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소크라테스는 평생에 걸쳐 아테네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덕을 돌봐야 함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하면서도 정작 공동체의 일, 즉 도시국가를 위해서는 아무런 정치적 참여도, 조언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상스럽게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자신이 정치에 참여하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어떤 영적인 목소리가 나와 정치 참여를 제지했다고 말한다.
고전본문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는 이런 조언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참견도 하면서, 정작 공적으로는 여러분들의 무리 앞에 올라와 나라를 위해 조언하려는 엄두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스럽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소. 나는 여러 번 많은 곳에서 그 이유를 이야기한 적도 있고, 여러분도 그것을 들었겠습니다만, 그것은 어떤 신적인 것, 혹은 신령스러운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오. 저 멜레토스가 고발장에 써서 희화화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내겐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목소리가 생겨나곤 했는데, 그것은 생길 때마다 늘 내가 하려는 일을 못하게 말리긴 했어도 하라고 부추긴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내가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 반대한 게 바로 그 목소리인데, 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정말 훌륭한 것이었소. 왜냐하면, 여러분! 나는 이점을 여러분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만, 만일 내가 정치 활동을 시도했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고, 여러분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함을 주지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니, 여러분! 제발 그렇게 화를 내지 말아주세요. 만일 여러분이나 다른 어떤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려 할 때, 전력을 다해 여러분들에 맞서가며 도시에 불법과 부정의가 생겨나지 않도록 애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진실로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 사람이 얼마간이라도 목숨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는 공적인 삶을 포기하고 사적인 삶에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므로 만일 내가 공적인 활동을 했다면, 그리고 훌륭한 사람에게 걸맞은 활동을 하면서 정의의 편에 도움을 주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만, 그런 일들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면, 여러분은 내가 이 긴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아테네인 여러분!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요. 인간들 가운데 다른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오. 나는 일생동안 공적인 영역에서도(내가 어디선가 공적인 활동을 했다고 친다면) 줄곧 그런 사람이었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똑같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오. 그러니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내 제자들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에게도, 정의에 반해서는 동조를 해 본적이 없단 말이오.
토론하기
(1)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된 일을 하려할 때 주저함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혹은 본의 아니게든, 혹은 욕심에 의해서든 나쁜 일을 하고 난 뒤에는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범죄를 저지르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싸이코패스라고 부르며 비난하기도 한다. 위의 대목을 읽고, 소크라테스가 잘못된 일을 하려 들 때마다 그를 제지했다는 영적인 목소리의 정체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해보자.
해설읽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즉 인간은 개개인이 고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고, 공동체를 꾸려 함께 살아가는 본성을 지닌 동물이라는 뜻이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기의 아테네는 민주정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자유인 신분의 성인 남성은 누구나 민회에 나와서 발언을 하고 시민들의 대표가 될 수 있었다. 그만큼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에서는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초연한 자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로 여긴다”고 말하며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나라의 자랑으로 여겼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살면서도 정치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줄기차게 나누며 공동체의 삶에 필요한 덕에 관하여 토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적인 자리에서 공공의 일을 수행하는 데는 아무런 참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눈에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중적이거나, 페리클레스의 말마따나 쓸모없는 자의 모습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일생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특이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다이모니온’이라고 하는 영적인 목소리가 나와서 정치 참여를 제지시켰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신비스럽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귀신의 계시나 명령(이 경우에는 금지 명령)에 가로막혀 정치 참여를 삼갔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어인 ‘다이모니온(daimonion)’은 신령스러운 존재를 가리킨다. 참고로 이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는 ‘다이몬(daemon)’은 신령을 뜻하며, 영어에서 ‘악령’을 의미하는 ‘디먼(demon)’의 어원이 된다. 다이모니온이나 다이몬은 모두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보다는 하급에 속하는 신들로서 자연 혹은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이것은 아마 자연이나 인간 자신의 모습 가운데 불가해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들을 신격화하여 만들어낸 개념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영적인 목소리가 어렸을 때부터 들려왔다고 말한다. 또한 이 목소리는 항상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개입했다고 한다. 즉 무엇인가를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치에 참여하려고 할 때 이 목소리가 만류했다고 말한다. 그렇듯 영적인 목소리의 만류로 인해 정치 참여를 포기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영적인 목소리의 제지를 무시하고 정치에 참여했더라면 그는 진작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왜 소크라테스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잘 한 일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소크라테스의 내면에 나타난다는 다이모니온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정의의 원칙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앞에서 그는 자신이 행동의 기준으로 목숨보다 정의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선언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의의 기준을 사생활은 물론 공적인 삶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적용시킨다. 고대 아테네에서 공적인 삶이란 나라와 시민 전체를 위한 일을 말한다. 