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소식은 “중국을 다스리는 방도로 오랑캐를 다스릴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논술하기 위해 소식은 공자가 편찬한 『춘추』에 기술되어 있는 오랑캐인 융이 노나라로 찾아와 노나라 군주와 회합한 사실을 제시하며 글을 시작한다. 이는 오랑캐가 중국의 예법에 따라 평화적인 협상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공자가 이 점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춘추』의 이 기사는 공자가 “중국을 다스리는 방도로 오랑캐를 다스릴 수 없다”는 가르침을 어기고 오랑캐도 중국의 예법으로 다스릴 수 있음을 환기한 것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소식은 이에 대해 공자가 오랑캐 가운데서도 중국을 따르고자 하는 오랑캐를 긍정했던 것이지, 순전히 오랑캐이기만을 고수하는 오랑캐도 긍정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곧 “중국을 다스리는 방도로 오랑캐를 다스릴 수 없다”는 가르침은 오랑캐이기만을 고수하는 오랑캐에 적용되는 가르침이지, 달리 말해 중국의 다스리는 방도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중국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밝힘이 공자의 의도였다고 하였다. 인용문은 이러한 논지 중 일부이다.
고전본문
오랑캐들은 중국의 다스림으로써 다스릴 수 없다. 비유하면 그들은 마치 새나 짐승 같아서 그들이 크게 다스려지기를 구하면 반드시 큰 혼란에 맞닥뜨리게 된다. 옛날 성왕들은 그들이 그러함을 알고 있어서 그래서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다스렸다. 그들을 다스림에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을 깊이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춘추』에는 “노나라 군주가 오랑캐인 융과 잠 땅에서 회합하였다”고 씌어 있다. 한대의 유학자 하휴는 “(중국의) 임금은 오랑캐를 다스리지 않는데 오랑캐인 융을 『춘추』에 기록한 것은 오랑캐 중 중국으로 찾아오는 이들은 거절하지 않고 중국에서 떠나는 이들은 쫓아가 잡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해설하였다. …… 본래부터 중국이었던 제(齊)나라와 진(晉)나라의 군주가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고 천자를 보위하며 백성을 아끼고 양육하는 방도가 어찌 모두 옛날 성왕의 법도와 같겠는가? 그 방도는 대체로 사술과 권력으로부터 나왔고 거기에 어짊과 의로움을 섞어 놓은 것이니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는 순전히 중국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본래는 오랑캐였던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는 또한 탐욕스럽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방자하게 행동하며 뒤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도 대체로 도를 지키고 의를 행하는 군주가 있었다. 그러니 진(秦)나라와 초(楚)나라 또한 순전히 오랑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 무릇 오랑캐는 교화하고 가르치고 일깨우며 회유하고 복종시킬 수가 없으니 저들이 사납게 무기를 들고 우리와 변경에서 전쟁하지 않음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니 하물며 이른바 회합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행하려 한다면, 이에 어찌 그들의 뜻을 매우 가상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중국의 예법을 철저히 요구한다면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포악한 분노를 터뜨릴 것이니 그 재앙은 클 것이다. 공자가 이를 무척 걱정하여 그들이 노나라로 찾아온 것을 회합한 것으로 기록하고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이는 장차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깊이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 소식, 「왕자불치이적론」
토론하기
(1) 인용문에 나타난 필자의 견해를 정리해보자.
(2) 필자는 태생이 중국인이어도 다스리는 방도가 사술과 완력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면 참된 중국인이라고 볼 수 없고, 태생이 오랑캐여도 군주가 도를 지키고 의를 행하면 오랑캐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필자의 타자를 대하는 태도의 장단점을 따져보자.
