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를 깨닫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무지를 폭로하는 것은 좀… – 소크라테스가 미움 받은 까닭
가격문의(상세정보 참조)
난이도 : ★★☆☆
셀묶음 : 당신은 지혜로운가요? 그렇다면 지혜의 증거를 대보시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시작한다. 부모에게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며, 친구와 선후배로부터 배우고, 삶의 경험 속에서 배운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지식을 얻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질 거라고 확신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식이 부와 행복, 한 마디로 인생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부류의 지식인들이 있다. 의사, 과학자, 교사,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이들은 자기가 공부한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가르치며, 이를 통해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일상의 삶에서 지혜롭지 못한 말과 어리석은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고학력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 막상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종종 과연 교육이 지혜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회의 석인 물음을 던지곤 한다. 여기에 실린 고전들 역시 지혜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지혜로운가?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시험하기 위해 지혜롭다고 알려진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소크라테스가 더 지혜로운 것으로 끝난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행동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특히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가 지혜로 유명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논박하는 것을 보며 열광한다. 급기야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를 흉내내어 자기들이 직접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논박하기 시작하는데….
고전본문
그런데 여러분! 진짜 지혜로운 자는 신이요, 신은 신탁을 통해서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즉 인간적인 지혜란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신이 지금 여러분 앞에 서있는 이 소크라테스를 언급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를 본보기로 삼아 내 이름을 이용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이런 말을 하려고 말입니다. “인간들이여! 소크라테스가 그랬듯이, 너희들 중에서는 누구든 지식 앞에서 자신이 실로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깨달은 자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자이니라.” 나는 지금도 여전히 돌아다니면서 신의 뜻에 따라 이런 것들을 찾고 탐문합니다. 내지인 중에서든 외지인 중에서든 지혜롭다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을 상대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혜롭지 않다고 여겨질 때는 신을 도와 그가 지혜롭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런 분주함으로 인해 나라의 일이든 집안일이든 뭔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할 여유가 내게는 없었고, 오히려 나는 신에 대한 봉사 때문에 극도로 가난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여유가 많은 젊은이들,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아들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날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이 검토 받는 걸 들으며 즐거워하지요. 또 종종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내 흉내를 내다가,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을 검토하여 시도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뭔가를 안다고 믿지만 실은 거의 혹은 아예 무지한 자들이 사람들 가운데 쌔고 쌨다는 걸 발견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이유로 젊은이들에게서 검토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화를 내면서 소크라테스라는 지극히 부정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젊은이들을 망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토론하기
(1) TV나 인터넷의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격렬한 논쟁 끝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논파하거나 논파 당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때 논쟁에서 승리한 자, 논쟁에서 패한 자, 그리고 이를 지켜본 참관자(시청자)는 어떤 기분을 느낄지, 또 무엇을 생각하게 될지 각각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2) 논박 당한 자가 느끼게 될 수치심과 분노는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해설읽기
불경죄로 고발당한 소크라테스가 재판에서 제일 먼저 한 이야기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평가 생겨난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자신이 미움을 받게 된 원인을 제대로 밝혀야만,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고발에 대해 제대로 변론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인간은 없다”는 신탁의 의미를 검증하기 위해 당시에 지혜롭기로 유명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들은 소문과는 반대로 지혜롭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들이 겪는 이러한 이중의 무지와 달리, 적어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이 상대적으로 그들보다 지혜로웠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2중의 무지를 겪고 있는 시민들을 일깨워주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요, 신에 대한 봉사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이런 숭고한 신념은 엉뚱하게도 그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발생시켰고, 결국 그를 재판정까지 끌고 오게 된다. 왜 그럴까?
