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전문학교의 졸업반 학생인 찬구는 학업 성적이 좋은 인물이지만, 학생들의 취직을 주선해주는 T선생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바람에 불이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정을 모르는 찬구의 가족들은 그가 곧 취직할 수 있을 거라 믿고 그에게 돈을 보태주기 위해 논밭과 집까지 팔아버린다. 찬구는 취직 청탁을 다니는 친구들을 경멸하지만 자신 또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청탁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취직을 재촉하는 가족들의 편지에 점점 궁지에 몰린 찬구는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T선생에게 찾아가 선처를 부탁한다. T선생이 그를 한 회사에 추천해주자 드디어 면접의 기회를 얻은 찬구는 최선을 다해 면접을 본 후 기대에 부푼 채 합격 통지서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에게 도착한 편지는 회사에서 온 불합격통지서와 집을 잃은 채 무일푼으로 상경한 식구들이 오늘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막막한 내용의 편지뿐이었다.
고전본문
해 넘어간 후에도 한참이나 어렴풋이 밝은 하늘에 차차 어둠이 짙어지고 그 대신 흐리던 거리의 등불이 차차로 휘황해 올 때쯤 기진맥진한 찬구는 탑골공원의 어느 으슥한 구석 나무 그루터기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바로 눈앞에는 반공일날 저녁 후의 한때를 산보로 보내는 사람떼가 물 흐르듯 지나간다. 그러나 그는 외로웠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새푸른 전등빛도 싫었다. 그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누구를 믿고 무엇을 희망하라는 것인가. 낙망과 외로움은 곧장 슬픔으로 변했다. 슬픔은 그의 살과 뼈를 사뭇 바늘같이 쑤시고 들었다. 그러자 별안간 찬구는 어버이와 가족들이 참을 수 없이 그리워지며 꾸겨 넣은 아버지의 편지를 생각하였다.
그는 일어나 편지를 꺼내 들고 불 밑으로 갔다.
‘……생각다 못해 모레는 온 가솔을 거느리고 서울로 떠나겠다……’라는 의미의 한문으로 쓴 짧은 글. 그러나 그런 글을 보아도 찬구의 신경은 인제는 마비나 되어 버린 듯이 아무렇게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냉정하게 ‘모레’하고 생각해 보았다. 편지 끝에 쓰인 날짜는 사월 초사일-그것으로는 알 수 없어 스탬프를 보니 오월 구일이라고 뚜렷이 찍혀 있다. 아 그러면 ‘모레’라는 것은 바로 오늘이 아닌가! 오늘 아침에 시골을 떠났다 하면 – 찬구는 새삼스레 기가 막혀 왔다. 그들은 벌써 서울에 다다랐을 것이 아닌가. P의 집을 찾노라고 동대문 거리를 헤매일 그들. 누덕누덕 기어 받친 때묻은 옷을 입고 남부여대해서 – 쭈그러진 얼굴에 찌그러진 갓을 쓰고 조그만 괴나리 보따리를 짊어진 아버지. 그 뒤에 입을 헤벌리고 줄줄 따라다니는 어머니와 아내와 불밤송이 같은 동생들…….
찬구는 도로 아까 자리로 돌아와 넋나간 사람 모양으로 한참이나 걸터 앉아 있었다. 그러자 홀연히 잠을 깨듯이 그는 무엇인가를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 오 나는 여태껏 무슨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인가. 거대한 건축이 넘어가듯이 기울어 가는 운명을 나 혼자 깨끗한 손으로 막아 보려고…….
………
………
“오냐! 아버지를 마중하러 가자!”
그는 힘있게 일어섰다. 삼 분 후 그는 무슨 운명이라도, 무슨 힘찬 일이라도 넉넉히 당해낼 수 있는 새로운 기운을 뱃속에 느끼며 낯익은 단성사 앞을 지나 동대문으로 동대문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유진오, 「오월의 구직자」 중에서
토론하기
(1) 찬구는 왜 T선생의 집에 찾아가는 것을 꺼렸을까?