(3) 우리 사회에서는 ‘반중(反中)’ 정서 수년째 지속되며 ‘혐중(嫌中)’의 수준으로 심화되고 있다. 이는 타자에 대한 혐오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타자 혐오를 건설적으로 극복할 수 있기 위한 조건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중국과 주변의 이민족은 지난 수천여 년의 세월 동안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동아시아 역사의 한 축을 이루어왔다. 농경문명이었던 중국이 문자 기록을 일찍부터 수행한 데 비해 주변의 이민족은 대개가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유목생활을 기본으로 하였고 문자 기록도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고 또 적었다. 그렇다 보니 이 둘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기록이 주로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 보니 중국 측 역사만 보면 중국과 주변 이민족 간의 상호작용, 상호교류, 상호형성의 역사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은 적어도 3천여 년 전부터 자신들의 중국은 문명으로 보고 주변 이민족은 야만 내지 미개로 보는 관점을 지니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역사에서 지속되면서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을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기준 내지 표준으로 본 시각의 소산으로, 중국이 그렇게 본다고 해서 실제도 그러했다고 주장할 수는 결코 없다. 주변 이민족 또한 자신들이 처한 자연환경과 역사 전통 아래서 자신들만의 문명을 높고도 지속적으로 일구어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지난 시절 중국뿐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도 주변 이민족과 끊임없는 상호 교류의 산물임을 중국의 역사는 분명하고도 명료하게 말해준다. 주변 이민족이 미개하거나 야만 상태였다면 이러한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음은 명약관화하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이민족과 자신은 질적으로 다르고, 그렇기에 결코 상호 동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는 중화주의 중에서도 근본주의적 경향을 띠는 관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른바 ‘오랑캐’인 이민족도 중국의 문명을 익히면 중국이 될 수 있고, 태생이 중국인이라도 중국의 문명을 버리고 오랑캐의 풍습대로 살면 오랑캐가 된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는 여전히 중화주의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지만 근본주의적인 중화주의에 비해서는 한층 유연한 절충주의적 중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중국인이든 주변 이민족이든 근본적으로 하나의 일족이라는 관념이 존재하기도 했다. ‘사해동포(四海同胞)’라는 말로 대변되는 관점이 그것으로, 이 또한 중화주의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관점은 아니지만, 근본주의적 중화주의와 절충주의적 중화주의에 비해 한층 개방적인 중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이념적 차원에서 이상형으로 표방된 탓에 그러한 생각이 현실화되어 중국인들이 일상생활 차원에서 자신들과 이민족은 일족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정치 차원에서 내정이나 외교 같은 국가 정책의 이념이나 지향으로 작동된 예는 거의 없었다.
소식의 「왕자불치이적론」에는 위의 관점 가운데 절충주의적 중화주의의 태도를 띠고 있다. “중국의 임금은 오랑캐를 다스릴 수 없다”는 관점은 근본주의적인 중화주의에 속한다. 이에 대해 소식은 오랑캐도 중국의 예법을 익히면 중국인이 될 수 있고 역으로 중국인이 중국의 예법을 버리면 오랑캐도 될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그러한 근본주의적 중화주의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소식은 공자의 권위를 빌려 왔다. 곧 공자가 편찬한 역사서이자 유가의 경전인 『춘추』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며, 공자도 오랑캐가 중국의 예법을 따르고자 했을 때에는 이들도 중국을 다스리는 방식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식의 관점에 입각하면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영원히 중국인-순수한 중국인, 오랑캐로 태어났으면 영원히 오랑캐-순수한 오랑캐!” 같은 명제는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관건은 ‘중국의 예법’으로 대변되는 중국 문명을 따르는지 여부, 태생이나 태어난 곳 등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식의 이러한 관점은 전형적인 중국 지식인으로서는 이민족과 같은 타자에 대하여 자못 유연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소식이 중화주의의 테두리를 깨고 나온 것은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준은 중국의 예법이고 여전히 중국인은 문명화된 상태, 오랑캐는 그렇지 못한 상태라는 이분법이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랑캐도 중국인이 되고자 하면 충분히 교화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중국의 예법으로 대변되는 중국문명의 우월성을 한층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문명, 소식, 야만, 예법, 오랑캐, 왕자불치이적론, 유목문명, 유목지대, 이민족, 중국, 중화주의, 타자
전후맥락
소식은 “중국을 다스리는 방도로 오랑캐를 다스릴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논술하기 위해 소식은 공자가 편찬한 『춘추』에 기술되어 있는 오랑캐인 융이 노나라로 찾아와 노나라 군주와 회합한 사실을 제시하며 글을 시작한다. 이는 오랑캐가 중국의 예법에 따라 평화적인 협상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공자가 이 점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춘추』의 이 기사는 공자가 “중국을 다스리는 방도로 오랑캐를 다스릴 수 없다”는 가르침을 어기고 오랑캐도 중국의 예법으로 다스릴 수 있음을 환기한 것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소식은 이에 대해 공자가 오랑캐 가운데서도 중국을 따르고자 하는 오랑캐를 긍정했던 것이지, 순전히 오랑캐이기만을 고수하는 오랑캐도 긍정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곧 “중국을 다스리는 방도로 오랑캐를 다스릴 수 없다”는 가르침은 오랑캐이기만을 고수하는 오랑캐에 적용되는 가르침이지, 달리 말해 중국의 다스리는 방도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중국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밝힘이 공자의 의도였다고 하였다. 인용문은 이러한 논지 중 일부이다.
