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시작한다. 부모에게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며, 친구와 선후배로부터 배우고, 삶의 경험 속에서 배운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지식을 얻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질 거라고 확신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식이 부와 행복, 한 마디로 인생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부류의 지식인들이 있다. 의사, 과학자, 교사,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이들은 자기가 공부한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가르치며, 이를 통해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일상의 삶에서 지혜롭지 못한 말과 어리석은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고학력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 막상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종종 과연 교육이 지혜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회의 석인 물음을 던지곤 한다. 여기에 실린 고전들 역시 지혜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지혜로운가?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소크라테스의 친구 중 한 사람인 카이레폰은 어느날 델피의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신탁의 대답은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내용을 검증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자기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한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것으로 드러난다면 신탁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리라는 생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시민들을 대표하여 도시국가를 이끄는 유명 정치인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
고전본문
나는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갔소. 어디가 됐든 할 수 있다면 거기서 예언을 검토하고 신탁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 “여기 이 사람이 나보다 지혜로운데, 당신은 내가 그렇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꼼꼼히 살펴보았소. 내가 굳이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는 그저 정치인들 중 한 사람이었소. 그런데 그 사람을 살펴보면서, 또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그러니까 그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물론 본인 스스로도 자기가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나는 그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해서 나는 그 사람에게도, 다른 많은 참석자들에게도 미움을 사게 되었소. 어쨌든 나는 그를 떠나오면서 나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론을 했습니다. ‘이 사람보다는 내가 더 지혜롭군. 왜냐하면 우리는 둘 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어떤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니까 바로 그렇게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든. 어쨌든 내가 그자보다 더 지혜로운 바로 바로 이 점에서 그런 것 같다. 즉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말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를 떠난 후 나는 또 다른 사람, 그러니까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고 여겨지던 사람에게 갔지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또한 같은 이유로 해서 나는 그 사람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사게 된 것이오.
토론하기
(1) 위의 인용문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구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라고 말하는 경우나 사례를 들어가며, ‘앎’의 의미에 관해 대화를 나눠보자.
해설읽기
신탁의 내용을 검증하기로 마음먹은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지혜롭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혜롭기로 소문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지혜를 확인하려 한다. 그들이 자신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신탁의 응답은 틀린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으로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 대화를 청하는데, 위의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치인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고 말한다. 대화의 결과는 어땠을까?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나눈 정치인이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고, 또 주변인들 역시 그가 지혜롭다고 여겼지만, 실상 그는 전혀 지혜롭지 않았다고 보고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가지로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 정치인은 결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시도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해당 정치인은 물론, 주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대목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향한 사회적 적대감이 형성된 계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대화자들이 과연 지혜로운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무지가 밝혀진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향해 드러낸 분노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에 이른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혜롭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정치인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결과, 그 정치인은 대화의 주제와 관련하여 전혀 지혜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그 정치인보다 더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무지하지만, 적어도 자기가 무지하다는 점만큼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치인은 대화의 주제에 관해서는 물론,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이른바 이중의 무지를 겪고 있었던 반면,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기 자신의 무지만큼은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과 그 대상이 조금 다르다. 예컨대 물리학자는 물질의 구조와 운동의 본성에 대해 잘 알 것이다. 