(2) 찬구가 취직 기회를 얻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3) 찬구가 취직에 실패했음에도 희망찬 마음으로 가족을 마중하러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설읽기
유진오의 「오월의 구직자」는 전문학교의 졸업반 학생인 찬구가 구직난 속에서 겪게 되는 갈등을 그리고 있다. 당시 조선에서 학교 공부를 끝까지 마친 인물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찬구는 그중에서도 특히 학업 성적이 좋은 인물이다. 찬구의 취직에 모든 희망을 건 시골의 가족들은 그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갖고 있던 논밭을 하나씩 팔다가 급기야는 마지막 남은 집까지 팔게 된다. 양반의 후손이었던 아버지가 빈농으로 전락하는 동안 찬구의 부담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는 학생들의 취직을 주선해주는 T선생에게 밉보인 죄로 어느 회사에도 추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학생들처럼 T선생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거나 눈치를 보는 대신 자기주장을 꺾지 않아 자주 언쟁을 벌여 왔던 것이다.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찬구의 취직은 요원하다. T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지인에게 선물을 사들고 취직 청탁을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찬구는 경멸스러운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는 한편, 자신은 취직에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청탁하지 못하는 것인가 싶어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취직을 재촉하는 가족들의 편지에 점점 궁지에 몰린 찬구는, 차마 T선생에게는 찾아가지 못하고 동네 유지인 K부자에게 찾아가 일자리 주선을 부탁한다. 그러나 힘을 써보겠다는 말과 달리 K에게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찬구는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T선생에게 찾아가 취직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찬구를 보며 흡족해한 T선생은 실제로 어느 회사에 찬구를 추천해준다. 드디어 면접의 기회를 얻은 찬구는 최선을 다해 면접을 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합격 통지서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편지는 불합격통지서와 집을 잃은 식구들이 오늘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막막한 내용의 편지뿐이었다. T선생은 추천서를 써주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다른 학생들과 차등을 둔 글에 불과했고, 찬구는 처음부터 면접의 들러리 역할을 했던 것이었다. 정의감이 투철하고 완고한 찬구는 성적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면접 자리조차 얻지 못하는 반면에, T선생의 비위를 맞추던 S는 손쉽게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된다.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작가는 이 시기 청년들의 구직난의 원인이 경제적 문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적 모순에서 기인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작품의 개작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말 부분의 변화이다. 이 작품의 초판본에서 찬구는 시골에서 올라오는 무일푼의 가족들이 과거의 양반 신분에서 벗어나 새로운 노동자 계층으로 편입될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조선 사회가 나아갈 길이라고 깨닫는다. 자신 또한 부르주아적·지식인적 태도를 버리고 공장의 직공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수정된 판본에서는 찬구가 T선생의 부당한 처사와 불합리한 현실에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신념과 자존심을 버리고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에 순응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아울러 작가는 이런 결정을 한 그를 비판적 시선으로 그려내기보다는, 치기 어린 과거를 청산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손을 더럽힐 용기를 낼 만큼 성숙해진 그를 밝고 희망차게 서술하고 있다. 즉 작가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전반부의 내용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청년들이 혁명적 의식을 갖고 끝까지 현실에 저항하기를 요청했던 후반부의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작가의 차후 친일 행적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의 결말은 비판의 여지가 많겠으나, 식민지 조선의 경제와 정치적 상황을 단순한 흑백논리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전후맥락
전문학교의 졸업반 학생인 찬구는 학업 성적이 좋은 인물이지만, 학생들의 취직을 주선해주는 T선생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바람에 불이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정을 모르는 찬구의 가족들은 그가 곧 취직할 수 있을 거라 믿고 그에게 돈을 보태주기 위해 논밭과 집까지 팔아버린다. 찬구는 취직 청탁을 다니는 친구들을 경멸하지만 자신 또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청탁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취직을 재촉하는 가족들의 편지에 점점 궁지에 몰린 찬구는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T선생에게 찾아가 선처를 부탁한다. T선생이 그를 한 회사에 추천해주자 드디어 면접의 기회를 얻은 찬구는 최선을 다해 면접을 본 후 기대에 부푼 채 합격 통지서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에게 도착한 편지는 회사에서 온 불합격통지서와 집을 잃은 채 무일푼으로 상경한 식구들이 오늘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막막한 내용의 편지뿐이었다.
고전본문
해 넘어간 후에도 한참이나 어렴풋이 밝은 하늘에 차차 어둠이 짙어지고 그 대신 흐리던 거리의 등불이 차차로 휘황해 올 때쯤 기진맥진한 찬구는 탑골공원의 어느 으슥한 구석 나무 그루터기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바로 눈앞에는 반공일날 저녁 후의 한때를 산보로 보내는 사람떼가 물 흐르듯 지나간다. 그러나 그는 외로웠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새푸른 전등빛도 싫었다. 그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누구를 믿고 무엇을 희망하라는 것인가. 낙망과 외로움은 곧장 슬픔으로 변했다. 슬픔은 그의 살과 뼈를 사뭇 바늘같이 쑤시고 들었다. 그러자 별안간 찬구는 어버이와 가족들이 참을 수 없이 그리워지며 꾸겨 넣은 아버지의 편지를 생각하였다.
그는 일어나 편지를 꺼내 들고 불 밑으로 갔다.