고전본문
오랑캐들은 중국의 다스림으로써 다스릴 수 없다. 비유하면 그들은 마치 새나 짐승 같아서 그들이 크게 다스려지기를 구하면 반드시 큰 혼란에 맞닥뜨리게 된다. 옛날 성왕들은 그들이 그러함을 알고 있어서 그래서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다스렸다. 그들을 다스림에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을 깊이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춘추』에는 “노나라 군주가 오랑캐인 융과 잠 땅에서 회합하였다”고 씌어 있다. 한대의 유학자 하휴는 “(중국의) 임금은 오랑캐를 다스리지 않는데 오랑캐인 융을 『춘추』에 기록한 것은 오랑캐 중 중국으로 찾아오는 이들은 거절하지 않고 중국에서 떠나는 이들은 쫓아가 잡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해설하였다. …… 본래부터 중국이었던 제(齊)나라와 진(晉)나라의 군주가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고 천자를 보위하며 백성을 아끼고 양육하는 방도가 어찌 모두 옛날 성왕의 법도와 같겠는가? 그 방도는 대체로 사술과 권력으로부터 나왔고 거기에 어짊과 의로움을 섞어 놓은 것이니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는 순전히 중국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본래는 오랑캐였던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는 또한 탐욕스럽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방자하게 행동하며 뒤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도 대체로 도를 지키고 의를 행하는 군주가 있었다. 그러니 진(秦)나라와 초(楚)나라 또한 순전히 오랑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 무릇 오랑캐는 교화하고 가르치고 일깨우며 회유하고 복종시킬 수가 없으니 저들이 사납게 무기를 들고 우리와 변경에서 전쟁하지 않음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니 하물며 이른바 회합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행하려 한다면, 이에 어찌 그들의 뜻을 매우 가상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중국의 예법을 철저히 요구한다면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포악한 분노를 터뜨릴 것이니 그 재앙은 클 것이다. 공자가 이를 무척 걱정하여 그들이 노나라로 찾아온 것을 회합한 것으로 기록하고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이는 장차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깊이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 소식, 「왕자불치이적론」
토론하기
(1) 인용문에 나타난 필자의 견해를 정리해보자.
(2) 필자는 태생이 중국인이어도 다스리는 방도가 사술과 완력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면 참된 중국인이라고 볼 수 없고, 태생이 오랑캐여도 군주가 도를 지키고 의를 행하면 오랑캐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필자의 타자를 대하는 태도의 장단점을 따져보자.
