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불경죄로 고발을 당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유무죄 여부와 관련하여 재판의 결과로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검토한다. 만일 재판관들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에게 ‘당신을 보내주겠다. 그 대신 다시는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삶을 살지 말라!’라고 명령한다면,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전본문
여러분이 나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해봅시다. “소크라테스! 이번에는 우리가 아뉘토스의 말에 따르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놓아주겠소.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더 이상 이런 탐색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도 지혜를 사랑하지도(철학을 하지도)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요. 그런데도 계속 이런 일을 하다가 잡히면 당신을 죽게 될 것이오.”
자, 내가 지금 말한 것처럼 이런 조건을 달고 여러분이 나를 놓아주려 한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숨이 붙어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지혜를 사랑하는 일(철학)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또 매번 내가 여러분 중 누구와 만나든 간에 그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을 여러분에게도 할 겁니다. “대단하신 분이여! 당신은 지혜와 힘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아테네 사람이면서, 돈을 최대한 많이 버는 일이라든가 평판과 명예를 얻는 일은 돌보면서, 현명함과 진실,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하게 되도록 하는 일은 돌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것이 수치스럽지도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자신은 혼을 돌보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즉시 나는 그를 놔주거나 내가 떠나가거나 하지 않고, 그에게 질문을 하고 그의 주장을 검토하고 그를 논박할 것입니다. 그가 덕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그런 주장을 한다는 생각이 내게 들면, 나는 그가 가장 큰 가치를 지닌 일은 가장 하찮게 여기면서, 더 보잘 것 없는 일을 더 중시한다고 그를 비난할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만나게 될 그 누구에게든 이런 일을 할 것입니다. 젊은이든 나이 든 이든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말입니다. […] 이 일은 신이 명령하는 것이기에, 내 생각에는 나의 이러한 신에 대한 봉사보다 여러분에 더 큰 좋음은 일찍이 이 나라에 생겨난 적이 없었을 겁니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은 결국 여러분 가운데 젊은이에게든 나이 든 이에게든, 혼보다 더 우선해서 몸이나 돈을 돌보는 일에 몰두하지 않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거든요.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게 아니라, 덕으로부터 돈을 비롯하여 사람들에게 좋은 여타 모든 것들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생긴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토론하기
(1) 위의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재판관의 명령보다 신의 명령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따르겠다고 선언한다. 오늘날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위의 주장은 우리의 삶에서 둘 이상의 가치가 상충될 때,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따를 것인가 하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선택의 상황을 마주하여 상충되는 가치들 앞에서 고민한 적이 있는가? 또한 그 상황에서 당신이 선택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으며, 왜 다른 가치가 아닌 바로 그 가치를 선택했는지 이야기해보자.
(2)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부터 돈을 비롯한 좋은 것들이 생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해설읽기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고발자들의 비난을 논박하는 한편, 자신이 선택한 철학적인 삶이 정의의 원칙이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판관들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는 무죄가 될 수도, 유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선택지 외에도 제3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철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무죄방면을 하겠다는 이른바 조건부 무죄이다. 그 대신 다시 철학을 하다 붙잡힐 경우 그때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제3의 가능성을 언급한 뒤에 단호하게 거부한다. 달리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하는 삶, 즉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일을 어떠한 경우에도 그만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신의 명령에서 찾는다. 