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시작한다. 부모에게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며, 친구와 선후배로부터 배우고, 삶의 경험 속에서 배운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지식을 얻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질 거라고 확신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식이 부와 행복, 한 마디로 인생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부류의 지식인들이 있다. 의사, 과학자, 교사,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이들은 자기가 공부한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가르치며, 이를 통해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일상의 삶에서 지혜롭지 못한 말과 어리석은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고학력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 막상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종종 과연 교육이 지혜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회의 석인 물음을 던지곤 한다. 여기에 실린 고전들 역시 지혜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지혜로운가?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서기전 399년의 어느 날,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세 명의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고발인들은 멜레토스, 아뉘토스, 뤼콘으로서, 이들은 각각 시인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변론가들을 대변하여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고 주장한다. 기소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인데, (1)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2) 새로운 영적인 것을 도입하였으며, (3) 젊은이들을 타락시킴으로써 부정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는 500 (또는 501명)의 배심원들이 “판관”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였다. 재판이 시작되면 먼저 고발인 측에서 피고인의 유죄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며,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는 연설은 그 다음에 이루어진다. 우리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고발인들의 연설이 끝난 직후에, 그들의 비난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을 시작한다.
고전본문
⓵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이 나를 고발한 사람들로 인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들로 인해 나 스스로도 거의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그들은 설득력 있게 말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진실에 관한 한 그들은 실상 아무 것도 말한 게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니 정말이지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께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⓶ 여러분 중 다수가 시장의 환전상 근처나 다른 어딘가에서 내가 하는 말을 듣거나 했을 텐데, 아무튼 그때 내가 입버릇처럼 쓰는 말들이 있지요. 혹시 내가 그런 말들을 사용하여 변명하는 걸 여러분이 듣더라도 놀라거나 소란을 피우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지금 나는 일흔 살이 되어 처음으로 재판정에 섰어요. 그래서 이곳의 말투에는 그야말로 생소한 외국인의 처지와 같아요. 그러니까 만일 내가 실제로 외국인이라면 내가 양육 받았을 때 썼던 바로 그 지역 말투와 같은 식으로 말을 하게 되더라도 여러분은 아마 나를 용서해주셨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 것처럼 지금도 나는 여러분께 다음과 같이 해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올바른 요청입니다. 그러니까 말투가 어떤 식인지는 문제 삼지 말고 (혹시 더 형편없을 수도 있고, 더 괜찮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저 내가 올바른 말을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만을 살펴보고 그것에만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재판관의 덕인 반면, 연설가의 덕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론하기
(1) 위 발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재판에 익숙하지 않으니 법정에서 쓰는 용어와 말투를 따르지 않고 일상의 말투로 연설을 하더라도 이해해달라고 요구한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요구는 발언의 형식보다는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발언의 장소에 따라 존중하고 지켜야 할 관례와 예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당신이 판관이라면, 소크라테스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2) 연설가의 목적은 자신의 견해로 청중을 설득하는 것이다. 법정 연설의 목적은 판관을 설득하여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연설가가 알고 있는 진실이 설득에 불리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면, 연설가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도 있는 논쟁의 사례들을 찾아서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재판관들을 향해 “아테네인 여러분”이라는 말로서 연설을 시작한다(⓵). 그런데 이런 호칭은 대화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무척 의아할 뿐만 아니라, 적잖이 무례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법정에서 피고인이 판사들을 향해 “존경하는 재판장님”이 아니라, “시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재판관의 역할은 오늘날의 배심원단과 같았다. 