즉 민회에 나가 연설을 하고 공동체의 대표가 되어 나라를 운영하거나, 외교사절이 되어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 참여 하거나, 혹은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전쟁을 수행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런 공적인 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충돌하며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며, 때때로 이러한 충돌은 정치인들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공적인 영역에 참여했다면, 그는 오직 정의만을 추구하는 비타협적인 행위로 인해 정적들의 미움을 샀을 것이요,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버린다면, 시민들의 영혼을 돌보라는 신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이모니온의 만류에 따라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았던 덕분에 오랫동안 살아남 자기 자신과 시민들에게 유익함을 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정의로운 행동은 세상과의 불화를 피할 수 없었겠지만, 다이모니온은 그런 불화가 가장 심하게 발생하는 정치의 영역에 소크라테스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제지함으로써 그를 최대한 오래 살려두었던 것이다. 그저 소크라테스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다른 방식, 즉 철학적 대화라는 방식으로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유익함을 줄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목숨을 구해준 영적인 목소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영적인 목소리가 언제나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즉 경고나 제지의 목소리로써만 개입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경고는 언제나 좋은 결과를 산출한다. 따라서 이 목소리는 소크라테스가 범할 수도 있는 잘못이나 오류에 대한 일종의 신적인 존재의 경고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러한 신호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의 종교적, 문화적 맥락과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성격, 그리고 그의 사상 등을 고려하여 몇 가지 다이모니온에 관한 몇 가지 해석들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이모니온이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믿었던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다이모니온의 원래 의미가 하급의 신에 해당되는 ‘신령’ 내지는 ‘정령’을 뜻하는 이상, 굳이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 없이, 소크라테스를 지켜주는 일종의 수호신령으로 보면 된다는 생각이다. 반면에 다이모니온을 조금 더 철학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영적인 신호가 사실은 인간의 양심이 마치 인격화된 신령처럼 묘사된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하려 할 때 마음속으로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거나 주저하여 멈칫거리곤 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받아온 교육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관이 인간의 내면에 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가 잘못된 행동에 대해 제동을 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과 같은 것은 존재하며, 그것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주저와 양심의 가책 등으로 나타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이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이르러 인간의 지성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념적인 발전을 이룬다고 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다이모니온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기에, 독자들은 이런저런 짐작과 추측을 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영적인 목소리 역시 소크라테스가 일생동안 지켜왔던 정의의 원칙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키워드
공적인 일, 다이몬, 사적인 일, 양심, 영적인 목소리, 정의
전후맥락
소크라테스는 평생에 걸쳐 아테네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덕을 돌봐야 함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하면서도 정작 공동체의 일, 즉 도시국가를 위해서는 아무런 정치적 참여도, 조언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상스럽게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자신이 정치에 참여하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어떤 영적인 목소리가 나와 정치 참여를 제지했다고 말한다.
고전본문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는 이런 조언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참견도 하면서, 정작 공적으로는 여러분들의 무리 앞에 올라와 나라를 위해 조언하려는 엄두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스럽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소. 나는 여러 번 많은 곳에서 그 이유를 이야기한 적도 있고, 여러분도 그것을 들었겠습니다만, 그것은 어떤 신적인 것, 혹은 신령스러운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오. 저 멜레토스가 고발장에 써서 희화화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내겐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목소리가 생겨나곤 했는데, 그것은 생길 때마다 늘 내가 하려는 일을 못하게 말리긴 했어도 하라고 부추긴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내가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 반대한 게 바로 그 목소리인데, 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정말 훌륭한 것이었소. 왜냐하면, 여러분! 나는 이점을 여러분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만, 만일 내가 정치 활동을 시도했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고, 여러분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함을 주지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니, 여러분! 제발 그렇게 화를 내지 말아주세요. 만일 여러분이나 다른 어떤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려 할 때, 전력을 다해 여러분들에 맞서가며 도시에 불법과 부정의가 생겨나지 않도록 애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진실로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 사람이 얼마간이라도 목숨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는 공적인 삶을 포기하고 사적인 삶에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므로 만일 내가 공적인 활동을 했다면, 그리고 훌륭한 사람에게 걸맞은 활동을 하면서 정의의 편에 도움을 주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만, 그런 일들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면, 여러분은 내가 이 긴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아테네인 여러분!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요. 인간들 가운데 다른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오. 나는 일생동안 공적인 영역에서도(내가 어디선가 공적인 활동을 했다고 친다면) 줄곧 그런 사람이었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똑같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오. 그러니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내 제자들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에게도, 정의에 반해서는 동조를 해 본적이 없단 말이오.
토론하기
(1)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된 일을 하려할 때 주저함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혹은 본의 아니게든, 혹은 욕심에 의해서든 나쁜 일을 하고 난 뒤에는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범죄를 저지르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싸이코패스라고 부르며 비난하기도 한다. 위의 대목을 읽고, 소크라테스가 잘못된 일을 하려 들 때마다 그를 제지했다는 영적인 목소리의 정체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해보자.
