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불경죄로 고발을 당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덕이 있는 자는 결코 해를 입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더 나은 사람은 결코 더 못한 사람에게 해를 입지 않는데, 도덕적인 사람들은 부도덕한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령 소크라테스 자신이 고발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해를 입는 쪽은 죽임을 당하는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의하게 자신을 죽게 만든 고발자들이라고 단언한다.
고전본문
여러분들은 이점을 알아두셨으면 하오. 그것은 여러분이 나와 같은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여러분 자신보다 나에게 더 큰 해를 끼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오. 멜레토스도 아뉘토스도 나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능력조차 없을 테니까요. 이는 더 훌륭한 사람이 더 형편없는 사람에게 해를 입는다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오. 물론 아마도 그는 나를 죽이거나 추방하거나 명예를 빼앗거나 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그나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아주 나쁜 일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지금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일, 즉 사람을 부정의하게 죽이려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오.
토론하기
(1) “더 훌륭한 자는 더 형편없는 자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주장의 이면에 어떤 교훈이 들어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2)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불경죄로 몰아 죽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혹시 비슷한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과연 우리 사회 안에 있을 지도 모르는 위인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해설읽기
소크라테스는 허위의식과 무지로 가득 찬 사람들의 혼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신에게 부여받은 임무라고 단언한다. 또한 그는 이것이 신의 명령인 이상, 인간이 내세운 법과 지시에 우선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죽음마저도 불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저 ‘신의 명령이기에 무조건 따르겠다’라는 식의 주장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어느 정도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다. 심지어 당시의 종교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에게도, 신의 명령을 우선시하여 법정에서 재판관의 결정을 거부하겠다는 주장은 쉽게 공감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 역시 신의 명령 이외에 자기 행위의 근거가 되는 신념을 밝히는데, 그것은 ‘더 훌륭한 자는 결코 더 형편없는 자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 즉 더 형편없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의가 패하고 착한 사람이 피해를 입는 사건들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또 이와 반대로,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 부도덕하고 못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의 몫을 가로채 이익을 누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소크라테스의 신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언급한 “더 훌륭한(사람)”과 “더 형편없는(사람)”의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더 훌륭한”으로 옮긴 그리스어 “아메이논(ameinon)”은 형용사 “좋은(agathos)”의 비교급으로, “더 좋은”, “더 나은”, “더 우월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 반면에 “더 형편없는”은 그리스어 “케이론(cheiron)”을 옮긴 것인데, 이 말 역시 “나쁘다(kakos)”는 뜻을 지닌 형용사 비교급으로 “더 나쁜(상태)”, “더 형편없는”, “더 열등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말의 의미만을 놓고 보면, 힘이나 상태, 능력, 지식 등, 모든 면에서 비교해 볼 때, 더 약한 자는 더 강한 자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운동 경기를 예로 들어 보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대결한다고 할 때, 약자가 강자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자는 더 나은 힘과 실력, 혹은 다른 더 우월한 능력을 통해서 약자의 공격을 간파하고 쉽게 막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일반화시키면, 더 열등한 자는 더 우월한 자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는 주장이 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일반화된 원칙을 도덕적인 훌륭함(우월함)과 보잘 것 없음(열등함)에도 적용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지혜나 용기, 절제, 정의와 같은 덕목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결코 열등한 사람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사람에게는 죽음도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거꾸로 만일 누군가가 부정의하게 타인을 죽였다면, 그런 부정의한 살인 행위야말로 그것을 저지른 사람에게 가장 큰 해악이라고 단언한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역설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독특한 생각 때문이다. 앞서 그는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바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인가가 나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두려워하는데, 죽음은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좋아하거나 두려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른다면, 단지 죽는다는 것만을 가지고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누군가가 부정의하게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떨까? 그 누군가는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부정의를 행함으로써 그 자신이 나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빠지게 되는 것은 해를 입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부정의하게 죽게 한다면, 정작 해를 입게 되는 사람은 죽음을 겪는 사람이 아니라, 부정의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멜레토스와 아뉘토스 등이 소크라테스를 부당하게 고발하여 죽게 만들 경우,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큰 해를 입혔다고 좋아하겠지만, 정작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가장 큰 해를 입게 되는 자들은 바로 고발자들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정의를 행함으로써 자기들 스스로를 나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오늘날 상식인의 시선으로 판단하기에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인들은 인권, 그 중에서도 생명권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마땅히 지켜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평가하는 일관된 관점이다. 