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은 『춘추좌전 』중에서 적인, 융인, 융적, 이적 등으로 지칭되는 소위 ‘오랑캐’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가려 뽑은 것이다. [가]에서 제나라의 재상 관중은 적인들이 중국의 일원인 형나라를 침공하자 형나라는 형제국인 만큼 당연히 도와줘야 한다고 군주에게 간언한다. 오랑캐를 타자로, 곧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한 결과였다. [나]와 [다], [라]에는 적인을 승냥이나 이리가 사는, 그렇게 인간이 살 수 없는 데서 살며, 문화라고는 일절 없으며, 사악학고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존재로 폄하하는 중국인들의 인식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
고전본문
[가] 오랑캐인 적인들이 형나라를 침공하자 승상 관중이 제나라 환공에게 아뢰었다. “오랑캐인 융적과 승냥이, 이리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또한 중원의 제후국들은 혈연관계로 엮여 있으니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안락과 맹독은 함께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경』에는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어찌 집으로 가고 싶지 않겠는가? 긴급 문서가 무서울 따름이네.’ 긴급 문서에는 ‘간악한 자들을 함께 미워하며 서로 도와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청컨대 긴급 문서의 내용을 좇아 형나라를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 민공(閔公) 원년(661년 BCE)
[나] 귀로 다섯 가지 소리의 화음을 듣지 못하는 것을 귀가 먹었다고 하고 눈으로 다섯 가지 빛깔의 문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덕과 의라는 근간을 본받지 못하는 것을 꽉 막혔다고 하고, 입으로 충성되고 미더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말 못한다고 합니다. 오랑캐인 적인들은 이 모두를 본받아 네 가지의 사악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 희공(僖公) 24년(636년 BCE)
[다] 여름, 오랑캐인 적인들이 정나라를 쳐서 역 땅을 빼앗았다. 이에 정나라와 불편한 관계였던 천자인 양왕이 적인을 크게 칭찬하며 그 영수의 딸을 왕후로 삼으려 했다. 이때 부진이 간하였다. “안 됩니다. 신이 듣건대 ‘보답하는 자는 싫증을 내는데 받는 자는 만족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적인은 본래부터 탐욕스러운 자들인데 왕께서 또 다시 이를 부추기고 계십니다.
– 희공(僖公) 24년(636년 BCE)
[라] 그곳(오랑캐인 융인의 거주지)은 여우와 살쾡이가 살고 승냥이와 이리가 울부짖는 곳이었다. … (융인은) 먹는 음식과 입는 복식이 중국과 다르고 재화도 통용하여 쓸 수 없으며 말도 서로 통하지 않는다.”
– 양공(襄公) 14년(559년 BCE)
토론하기
(1) 중국인들이 적인이나 융인 같은 이민족을 폄하한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그러한 근거의 타당성에 대하여 검토해보자.
(2) 왜 중국인들은 타자를 ‘오랑캐’라 부르며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격하시켰을까? 그럼으로써 중국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일까? 또 어떠한 손해가 생겼을까?
(3) 타자를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대하기 위해 필요한 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해설읽기
우리말 ‘오랑캐’는 본래 두만강 일대의 만주 지방에 살던 여진족을 멸시하여 이르던 말이다. 그러다 여진족뿐 아니라 모든 ‘이민족’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진출하던 시기,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을 일러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라고 불렀던 것도 이러한 전통적, 관습적 쓰임새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오랑캐를 여러 단어로 지칭하였다. 가령 ‘이(夷)’나 ‘융(戎)’, ‘만(蠻)’, ‘적(狄)’과 같은 글자를 대표적으로 사용했다. 이들 글자를 가지고 중국인들은 주변의 이민족을 ‘사이(四夷, 사방의 오랑캐)’, 그러니까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 식으로 범주화하였다. 그런데 이들 글자는 하나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와 직결되어 만들어졌다. ‘이(夷)’를 해체하여 보면 ‘대(大)’와 ‘궁(弓)’으로 나뉜다. 여기서 ‘대’는 사람의 형상을 뜻하고 ‘궁’은 포로나 사냥한 짐승 따위를 나무에 묶은 줄의 형상이다. 곧 ‘이’는 나무에 묶인 포로의 형상을 상형한 글자이다. 당시 포로는 인간의 범주 안에 들던 존재가 아니었다. ‘적(狄)’이나 ‘만(蠻)’에 들어 있는 ‘견(犭)’이나 ‘충(虫)’은 모두 짐승을 뜻한다. ‘융(戎)’ 역시 ‘사납다’는 뜻으로 맹수 등의 사나움을 가리킨다. 결국 사방의 이민족을 사람이 아닌 포로나 짐승과 동격의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에서 관중이 융적을 이리, 승냥이와 병렬한 후 이들은 욕심을 그칠 줄 모르는 존재라고 단언하고, 그들이 사는 곳은 이리나 승냥이 등이 사는, 다시 말해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단정한 것은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일관된 인식이었던 셈이다. 주위의 이민족을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들보다 매우 열등한 존재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이 주변의 이민족을 하등의 존재로 치부하게 된 근거는 무엇일까? 인용문을 보면 중국인은 융인, 적인 등이 다섯 가지 소리의 화음이나 다섯 가지 빛깔의 문채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융적 등이 문명화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또한 마음에는 덕과 의라는 근간이 없고 충성되고 미더운 말을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융적 등이 윤리도덕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신들과 의식주 문화가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도 든다. 마치 집에서 키우는 소나 말, 개 등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는 이러한 점들을 토대로 융적 등은 탐욕을 제어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여 만족할 줄 모르고 그 결과 맹독과 같은 해악을 끼친다고 규정한다. 『춘추좌전』의 다른 대목에는 이러한 말이 실려 있다. “천자인 평왕이 낙읍으로 천도할 때에 고위직이었던 신유가 이천을 건너갔다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들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자를 보고는 ‘앞으로 백년이 되지 않아 이곳은 오랑캐의 땅이 될 것이다. 그에 앞서 예법이 무너질 것이다.’”(희공 22년(638년 BCE)) 여기서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들판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중국의 예법을 어겼다는 뜻이다. 이렇게 중국의 예법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고위관리였던 신유는 그 일대가 오랑캐의 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곧 중국의 예법을 따르지 않으면 오랑캐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인 것이다.
