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인생의 중반에 길을 잃고 골짜기의 입구에서 방황하던 나(단테)는 고대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 여행을 떠난다. 나는 지옥의 문 앞에 도착하여 문에 새겨진 글귀를 읽고 공포에 질리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전본문
나를 통해 고통의 도시로 들어가고, 나를 통해 영원의 괴로움 속으로 들어가며, 나를 통해 망자들 사이로 가노라. 정의는 지고하신 나의 창조주를 움직였으니, 나를 만드신 자는 신성한 권능과 최고의 지혜와 원초적인 사랑이시다. 영원한 것 말고는 나보다 앞서 창조된 것은 없으며, 나 또한 영원히 지속하리라.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 들어오는 자들이여! | Per me si va nel la città dolente, Per me si va nell’etterno doloe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Giustizia mosse il mio alto fattore: Fecemi la divina potestate, La somma sapienza e’l primo amore. Dinanzi a me non fuor cose create se non etterne, e io etterna duro.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intrate. |
토론하기
(1) 많은 종교인들은 죽음 이후에도 또 다른 종류의 삶, 이른바 내세(來世)의 삶이 있으며, 그곳에서의 행복과 불행이 바로 현세(現世)의 삶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과연 종교에서 내세(천국이나 지옥, 혹은 그리스 신화의 하데스, 등)가 꼭 필요한 것인지, 또 필요하다면 그 기능과 역할은 무엇이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화자인 나와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의 입구에 서서 문에 새겨진 글귀를 바라본다. 글에 따르면, 지옥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의인화되어 있다. 그래서 지옥문은 ‘나를 통해서’ 망자들이 지옥에 들어선다고 말한다. 지옥문에 새겨진 글귀는 비교적 짧지만, 지옥이 어떤 곳이며,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제부터 이곳에 들어가려는 자는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
먼저 처음 세 행은 지옥이 어떤 장소인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지옥은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이다. 1-2행에서 지옥은 자신이 고통의 도시이며 영원한 괴로움의 장소임을 선언한다. 여기서 ‘고통’과 ‘괴로움’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돌렌테(dolente)’와 ‘돌로레(dolore)’는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괴로움, 즉 슬픔이나 비탄 등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고통의 도시로 들어갈까? 위의 문장에는 주어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들어)간다’로 번역된 동사 ‘si va’는 기본적으로 3인칭 단수 형태로서 여기서는 인간, 그 중에서도 죽어서 천국이나 연옥이 아닌 지옥행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제3행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될 대상이 죽은 자들임을 적시한다. ‘그야 지옥이라면 당연히 죽은 자들이 가는 곳 아니겠냐’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죽은 자’와 바로 위의 ‘영원한’ 고통은 조금 뒤에 살펴볼 마지막 행의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단 지옥은 ‘망자들이 겪게 되는 영원한 고통의 장소’로서 규정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신이 창조한 지옥
다음으로 4-6행은 지옥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옥은 원래부터 있었던 곳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4행의 ‘정의가 지고하신 나의 창조주를 움직였다’는 대목이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표현이지만, 이를 한국어의 어법에 맞게 옮기면, 창조주가 정의로운 마음으로 지옥을 만들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지옥은 신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장소인 것이다. 한편, 5-6행은 신의 속성을 묘사한다. 신은 권능과 지혜와 사랑의 담지자이다. 이 모든 것들을 갖춘 신이 정의로운 마음으로 지옥을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묘사는 앞의 1-3행에서 언급된 영원한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로서의 지옥의 존재를 정당화해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타인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기 위한 장소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비난할 것이다. 반면에 지옥을 만든 자가 권능과 지혜와 사랑의 신이며, 그것을 만든 동기가 바로 정의의 구현이라고 한다면, 지옥은 그 존재의 정당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고통과 괴로움의 정체
마지막 7-9행은 지옥의 영원함과 함께 지옥으로 들어오는 망자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담고 있다. 그런데 위의 대목에서 지옥이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영원성()이다. 먼저 지옥은 ‘영원한 것 말고는 자기보다 앞서 창조된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지옥은 ‘자기도 영원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앞의 영원한 것은 바로 창조주인 신을 가리킨다. 즉 지옥은 자기를 만든 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자기보다 더 오래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한 자이지, 신 자신은 결코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신의 영원함은 생성과 소멸을 초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지옥은 신에 의해 만들어짐으로써 생겨났다. 그렇지만 지옥은 소멸을 겪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지옥이 ‘나 또한 영원히 지속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은 생겨난 것의 영원한 지속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과연 어떤 고통을 겪을까? 만화나 영화, 혹은 문학 작품 속에 묘사된 지옥에는 대체로 불구덩이나, 끓는 기름솥, 또는 칠성판 등이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은 벌레들에게 몸을 뜯기기도 하고, 생전에 남겼던 썩은 음식을 먹으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요컨대 사람들이 상상으로 그려낸 지옥도(地獄圖)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고통스러운 모습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옥에서 겪는다고 묘사된 고통의 모습이 거의 대부분 육체적인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위에서 열거한 불구덩이나 끓는 기름솥 등과 같은 사례들은 모두 육체적인 고통을 발생시키는 것들이다. 달리 말하자면 위의 사례들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은 몸이 있어야만 겪을 수 있는 괴로움인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몸을 가지고 있을까? 