더 나은 것, 더 훌륭한 것, 더 우월한 것은 더 나쁜 것, 더 형편없는 것, 더 열등한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앞서 있으며, 후자는 전자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정의에 적용될 경우(정의 역시 좋은 것이기 때문에), 정의가 부정의보다 더 훌륭하고, 더 우월한 것인 한, 부정의한 자는 결코 정의로운 자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 신념 하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고발자들에 의해 부정의하게 고발당하여 죽음의 위기에 처하였지만, 해를 입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부정의를 행한 고발자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 대화편인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는 더 이상 다뤄지지 않지만, ‘더 훌륭한 사람은 더 보잘것없는 사람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고르기아스>에서 한층 더 역설적인 주장으로 발전하는데, 그것은 ‘부정의를 겪는 것이 부정의를 행하는 것보다 더 낫다’라는 논제이다. 이것은 오직 정의만을 인정하고 일체의 부정의를 배제하는 극단적인 정의의 원칙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사람들은 도덕과 상식에 따라 부정의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일 내가 누군가에게 부정의를 당하는 상황이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에게 부정의를 해야 한다면 어떨까? 혹은 상대의 부정의한 행동으로 인해 내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경우에 적잖은 사람들은 ‘부정의를 당하느니 차라리 부정의를 행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나, ‘부정의를 당했다면 똑같이 부정의로 갚는 것 역시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내가 부정의를 당함으로써 해를 입었다’라는 판단이 들어있다. 즉 ‘(부정의를 당해) 해를 입느니 차라리 (부정의를 행해서) 해를 끼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거나 ‘(부정의로) 해를 입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입은 해를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하지만 해를 입는다는 것은 내가 나쁘게 된다는 것인데, 내가 나빠지는 것은 나쁜 짓을 저지름으로써, 즉 부정의를 행함으로써 나빠지는 것이지, 나쁜 짓을 당함으로써 나빠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따라서 언제나 나빠지는 쪽은 부정의 행한 쪽이지, 부정의를 겪는 쪽은 아니다. 심지어 상대의 부정의로 인해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가장 나쁘게 되는 것은 죽임을 당한 쪽이 아니라 살해를 한 쪽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은 그 결론만을 놓고 보면 매우 역설적이어서 보통의 사람들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바탕이 되는 정의의 원칙은 불법을 불법으로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오늘날의 법 정신이나, 국가의 불법적인 폭력에 맞서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던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신념 등과도 이어져있다고 할 수 있다.
키워드
더 나쁨(열등함), 더 훌륭함, 죽음
전후맥락
불경죄로 고발을 당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덕이 있는 자는 결코 해를 입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더 나은 사람은 결코 더 못한 사람에게 해를 입지 않는데, 도덕적인 사람들은 부도덕한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령 소크라테스 자신이 고발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해를 입는 쪽은 죽임을 당하는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의하게 자신을 죽게 만든 고발자들이라고 단언한다.
고전본문
여러분들은 이점을 알아두셨으면 하오. 그것은 여러분이 나와 같은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여러분 자신보다 나에게 더 큰 해를 끼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오. 멜레토스도 아뉘토스도 나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능력조차 없을 테니까요. 이는 더 훌륭한 사람이 더 형편없는 사람에게 해를 입는다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오. 물론 아마도 그는 나를 죽이거나 추방하거나 명예를 빼앗거나 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그나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아주 나쁜 일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지금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일, 즉 사람을 부정의하게 죽이려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오.
토론하기
(1) “더 훌륭한 자는 더 형편없는 자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주장의 이면에 어떤 교훈이 들어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2)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불경죄로 몰아 죽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혹시 비슷한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과연 우리 사회 안에 있을 지도 모르는 위인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해설읽기
소크라테스는 허위의식과 무지로 가득 찬 사람들의 혼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신에게 부여받은 임무라고 단언한다. 또한 그는 이것이 신의 명령인 이상, 인간이 내세운 법과 지시에 우선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죽음마저도 불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저 ‘신의 명령이기에 무조건 따르겠다’라는 식의 주장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어느 정도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다. 