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조선 18세기의 북학파로 분류되는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문집인 『정유각집』(貞蕤閣集)에는 맛에 대한 한 편의 글이 나온다. 「시선서(詩選序)」가 바로 그것인데, “시를 선택하는 법은 요컨대 온갖 맛을 다 갖추어야 한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글에서는 맛을 기준으로 시를 선정할 것을 말하면서 대상에 대한 음미를 맛[味]의 체험으로 확장시켜 논의하고 있다. 박제가가 말해주는 맛보기의 체험을 함께 따라가 보자.
고전본문
맛이란 무엇인가? 구름 노을과 수놓은 비단을 보지 못했는가? 잠깐 사이에 마음과 눈이 함께 그리로 옮겨가고 지척의 거리에도 계절[舒慘]*에 따라 기이한 자태로 변화무쌍하다. 대충 보면 거기서 정감[情]을 느끼기에 부족하나 세심하게 음미하면 맛이 무궁하다.
대체로 사물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 마음을 움직이고 눈을 기쁘게 하는 것 모두가 맛이다. 유독 입에서 맡고 있는 것만을 맛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시를 선택하는 것에 어찌하여 맛으로 취하는가? 무릇 짠맛,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 이 다섯 가지 맛은 혀에서 느낄 수 있고 얼굴에 전달되니 맛을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다. 그러하지 않으면 맛이 아니니, 맛이 없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니 시를 선택하는 법이 어찌 다르겠는가.
그렇다면 온갖 맛이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택하되 한 가지 맛으로 하지 않고 또 각각의 맛에서 한 가지씩 뽑으라는 것이다. 무릇 신맛을 알면서 단맛을 모르는 것은 맛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단맛과 신맛을 저울질하여 가늠하면서 짠맛과 매운 맛을 엮어서 구차하게 채우는 것은 선택하길 알지 못하는 자이다. 바야흐로 신맛을 선정할 때는 극도로 신맛이 나는 것을 선택하고, 단맛을 선정할 때는 극도로 단맛이 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맛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공자는 “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맛을 잘 아는 이는 드물다.”라고 했다. 이로 보건대 성인은 마음이 세심한 까닭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묘미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속인들은 혼연 일색으로 날마다 먹고 마시면서도 맛을 잘 알지 못한다. 혹자가 “물은 어떤 맛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은 아무 맛이 없다. 그러나 목마른 이가 마신다면 천하에 이 보다 더 맛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 그대는 목마르지 않으니 어찌 물의 맛을 알겠는가?”
『정유각집』 문집 권1, 「시선서」 중에서
* 계절[舒慘] : 양에 해당하는 봄과 여름에는 만물이 펴지고 음에 해당하는 가을과 겨울에는 만물이 움츠러든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계절로 풀이하였다.
토론하기
(1) 맛은 미각과 관계된다. 본문에서 일컫는 맛은 어떤 의미로 확장되고 있는지 얘기해보자.
(2) 본문에서 말하는 맛의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일상 곳곳에서 맛(味)의 경험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각, 청각, 촉각 등 오감을 통한 맛의 경험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본문에서 공자의 말을 빌어서 맛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고 주장한 이유가 뭘까?
(3) 본문에 따르면, 시를 비롯해 예술 작품의 감상은 맛보기와 같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제껏 감상해본 예술 작품들을 맛으로 감별하여 평가한다면 어떤 사례가 있을까? 가령 구수한 맛, 담백한 맛, 시큼한 맛, 톡 쏘는 맛 등 다채롭게 맛으로 표현해본다면 어떤 것들을 소개해볼 수 있을까?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그 맛이 서로 같은지 다른지도 말해보자.
