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는 10권으로 이루어진 고구려본기의 두 번째 편인 대무신왕 편에 실려 있다. 「대무신왕본기」에는 대무신왕이 재위했던 27년간에 있었던 중요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낙랑국 정벌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대무신왕 15년에 일어난 일로, 그해 4월에 고구려가 낙랑국을 정벌하였다는 사실과 같은 해 11월 호동왕자가 자결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다만 낙랑국 정벌 시 호동왕자의 행위와 그의 자결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다. 호동왕자의 자결에 대한 기술 말미에는 이에 대한 김부식의 논평이 함께 실려 있다.
고전본문
대무신왕 15년(32년)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유람하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왕궁 밖으로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서는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예사 사람이 아닌 게 틀림없소. 어찌 북국(北國,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낙랑왕이 결국에는 호동왕자와 함께 궁궐로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왕자가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낙랑왕의 딸, 곧 낙랑공주에게 말을 전했다.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저절로 울리는 북을 찢고 스스로 우는 나팔을 부수면 내가 예를 갖추어 그대를 아내로서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 이전부터 낙랑국에는 적병이 침입해오면 저절로 울리는 북과 스스로 우는 나팔이 있었다. 그래서 명을 내려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낙랑왕의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 안에 들어가 저절로 울리는 북의 양면을 찢고 스스로 우는 나팔의 주둥이를 부수고는 호동왕자에게 이를 알렸다.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낙랑왕은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였다. 고구려 병사가 엄습하여 성 아래에 다다른 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훼손된 것을 알았다. 이에 결국 딸을 죽이고는 성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낙랑을 멸망시키고자 마침내 혼인을 청하여 낙랑왕의 딸을 취하여 아들의 처로 삼은 다음, 후에 아들을 본국으로 오게 한 후 병장기를 파괴하게 하였다.”
대무신왕 15년 겨울 11월에 호동왕자가 자결하였다. 호동왕자는 왕의 둘째 후비인 갈사국왕의 손녀 소생이었다. 용모가 곱고 아름다워 왕이 그를 매우 아꼈던 까닭에 ‘사랑하는 아이’라는 뜻의 호동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첫째 왕비는 호동왕자가 적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두려워 이에 왕에게 그를 무고하여 말했다. “호동왕자가 저를 예로써 대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란하게 굴려는 듯합니다.” 왕이 말했다. “당신은 호동왕자가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고 미워하는 것이오?” 그러자 왕비는 왕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알고는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아뢰었다. “청컨대 대왕께서 몰래 살펴봐주십시오. 만일 그런 일이 없다면 제가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 이에 신무대왕이 호동왕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어 호동왕자에게 죄를 내리려 하였다. 어떤 이가 호동왕자에게 말했다. “왕자께서는 어찌 스스로를 해명하지 않으십니까?” 호동왕자가 대답했다. “내가 만일 해명하면 이는 어머니의 잘못을 드러내어 왕께 심려를 끼치게 되니 이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바로 칼을 거꾸로 들고 그 위로 엎어져 죽었다.
논평하여 말한다. 지금 왕이 거짓으로 헐뜯는 말을 믿고 잘못이 없는 아끼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은 언급할 거리조차 못된다. 그러나 호동왕자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아들이 그 아비에게 책망을 들을 때는 마땅히 순(舜)이 고수(瞽瞍)*에게 한 것처럼 하여 작은 회초리이면 맞고 큰 몽둥이면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호동왕자가 이렇게 해나갈 줄 알지 못하여 죽을 자리가 아닌 데서 죽었으니 작은 일을 삼가는 데 매몰되어 큰 도의에 어두웠다고 이를 만하다. 이것이 어찌 공자(公子) 신생(申生)**의 일에 비유할 만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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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고수(瞽瞍) : 중국 고대 전설상의 성군인 순(舜)의 아버지. 두 눈이 모두 멀었고,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워 후처의 꾐에 빠져 아들 순을 여러 차례 죽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마땅히 순이 고수에게 한 것처럼 하여 작은 몽둥이면 맞고 큰 몽둥이면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은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순이 고수를 섬김에 고수가 심부름을 시키려고 하면 그 곁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순을 찾아서 죽이려고 하면 순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은 작은 회초리면 맞았으나 큰 몽둥이면 숨어 달아났던 까닭에 고수는 아버지답지 못하다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되었고, 순도 극진한 효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 신생(申生) : 중국 춘추시대 진(晉) 헌공(獻公)의 태자이다. 헌공이 여희(驪姬)를 후실로 맞이하여 해제(奚齊)를 낳았다. 그러자 여희는 해제로 헌공의 뒤를 잇게 하고자 신생을 여러 차례 모함하였다. 이에 신생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자살하였다.
토론하기
(1) 낙랑공주의 행위를 옹호해보자. 또 비판해보자.
(2) 사랑이라는 격정에 빠졌을 때 합리적 판단이 가능한지에 대해 토론해보자.
(3) 사랑을 정죄(定罪)할 수 있는지에 대해 토론해보자.