결국 중국인들은 주변의 이민족을 ‘중국의 예법’으로 대변되는 문명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짐승들처럼 중국의 언어도 할 줄 모르고 인간의 문화라고 할 것이 전혀 없는 미개인으로 본 것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이민족이라는 타자를 대했음이다. 중국인의 이러한 관념 아래 ‘오랑캐’는 본디부터 부끄러움을 모르는 족속이요, 다양한 유형의 악을 갖춘 존재이자 끝없이 욕심을 추구하는 부류로 규정되었다. 중국인이 이렇게 나열한 ‘오랑캐’의 악한 속성은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모두 예법의 규제 대상이었으니, 그러한 악한 속성이 발현된다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는 예법이 없다는 증거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예법이라는 것이 과연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언제이든지 다 타당하고 보편적인 문명의 표준인 것일까? 중국인들이 금과옥조처럼 그렇게 중시했던 예법의 한 덕목인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왜 중국인들은 이민족이라는 타자에게는 적용하지 못했던 것일까?
인용문은 『춘추좌전 』중에서 적인, 융인, 융적, 이적 등으로 지칭되는 소위 ‘오랑캐’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가려 뽑은 것이다. [가]에서 제나라의 재상 관중은 적인들이 중국의 일원인 형나라를 침공하자 형나라는 형제국인 만큼 당연히 도와줘야 한다고 군주에게 간언한다. 오랑캐를 타자로, 곧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한 결과였다. [나]와 [다], [라]에는 적인을 승냥이나 이리가 사는, 그렇게 인간이 살 수 없는 데서 살며, 문화라고는 일절 없으며, 사악학고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존재로 폄하하는 중국인들의 인식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
고전본문
[가] 오랑캐인 적인들이 형나라를 침공하자 승상 관중이 제나라 환공에게 아뢰었다. “오랑캐인 융적과 승냥이, 이리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또한 중원의 제후국들은 혈연관계로 엮여 있으니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안락과 맹독은 함께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경』에는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어찌 집으로 가고 싶지 않겠는가? 긴급 문서가 무서울 따름이네.’ 긴급 문서에는 ‘간악한 자들을 함께 미워하며 서로 도와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청컨대 긴급 문서의 내용을 좇아 형나라를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 민공(閔公) 원년(661년 BCE)
[나] 귀로 다섯 가지 소리의 화음을 듣지 못하는 것을 귀가 먹었다고 하고 눈으로 다섯 가지 빛깔의 문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덕과 의라는 근간을 본받지 못하는 것을 꽉 막혔다고 하고, 입으로 충성되고 미더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말 못한다고 합니다. 오랑캐인 적인들은 이 모두를 본받아 네 가지의 사악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 희공(僖公) 24년(636년 BCE)
[다] 여름, 오랑캐인 적인들이 정나라를 쳐서 역 땅을 빼앗았다. 이에 정나라와 불편한 관계였던 천자인 양왕이 적인을 크게 칭찬하며 그 영수의 딸을 왕후로 삼으려 했다. 이때 부진이 간하였다. “안 됩니다. 신이 듣건대 ‘보답하는 자는 싫증을 내는데 받는 자는 만족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적인은 본래부터 탐욕스러운 자들인데 왕께서 또 다시 이를 부추기고 계십니다.
