은 남인 소론계 지식인들과 가까이 지냈다. 만년에는 박지원, 남공철 등 북학파 계열의 지식인과 교유하였다. 그의 화풍은 남종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탈속적이고 자연주의적 경향을 띠었고, 말년에는 자유분방한 화풍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고전본문
자가 칠칠인 최북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 가계나 본관을 알지 못한다. 이름인 북(北) 자를 파자(破字)*한 칠칠(七七)을 자(字)로 삼은 것이 그의 생전에 널리 퍼졌다. 그림을 매우 잘 그렸으며 한 쪽 눈이 멀어서 늘 외알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칠칠은 술을 좋아하고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다. 금강산 구룡연에 이르러서는 몹시 즐거워하며 술을 잔뜩 마시고는 울다가 웃다가 하더니 이윽고 고함을 지르며 말하기를 “천하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하리라”고 하고는 마침내 몸을 물구나무서듯 뒤집어 구룡연으로 뛰어내렸다가 주변에 있던 사람이 구해주어 죽지는 않았다. 그를 들쳐 들고 산 아래의 반석 위로 옮겨 눕히니 숨을 헐떡헐떡 쉬다가 문득 일어나 휘파람을 길게 불었는데 그 소리가 수풀을 울려 깃들어 있던 송골매들이 모두 휘익 대며 날아갔다.
칠칠은 하루에 늘 5, 6되의 술을 마셨다. 시중의 술파는 아이들이 술병을 들고 오면 칠칠은 그때마다 집안의 책과 화첩, 종이, 비단을 털어 주고는 술을 샀다. 재물이 매우 궁색해지자 급기야 나그네가 되어 서경(西京)과 동래(東萊)를 유람하면서 그림을 팔았는데 그 곳 사람들이 비단을 들고 오는 바람에 문 앞에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산수를 그려 달라 청하니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칠칠은 붓을 던지며 “종이 밖에는 모두 물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림이 마음에 들 정도의 수작인데 주는 돈이 적으면 문득 노하여 그 그림을 찢어 없애버렸다. 혹 그림이 마음에 들 정도가 아니었음에도 주는 돈이 많으면 껄껄 웃으며 대금을 돌려주고는 대문을 나가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며 “저 사람은 값어치를 모른다”라고 비웃었다.
칠칠은 스스로 호를 호생자(毫生子)라 했다. 그는 성품이 드세고 거만하여 남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하루는 서평자(西平子)와 더불어 백 냥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었다. 칠칠이 승기를 잡자 서평자가 한 수만 무르자고 하니 칠칠이 갑자기 바둑판을 쓸어 업고는 물러나 앉으며 “바둑은 본래 오락인데 무르기만 한다면 평생 두어도 한 판을 마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 뒤로는 다시는 서평자와 바둑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어떤 귀인의 집을 방문했다. 문지기가 칠칠의 이름을 부르기 꺼려하여 들어가 “최직장이 왔습니다”고 아뢰니 칠칠이 벌컥 화를 내며 “당신은 어찌하여 나더러 최정승이라 하지 않고 최직장이라 하느냐”고 하였다. 문지기가 웃으며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라고 반문하자 칠칠은 “내가 직장이 된 적은 언제 있었는가? 만일 직함을 붙여 나를 높이려 한 것이거든 왜 하필 정승이라는 높은 직함을 버리고 직장이라는 낮은 직함을 붙였는가?”라 하고는 귀인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칠칠의 그림이 날로 세상에 전파되자 세인들은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렀다. 특히 꽃과 나무, 새, 짐승, 괴석(怪石), 고목(古木)을 매우 잘 그렸고 장난삼아 쓴 광초(狂草)**는 일반 서예가들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었다.
