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도르 쿠지미치 솔로구프
표도르 쿠지미치 솔로구프(본명 테테르니코프: 1863~1927)는 러시아의 상징주의 시인, 소설가, 번역가로, 유럽 세기말 문학과 철학의 염세주의와 비관주의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솔로구프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데카당스 경향의 대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솔로구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빈곤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단사였고 어머니는 농노 출신이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어머니는 결혼 전 속해 있던 귀족 아가포프 가문의 하녀로 다시 돌아갔고 솔로구프와 그의 여동생은 아가포프 가문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솔로구프의 어머니는 체벌을 교육의 주요 수단으로 간주하여 사소한 잘못에도 아들을 심하게 처벌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사도마조히즘적 콤플렉스를 형성했고, 이는 작가의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1884년 어린이 잡지에 시 「여우와 고슴도치」가 솔로구프의 첫 출판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어머니를 구출하려는 결심에서였다고 한다.
1879년 페테르부르크 교사연구소에 입학한 솔로구프는 1882년 졸업 후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북부 지방으로 이주하여 크레스치, 벨리키예 루키, 비테그라 등에서 교사로 일했다. 이 시기에도 솔로구프는 꾸준히 시작(詩作)을 이어갔다. 지방 생활로 인해 문학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다고 느낀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고 1892년 가을이 되어서야 페테르부르크 외곽의 페스키에 있는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외딴 지방 생활의 “무서운 세계”에 대한 솔로구프의 10년간의 경험은 이후에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소설 『작은 악마』를 쓰게 바탕이 되었다. 솔로구프는 저널 『북방통보』를 중심으로 하여 니콜라이 민스키, 지나이다 기피우스, 드미트리 메레지콥스키 등이 조직했던 상징주의 운동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1892년에 수도로 이주한 솔로구프는 『작은 악마』를 쓰면서 『북방통보』 사무실에 자주 방문하였다. 향후 5년간 이 저널은 솔로구프의 작품의 주된 출판사가 된다. 1893년 테테르니코프가 시적이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한 민스키는 가명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고 귀족적인 이름인 솔로구프가 결정되었지만 귀족 솔로구프 백작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두 개의 l 중 하나를 뺀 채로 사용하게 된다.
1894년 그의 첫 번째 단편 소설 『니노치카의 실수』가 출판되었고, 이해 가을에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다.
1896년에 그는 시집, 단편 소설집, 그리고 1883년에 쓰기 시작한 첫 번째 소설이며 러시아 최초의 데카당스 소설로 평가되는 『나쁜 꿈』 등 첫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
1902년에 『작은 악마』를 완성한다. 당시 솔로구프의 집에서는 이루어지던 문학모임인 「일요일」에는 알렉산드르 블로크, 미하일 쿠즈민, 알렉세이 레미조프, 세르게이 고로데츠키, 뱌체슬라프 이바노프, 레온 박스트, 므스티슬라프 도부진스키, 세르게이 아우슬렌데르 등을 포함한 시인, 예술가, 배우들이 모였다. 솔로구프의 이후의 주요 산문으로 꼽히는 3부작 『창조된 전설』(1905–1913)은 이전 작품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에 대한 훨씬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여전히 “인생은 저속하고 (···) 어둠 속에 정체되어 있고, 지루하고 평범하지만”, 시인은 “그로부터 달콤한 전설을,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전설을 창조한다”는 유명한 선언은 데카당스 문학의 표어가 되었다.
1907년 솔로구프는 25년 동안 교직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고, 1908년 가을 번역가 아나스타시야 체보타렙스카야와 결혼한다. 1909년~1911년 사이에 솔로구프의 전집이 12권으로 출판되었고,
1911년에는 30개 이상의 비평, 노트, 유명 작가들의 평론이 포함된 비평집이 나왔다. 솔로구프는 1917년의 2월 혁명을 환영했고 여름 동안 예술가 연합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볼셰비키에 공감하지 않았고 10월 혁명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로그라드에 남아 활동을 계속했던 솔로구프는 이후 출판과 서적 판매에 대한 볼셰비키의 통제로 인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펜을 놓고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솔로구프는 원칙적으로 이민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아내는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19년 12월에 출국 허가를 신청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다. 반년 후 그는 개인적으로 레닌에게 편지를 썼지만 역시 결과는 없었다.
1921년 7월 중순 그는 마침내 트로츠키로부터 출발을 허가하는 편지를 받았고 9월 25일 레발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9월 23일 저녁 그의 아내는 궁핍으로 쇠약해지고 불확실성의 오랜 고통으로 절망에 빠진 채 투치코프 다리에서 몸을 던져 익사하고 만다. 이에 솔로구프는 떠나지 못하고 아내가 익사한 지다노프강 유역 아파트에서 은둔했다.
1927년 봄 앓아누운 솔로구프는 12월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하였고 스몰렌스크 묘지의 아내 곁에 안장되었다.