해설읽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맛(味)과 관련된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단지 음식을 먹을 때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경치 보는 맛이 끝내준다”라고 하거나 “그 사람은 보면 볼수록 색다른 맛이 난다.”라고 하는 등 맛으로 무언가를 얘기하곤 한다. 예술 작품을 볼 때에도 맛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가령 “이 그림은 볼수록 맛이 우러난다.”라거나 “그 음악은 들을수록 맛이 새롭다.” 등등 맛으로 미감(美感)을 표현한다. 이렇게 맛과 관련된 표현들을 즐겨 쓰게 된 것은 음식의 미각으로부터 각종 대상을 맛보는 미감으로 확장되어 간 역사를 잘 드러낸다. 더욱이 이런 내용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에서 맛으로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흐름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 주된 특징은 음미할 만한 작품을 ‘맛’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이 글 역시 예술 작품에 대해 맛으로 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미각으로부터 출발한 맛의 의미를 미감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박제가는 맛이라는 것이 단지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 모두가 맛이라고 하였다. 입에서 머금고 맛을 느끼는 것만이 맛이 아니라, 온갖 대상을 접하며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까지도 모두 맛을 보는 경험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는 이 맛으로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맛은 그 대상에 대해 대충 맛봐서는 제대로 알 수 없으며, 그가 말하였듯이 “세심하게 음미하는[細玩]” 과정을 통해서 그 맛의 무궁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세심하게 음미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은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 과정에서 맛을 세밀히 구별할 수 있는 감상력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논지는 그가 공자의 말을 빌어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는 이가 없지만 맛을 아는 이가 적다.”라는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원래 공자가 말한 내용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것인데,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접하면서도 도(道)를 제대로 알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이를 박제가는 예술 작품에 대한 내용으로 환치시켰다.
맛을 안다는 것은 일종의 미적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다시 말해, 맛을 음미하는 과정을 통해 그 대상이 지니는 맛을 세심히 감지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를 물맛으로 설명하게 되는데, 우리는 물맛을 다 경험한 바 있지만, 물맛을 말하라고 하면 맹물 맛이라거나 물에 무슨 맛이 있냐고 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는 물맛이 좋다, 물맛이 나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물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차를 음미할 줄 아는 옛 사람들은 차 맛을 결정하는 데 물맛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좋은 샘물을 찾아서 차를 마시곤 했으며, 때로는 우물물과 샘물, 냇물과 눈 녹인 물의 맛을 감별할 줄 알았다. 이런 정도라면 물을 마시면서도 그 맛을 세심하게 음미할 줄 아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와인 소믈리에가 일반인들과는 달리 와인의 맛을 세심히 감별해낼 줄 아는 것처럼, 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모두 맛에 대해 세심히 감지할 수 있는 감상력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단지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물맛을 음미할 수 있어야 물맛을 제대로 알 수 있으며, 물맛을 안다고 해도 그 맛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물맛을 깊이 음미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맛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사람과 음미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맛에 대한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온갖 맛의 경험을 하면서도 그 맛을 세심하게 음미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 맛은 단순히 미각의 경험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한 잔의 차를 마실 때에도 차의 은은한 향을 느끼고 차의 맑은 색을 보고 차의 첫 맛과 끝 맛까지 천천히 음미하는 것은 미각과 후각, 시각 등 오감으로 확장되는 일종의 미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맛을 잘 음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미적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일락아, 하소용이 널 친아들로 받아들이려 한다는구나. 그 사람이 널 친아들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도 네 친아비 노릇을 할 수가 없단다……. 일락아, 오늘 내가 한 말 꼭 기억해둬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일락이는 허삼관의 말을 듣고 지붕에 올라가긴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아버지는 하소용이 아니라 허삼관”이라고 버티며 곡하기를 거부한다. 친엄마인 허옥란도 일락이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사람들은 허삼관이 일하는 생사 공장으로 그를 찾아간다. 이 사실을 들은 허삼관은 “십삼 년 동안 헛키우지 않았구나”라며 몹시 흐뭇해한다. 일락이의 태도는 그동안 구겨진 허삼관의 체면을 세워주고 그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허삼관은 무서우니까 지붕에서 빨리 내려 달라고 우는 일락이에게 그냥 소리 몇 번만 지르면 오늘부터 내가 네 친아버지라고 달랜다. 일락이는 허삼관의 말을 듣고 하늘을 향해 외친다. 허삼관은 그 외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높은 굴뚝 위에서 느꼈을 공포와 그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말 대로 따라준 마음이 어떠한지 이해했을 것이다. 아마도 일락이가 외쳐 부른 ‘아버지’는 하소용이 아닌 허삼관이었을 것이다. 허삼관은 일락이를 지붕에서 업고 내려와 구름같이 몰려든 구경꾼들을 향해 피로써 맹세한다. 앞으로 누구든 일락이가 내 친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칼로 베어버리겠노라고.