처음에 나는 이전(李佃)으로 인하여 칠칠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칠칠과 산방에서 만나 촛불을 켜놓고 대나무 그림을 여러 폭 그렸다. 그때 칠칠이 나에게 말하기를 “국가에서 수군 몇 만 명을 길러서 장차 왜에 대비하려 하지만 왜인은 본래 수전에 익숙하고 우리 습속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니 왜가 와도 우리가 응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풍랑 속에 죽어갈 터인데 무엇 때문에 삼남 지방의 사람들을 번잡하게 하느냐”라고 했다. 다시 술을 들어 이야기하다보니 날이 밝았다. 세상 사람들은 칠칠을 술꾼이라고도 하고 환쟁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그를 가리켜 미친놈이라고도 하지만 그의 말이 때로 깊은 깨달음을 주거나 쓸모가 높았음이 이와 같았다. 이전은 칠칠이『서상기』나『수호전』같은 책을 읽기 좋아했고, 지은 시도 기이하고 고풍스러워 읊조릴 만했지만 감춰두고는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고 했다.
최북은 한양의 여관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른다.
[출전] 남공철, 『금릉집』권 6, 「최칠칠전」 중에서
* 파자(破字) : 글자를 분해하는 것을 말한다. 북(北) 자를 분해하면 왼쪽 부분과 오른쪽 부분 모두 칠(七) 자와 유사한 형상을 띤다.
** 광초(狂草) : 초서의 한 종류. 초서는 한자를 흘겨 쓴 글꼴을 가리키는데, 흘겨 쓴 정도가 매우 심하여 마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쓴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토론하기
(1) 최북의 일화를 토대로 최북이라는 사람을 분석해보자.
(2) 금강산 구룡연에서 최북이 한 말과 취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3) 살면서 가장 감격스러웠을 때는 언제인가? 무엇으로 인해 감격스러웠는가? 감격했을 때 어떠한 마음이 들었으며 어떠한 행동을 했는가?
해설읽기
내 생애 최고의 절경과 마주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밀려들 때 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또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조선 후기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최북은 금강산 구룡폭포와 연이어 있는 구룡연을 보고는 “나 천하의 명인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으리라” 외치고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구룡연으로 뛰어내렸다. 이렇게 행동했을 때 최북을 사로잡고 있는 감정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가 느꼈던 감격의 크기는 어떠했을까?
물론 감격의 크기가 엄청나다고 하여 모두가 다 최북처럼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최북의 그러한 언행은 최북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최북은 대략 1712년 즈음에 태어나 1786년 언저리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직업적 화가이자 여항시인으로, 또 빼어난 서예가로도 이름이 났던 인물로, 괴팍하고 불같은 성격에 오기, 고집, 자만 등이 강해 많은 기행이 전해지고 있다. 가령 「최칠칠전」에 기술된 기행 외에도 한쪽 눈이 멀게 된 일화도 유명하다. 어느 벼슬아치가 최북에게 그림을 요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그는 최북을 협박하였다. 그러자 최북은 “남이 나를 못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못쓰게 한다”고 하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하고는 평생을 외알 안경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단순히 기행이라기보다는 평소의 신념을 굳세게 지키고자 했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보기에 따라 광기가 어린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최북은 늘 술을 마셨다. 「최칠칠전」을 보면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기보다는 술을 마시기 위해 그림을 팔았다고 보일 정도로 술을 탐했다고 할 수 있는 장면이다. 뛰어난 재주와 남다른 역량을 지닌 이가 세상과 불화관계에 놓였을 때 줄곧 택했던 것처럼 그 또한 술에 탐닉했음이다. 빼어난 예술적 역량과 나란히 하는 기행과 광기 그리고 술! 어쩌면 이는 절경을 마주했을 때 최북이 보인 행동이 결코 일반적일 수 없음을 말해주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금강산 구룡연에서 보였던 최북의 행동을 광기나 취기로 인한 행동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품과의 몰아일체를 향한 염원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을까? 최북의 그림 중 80여 종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고 그 대부분은 예술적 성취가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북의 예술적 역량이 탁월함은 물론 그가 예술을 보는 눈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한 높은 예술혼을 지녔던 이라면 구룡폭포와 구룡연이 펼쳐져 있는 광경을 한 폭의 빼어난 그림으로, 곧 완벽한 예술 작품으로 인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예술 작품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은 어쩌면 최북같이 기벽과 광기가 한데 얽혀있는 예술혼의 소유자에게는 가장 감격스런 일이었을 수도 있다. 이를 절정의 카타르시스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빼어난 절경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과 영혼의 갖은 번뇌와 욕망, 근심 따위가 일순간 씻겨나가는 듯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정화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카타르시스는 마음과 영혼 속 번뇌나 욕망, 근심 같은 것들만 씻겨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해체되는 듯한 경험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몰아(沒我)”니 “망아(忘我)”니 하는 경지다. ‘나’가 소멸되는 경지, ‘나’가 잊히는 경지 말이다. 최북은 구룡연 일대가 자아내는 풍경을 보는 순간 자아가 해체되는 듯한 경험에 빠져들었고 그로 인해 구룡연으로, 곧 최고의 예술 속으로 자신을 던졌을 수도 있다.