해설읽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즉 인간은 개개인이 고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고, 공동체를 꾸려 함께 살아가는 본성을 지닌 동물이라는 뜻이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기의 아테네는 민주정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자유인 신분의 성인 남성은 누구나 민회에 나와서 발언을 하고 시민들의 대표가 될 수 있었다. 그만큼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에서는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초연한 자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로 여긴다”고 말하며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나라의 자랑으로 여겼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살면서도 정치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줄기차게 나누며 공동체의 삶에 필요한 덕에 관하여 토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적인 자리에서 공공의 일을 수행하는 데는 아무런 참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눈에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중적이거나, 페리클레스의 말마따나 쓸모없는 자의 모습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일생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특이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다이모니온’이라고 하는 영적인 목소리가 나와서 정치 참여를 제지시켰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신비스럽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귀신의 계시나 명령(이 경우에는 금지 명령)에 가로막혀 정치 참여를 삼갔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어인 ‘다이모니온(daimonion)’은 신령스러운 존재를 가리킨다. 참고로 이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는 ‘다이몬(daemon)’은 신령을 뜻하며, 영어에서 ‘악령’을 의미하는 ‘디먼(demon)’의 어원이 된다. 다이모니온이나 다이몬은 모두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보다는 하급에 속하는 신들로서 자연 혹은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이것은 아마 자연이나 인간 자신의 모습 가운데 불가해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들을 신격화하여 만들어낸 개념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영적인 목소리가 어렸을 때부터 들려왔다고 말한다. 또한 이 목소리는 항상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개입했다고 한다. 즉 무엇인가를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치에 참여하려고 할 때 이 목소리가 만류했다고 말한다. 그렇듯 영적인 목소리의 만류로 인해 정치 참여를 포기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영적인 목소리의 제지를 무시하고 정치에 참여했더라면 그는 진작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왜 소크라테스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잘 한 일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소크라테스의 내면에 나타난다는 다이모니온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정의의 원칙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앞에서 그는 자신이 행동의 기준으로 목숨보다 정의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선언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의의 기준을 사생활은 물론 공적인 삶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적용시킨다. 고대 아테네에서 공적인 삶이란 나라와 시민 전체를 위한 일을 말한다. 즉 민회에 나가 연설을 하고 공동체의 대표가 되어 나라를 운영하거나, 외교사절이 되어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 참여 하거나, 혹은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전쟁을 수행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런 공적인 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충돌하며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며, 때때로 이러한 충돌은 정치인들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공적인 영역에 참여했다면, 그는 오직 정의만을 추구하는 비타협적인 행위로 인해 정적들의 미움을 샀을 것이요,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버린다면, 시민들의 영혼을 돌보라는 신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이모니온의 만류에 따라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았던 덕분에 오랫동안 살아남 자기 자신과 시민들에게 유익함을 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정의로운 행동은 세상과의 불화를 피할 수 없었겠지만, 다이모니온은 그런 불화가 가장 심하게 발생하는 정치의 영역에 소크라테스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제지함으로써 그를 최대한 오래 살려두었던 것이다. 그저 소크라테스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다른 방식, 즉 철학적 대화라는 방식으로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유익함을 줄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목숨을 구해준 영적인 목소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영적인 목소리가 언제나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즉 경고나 제지의 목소리로써만 개입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경고는 언제나 좋은 결과를 산출한다. 따라서 이 목소리는 소크라테스가 범할 수도 있는 잘못이나 오류에 대한 일종의 신적인 존재의 경고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러한 신호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의 종교적, 문화적 맥락과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성격, 그리고 그의 사상 등을 고려하여 몇 가지 다이모니온에 관한 몇 가지 해석들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이모니온이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믿었던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다이모니온의 원래 의미가 하급의 신에 해당되는 ‘신령’ 내지는 ‘정령’을 뜻하는 이상, 굳이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 없이, 소크라테스를 지켜주는 일종의 수호신령으로 보면 된다는 생각이다. 반면에 다이모니온을 조금 더 철학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영적인 신호가 사실은 인간의 양심이 마치 인격화된 신령처럼 묘사된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하려 할 때 마음속으로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거나 주저하여 멈칫거리곤 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받아온 교육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관이 인간의 내면에 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가 잘못된 행동에 대해 제동을 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과 같은 것은 존재하며, 그것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주저와 양심의 가책 등으로 나타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이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이르러 인간의 지성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념적인 발전을 이룬다고 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다이모니온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기에, 독자들은 이런저런 짐작과 추측을 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영적인 목소리 역시 소크라테스가 일생동안 지켜왔던 정의의 원칙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키워드
공적인 일, 다이몬, 사적인 일, 양심, 영적인 목소리, 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