즉 두 개의 명령 혹은 법이 상충될 때는 더 상위의 명령이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행동이 델피 신전의 주관자이자 예언의 신인 아폴론의 명령에 따르는 것,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 자신이 본보기가 되어 사람들의 무지를 깨닫도록 만들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인간의 법정에서는 소크라테스를 풀어주되 그에게 사람들과의 대화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려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상황을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라는 신의 명령과 더 이상은 그런 대화를 하지 말라는 인간의 명령이 부딪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에서 소크라테스는 인간보다 더 상위의 존재자인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정교분리가 이루어진 세속국가에서 소크라테스처럼 인간의 법보다 신의 명령을 위에 놓아야 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둘 이상의 명령 혹은 의무가 상충될 때, 어떤 것을 더 상위에 놓아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보라고 충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우리는 위의 대목에서 소크라테스가 신의 권위를 내세워 강조하려는 가치의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들이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평판, 명예와 같은 것들에만 몰두할 뿐, 정작 현명함이나 진실 등 혼을 돌보는 일은 소홀히 한다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덕으로부터 돈이 생긴다고 결론을 내린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과 현자들은 부(재산)를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은 각각 외적인 부, 신체적인 부, 그리고 영혼의 부이다. 외적인 부는 재산이나 지위, 권력, 명성 등과 같이 나를 둘러싼 모든 외적인 좋은 것들을 말한다. 신체적인 부는 외모나 키, 몸매, 건강과 같이 몸과 관련된 좋은 것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부는 지혜, 용기, 절제 등과 같은 인간의 내면적인 덕목들을 말한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세 종류의 부가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옛 철학자들은 이 셋을 똑같이 좋은 것들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중립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테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많은 좋은 것들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막대한 불행을 야기할 수도 있다. 우리는 탐욕에 물든 권력자가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자신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도 할 수 없는 불행에 빠뜨린 몇몇 역사적 사건들을 알고 있다. 신체적인 부도 이와 비슷하다. 건강한 신체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재산이지만, 자신의 힘을 잘못 휘두를 경우에는 타인에게 고통을 줄뿐더러, 결과적으로는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는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반면에 영혼의 부는 오직 좋기만 할 뿐, 결코 나쁠 수 없는 것들이다. 철학자들은 영혼의 부를 지혜, 용기, 절제, 정의와 같은 인간의 내면적인 덕목들로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덕들은 오직 좋은 결과만을 산출할 뿐이다. 예를 들어 지혜를 사용한다는 것은 지혜롭게 산다는 것인데, 지혜로운 삶은 어떻게 봐도 나쁜 것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절제 있는 삶 역시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일 수밖에 없으며, 용감하고 정의로운 삶 역시 그것이 구현된다면 좋은 것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외적인 부나 신체적인 부가 잘못 사용되거나 악용될 수 있는 것과 달리, 영혼의 부는 잘못 사용되거나 악용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위의 대목에서 외적인 부(돈, 명성, 평판)와 영혼의 부(덕)를 비교하고 있다. 그러면서 훌륭한 시민일수록 더더욱 외적인 부가 아닌 영혼의 부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혼의 부를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덕을 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지혜와 용기, 절제와 정의를 자신의 내면에 갖추어내는 일이다. 이렇듯 오직 좋기만 한 덕목들을 모두 갖추게 되면, 그 외의 나머지 재산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내면, 즉 혼을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혼을 돌보는 첫 단계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편견과 허위의식, 특히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믿었던 이중의 무지를 제거하는 일이다. 이렇듯 혼을 채우고 있었던 무지와 허위의식이 제거되었을 때, 그 다음 단계로서 혼 안에 덕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보았던 예언의 신 아폴론의 경고와도 이어진다. 즉 인간은 자신의 지혜가 보잘것없거나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 결핍된 지혜와 덕목을 채우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해온 일은 바로 이런 아폴론의 경고를 대신해서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이 신에 대한 봉사이자 신을 돕는 일로서, 젊은이와 노인, 내국인과 외국인 등 모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겪고 있었던 이중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덕을 탐구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일생의 과업이라면, 인간의 재판을 통해 금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키워드
더 나쁨(열등함), 더 훌륭함(우월함), 덕목, 무지, 부와 명예, 부정의 신체와 건강, 영혼의 부, 용기, 절제, 죽음, 지혜
전후맥락
불경죄로 고발을 당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유무죄 여부와 관련하여 재판의 결과로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검토한다. 만일 재판관들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에게 ‘당신을 보내주겠다. 그 대신 다시는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삶을 살지 말라!’라고 명령한다면,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전본문
여러분이 나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해봅시다. “소크라테스! 이번에는 우리가 아뉘토스의 말에 따르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놓아주겠소.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더 이상 이런 탐색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도 지혜를 사랑하지도(철학을 하지도)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요. 그런데도 계속 이런 일을 하다가 잡히면 당신을 죽게 될 것이오.”