이러한 카타르시스를 유발해주는 곳은 꼭 금강산 구룡폭포와 같은 절경만은 아닐 수 있다. 예컨대 그랜드캐넌처럼 또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빨려들어갈 것 같은 창공 속으로 신비롭게 솟아 있는 히말라야의 만년설 봉우리처럼 우리 인간의 의식을 묵직하고도 강하게 압박하는 대자연의 스케일을 접했을 때, 일망무제의 대양 한복판에 저 홀로 떠 있을 때, 보이는 사방 저 끝까지가 온통 모래인 사막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였을 때도 인식이 해체되고 자아가 증발되는 경험에 휩싸일 수 있다. 이 또한 절정의 감격이 우리 인간에게 안겨주는 다양한 감정과 경험의 일부이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자아의 해체라는 경험을 실제 자신의 죽음으로 반드시 이어가야 할 필연성이나 정당은 하나도 없음을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다.
키워드
격정, 절경, 최북, 최칠칠전, 카타르시스
전후맥락
「최칠칠전」은 『금릉집』권6 ‘잡저(雜著)’ 편에 실려 있다. 조선 후기 중인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최북(崔北)에 대하여 그의 기행을 중심으로 일대기를 간략하게 서술한 글이다. 최북은 한양 출신으로 시서화를 겸비한 직업화가로 이름 높았으며, 당시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이익, 이용휴, 이광사, 강세황 같은 남인 소론계 지식인들과 가까이 지냈다. 만년에는 박지원, 남공철 등 북학파 계열의 지식인과 교유하였다. 그의 화풍은 남종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탈속적이고 자연주의적 경향을 띠었고, 말년에는 자유분방한 화풍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고전본문
자가 칠칠인 최북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 가계나 본관을 알지 못한다. 이름인 북(北) 자를 파자(破字)*한 칠칠(七七)을 자(字)로 삼은 것이 그의 생전에 널리 퍼졌다. 그림을 매우 잘 그렸으며 한 쪽 눈이 멀어서 늘 외알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칠칠은 술을 좋아하고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다. 금강산 구룡연에 이르러서는 몹시 즐거워하며 술을 잔뜩 마시고는 울다가 웃다가 하더니 이윽고 고함을 지르며 말하기를 “천하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하리라”고 하고는 마침내 몸을 물구나무서듯 뒤집어 구룡연으로 뛰어내렸다가 주변에 있던 사람이 구해주어 죽지는 않았다. 그를 들쳐 들고 산 아래의 반석 위로 옮겨 눕히니 숨을 헐떡헐떡 쉬다가 문득 일어나 휘파람을 길게 불었는데 그 소리가 수풀을 울려 깃들어 있던 송골매들이 모두 휘익 대며 날아갔다.
칠칠은 하루에 늘 5, 6되의 술을 마셨다. 시중의 술파는 아이들이 술병을 들고 오면 칠칠은 그때마다 집안의 책과 화첩, 종이, 비단을 털어 주고는 술을 샀다. 재물이 매우 궁색해지자 급기야 나그네가 되어 서경(西京)과 동래(東萊)를 유람하면서 그림을 팔았는데 그 곳 사람들이 비단을 들고 오는 바람에 문 앞에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산수를 그려 달라 청하니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칠칠은 붓을 던지며 “종이 밖에는 모두 물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림이 마음에 들 정도의 수작인데 주는 돈이 적으면 문득 노하여 그 그림을 찢어 없애버렸다. 혹 그림이 마음에 들 정도가 아니었음에도 주는 돈이 많으면 껄껄 웃으며 대금을 돌려주고는 대문을 나가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며 “저 사람은 값어치를 모른다”라고 비웃었다.