해설읽기
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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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는 10권으로 이루어진 고구려본기의 두 번째 편인 대무신왕 편에 실려 있다. 「대무신왕본기」에는 대무신왕이 재위했던 27년간에 있었던 중요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낙랑국 정벌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대무신왕 15년에 일어난 일로, 그해 4월에 고구려가 낙랑국을 정벌하였다는 사실과 같은 해 11월 호동왕자가 자결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다만 낙랑국 정벌 시 호동왕자의 행위와 그의 자결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다. 호동왕자의 자결에 대한 기술 말미에는 이에 대한 김부식의 논평이 함께 실려 있다.
고전본문
대무신왕 15년(32년)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유람하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왕궁 밖으로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서는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예사 사람이 아닌 게 틀림없소. 어찌 북국(北國,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낙랑왕이 결국에는 호동왕자와 함께 궁궐로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왕자가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낙랑왕의 딸, 곧 낙랑공주에게 말을 전했다.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저절로 울리는 북을 찢고 스스로 우는 나팔을 부수면 내가 예를 갖추어 그대를 아내로서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 이전부터 낙랑국에는 적병이 침입해오면 저절로 울리는 북과 스스로 우는 나팔이 있었다. 그래서 명을 내려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낙랑왕의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 안에 들어가 저절로 울리는 북의 양면을 찢고 스스로 우는 나팔의 주둥이를 부수고는 호동왕자에게 이를 알렸다.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낙랑왕은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였다. 고구려 병사가 엄습하여 성 아래에 다다른 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훼손된 것을 알았다. 이에 결국 딸을 죽이고는 성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낙랑을 멸망시키고자 마침내 혼인을 청하여 낙랑왕의 딸을 취하여 아들의 처로 삼은 다음, 후에 아들을 본국으로 오게 한 후 병장기를 파괴하게 하였다.”
대무신왕 15년 겨울 11월에 호동왕자가 자결하였다. 호동왕자는 왕의 둘째 후비인 갈사국왕의 손녀 소생이었다. 용모가 곱고 아름다워 왕이 그를 매우 아꼈던 까닭에 ‘사랑하는 아이’라는 뜻의 호동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첫째 왕비는 호동왕자가 적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두려워 이에 왕에게 그를 무고하여 말했다. “호동왕자가 저를 예로써 대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란하게 굴려는 듯합니다.” 왕이 말했다. “당신은 호동왕자가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고 미워하는 것이오?” 그러자 왕비는 왕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알고는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아뢰었다. “청컨대 대왕께서 몰래 살펴봐주십시오. 만일 그런 일이 없다면 제가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 이에 신무대왕이 호동왕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어 호동왕자에게 죄를 내리려 하였다. 어떤 이가 호동왕자에게 말했다. “왕자께서는 어찌 스스로를 해명하지 않으십니까?” 호동왕자가 대답했다. “내가 만일 해명하면 이는 어머니의 잘못을 드러내어 왕께 심려를 끼치게 되니 이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바로 칼을 거꾸로 들고 그 위로 엎어져 죽었다.
논평하여 말한다. 지금 왕이 거짓으로 헐뜯는 말을 믿고 잘못이 없는 아끼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은 언급할 거리조차 못된다. 그러나 호동왕자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아들이 그 아비에게 책망을 들을 때는 마땅히 순(舜)이 고수(瞽瞍)*에게 한 것처럼 하여 작은 회초리이면 맞고 큰 몽둥이면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호동왕자가 이렇게 해나갈 줄 알지 못하여 죽을 자리가 아닌 데서 죽었으니 작은 일을 삼가는 데 매몰되어 큰 도의에 어두웠다고 이를 만하다. 이것이 어찌 공자(公子) 신생(申生)**의 일에 비유할 만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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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고수(瞽瞍) : 중국 고대 전설상의 성군인 순(舜)의 아버지. 두 눈이 모두 멀었고,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워 후처의 꾐에 빠져 아들 순을 여러 차례 죽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마땅히 순이 고수에게 한 것처럼 하여 작은 몽둥이면 맞고 큰 몽둥이면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은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순이 고수를 섬김에 고수가 심부름을 시키려고 하면 그 곁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순을 찾아서 죽이려고 하면 순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은 작은 회초리면 맞았으나 큰 몽둥이면 숨어 달아났던 까닭에 고수는 아버지답지 못하다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되었고, 순도 극진한 효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 신생(申生) : 중국 춘추시대 진(晉) 헌공(獻公)의 태자이다. 헌공이 여희(驪姬)를 후실로 맞이하여 해제(奚齊)를 낳았다. 그러자 여희는 해제로 헌공의 뒤를 잇게 하고자 신생을 여러 차례 모함하였다. 이에 신생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자살하였다.
토론하기
(1) 낙랑공주의 행위를 옹호해보자. 또 비판해보자.
(2) 사랑이라는 격정에 빠졌을 때 합리적 판단이 가능한지에 대해 토론해보자.
(3) 사랑을 정죄(定罪)할 수 있는지에 대해 토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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