키워드
맛(味 ), 미(美), 미각, 미적 경험, 박제가, 시, 예술 감상
전후맥락
조선 18세기의 북학파로 분류되는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문집인 『정유각집』(貞蕤閣集)에는 맛에 대한 한 편의 글이 나온다. 「시선서(詩選序)」가 바로 그것인데, “시를 선택하는 법은 요컨대 온갖 맛을 다 갖추어야 한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글에서는 맛을 기준으로 시를 선정할 것을 말하면서 대상에 대한 음미를 맛[味]의 체험으로 확장시켜 논의하고 있다. 박제가가 말해주는 맛보기의 체험을 함께 따라가 보자.
고전본문
맛이란 무엇인가? 구름 노을과 수놓은 비단을 보지 못했는가? 잠깐 사이에 마음과 눈이 함께 그리로 옮겨가고 지척의 거리에도 계절[舒慘]*에 따라 기이한 자태로 변화무쌍하다. 대충 보면 거기서 정감[情]을 느끼기에 부족하나 세심하게 음미하면 맛이 무궁하다.
대체로 사물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 마음을 움직이고 눈을 기쁘게 하는 것 모두가 맛이다. 유독 입에서 맡고 있는 것만을 맛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시를 선택하는 것에 어찌하여 맛으로 취하는가? 무릇 짠맛,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 이 다섯 가지 맛은 혀에서 느낄 수 있고 얼굴에 전달되니 맛을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다. 그러하지 않으면 맛이 아니니, 맛이 없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니 시를 선택하는 법이 어찌 다르겠는가.
그렇다면 온갖 맛이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택하되 한 가지 맛으로 하지 않고 또 각각의 맛에서 한 가지씩 뽑으라는 것이다. 무릇 신맛을 알면서 단맛을 모르는 것은 맛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단맛과 신맛을 저울질하여 가늠하면서 짠맛과 매운 맛을 엮어서 구차하게 채우는 것은 선택하길 알지 못하는 자이다. 바야흐로 신맛을 선정할 때는 극도로 신맛이 나는 것을 선택하고, 단맛을 선정할 때는 극도로 단맛이 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맛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공자는 “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맛을 잘 아는 이는 드물다.”라고 했다. 이로 보건대 성인은 마음이 세심한 까닭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묘미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속인들은 혼연 일색으로 날마다 먹고 마시면서도 맛을 잘 알지 못한다. 혹자가 “물은 어떤 맛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은 아무 맛이 없다. 그러나 목마른 이가 마신다면 천하에 이 보다 더 맛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 그대는 목마르지 않으니 어찌 물의 맛을 알겠는가?”
『정유각집』 문집 권1, 「시선서」 중에서
* 계절[舒慘] : 양에 해당하는 봄과 여름에는 만물이 펴지고 음에 해당하는 가을과 겨울에는 만물이 움츠러든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계절로 풀이하였다.
토론하기
(1) 맛은 미각과 관계된다. 본문에서 일컫는 맛은 어떤 의미로 확장되고 있는지 얘기해보자.
(2) 본문에서 말하는 맛의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일상 곳곳에서 맛(味)의 경험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각, 청각, 촉각 등 오감을 통한 맛의 경험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본문에서 공자의 말을 빌어서 맛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고 주장한 이유가 뭘까?
(3) 본문에 따르면, 시를 비롯해 예술 작품의 감상은 맛보기와 같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제껏 감상해본 예술 작품들을 맛으로 감별하여 평가한다면 어떤 사례가 있을까? 가령 구수한 맛, 담백한 맛, 시큼한 맛, 톡 쏘는 맛 등 다채롭게 맛으로 표현해본다면 어떤 것들을 소개해볼 수 있을까?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그 맛이 서로 같은지 다른지도 말해보자.