칠칠은 스스로 호를 호생자(毫生子)라 했다. 그는 성품이 드세고 거만하여 남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하루는 서평자(西平子)와 더불어 백 냥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었다. 칠칠이 승기를 잡자 서평자가 한 수만 무르자고 하니 칠칠이 갑자기 바둑판을 쓸어 업고는 물러나 앉으며 “바둑은 본래 오락인데 무르기만 한다면 평생 두어도 한 판을 마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 뒤로는 다시는 서평자와 바둑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어떤 귀인의 집을 방문했다. 문지기가 칠칠의 이름을 부르기 꺼려하여 들어가 “최직장이 왔습니다”고 아뢰니 칠칠이 벌컥 화를 내며 “당신은 어찌하여 나더러 최정승이라 하지 않고 최직장이라 하느냐”고 하였다. 문지기가 웃으며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라고 반문하자 칠칠은 “내가 직장이 된 적은 언제 있었는가? 만일 직함을 붙여 나를 높이려 한 것이거든 왜 하필 정승이라는 높은 직함을 버리고 직장이라는 낮은 직함을 붙였는가?”라 하고는 귀인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칠칠의 그림이 날로 세상에 전파되자 세인들은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렀다. 특히 꽃과 나무, 새, 짐승, 괴석(怪石), 고목(古木)을 매우 잘 그렸고 장난삼아 쓴 광초(狂草)**는 일반 서예가들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었다.
처음에 나는 이전(李佃)으로 인하여 칠칠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칠칠과 산방에서 만나 촛불을 켜놓고 대나무 그림을 여러 폭 그렸다. 그때 칠칠이 나에게 말하기를 “국가에서 수군 몇 만 명을 길러서 장차 왜에 대비하려 하지만 왜인은 본래 수전에 익숙하고 우리 습속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니 왜가 와도 우리가 응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풍랑 속에 죽어갈 터인데 무엇 때문에 삼남 지방의 사람들을 번잡하게 하느냐”라고 했다. 다시 술을 들어 이야기하다보니 날이 밝았다. 세상 사람들은 칠칠을 술꾼이라고도 하고 환쟁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그를 가리켜 미친놈이라고도 하지만 그의 말이 때로 깊은 깨달음을 주거나 쓸모가 높았음이 이와 같았다. 이전은 칠칠이『서상기』나『수호전』같은 책을 읽기 좋아했고, 지은 시도 기이하고 고풍스러워 읊조릴 만했지만 감춰두고는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고 했다.
최북은 한양의 여관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른다.
[출전] 남공철, 『금릉집』권 6, 「최칠칠전」 중에서
* 파자(破字) : 글자를 분해하는 것을 말한다. 북(北) 자를 분해하면 왼쪽 부분과 오른쪽 부분 모두 칠(七) 자와 유사한 형상을 띤다.
** 광초(狂草) : 초서의 한 종류. 초서는 한자를 흘겨 쓴 글꼴을 가리키는데, 흘겨 쓴 정도가 매우 심하여 마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쓴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토론하기
(1) 최북의 일화를 토대로 최북이라는 사람을 분석해보자.
(2) 금강산 구룡연에서 최북이 한 말과 취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3) 살면서 가장 감격스러웠을 때는 언제인가? 무엇으로 인해 감격스러웠는가? 감격했을 때 어떠한 마음이 들었으며 어떠한 행동을 했는가?
해설읽기
내 생애 최고의 절경과 마주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밀려들 때 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또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조선 후기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최북은 금강산 구룡폭포와 연이어 있는 구룡연을 보고는 “나 천하의 명인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으리라” 외치고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구룡연으로 뛰어내렸다. 이렇게 행동했을 때 최북을 사로잡고 있는 감정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가 느꼈던 감격의 크기는 어떠했을까?