당시에 재판관들은 시민들 가운데 추첨을 통해 선발되었는데, 이때 재판관들의 수는 재판의 규모에 따라 200(또는 201)명, 400(401)명, 또는 500(501)명이나 그 이상으로 수가 정해져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는 500(501)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비록 오늘날과 달리 고대 아테네의 재판관들이 법률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들 가운데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되었다고는 해도, 이들이 투표를 통해 피고인의 잘잘못을 가리고 그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재판관 여러분”이 아니라 “아테네인 여러분”이라고 부른 것은 생각 없이 경솔하거나 심각하게 무례한 발언으로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발언은 법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순수한 재판 기록이라기보다는, 철학자 플라톤의 스승에 관한 일종의 보고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재판관들을 그렇게 불렀는지, 아니면 플라톤이 각색해서 그렇게 묘사한 것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발언이 사실이든 허구든, 그 의도는 비교적 분명하게 전해진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재판관들의 권위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재판은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지만, 이때의 잘잘못이란 재판관의 권위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 여부에 의해 가려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첨을 통해 뽑힌 재판관들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진실의 권위만을 인정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이러한 발언은 소크라테스가 변명에 앞서 배심원들에게 앞으로 자신이 할 진술 방식을 소개하고 양해를 구하는 대목에서도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지금부터 행할 자신의 발언이 법정에 걸맞은 방식이 아니라,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과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라며 양해를 구한다(⓶). 그 이유는 자신이 일흔 살이 되도록 단 한 번도 법정에 선 적이 없었기에, 낯선 법정 연설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대화의 방식으로 변론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도 어느 정도 의도된 도발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민들에게도 법정에 서는 일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정 연설이 낯선 것은 비단 소크라테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정에서의 발언 방식과 규칙에 충실히 지키면서 자신을 방어하거나 상대방을 비난한다. 왜냐하면 재판의 목적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인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법정 연설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승리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자기에게 낯선 발언의 방식은 진실을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법정 다툼에 최적화된 연설의 방식을 쓰지 않고, 일상의 대화에서 시용해온 방식대로 변론을 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재판은 일종의 싸움이고, 재판의 목적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여기서 진실은 승리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진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을 밝히고도 재판에서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승리를 위해서 자기들에게 불리한 진실을 감출 수 있다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재판의 목적이 승리라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배심원들을 설득하여 나의 편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소크라테스가 재판의 향방을 손에 쥐고 있는 배심원들을 향해 “재판관 여러분”이 아니라 “아테네인 여러분”이라고 발언한 것은 재판에 대한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생각에 대한 도발의 의도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말려고 한 것은 서로 다른 가치들이 대결하는 장에서 따져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를 강조하기 이하여 소크라테스는 재판이라고 하는 삶과 죽음이 걸린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일부러 재판관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진실을 강조하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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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맥락
서기전 399년의 어느 날,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세 명의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고발인들은 멜레토스, 아뉘토스, 뤼콘으로서, 이들은 각각 시인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변론가들을 대변하여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고 주장한다. 기소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인데, (1)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2) 새로운 영적인 것을 도입하였으며, (3) 젊은이들을 타락시킴으로써 부정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는 500 (또는 501명)의 배심원들이 “판관”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였다. 재판이 시작되면 먼저 고발인 측에서 피고인의 유죄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며,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는 연설은 그 다음에 이루어진다. 우리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고발인들의 연설이 끝난 직후에, 그들의 비난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을 시작한다.