옛사람들은 죽음을 몸과 혼의 분리로 이해했다. 혼과 분리된 몸은 부패하여 자연의 요소들로 해체된다. 반면에 죽은 자들의 혼은 신에게 가서 심판을 받고, 전생에 죄를 지은 자들이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겪는 고통은 대부분 몸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태우거나 찌르거나 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 추위나 더위, 혹은 배고픔 등의 고통은 모두 육체와 관련된 것이지, 혼과는 상관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지옥의 형벌들 가운데 혼이 겪을 만한 것은 거의 없는 셈이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최후의 심판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육신을 입고서 심판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고통의 육체적인 성격을 고려한 묘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이 지옥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옥: 절망의 장소
사실 지옥의 진정한 무서움은 고통의 영원성에 있다. ‘영원’이라는 말은 앞의 1-3행에도 이미 한 차례 나온 바 있다. 거기서 지옥은 사람들이 죽어서 ‘영원한’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로 들어온다고 말한다. 이때 영원은 고통의 끝없는 지속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누군가가 적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고문으로 인해 온갖 고통과 두려움을 겪으면서도 언젠가는 그 고문이 끝날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조만간 아군이 자신을 구출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혹은 곧 전쟁이 끝나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죽어버리면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생각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의든 타의든) 고통이 끝나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반면에 지옥에서의 형벌은 사정이 다르다. 지옥은 시공간을 초월해 영원한 신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서 만든 시점부터 영원히 존재하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징벌 역시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또한 지옥에 온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기에 죽음을 통해 고통을 벗어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결국 고통의 영원함에는 절망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괴로움, 슬픔과 비탄은 어떤 식으로든 끝이 정해져 있다.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그것들을 겪는 인간의 죽음과 함께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들이 지옥에서 겪는 고통은 끝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옥에서는 형벌이나 고통일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기대가 불가능하다. 지옥문에 써있는 마지막 문구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말에는 바로 단테가, 그리고 서양인들이 생각했던 가장 두려운 고통의 핵심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키워드
고통, 괴로움, 몸, 죽음, 혼, 희망/절망
전후맥락
인생의 중반에 길을 잃고 골짜기의 입구에서 방황하던 나(단테)는 고대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 여행을 떠난다. 나는 지옥의 문 앞에 도착하여 문에 새겨진 글귀를 읽고 공포에 질리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전본문
나를 통해 고통의 도시로 들어가고, 나를 통해 영원의 괴로움 속으로 들어가며, 나를 통해 망자들 사이로 가노라. 정의는 지고하신 나의 창조주를 움직였으니, 나를 만드신 자는 신성한 권능과 최고의 지혜와 원초적인 사랑이시다. 영원한 것 말고는 나보다 앞서 창조된 것은 없으며, 나 또한 영원히 지속하리라.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 들어오는 자들이여! | Per me si va nel la città dolente, Per me si va nell’etterno doloe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Giustizia mosse il mio alto fattore: Fecemi la divina potestate, La somma sapienza e’l primo amore. Dinanzi a me non fuor cose create se non etterne, e io etterna duro.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intrate. |
토론하기
(1) 많은 종교인들은 죽음 이후에도 또 다른 종류의 삶, 이른바 내세(來世)의 삶이 있으며, 그곳에서의 행복과 불행이 바로 현세(現世)의 삶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과연 종교에서 내세(천국이나 지옥, 혹은 그리스 신화의 하데스, 등)가 꼭 필요한 것인지, 또 필요하다면 그 기능과 역할은 무엇이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화자인 나와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의 입구에 서서 문에 새겨진 글귀를 바라본다. 글에 따르면, 지옥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의인화되어 있다. 그래서 지옥문은 ‘나를 통해서’ 망자들이 지옥에 들어선다고 말한다. 지옥문에 새겨진 글귀는 비교적 짧지만, 지옥이 어떤 곳이며,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제부터 이곳에 들어가려는 자는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
먼저 처음 세 행은 지옥이 어떤 장소인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지옥은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이다. 1-2행에서 지옥은 자신이 고통의 도시이며 영원한 괴로움의 장소임을 선언한다. 여기서 ‘고통’과 ‘괴로움’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돌렌테(dolente)’와 ‘돌로레(dolore)’는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괴로움, 즉 슬픔이나 비탄 등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고통의 도시로 들어갈까? 위의 문장에는 주어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들어)간다’로 번역된 동사 ‘si va’는 기본적으로 3인칭 단수 형태로서 여기서는 인간, 그 중에서도 죽어서 천국이나 연옥이 아닌 지옥행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제3행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될 대상이 죽은 자들임을 적시한다. ‘그야 지옥이라면 당연히 죽은 자들이 가는 곳 아니겠냐’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죽은 자’와 바로 위의 ‘영원한’ 고통은 조금 뒤에 살펴볼 마지막 행의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단 지옥은 ‘망자들이 겪게 되는 영원한 고통의 장소’로서 규정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신이 창조한 지옥