표도르 쿠지미치 솔로구프
표도르 쿠지미치 솔로구프(본명 테테르니코프: 1863~1927)는 러시아의 상징주의 시인, 소설가, 번역가로, 유럽 세기말 문학과 철학의 염세주의와 비관주의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솔로구프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데카당스 경향의 대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솔로구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빈곤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단사였고 어머니는 농노 출신이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어머니는 결혼 전 속해 있던 귀족 아가포프 가문의 하녀로 다시 돌아갔고 솔로구프와 그의 여동생은 아가포프 가문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솔로구프의 어머니는 체벌을 교육의 주요 수단으로 간주하여 사소한 잘못에도 아들을 심하게 처벌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사도마조히즘적 콤플렉스를 형성했고, 이는 작가의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1884년 어린이 잡지에 시 「여우와 고슴도치」가 솔로구프의 첫 출판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어머니를 구출하려는 결심에서였다고 한다.
1879년 페테르부르크 교사연구소에 입학한 솔로구프는 1882년 졸업 후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북부 지방으로 이주하여 크레스치, 벨리키예 루키, 비테그라 등에서 교사로 일했다. 이 시기에도 솔로구프는 꾸준히 시작(詩作)을 이어갔다. 지방 생활로 인해 문학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다고 느낀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고 1892년 가을이 되어서야 페테르부르크 외곽의 페스키에 있는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외딴 지방 생활의 “무서운 세계”에 대한 솔로구프의 10년간의 경험은 이후에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소설 『작은 악마』를 쓰게 바탕이 되었다. 솔로구프는 저널 『북방통보』를 중심으로 하여 니콜라이 민스키, 지나이다 기피우스, 드미트리 메레지콥스키 등이 조직했던 상징주의 운동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1892년에 수도로 이주한 솔로구프는 『작은 악마』를 쓰면서 『북방통보』 사무실에 자주 방문하였다. 향후 5년간 이 저널은 솔로구프의 작품의 주된 출판사가 된다. 1893년 테테르니코프가 시적이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한 민스키는 가명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고 귀족적인 이름인 솔로구프가 결정되었지만 귀족 솔로구프 백작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두 개의 l 중 하나를 뺀 채로 사용하게 된다.
1894년 그의 첫 번째 단편 소설 『니노치카의 실수』가 출판되었고, 이해 가을에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다.
1896년에 그는 시집, 단편 소설집, 그리고 1883년에 쓰기 시작한 첫 번째 소설이며 러시아 최초의 데카당스 소설로 평가되는 『나쁜 꿈』 등 첫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
1902년에 『작은 악마』를 완성한다. 당시 솔로구프의 집에서는 이루어지던 문학모임인 「일요일」에는 알렉산드르 블로크, 미하일 쿠즈민, 알렉세이 레미조프, 세르게이 고로데츠키, 뱌체슬라프 이바노프, 레온 박스트, 므스티슬라프 도부진스키, 세르게이 아우슬렌데르 등을 포함한 시인, 예술가, 배우들이 모였다. 솔로구프의 이후의 주요 산문으로 꼽히는 3부작 『창조된 전설』(1905–1913)은 이전 작품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에 대한 훨씬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여전히 “인생은 저속하고 (···) 어둠 속에 정체되어 있고, 지루하고 평범하지만”, 시인은 “그로부터 달콤한 전설을,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전설을 창조한다”는 유명한 선언은 데카당스 문학의 표어가 되었다.
1907년 솔로구프는 25년 동안 교직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고, 1908년 가을 번역가 아나스타시야 체보타렙스카야와 결혼한다. 1909년~1911년 사이에 솔로구프의 전집이 12권으로 출판되었고,
1911년에는 30개 이상의 비평, 노트, 유명 작가들의 평론이 포함된 비평집이 나왔다. 솔로구프는 1917년의 2월 혁명을 환영했고 여름 동안 예술가 연합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볼셰비키에 공감하지 않았고 10월 혁명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로그라드에 남아 활동을 계속했던 솔로구프는 이후 출판과 서적 판매에 대한 볼셰비키의 통제로 인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펜을 놓고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솔로구프는 원칙적으로 이민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아내는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19년 12월에 출국 허가를 신청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다. 반년 후 그는 개인적으로 레닌에게 편지를 썼지만 역시 결과는 없었다.
1921년 7월 중순 그는 마침내 트로츠키로부터 출발을 허가하는 편지를 받았고 9월 25일 레발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9월 23일 저녁 그의 아내는 궁핍으로 쇠약해지고 불확실성의 오랜 고통으로 절망에 빠진 채 투치코프 다리에서 몸을 던져 익사하고 만다. 이에 솔로구프는 떠나지 못하고 아내가 익사한 지다노프강 유역 아파트에서 은둔했다.
1927년 봄 앓아누운 솔로구프는 12월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하였고 스몰렌스크 묘지의 아내 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