심지어 당시의 종교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에게도, 신의 명령을 우선시하여 법정에서 재판관의 결정을 거부하겠다는 주장은 쉽게 공감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 역시 신의 명령 이외에 자기 행위의 근거가 되는 신념을 밝히는데, 그것은 ‘더 훌륭한 자는 결코 더 형편없는 자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 즉 더 형편없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의가 패하고 착한 사람이 피해를 입는 사건들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또 이와 반대로,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 부도덕하고 못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의 몫을 가로채 이익을 누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소크라테스의 신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언급한 “더 훌륭한(사람)”과 “더 형편없는(사람)”의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더 훌륭한”으로 옮긴 그리스어 “아메이논(ameinon)”은 형용사 “좋은(agathos)”의 비교급으로, “더 좋은”, “더 나은”, “더 우월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 반면에 “더 형편없는”은 그리스어 “케이론(cheiron)”을 옮긴 것인데, 이 말 역시 “나쁘다(kakos)”는 뜻을 지닌 형용사 비교급으로 “더 나쁜(상태)”, “더 형편없는”, “더 열등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말의 의미만을 놓고 보면, 힘이나 상태, 능력, 지식 등, 모든 면에서 비교해 볼 때, 더 약한 자는 더 강한 자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운동 경기를 예로 들어 보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대결한다고 할 때, 약자가 강자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자는 더 나은 힘과 실력, 혹은 다른 더 우월한 능력을 통해서 약자의 공격을 간파하고 쉽게 막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일반화시키면, 더 열등한 자는 더 우월한 자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는 주장이 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일반화된 원칙을 도덕적인 훌륭함(우월함)과 보잘 것 없음(열등함)에도 적용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지혜나 용기, 절제, 정의와 같은 덕목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결코 열등한 사람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사람에게는 죽음도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거꾸로 만일 누군가가 부정의하게 타인을 죽였다면, 그런 부정의한 살인 행위야말로 그것을 저지른 사람에게 가장 큰 해악이라고 단언한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역설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독특한 생각 때문이다. 앞서 그는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바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인가가 나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두려워하는데, 죽음은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좋아하거나 두려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른다면, 단지 죽는다는 것만을 가지고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누군가가 부정의하게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떨까? 그 누군가는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부정의를 행함으로써 그 자신이 나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빠지게 되는 것은 해를 입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부정의하게 죽게 한다면, 정작 해를 입게 되는 사람은 죽음을 겪는 사람이 아니라, 부정의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멜레토스와 아뉘토스 등이 소크라테스를 부당하게 고발하여 죽게 만들 경우,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큰 해를 입혔다고 좋아하겠지만, 정작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가장 큰 해를 입게 되는 자들은 바로 고발자들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정의를 행함으로써 자기들 스스로를 나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오늘날 상식인의 시선으로 판단하기에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인들은 인권, 그 중에서도 생명권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마땅히 지켜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평가하는 일관된 관점이다. 더 나은 것, 더 훌륭한 것, 더 우월한 것은 더 나쁜 것, 더 형편없는 것, 더 열등한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앞서 있으며, 후자는 전자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정의에 적용될 경우(정의 역시 좋은 것이기 때문에), 정의가 부정의보다 더 훌륭하고, 더 우월한 것인 한, 부정의한 자는 결코 정의로운 자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 신념 하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고발자들에 의해 부정의하게 고발당하여 죽음의 위기에 처하였지만, 해를 입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부정의를 행한 고발자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 대화편인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는 더 이상 다뤄지지 않지만, ‘더 훌륭한 사람은 더 보잘것없는 사람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고르기아스>에서 한층 더 역설적인 주장으로 발전하는데, 그것은 ‘부정의를 겪는 것이 부정의를 행하는 것보다 더 낫다’라는 논제이다. 이것은 오직 정의만을 인정하고 일체의 부정의를 배제하는 극단적인 정의의 원칙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사람들은 도덕과 상식에 따라 부정의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일 내가 누군가에게 부정의를 당하는 상황이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에게 부정의를 해야 한다면 어떨까? 혹은 상대의 부정의한 행동으로 인해 내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경우에 적잖은 사람들은 ‘부정의를 당하느니 차라리 부정의를 행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나, ‘부정의를 당했다면 똑같이 부정의로 갚는 것 역시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내가 부정의를 당함으로써 해를 입었다’라는 판단이 들어있다. 즉 ‘(부정의를 당해) 해를 입느니 차라리 (부정의를 행해서) 해를 끼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거나 ‘(부정의로) 해를 입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입은 해를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하지만 해를 입는다는 것은 내가 나쁘게 된다는 것인데, 내가 나빠지는 것은 나쁜 짓을 저지름으로써, 즉 부정의를 행함으로써 나빠지는 것이지, 나쁜 짓을 당함으로써 나빠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따라서 언제나 나빠지는 쪽은 부정의 행한 쪽이지, 부정의를 겪는 쪽은 아니다. 심지어 상대의 부정의로 인해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가장 나쁘게 되는 것은 죽임을 당한 쪽이 아니라 살해를 한 쪽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은 그 결론만을 놓고 보면 매우 역설적이어서 보통의 사람들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바탕이 되는 정의의 원칙은 불법을 불법으로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오늘날의 법 정신이나, 국가의 불법적인 폭력에 맞서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던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신념 등과도 이어져있다고 할 수 있다.
키워드
더 나쁨(열등함), 더 훌륭함,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