(3) 우리 사회에서는 ‘반중(反中)’ 정서 수년째 지속되며 ‘혐중(嫌中)’의 수준으로 심화되고 있다. 이는 타자에 대한 혐오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타자 혐오를 건설적으로 극복할 수 있기 위한 조건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중국과 주변의 이민족은 지난 수천여 년의 세월 동안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동아시아 역사의 한 축을 이루어왔다. 농경문명이었던 중국이 문자 기록을 일찍부터 수행한 데 비해 주변의 이민족은 대개가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유목생활을 기본으로 하였고 문자 기록도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고 또 적었다. 그렇다 보니 이 둘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기록이 주로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 보니 중국 측 역사만 보면 중국과 주변 이민족 간의 상호작용, 상호교류, 상호형성의 역사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은 적어도 3천여 년 전부터 자신들의 중국은 문명으로 보고 주변 이민족은 야만 내지 미개로 보는 관점을 지니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역사에서 지속되면서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을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기준 내지 표준으로 본 시각의 소산으로, 중국이 그렇게 본다고 해서 실제도 그러했다고 주장할 수는 결코 없다. 주변 이민족 또한 자신들이 처한 자연환경과 역사 전통 아래서 자신들만의 문명을 높고도 지속적으로 일구어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지난 시절 중국뿐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도 주변 이민족과 끊임없는 상호 교류의 산물임을 중국의 역사는 분명하고도 명료하게 말해준다. 주변 이민족이 미개하거나 야만 상태였다면 이러한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음은 명약관화하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이민족과 자신은 질적으로 다르고, 그렇기에 결코 상호 동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는 중화주의 중에서도 근본주의적 경향을 띠는 관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른바 ‘오랑캐’인 이민족도 중국의 문명을 익히면 중국이 될 수 있고, 태생이 중국인이라도 중국의 문명을 버리고 오랑캐의 풍습대로 살면 오랑캐가 된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는 여전히 중화주의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지만 근본주의적인 중화주의에 비해서는 한층 유연한 절충주의적 중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중국인이든 주변 이민족이든 근본적으로 하나의 일족이라는 관념이 존재하기도 했다. ‘사해동포(四海同胞)’라는 말로 대변되는 관점이 그것으로, 이 또한 중화주의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관점은 아니지만, 근본주의적 중화주의와 절충주의적 중화주의에 비해 한층 개방적인 중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이념적 차원에서 이상형으로 표방된 탓에 그러한 생각이 현실화되어 중국인들이 일상생활 차원에서 자신들과 이민족은 일족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정치 차원에서 내정이나 외교 같은 국가 정책의 이념이나 지향으로 작동된 예는 거의 없었다.
소식의 「왕자불치이적론」에는 위의 관점 가운데 절충주의적 중화주의의 태도를 띠고 있다. “중국의 임금은 오랑캐를 다스릴 수 없다”는 관점은 근본주의적인 중화주의에 속한다. 이에 대해 소식은 오랑캐도 중국의 예법을 익히면 중국인이 될 수 있고 역으로 중국인이 중국의 예법을 버리면 오랑캐도 될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그러한 근본주의적 중화주의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소식은 공자의 권위를 빌려 왔다. 곧 공자가 편찬한 역사서이자 유가의 경전인 『춘추』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며, 공자도 오랑캐가 중국의 예법을 따르고자 했을 때에는 이들도 중국을 다스리는 방식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식의 관점에 입각하면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영원히 중국인-순수한 중국인, 오랑캐로 태어났으면 영원히 오랑캐-순수한 오랑캐!” 같은 명제는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관건은 ‘중국의 예법’으로 대변되는 중국 문명을 따르는지 여부, 태생이나 태어난 곳 등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식의 이러한 관점은 전형적인 중국 지식인으로서는 이민족과 같은 타자에 대하여 자못 유연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소식이 중화주의의 테두리를 깨고 나온 것은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준은 중국의 예법이고 여전히 중국인은 문명화된 상태, 오랑캐는 그렇지 못한 상태라는 이분법이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랑캐도 중국인이 되고자 하면 충분히 교화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중국의 예법으로 대변되는 중국문명의 우월성을 한층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문명, 소식, 야만, 예법, 오랑캐, 왕자불치이적론, 유목문명, 유목지대, 이민족, 중국, 중화주의, 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