고전본문
⓵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이 나를 고발한 사람들로 인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들로 인해 나 스스로도 거의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그들은 설득력 있게 말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진실에 관한 한 그들은 실상 아무 것도 말한 게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니 정말이지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께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⓶ 여러분 중 다수가 시장의 환전상 근처나 다른 어딘가에서 내가 하는 말을 듣거나 했을 텐데, 아무튼 그때 내가 입버릇처럼 쓰는 말들이 있지요. 혹시 내가 그런 말들을 사용하여 변명하는 걸 여러분이 듣더라도 놀라거나 소란을 피우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지금 나는 일흔 살이 되어 처음으로 재판정에 섰어요. 그래서 이곳의 말투에는 그야말로 생소한 외국인의 처지와 같아요. 그러니까 만일 내가 실제로 외국인이라면 내가 양육 받았을 때 썼던 바로 그 지역 말투와 같은 식으로 말을 하게 되더라도 여러분은 아마 나를 용서해주셨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 것처럼 지금도 나는 여러분께 다음과 같이 해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올바른 요청입니다. 그러니까 말투가 어떤 식인지는 문제 삼지 말고 (혹시 더 형편없을 수도 있고, 더 괜찮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저 내가 올바른 말을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만을 살펴보고 그것에만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재판관의 덕인 반면, 연설가의 덕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론하기
(1) 위 발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재판에 익숙하지 않으니 법정에서 쓰는 용어와 말투를 따르지 않고 일상의 말투로 연설을 하더라도 이해해달라고 요구한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요구는 발언의 형식보다는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발언의 장소에 따라 존중하고 지켜야 할 관례와 예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당신이 판관이라면, 소크라테스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2) 연설가의 목적은 자신의 견해로 청중을 설득하는 것이다. 법정 연설의 목적은 판관을 설득하여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연설가가 알고 있는 진실이 설득에 불리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면, 연설가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도 있는 논쟁의 사례들을 찾아서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재판관들을 향해 “아테네인 여러분”이라는 말로서 연설을 시작한다(⓵). 그런데 이런 호칭은 대화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무척 의아할 뿐만 아니라, 적잖이 무례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법정에서 피고인이 판사들을 향해 “존경하는 재판장님”이 아니라, “시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재판관의 역할은 오늘날의 배심원단과 같았다. 당시에 재판관들은 시민들 가운데 추첨을 통해 선발되었는데, 이때 재판관들의 수는 재판의 규모에 따라 200(또는 201)명, 400(401)명, 또는 500(501)명이나 그 이상으로 수가 정해져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는 500(501)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비록 오늘날과 달리 고대 아테네의 재판관들이 법률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들 가운데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되었다고는 해도, 이들이 투표를 통해 피고인의 잘잘못을 가리고 그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재판관 여러분”이 아니라 “아테네인 여러분”이라고 부른 것은 생각 없이 경솔하거나 심각하게 무례한 발언으로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발언은 법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순수한 재판 기록이라기보다는, 철학자 플라톤의 스승에 관한 일종의 보고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재판관들을 그렇게 불렀는지, 아니면 플라톤이 각색해서 그렇게 묘사한 것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발언이 사실이든 허구든, 그 의도는 비교적 분명하게 전해진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재판관들의 권위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재판은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지만, 이때의 잘잘못이란 재판관의 권위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 여부에 의해 가려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첨을 통해 뽑힌 재판관들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진실의 권위만을 인정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이러한 발언은 소크라테스가 변명에 앞서 배심원들에게 앞으로 자신이 할 진술 방식을 소개하고 양해를 구하는 대목에서도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지금부터 행할 자신의 발언이 법정에 걸맞은 방식이 아니라,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과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라며 양해를 구한다(⓶). 그 이유는 자신이 일흔 살이 되도록 단 한 번도 법정에 선 적이 없었기에, 낯선 법정 연설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대화의 방식으로 변론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도 어느 정도 의도된 도발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민들에게도 법정에 서는 일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정 연설이 낯선 것은 비단 소크라테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정에서의 발언 방식과 규칙에 충실히 지키면서 자신을 방어하거나 상대방을 비난한다. 왜냐하면 재판의 목적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인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법정 연설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승리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자기에게 낯선 발언의 방식은 진실을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법정 다툼에 최적화된 연설의 방식을 쓰지 않고, 일상의 대화에서 시용해온 방식대로 변론을 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재판은 일종의 싸움이고, 재판의 목적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여기서 진실은 승리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진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을 밝히고도 재판에서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승리를 위해서 자기들에게 불리한 진실을 감출 수 있다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재판의 목적이 승리라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배심원들을 설득하여 나의 편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소크라테스가 재판의 향방을 손에 쥐고 있는 배심원들을 향해 “재판관 여러분”이 아니라 “아테네인 여러분”이라고 발언한 것은 재판에 대한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생각에 대한 도발의 의도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말려고 한 것은 서로 다른 가치들이 대결하는 장에서 따져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를 강조하기 이하여 소크라테스는 재판이라고 하는 삶과 죽음이 걸린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일부러 재판관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진실을 강조하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