다음으로 4-6행은 지옥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옥은 원래부터 있었던 곳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4행의 ‘정의가 지고하신 나의 창조주를 움직였다’는 대목이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표현이지만, 이를 한국어의 어법에 맞게 옮기면, 창조주가 정의로운 마음으로 지옥을 만들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지옥은 신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장소인 것이다. 한편, 5-6행은 신의 속성을 묘사한다. 신은 권능과 지혜와 사랑의 담지자이다. 이 모든 것들을 갖춘 신이 정의로운 마음으로 지옥을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묘사는 앞의 1-3행에서 언급된 영원한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로서의 지옥의 존재를 정당화해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타인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기 위한 장소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비난할 것이다. 반면에 지옥을 만든 자가 권능과 지혜와 사랑의 신이며, 그것을 만든 동기가 바로 정의의 구현이라고 한다면, 지옥은 그 존재의 정당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고통과 괴로움의 정체
마지막 7-9행은 지옥의 영원함과 함께 지옥으로 들어오는 망자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담고 있다. 그런데 위의 대목에서 지옥이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영원성()이다. 먼저 지옥은 ‘영원한 것 말고는 자기보다 앞서 창조된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지옥은 ‘자기도 영원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앞의 영원한 것은 바로 창조주인 신을 가리킨다. 즉 지옥은 자기를 만든 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자기보다 더 오래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한 자이지, 신 자신은 결코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신의 영원함은 생성과 소멸을 초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지옥은 신에 의해 만들어짐으로써 생겨났다. 그렇지만 지옥은 소멸을 겪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지옥이 ‘나 또한 영원히 지속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은 생겨난 것의 영원한 지속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과연 어떤 고통을 겪을까? 만화나 영화, 혹은 문학 작품 속에 묘사된 지옥에는 대체로 불구덩이나, 끓는 기름솥, 또는 칠성판 등이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은 벌레들에게 몸을 뜯기기도 하고, 생전에 남겼던 썩은 음식을 먹으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요컨대 사람들이 상상으로 그려낸 지옥도(地獄圖)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고통스러운 모습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옥에서 겪는다고 묘사된 고통의 모습이 거의 대부분 육체적인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위에서 열거한 불구덩이나 끓는 기름솥 등과 같은 사례들은 모두 육체적인 고통을 발생시키는 것들이다. 달리 말하자면 위의 사례들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은 몸이 있어야만 겪을 수 있는 괴로움인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몸을 가지고 있을까? 옛사람들은 죽음을 몸과 혼의 분리로 이해했다. 혼과 분리된 몸은 부패하여 자연의 요소들로 해체된다. 반면에 죽은 자들의 혼은 신에게 가서 심판을 받고, 전생에 죄를 지은 자들이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겪는 고통은 대부분 몸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태우거나 찌르거나 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 추위나 더위, 혹은 배고픔 등의 고통은 모두 육체와 관련된 것이지, 혼과는 상관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지옥의 형벌들 가운데 혼이 겪을 만한 것은 거의 없는 셈이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최후의 심판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육신을 입고서 심판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고통의 육체적인 성격을 고려한 묘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이 지옥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옥: 절망의 장소
사실 지옥의 진정한 무서움은 고통의 영원성에 있다. ‘영원’이라는 말은 앞의 1-3행에도 이미 한 차례 나온 바 있다. 거기서 지옥은 사람들이 죽어서 ‘영원한’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로 들어온다고 말한다. 이때 영원은 고통의 끝없는 지속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누군가가 적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고문으로 인해 온갖 고통과 두려움을 겪으면서도 언젠가는 그 고문이 끝날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조만간 아군이 자신을 구출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혹은 곧 전쟁이 끝나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죽어버리면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생각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의든 타의든) 고통이 끝나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반면에 지옥에서의 형벌은 사정이 다르다. 지옥은 시공간을 초월해 영원한 신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서 만든 시점부터 영원히 존재하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징벌 역시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또한 지옥에 온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기에 죽음을 통해 고통을 벗어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결국 고통의 영원함에는 절망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괴로움, 슬픔과 비탄은 어떤 식으로든 끝이 정해져 있다.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그것들을 겪는 인간의 죽음과 함께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들이 지옥에서 겪는 고통은 끝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옥에서는 형벌이나 고통일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기대가 불가능하다. 지옥문에 써있는 마지막 문구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말에는 바로 단테가, 그리고 서양인들이 생각했던 가장 두려운 고통의 핵심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키워드
고통, 괴로움, 몸, 죽음, 혼, 희망/절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