물론 감격의 크기가 엄청나다고 하여 모두가 다 최북처럼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최북의 그러한 언행은 최북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최북은 대략 1712년 즈음에 태어나 1786년 언저리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직업적 화가이자 여항시인으로, 또 빼어난 서예가로도 이름이 났던 인물로, 괴팍하고 불같은 성격에 오기, 고집, 자만 등이 강해 많은 기행이 전해지고 있다. 가령 「최칠칠전」에 기술된 기행 외에도 한쪽 눈이 멀게 된 일화도 유명하다. 어느 벼슬아치가 최북에게 그림을 요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그는 최북을 협박하였다. 그러자 최북은 “남이 나를 못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못쓰게 한다”고 하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하고는 평생을 외알 안경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단순히 기행이라기보다는 평소의 신념을 굳세게 지키고자 했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보기에 따라 광기가 어린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최북은 늘 술을 마셨다. 「최칠칠전」을 보면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기보다는 술을 마시기 위해 그림을 팔았다고 보일 정도로 술을 탐했다고 할 수 있는 장면이다. 뛰어난 재주와 남다른 역량을 지닌 이가 세상과 불화관계에 놓였을 때 줄곧 택했던 것처럼 그 또한 술에 탐닉했음이다. 빼어난 예술적 역량과 나란히 하는 기행과 광기 그리고 술! 어쩌면 이는 절경을 마주했을 때 최북이 보인 행동이 결코 일반적일 수 없음을 말해주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금강산 구룡연에서 보였던 최북의 행동을 광기나 취기로 인한 행동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품과의 몰아일체를 향한 염원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을까? 최북의 그림 중 80여 종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고 그 대부분은 예술적 성취가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북의 예술적 역량이 탁월함은 물론 그가 예술을 보는 눈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한 높은 예술혼을 지녔던 이라면 구룡폭포와 구룡연이 펼쳐져 있는 광경을 한 폭의 빼어난 그림으로, 곧 완벽한 예술 작품으로 인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예술 작품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은 어쩌면 최북같이 기벽과 광기가 한데 얽혀있는 예술혼의 소유자에게는 가장 감격스런 일이었을 수도 있다. 이를 절정의 카타르시스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빼어난 절경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과 영혼의 갖은 번뇌와 욕망, 근심 따위가 일순간 씻겨나가는 듯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정화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카타르시스는 마음과 영혼 속 번뇌나 욕망, 근심 같은 것들만 씻겨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해체되는 듯한 경험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몰아(沒我)”니 “망아(忘我)”니 하는 경지다. ‘나’가 소멸되는 경지, ‘나’가 잊히는 경지 말이다. 최북은 구룡연 일대가 자아내는 풍경을 보는 순간 자아가 해체되는 듯한 경험에 빠져들었고 그로 인해 구룡연으로, 곧 최고의 예술 속으로 자신을 던졌을 수도 있다.
이러한 카타르시스를 유발해주는 곳은 꼭 금강산 구룡폭포와 같은 절경만은 아닐 수 있다. 예컨대 그랜드캐넌처럼 또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빨려들어갈 것 같은 창공 속으로 신비롭게 솟아 있는 히말라야의 만년설 봉우리처럼 우리 인간의 의식을 묵직하고도 강하게 압박하는 대자연의 스케일을 접했을 때, 일망무제의 대양 한복판에 저 홀로 떠 있을 때, 보이는 사방 저 끝까지가 온통 모래인 사막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였을 때도 인식이 해체되고 자아가 증발되는 경험에 휩싸일 수 있다. 이 또한 절정의 감격이 우리 인간에게 안겨주는 다양한 감정과 경험의 일부이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자아의 해체라는 경험을 실제 자신의 죽음으로 반드시 이어가야 할 필연성이나 정당은 하나도 없음을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다.
키워드
격정, 절경, 최북, 최칠칠전, 카타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