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불경죄로 고발되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목숨보다는 정의가 자기 삶의 기준이자 행위의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즉 살기 위해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의 가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주장은 뭔가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는 과연 죽음이 두려워할 만한 일이냐고 묻는다.
고전본문
사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롭지도 않으면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일이니까요. 사실 아무도 죽음을 알지 못하는데, 심지어는 혹시 그것이 인간에게 생길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죽음이 나쁜 것들 중에서 가장 나쁜 것임을 마치 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두려워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무지야말로 가장 비난받을 만한 무지가 아닐까요?
그런데 여러분! 내가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 점에서일 겁니다. 또한 내가 누구보다도 가장 지혜롭다고 주장한다면, 그것 역시 바로 이 점에서일 겁니다. 즉 나는 저승(하데스)의 일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만큼,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말입니다. 반면에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신이든 인간이든 더 나은 자를 따르지 않는 것이 나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나쁘다고 알고 있는 그런 나쁜 것들에 우선하여, 내가 좋은지 어떤지조차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토론하기
(1)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찬찬히 음미해본 뒤에 ‘죽음’이라는 말에 담긴 두려움과 공포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소크라테스는 목숨보다는 정의가 자기 삶의 기준이자 행위의 원칙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아테네인들이 숭배하고 있었던 신화 속 영웅 아킬레우스의 일화를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신화 속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 가운데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사실 누구도 아직 겪어보지 않은 것(죽음)에 대한 위선적인 태도 아닐까?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정의가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무엇보다도 죽음을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해서서인지 소크라테스는 목숨보다는 정의로움이 더 중요한 원칙이라는 주장에 이어서, 사실 죽음이란 전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죽음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언뜻 보기에도 역설적인 주장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숨은 전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가 나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가급적 피하려고 애를 쓴다. 이때 나쁘다는 것은 나에게 고통을 주고 피해를 입히며 나와 주변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것이다. 반대로 무엇인가가 좋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며,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때 좋다는 것은 나에게 유익하고 즐거움을 주며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죽음이 우리에게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과연 나쁜 것일까? 사실 우리는 죽음이 뭔지 모른다. 왜냐하면 죽음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죽어봐야 하는데, 문제는 죽음이 인간에게 단 한 번 찾아오는 것이요, 일단 죽으면 결코 되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누군가가 죽음을 경험하고 그것의 좋거나 나쁨을 다른 이에게 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알 수 없으며,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좋아하거나 두려워 할 이유도 없어지게 된다.
여기까지 말한 뒤에, 소크라테스는 앞서 지적했던 ‘이중의 무지’와 ‘무지에 대한 자각’을 죽음의 논의와 연결시킨다. 만일 누군가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죽음이 좋은지 나쁜지 알지 못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것을 나쁘다 여기고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중적인 무지라 할 수 있다. 즉 그 사람은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음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음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했다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크라테스는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 지혜롭기로 유명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모든 대화자들이 인간의 삶에 중요한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에 관해 무지할뿐더러, 자기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자신은 적어도 자신이 인간의 삶에 중요한 것들에 관해 무지하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요컨대 죽음에 대한 태도 역시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한 앎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결국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호오(好惡)를 가릴 수 없다 식는 주장으로 귀결되는데, 과연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을까? 위의 인용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연설의 말미(40b-41d)에 가서 소크라테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죽음 이후의 겪게 될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긍정적인 주장을 편다.
키워드
두려움, 무지, 이중의 무지와 무지의 자각, 좋은 것과 나쁜 것, 죽음
전후맥락
불경죄로 고발되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목숨보다는 정의가 자기 삶의 기준이자 행위의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즉 살기 위해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의 가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주장은 뭔가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는 과연 죽음이 두려워할 만한 일이냐고 묻는다.
고전본문
사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롭지도 않으면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일이니까요. 사실 아무도 죽음을 알지 못하는데, 심지어는 혹시 그것이 인간에게 생길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죽음이 나쁜 것들 중에서 가장 나쁜 것임을 마치 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두려워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무지야말로 가장 비난받을 만한 무지가 아닐까요?
그런데 여러분! 내가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 점에서일 겁니다. 또한 내가 누구보다도 가장 지혜롭다고 주장한다면, 그것 역시 바로 이 점에서일 겁니다. 즉 나는 저승(하데스)의 일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만큼,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말입니다. 반면에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신이든 인간이든 더 나은 자를 따르지 않는 것이 나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나쁘다고 알고 있는 그런 나쁜 것들에 우선하여, 내가 좋은지 어떤지조차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토론하기
(1)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찬찬히 음미해본 뒤에 ‘죽음’이라는 말에 담긴 두려움과 공포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소크라테스는 목숨보다는 정의가 자기 삶의 기준이자 행위의 원칙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아테네인들이 숭배하고 있었던 신화 속 영웅 아킬레우스의 일화를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신화 속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 가운데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사실 누구도 아직 겪어보지 않은 것(죽음)에 대한 위선적인 태도 아닐까?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정의가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무엇보다도 죽음을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해서서인지 소크라테스는 목숨보다는 정의로움이 더 중요한 원칙이라는 주장에 이어서, 사실 죽음이란 전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죽음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언뜻 보기에도 역설적인 주장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숨은 전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가 나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가급적 피하려고 애를 쓴다. 이때 나쁘다는 것은 나에게 고통을 주고 피해를 입히며 나와 주변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것이다. 반대로 무엇인가가 좋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며,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때 좋다는 것은 나에게 유익하고 즐거움을 주며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죽음이 우리에게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과연 나쁜 것일까? 사실 우리는 죽음이 뭔지 모른다. 왜냐하면 죽음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죽어봐야 하는데, 문제는 죽음이 인간에게 단 한 번 찾아오는 것이요, 일단 죽으면 결코 되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누군가가 죽음을 경험하고 그것의 좋거나 나쁨을 다른 이에게 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알 수 없으며,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좋아하거나 두려워 할 이유도 없어지게 된다.
여기까지 말한 뒤에, 소크라테스는 앞서 지적했던 ‘이중의 무지’와 ‘무지에 대한 자각’을 죽음의 논의와 연결시킨다. 만일 누군가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죽음이 좋은지 나쁜지 알지 못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것을 나쁘다 여기고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중적인 무지라 할 수 있다. 즉 그 사람은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음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음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했다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크라테스는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 지혜롭기로 유명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모든 대화자들이 인간의 삶에 중요한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에 관해 무지할뿐더러, 자기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자신은 적어도 자신이 인간의 삶에 중요한 것들에 관해 무지하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요컨대 죽음에 대한 태도 역시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한 앎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결국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호오(好惡)를 가릴 수 없다 식는 주장으로 귀결되는데, 과연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을까? 위의 인용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연설의 말미(40b-41d)에 가서 소크라테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죽음 이후의 겪게 될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긍정적인 주장을 편다.
키워드
두려움, 무지, 이중의 무지와 무지의 자각, 좋은 것과 나쁜 것,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