플라톤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소크라테스를 향한 분노의 정체가 바로 논박당한 사람들의 수치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저마다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사회적 명망가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주제에 관하여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고 논박을 당함으로써 느낀 열패감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정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바로 주변에서 대화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존재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논박을 당했을 때 수치심은 더욱 배가되기 때문이다. 사실 수치심은 기쁨이나 슬픔 등, 여타의 감정들에 비해 사회적인 성격이 강한 감정이다. 기쁨과 슬픔의 감정은 주로 나와 대상 사이의 관계로부터 내 안에 촉발된다. 예를 들어 내가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느낀다거나, 친구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 슬픔을 느끼는 경우가 그렇다. 나와 시험 결과, 나와 친구의 죽음 사이에서 내 안에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에 수치심의 경우에는 나와 대상 사이에, 이를 지켜보는 제삼자가 추가된다. 수치심은 내가 확신하는 나의 가치(재산, 지위, 외모, 성격, 지혜 등)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검증 과정(테스트, 시합, 토론, 등)을 통해 부정되었을 때 발생한다. 그런데 이 감정은 가치의 검증 결과로부터 직접 생겨나지 않고, 이 결과를 제삼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상황 인식으로부터 생겨난다. 즉 나의 가치가 부정당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런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말았다는 현실 인식이 수치심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때 수치심은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의 정도와 그것을 시험하고 평가하는 상대의 지위, 그리고 이를 관찰하는 사람들에 따라 감정의 크기와 강도를 달리 한다. 우선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의 자기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가치가 부정되었을 때의 수치심은 커진다. 다음으로 가치를 평가하고 테스트하는 상대(혹은 논적)가 자기보다 약하거나 낮은 지위의 사람일수록,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판단된 사람에게 논박 당했을 때 수치심은 커진다. 마지막으로 지켜보는 청중의 수가 많을수록, 또 그들의 반응이 적극적일수록, 수치심은 커진다. 이상의 조건을 소크라테스에게 적용해보면, 그를 향한 분노의 정체는 분명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젊은이들이 그가 대화 상대의 주장을 검토하고 논박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진술한다. 더 나아가 이번에는 젊은이들이 직접 소크라테스의 흉내를 내어 유명인들을 상대로 그들의 주장을 검토하고 논박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대화자는 사람들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훌륭히 답변함으로써 자신의 가치와 명예를 드높이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무지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자처하며 대화자에게 가르침을 구한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하지만 대화의 결과, 한껏 자존심을 세웠던 대화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말문이 막히게 되고, 이 광경을 지켜본 젊은이들은 유명인이 보잘 것 없음을 자처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패했다며 즐거워한다. 그렇게 해서 대화자는 자신이 인생을 통해 쌓아 왔다고 확신했던 가치의 붕괴를 경험하게 되며, 이것이 곧 심한 수치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수치심에 사로잡힌 대화자는 곧 수치심을 야기한 원인을 향해 화를 내게 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누구/무엇일까?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듯이 그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것은 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신의 봉사자로서 신을 도와서 사람들이 갖고 있다고 믿었던 지혜를 검토하고,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려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지혜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실제로는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믿는 사람은 결코 뭔가를 배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대화자가 무지를 깨달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대화자가 무지를 자각했다는 증거 내지는 징표는 과연 무엇일까?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바로 대화자가 느끼는 수치심이다. 이때의 수치란 실제로는 무지함에도 스스로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 역시 이중의 무지에 빠져있었던 자기 자신을 향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수치심과 분노는 대화자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감정들은 대화자의 혼이 잘못된 신념과 미망(迷妄)으로부터 비로소 정화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 내지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혼을 점유하고 있었던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이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모두 제거된 이상, 그리고 이러한 혼의 정화가 과거의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분노를 통해서 확인된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제대로 진리를 탐구하고 참된 지식을 얻는 일 뿐이다. 요컨대 이중의 무지로부터 사람들의 혼을 정화시키고 함께 진리를 탐구하도록 추동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동포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을 당혹스럽고 수치스럽게 만든 핵심적인 이유이자, 신이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했던 임무인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숭고한 마음은 시민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논박 당한 것을 수치스러워했지만, 그 수치는 자신이 겪어온 이중의 무지에 대한 자각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논박 당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또한 그 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려온 자신의 명성과 지위가 파괴되고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지며, 결국에는 자신을 위태롭게 만든 자, 즉 소크라테스를 향한 분노를 발생시킨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좋은 의도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자신을 논박한 소크라테스를 불온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적대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추종했던 젊은이들이 스승의 흉내를 내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선의와 소명의식은 전달되지 않았고,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동포시민들에 의해 불경죄로 고발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간혹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하다가 지는 경우가 있다. 내 주장이 힘을 못쓰고 상대의 주장에 당한 것도 기분 나쁜 일이지만,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논박을 당할 경우, 민망함과 수치심은 훨씬 더 크고 강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나를 논박한 상대를 향해 ‘다음번에는 꼭 이 치욕을 되갚아주겠어!’라며 복수를 다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수를 꿈꾸기에 앞서 내 안에 생겨난 수치심과 분노가 사실은 어디를 향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변명?의 주인공은 우리에게 충고를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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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신탁을 시험하기 위해 지혜롭다고 알려진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소크라테스가 더 지혜로운 것으로 끝난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행동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특히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가 지혜로 유명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논박하는 것을 보며 열광한다. 급기야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를 흉내내어 자기들이 직접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논박하기 시작하는데….