해설읽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맛(味)과 관련된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단지 음식을 먹을 때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경치 보는 맛이 끝내준다”라고 하거나 “그 사람은 보면 볼수록 색다른 맛이 난다.”라고 하는 등 맛으로 무언가를 얘기하곤 한다. 예술 작품을 볼 때에도 맛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가령 “이 그림은 볼수록 맛이 우러난다.”라거나 “그 음악은 들을수록 맛이 새롭다.” 등등 맛으로 미감(美感)을 표현한다. 이렇게 맛과 관련된 표현들을 즐겨 쓰게 된 것은 음식의 미각으로부터 각종 대상을 맛보는 미감으로 확장되어 간 역사를 잘 드러낸다. 더욱이 이런 내용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에서 맛으로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흐름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 주된 특징은 음미할 만한 작품을 ‘맛’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이 글 역시 예술 작품에 대해 맛으로 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미각으로부터 출발한 맛의 의미를 미감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박제가는 맛이라는 것이 단지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 모두가 맛이라고 하였다. 입에서 머금고 맛을 느끼는 것만이 맛이 아니라, 온갖 대상을 접하며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까지도 모두 맛을 보는 경험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는 이 맛으로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맛은 그 대상에 대해 대충 맛봐서는 제대로 알 수 없으며, 그가 말하였듯이 “세심하게 음미하는[細玩]” 과정을 통해서 그 맛의 무궁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세심하게 음미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은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 과정에서 맛을 세밀히 구별할 수 있는 감상력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논지는 그가 공자의 말을 빌어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는 이가 없지만 맛을 아는 이가 적다.”라는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원래 공자가 말한 내용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것인데,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접하면서도 도(道)를 제대로 알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이를 박제가는 예술 작품에 대한 내용으로 환치시켰다.
맛을 안다는 것은 일종의 미적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다시 말해, 맛을 음미하는 과정을 통해 그 대상이 지니는 맛을 세심히 감지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를 물맛으로 설명하게 되는데, 우리는 물맛을 다 경험한 바 있지만, 물맛을 말하라고 하면 맹물 맛이라거나 물에 무슨 맛이 있냐고 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는 물맛이 좋다, 물맛이 나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물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차를 음미할 줄 아는 옛 사람들은 차 맛을 결정하는 데 물맛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좋은 샘물을 찾아서 차를 마시곤 했으며, 때로는 우물물과 샘물, 냇물과 눈 녹인 물의 맛을 감별할 줄 알았다. 이런 정도라면 물을 마시면서도 그 맛을 세심하게 음미할 줄 아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와인 소믈리에가 일반인들과는 달리 와인의 맛을 세심히 감별해낼 줄 아는 것처럼, 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모두 맛에 대해 세심히 감지할 수 있는 감상력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단지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물맛을 음미할 수 있어야 물맛을 제대로 알 수 있으며, 물맛을 안다고 해도 그 맛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물맛을 깊이 음미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맛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사람과 음미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맛에 대한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온갖 맛의 경험을 하면서도 그 맛을 세심하게 음미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 맛은 단순히 미각의 경험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한 잔의 차를 마실 때에도 차의 은은한 향을 느끼고 차의 맑은 색을 보고 차의 첫 맛과 끝 맛까지 천천히 음미하는 것은 미각과 후각, 시각 등 오감으로 확장되는 일종의 미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맛을 잘 음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미적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일락아, 하소용이 널 친아들로 받아들이려 한다는구나. 그 사람이 널 친아들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도 네 친아비 노릇을 할 수가 없단다……. 일락아, 오늘 내가 한 말 꼭 기억해둬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일락이는 허삼관의 말을 듣고 지붕에 올라가긴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아버지는 하소용이 아니라 허삼관”이라고 버티며 곡하기를 거부한다. 친엄마인 허옥란도 일락이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사람들은 허삼관이 일하는 생사 공장으로 그를 찾아간다. 이 사실을 들은 허삼관은 “십삼 년 동안 헛키우지 않았구나”라며 몹시 흐뭇해한다. 일락이의 태도는 그동안 구겨진 허삼관의 체면을 세워주고 그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허삼관은 무서우니까 지붕에서 빨리 내려 달라고 우는 일락이에게 그냥 소리 몇 번만 지르면 오늘부터 내가 네 친아버지라고 달랜다. 일락이는 허삼관의 말을 듣고 하늘을 향해 외친다. 허삼관은 그 외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높은 굴뚝 위에서 느꼈을 공포와 그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말 대로 따라준 마음이 어떠한지 이해했을 것이다. 아마도 일락이가 외쳐 부른 ‘아버지’는 하소용이 아닌 허삼관이었을 것이다. 허삼관은 일락이를 지붕에서 업고 내려와 구름같이 몰려든 구경꾼들을 향해 피로써 맹세한다. 앞으로 누구든 일락이가 내 친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칼로 베어버리겠노라고.
키워드
맛(味 ), 미(美), 미각, 미적 경험, 박제가, 시, 예술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