‘……생각다 못해 모레는 온 가솔을 거느리고 서울로 떠나겠다……’라는 의미의 한문으로 쓴 짧은 글. 그러나 그런 글을 보아도 찬구의 신경은 인제는 마비나 되어 버린 듯이 아무렇게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냉정하게 ‘모레’하고 생각해 보았다. 편지 끝에 쓰인 날짜는 사월 초사일-그것으로는 알 수 없어 스탬프를 보니 오월 구일이라고 뚜렷이 찍혀 있다. 아 그러면 ‘모레’라는 것은 바로 오늘이 아닌가! 오늘 아침에 시골을 떠났다 하면 – 찬구는 새삼스레 기가 막혀 왔다. 그들은 벌써 서울에 다다랐을 것이 아닌가. P의 집을 찾노라고 동대문 거리를 헤매일 그들. 누덕누덕 기어 받친 때묻은 옷을 입고 남부여대해서 – 쭈그러진 얼굴에 찌그러진 갓을 쓰고 조그만 괴나리 보따리를 짊어진 아버지. 그 뒤에 입을 헤벌리고 줄줄 따라다니는 어머니와 아내와 불밤송이 같은 동생들…….
찬구는 도로 아까 자리로 돌아와 넋나간 사람 모양으로 한참이나 걸터 앉아 있었다. 그러자 홀연히 잠을 깨듯이 그는 무엇인가를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 오 나는 여태껏 무슨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인가. 거대한 건축이 넘어가듯이 기울어 가는 운명을 나 혼자 깨끗한 손으로 막아 보려고…….
………
………
“오냐! 아버지를 마중하러 가자!”
그는 힘있게 일어섰다. 삼 분 후 그는 무슨 운명이라도, 무슨 힘찬 일이라도 넉넉히 당해낼 수 있는 새로운 기운을 뱃속에 느끼며 낯익은 단성사 앞을 지나 동대문으로 동대문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유진오, 「오월의 구직자」 중에서
토론하기
(1) 찬구는 왜 T선생의 집에 찾아가는 것을 꺼렸을까?
(2) 찬구가 취직 기회를 얻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3) 찬구가 취직에 실패했음에도 희망찬 마음으로 가족을 마중하러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설읽기
유진오의 「오월의 구직자」는 전문학교의 졸업반 학생인 찬구가 구직난 속에서 겪게 되는 갈등을 그리고 있다. 당시 조선에서 학교 공부를 끝까지 마친 인물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찬구는 그중에서도 특히 학업 성적이 좋은 인물이다. 찬구의 취직에 모든 희망을 건 시골의 가족들은 그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갖고 있던 논밭을 하나씩 팔다가 급기야는 마지막 남은 집까지 팔게 된다. 양반의 후손이었던 아버지가 빈농으로 전락하는 동안 찬구의 부담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는 학생들의 취직을 주선해주는 T선생에게 밉보인 죄로 어느 회사에도 추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학생들처럼 T선생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거나 눈치를 보는 대신 자기주장을 꺾지 않아 자주 언쟁을 벌여 왔던 것이다.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찬구의 취직은 요원하다. T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지인에게 선물을 사들고 취직 청탁을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찬구는 경멸스러운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는 한편, 자신은 취직에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청탁하지 못하는 것인가 싶어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취직을 재촉하는 가족들의 편지에 점점 궁지에 몰린 찬구는, 차마 T선생에게는 찾아가지 못하고 동네 유지인 K부자에게 찾아가 일자리 주선을 부탁한다. 그러나 힘을 써보겠다는 말과 달리 K에게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찬구는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T선생에게 찾아가 취직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찬구를 보며 흡족해한 T선생은 실제로 어느 회사에 찬구를 추천해준다. 드디어 면접의 기회를 얻은 찬구는 최선을 다해 면접을 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합격 통지서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편지는 불합격통지서와 집을 잃은 식구들이 오늘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막막한 내용의 편지뿐이었다. T선생은 추천서를 써주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다른 학생들과 차등을 둔 글에 불과했고, 찬구는 처음부터 면접의 들러리 역할을 했던 것이었다. 정의감이 투철하고 완고한 찬구는 성적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면접 자리조차 얻지 못하는 반면에, T선생의 비위를 맞추던 S는 손쉽게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된다.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작가는 이 시기 청년들의 구직난의 원인이 경제적 문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적 모순에서 기인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작품의 개작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말 부분의 변화이다. 이 작품의 초판본에서 찬구는 시골에서 올라오는 무일푼의 가족들이 과거의 양반 신분에서 벗어나 새로운 노동자 계층으로 편입될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조선 사회가 나아갈 길이라고 깨닫는다. 자신 또한 부르주아적·지식인적 태도를 버리고 공장의 직공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수정된 판본에서는 찬구가 T선생의 부당한 처사와 불합리한 현실에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신념과 자존심을 버리고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에 순응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아울러 작가는 이런 결정을 한 그를 비판적 시선으로 그려내기보다는, 치기 어린 과거를 청산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손을 더럽힐 용기를 낼 만큼 성숙해진 그를 밝고 희망차게 서술하고 있다. 즉 작가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전반부의 내용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청년들이 혁명적 의식을 갖고 끝까지 현실에 저항하기를 요청했던 후반부의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작가의 차후 친일 행적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의 결말은 비판의 여지가 많겠으나, 식민지 조선의 경제와 정치적 상황을 단순한 흑백논리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