고전본문
그런데 여러분! 진짜 지혜로운 자는 신이요, 신은 신탁을 통해서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즉 인간적인 지혜란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신이 지금 여러분 앞에 서있는 이 소크라테스를 언급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를 본보기로 삼아 내 이름을 이용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이런 말을 하려고 말입니다. “인간들이여! 소크라테스가 그랬듯이, 너희들 중에서는 누구든 지식 앞에서 자신이 실로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깨달은 자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자이니라.” 나는 지금도 여전히 돌아다니면서 신의 뜻에 따라 이런 것들을 찾고 탐문합니다. 내지인 중에서든 외지인 중에서든 지혜롭다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을 상대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혜롭지 않다고 여겨질 때는 신을 도와 그가 지혜롭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런 분주함으로 인해 나라의 일이든 집안일이든 뭔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할 여유가 내게는 없었고, 오히려 나는 신에 대한 봉사 때문에 극도로 가난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여유가 많은 젊은이들,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아들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날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이 검토 받는 걸 들으며 즐거워하지요. 또 종종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내 흉내를 내다가,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을 검토하여 시도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뭔가를 안다고 믿지만 실은 거의 혹은 아예 무지한 자들이 사람들 가운데 쌔고 쌨다는 걸 발견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이유로 젊은이들에게서 검토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화를 내면서 소크라테스라는 지극히 부정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젊은이들을 망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토론하기
(1) TV나 인터넷의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격렬한 논쟁 끝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논파하거나 논파 당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때 논쟁에서 승리한 자, 논쟁에서 패한 자, 그리고 이를 지켜본 참관자(시청자)는 어떤 기분을 느낄지, 또 무엇을 생각하게 될지 각각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2) 논박 당한 자가 느끼게 될 수치심과 분노는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해설읽기
불경죄로 고발당한 소크라테스가 재판에서 제일 먼저 한 이야기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평가 생겨난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자신이 미움을 받게 된 원인을 제대로 밝혀야만,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고발에 대해 제대로 변론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인간은 없다”는 신탁의 의미를 검증하기 위해 당시에 지혜롭기로 유명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들은 소문과는 반대로 지혜롭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들이 겪는 이러한 이중의 무지와 달리, 적어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이 상대적으로 그들보다 지혜로웠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2중의 무지를 겪고 있는 시민들을 일깨워주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요, 신에 대한 봉사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이런 숭고한 신념은 엉뚱하게도 그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발생시켰고, 결국 그를 재판정까지 끌고 오게 된다. 왜 그럴까?