생물학자나 의학자는 생명현상이나 질병에 관한 지식을 가질 것이며, 경제학자는 인간의 경제활동과 그에 수반되는 일체의 주제들에 관한 앎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앎의 대상을 모두 자기 이외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앎은 외부가 아닌 내부, 구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성찰, 혹은 자기반성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인과 대화를 나눌 때, 정치적인 주제들, 예컨대 좋은 나라와 정부, 훌륭한 법과 교육제도에 대해서 자기가 모르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눴던 정치가는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정치적인 주제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 결과, 그 정치인은 자기가 안다고 확신했던 주제들에 관해 사실은 전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대화가 지속되면서 자신의 무지가 밝혀지는 것을 당혹스러워 했을 것이며, 또한 자기도 몰랐던 무지를 벗겨내는 소크라테스를 원망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와 정치인은 모두 대화 주제와 관련하여 지혜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가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해당 주제에 관해 무지하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성찰 혹은 자기반성으로서의 무지에 대한 자각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그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정치인보다 더 지혜롭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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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친구 중 한 사람인 카이레폰은 어느날 델피의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신탁의 대답은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내용을 검증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자기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한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것으로 드러난다면 신탁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리라는 생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시민들을 대표하여 도시국가를 이끄는 유명 정치인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
고전본문
나는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갔소. 어디가 됐든 할 수 있다면 거기서 예언을 검토하고 신탁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 “여기 이 사람이 나보다 지혜로운데, 당신은 내가 그렇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꼼꼼히 살펴보았소. 내가 굳이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는 그저 정치인들 중 한 사람이었소. 그런데 그 사람을 살펴보면서, 또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그러니까 그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물론 본인 스스로도 자기가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나는 그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해서 나는 그 사람에게도, 다른 많은 참석자들에게도 미움을 사게 되었소. 어쨌든 나는 그를 떠나오면서 나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론을 했습니다. ‘이 사람보다는 내가 더 지혜롭군. 왜냐하면 우리는 둘 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어떤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니까 바로 그렇게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든. 어쨌든 내가 그자보다 더 지혜로운 바로 바로 이 점에서 그런 것 같다. 즉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말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를 떠난 후 나는 또 다른 사람, 그러니까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고 여겨지던 사람에게 갔지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또한 같은 이유로 해서 나는 그 사람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사게 된 것이오.
토론하기
(1) 위의 인용문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구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라고 말하는 경우나 사례를 들어가며, ‘앎’의 의미에 관해 대화를 나눠보자.
해설읽기
신탁의 내용을 검증하기로 마음먹은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지혜롭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혜롭기로 소문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지혜를 확인하려 한다. 그들이 자신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신탁의 응답은 틀린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으로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 대화를 청하는데, 위의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치인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고 말한다. 대화의 결과는 어땠을까?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나눈 정치인이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고, 또 주변인들 역시 그가 지혜롭다고 여겼지만, 실상 그는 전혀 지혜롭지 않았다고 보고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가지로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 정치인은 결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시도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해당 정치인은 물론, 주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대목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향한 사회적 적대감이 형성된 계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대화자들이 과연 지혜로운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무지가 밝혀진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향해 드러낸 분노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에 이른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혜롭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정치인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결과, 그 정치인은 대화의 주제와 관련하여 전혀 지혜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그 정치인보다 더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무지하지만, 적어도 자기가 무지하다는 점만큼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치인은 대화의 주제에 관해서는 물론,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이른바 이중의 무지를 겪고 있었던 반면,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기 자신의 무지만큼은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과 그 대상이 조금 다르다. 예컨대 물리학자는 물질의 구조와 운동의 본성에 대해 잘 알 것이다. 생물학자나 의학자는 생명현상이나 질병에 관한 지식을 가질 것이며, 경제학자는 인간의 경제활동과 그에 수반되는 일체의 주제들에 관한 앎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앎의 대상을 모두 자기 이외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앎은 외부가 아닌 내부, 구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성찰, 혹은 자기반성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인과 대화를 나눌 때, 정치적인 주제들, 예컨대 좋은 나라와 정부, 훌륭한 법과 교육제도에 대해서 자기가 모르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눴던 정치가는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정치적인 주제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 결과, 그 정치인은 자기가 안다고 확신했던 주제들에 관해 사실은 전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대화가 지속되면서 자신의 무지가 밝혀지는 것을 당혹스러워 했을 것이며, 또한 자기도 몰랐던 무지를 벗겨내는 소크라테스를 원망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와 정치인은 모두 대화 주제와 관련하여 지혜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가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해당 주제에 관해 무지하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성찰 혹은 자기반성으로서의 무지에 대한 자각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그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정치인보다 더 지혜롭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