– 희공(僖公) 24년(636년 BCE)
[라] 그곳(오랑캐인 융인의 거주지)은 여우와 살쾡이가 살고 승냥이와 이리가 울부짖는 곳이었다. … (융인은) 먹는 음식과 입는 복식이 중국과 다르고 재화도 통용하여 쓸 수 없으며 말도 서로 통하지 않는다.”
– 양공(襄公) 14년(559년 BCE)
토론하기
(1) 중국인들이 적인이나 융인 같은 이민족을 폄하한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그러한 근거의 타당성에 대하여 검토해보자.
(2) 왜 중국인들은 타자를 ‘오랑캐’라 부르며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격하시켰을까? 그럼으로써 중국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일까? 또 어떠한 손해가 생겼을까?
(3) 타자를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대하기 위해 필요한 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해설읽기
우리말 ‘오랑캐’는 본래 두만강 일대의 만주 지방에 살던 여진족을 멸시하여 이르던 말이다. 그러다 여진족뿐 아니라 모든 ‘이민족’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진출하던 시기,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을 일러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라고 불렀던 것도 이러한 전통적, 관습적 쓰임새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오랑캐를 여러 단어로 지칭하였다. 가령 ‘이(夷)’나 ‘융(戎)’, ‘만(蠻)’, ‘적(狄)’과 같은 글자를 대표적으로 사용했다. 이들 글자를 가지고 중국인들은 주변의 이민족을 ‘사이(四夷, 사방의 오랑캐)’, 그러니까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 식으로 범주화하였다. 그런데 이들 글자는 하나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와 직결되어 만들어졌다. ‘이(夷)’를 해체하여 보면 ‘대(大)’와 ‘궁(弓)’으로 나뉜다. 여기서 ‘대’는 사람의 형상을 뜻하고 ‘궁’은 포로나 사냥한 짐승 따위를 나무에 묶은 줄의 형상이다. 곧 ‘이’는 나무에 묶인 포로의 형상을 상형한 글자이다. 당시 포로는 인간의 범주 안에 들던 존재가 아니었다. ‘적(狄)’이나 ‘만(蠻)’에 들어 있는 ‘견(犭)’이나 ‘충(虫)’은 모두 짐승을 뜻한다. ‘융(戎)’ 역시 ‘사납다’는 뜻으로 맹수 등의 사나움을 가리킨다. 결국 사방의 이민족을 사람이 아닌 포로나 짐승과 동격의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에서 관중이 융적을 이리, 승냥이와 병렬한 후 이들은 욕심을 그칠 줄 모르는 존재라고 단언하고, 그들이 사는 곳은 이리나 승냥이 등이 사는, 다시 말해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단정한 것은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일관된 인식이었던 셈이다. 주위의 이민족을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들보다 매우 열등한 존재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이 주변의 이민족을 하등의 존재로 치부하게 된 근거는 무엇일까? 인용문을 보면 중국인은 융인, 적인 등이 다섯 가지 소리의 화음이나 다섯 가지 빛깔의 문채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융적 등이 문명화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또한 마음에는 덕과 의라는 근간이 없고 충성되고 미더운 말을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융적 등이 윤리도덕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신들과 의식주 문화가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도 든다. 마치 집에서 키우는 소나 말, 개 등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는 이러한 점들을 토대로 융적 등은 탐욕을 제어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여 만족할 줄 모르고 그 결과 맹독과 같은 해악을 끼친다고 규정한다. 『춘추좌전』의 다른 대목에는 이러한 말이 실려 있다. “천자인 평왕이 낙읍으로 천도할 때에 고위직이었던 신유가 이천을 건너갔다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들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자를 보고는 ‘앞으로 백년이 되지 않아 이곳은 오랑캐의 땅이 될 것이다. 그에 앞서 예법이 무너질 것이다.’”(희공 22년(638년 BCE)) 여기서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들판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중국의 예법을 어겼다는 뜻이다. 이렇게 중국의 예법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고위관리였던 신유는 그 일대가 오랑캐의 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곧 중국의 예법을 따르지 않으면 오랑캐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인 것이다.
결국 중국인들은 주변의 이민족을 ‘중국의 예법’으로 대변되는 문명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짐승들처럼 중국의 언어도 할 줄 모르고 인간의 문화라고 할 것이 전혀 없는 미개인으로 본 것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이민족이라는 타자를 대했음이다. 중국인의 이러한 관념 아래 ‘오랑캐’는 본디부터 부끄러움을 모르는 족속이요, 다양한 유형의 악을 갖춘 존재이자 끝없이 욕심을 추구하는 부류로 규정되었다. 중국인이 이렇게 나열한 ‘오랑캐’의 악한 속성은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모두 예법의 규제 대상이었으니, 그러한 악한 속성이 발현된다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는 예법이 없다는 증거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예법이라는 것이 과연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언제이든지 다 타당하고 보편적인 문명의 표준인 것일까? 중국인들이 금과옥조처럼 그렇게 중시했던 예법의 한 덕목인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왜 중국인들은 이민족이라는 타자에게는 적용하지 못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