플라톤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소크라테스를 향한 분노의 정체가 바로 논박당한 사람들의 수치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저마다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사회적 명망가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주제에 관하여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고 논박을 당함으로써 느낀 열패감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정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바로 주변에서 대화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존재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논박을 당했을 때 수치심은 더욱 배가되기 때문이다. 사실 수치심은 기쁨이나 슬픔 등, 여타의 감정들에 비해 사회적인 성격이 강한 감정이다. 기쁨과 슬픔의 감정은 주로 나와 대상 사이의 관계로부터 내 안에 촉발된다. 예를 들어 내가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느낀다거나, 친구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 슬픔을 느끼는 경우가 그렇다. 나와 시험 결과, 나와 친구의 죽음 사이에서 내 안에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에 수치심의 경우에는 나와 대상 사이에, 이를 지켜보는 제삼자가 추가된다. 수치심은 내가 확신하는 나의 가치(재산, 지위, 외모, 성격, 지혜 등)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검증 과정(테스트, 시합, 토론, 등)을 통해 부정되었을 때 발생한다. 그런데 이 감정은 가치의 검증 결과로부터 직접 생겨나지 않고, 이 결과를 제삼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상황 인식으로부터 생겨난다. 즉 나의 가치가 부정당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런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말았다는 현실 인식이 수치심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때 수치심은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의 정도와 그것을 시험하고 평가하는 상대의 지위, 그리고 이를 관찰하는 사람들에 따라 감정의 크기와 강도를 달리 한다. 우선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의 자기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가치가 부정되었을 때의 수치심은 커진다. 다음으로 가치를 평가하고 테스트하는 상대(혹은 논적)가 자기보다 약하거나 낮은 지위의 사람일수록,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판단된 사람에게 논박 당했을 때 수치심은 커진다. 마지막으로 지켜보는 청중의 수가 많을수록, 또 그들의 반응이 적극적일수록, 수치심은 커진다. 이상의 조건을 소크라테스에게 적용해보면, 그를 향한 분노의 정체는 분명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젊은이들이 그가 대화 상대의 주장을 검토하고 논박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진술한다. 더 나아가 이번에는 젊은이들이 직접 소크라테스의 흉내를 내어 유명인들을 상대로 그들의 주장을 검토하고 논박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대화자는 사람들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훌륭히 답변함으로써 자신의 가치와 명예를 드높이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무지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자처하며 대화자에게 가르침을 구한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하지만 대화의 결과, 한껏 자존심을 세웠던 대화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말문이 막히게 되고, 이 광경을 지켜본 젊은이들은 유명인이 보잘 것 없음을 자처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패했다며 즐거워한다. 그렇게 해서 대화자는 자신이 인생을 통해 쌓아 왔다고 확신했던 가치의 붕괴를 경험하게 되며, 이것이 곧 심한 수치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수치심에 사로잡힌 대화자는 곧 수치심을 야기한 원인을 향해 화를 내게 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누구/무엇일까?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듯이 그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것은 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신의 봉사자로서 신을 도와서 사람들이 갖고 있다고 믿었던 지혜를 검토하고,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려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지혜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실제로는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믿는 사람은 결코 뭔가를 배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대화자가 무지를 깨달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대화자가 무지를 자각했다는 증거 내지는 징표는 과연 무엇일까?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바로 대화자가 느끼는 수치심이다. 이때의 수치란 실제로는 무지함에도 스스로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 역시 이중의 무지에 빠져있었던 자기 자신을 향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수치심과 분노는 대화자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감정들은 대화자의 혼이 잘못된 신념과 미망(迷妄)으로부터 비로소 정화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 내지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혼을 점유하고 있었던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이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모두 제거된 이상, 그리고 이러한 혼의 정화가 과거의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분노를 통해서 확인된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제대로 진리를 탐구하고 참된 지식을 얻는 일 뿐이다. 요컨대 이중의 무지로부터 사람들의 혼을 정화시키고 함께 진리를 탐구하도록 추동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동포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을 당혹스럽고 수치스럽게 만든 핵심적인 이유이자, 신이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했던 임무인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숭고한 마음은 시민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논박 당한 것을 수치스러워했지만, 그 수치는 자신이 겪어온 이중의 무지에 대한 자각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논박 당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또한 그 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려온 자신의 명성과 지위가 파괴되고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지며, 결국에는 자신을 위태롭게 만든 자, 즉 소크라테스를 향한 분노를 발생시킨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좋은 의도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자신을 논박한 소크라테스를 불온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적대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추종했던 젊은이들이 스승의 흉내를 내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선의와 소명의식은 전달되지 않았고,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동포시민들에 의해 불경죄로 고발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간혹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하다가 지는 경우가 있다. 내 주장이 힘을 못쓰고 상대의 주장에 당한 것도 기분 나쁜 일이지만,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논박을 당할 경우, 민망함과 수치심은 훨씬 더 크고 강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나를 논박한 상대를 향해 ‘다음번에는 꼭 이 치욕을 되갚아주겠어!’라며 복수를 다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수를 꿈꾸기에 앞서 내 안에 생겨난 수치심과 분노가 사실은 어디를 향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변명?의 주인공은 우리에게 충고를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