자, 내가 지금 말한 것처럼 이런 조건을 달고 여러분이 나를 놓아주려 한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숨이 붙어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지혜를 사랑하는 일(철학)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또 매번 내가 여러분 중 누구와 만나든 간에 그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을 여러분에게도 할 겁니다. “대단하신 분이여! 당신은 지혜와 힘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아테네 사람이면서, 돈을 최대한 많이 버는 일이라든가 평판과 명예를 얻는 일은 돌보면서, 현명함과 진실,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하게 되도록 하는 일은 돌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것이 수치스럽지도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자신은 혼을 돌보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즉시 나는 그를 놔주거나 내가 떠나가거나 하지 않고, 그에게 질문을 하고 그의 주장을 검토하고 그를 논박할 것입니다. 그가 덕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그런 주장을 한다는 생각이 내게 들면, 나는 그가 가장 큰 가치를 지닌 일은 가장 하찮게 여기면서, 더 보잘 것 없는 일을 더 중시한다고 그를 비난할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만나게 될 그 누구에게든 이런 일을 할 것입니다. 젊은이든 나이 든 이든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말입니다. […] 이 일은 신이 명령하는 것이기에, 내 생각에는 나의 이러한 신에 대한 봉사보다 여러분에 더 큰 좋음은 일찍이 이 나라에 생겨난 적이 없었을 겁니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은 결국 여러분 가운데 젊은이에게든 나이 든 이에게든, 혼보다 더 우선해서 몸이나 돈을 돌보는 일에 몰두하지 않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거든요.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게 아니라, 덕으로부터 돈을 비롯하여 사람들에게 좋은 여타 모든 것들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생긴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토론하기
(1) 위의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재판관의 명령보다 신의 명령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따르겠다고 선언한다. 오늘날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위의 주장은 우리의 삶에서 둘 이상의 가치가 상충될 때,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따를 것인가 하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선택의 상황을 마주하여 상충되는 가치들 앞에서 고민한 적이 있는가? 또한 그 상황에서 당신이 선택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으며, 왜 다른 가치가 아닌 바로 그 가치를 선택했는지 이야기해보자.
(2)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부터 돈을 비롯한 좋은 것들이 생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해설읽기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고발자들의 비난을 논박하는 한편, 자신이 선택한 철학적인 삶이 정의의 원칙이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판관들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는 무죄가 될 수도, 유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선택지 외에도 제3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철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무죄방면을 하겠다는 이른바 조건부 무죄이다. 그 대신 다시 철학을 하다 붙잡힐 경우 그때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제3의 가능성을 언급한 뒤에 단호하게 거부한다. 달리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하는 삶, 즉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일을 어떠한 경우에도 그만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신의 명령에서 찾는다. 즉 두 개의 명령 혹은 법이 상충될 때는 더 상위의 명령이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행동이 델피 신전의 주관자이자 예언의 신인 아폴론의 명령에 따르는 것,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 자신이 본보기가 되어 사람들의 무지를 깨닫도록 만들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인간의 법정에서는 소크라테스를 풀어주되 그에게 사람들과의 대화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려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상황을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라는 신의 명령과 더 이상은 그런 대화를 하지 말라는 인간의 명령이 부딪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에서 소크라테스는 인간보다 더 상위의 존재자인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정교분리가 이루어진 세속국가에서 소크라테스처럼 인간의 법보다 신의 명령을 위에 놓아야 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둘 이상의 명령 혹은 의무가 상충될 때, 어떤 것을 더 상위에 놓아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보라고 충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우리는 위의 대목에서 소크라테스가 신의 권위를 내세워 강조하려는 가치의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들이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평판, 명예와 같은 것들에만 몰두할 뿐, 정작 현명함이나 진실 등 혼을 돌보는 일은 소홀히 한다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덕으로부터 돈이 생긴다고 결론을 내린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과 현자들은 부(재산)를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은 각각 외적인 부, 신체적인 부, 그리고 영혼의 부이다. 외적인 부는 재산이나 지위, 권력, 명성 등과 같이 나를 둘러싼 모든 외적인 좋은 것들을 말한다. 신체적인 부는 외모나 키, 몸매, 건강과 같이 몸과 관련된 좋은 것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부는 지혜, 용기, 절제 등과 같은 인간의 내면적인 덕목들을 말한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세 종류의 부가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옛 철학자들은 이 셋을 똑같이 좋은 것들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중립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테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많은 좋은 것들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막대한 불행을 야기할 수도 있다. 우리는 탐욕에 물든 권력자가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자신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도 할 수 없는 불행에 빠뜨린 몇몇 역사적 사건들을 알고 있다. 신체적인 부도 이와 비슷하다. 건강한 신체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재산이지만, 자신의 힘을 잘못 휘두를 경우에는 타인에게 고통을 줄뿐더러, 결과적으로는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는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반면에 영혼의 부는 오직 좋기만 할 뿐, 결코 나쁠 수 없는 것들이다. 철학자들은 영혼의 부를 지혜, 용기, 절제, 정의와 같은 인간의 내면적인 덕목들로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덕들은 오직 좋은 결과만을 산출할 뿐이다. 예를 들어 지혜를 사용한다는 것은 지혜롭게 산다는 것인데, 지혜로운 삶은 어떻게 봐도 나쁜 것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절제 있는 삶 역시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일 수밖에 없으며, 용감하고 정의로운 삶 역시 그것이 구현된다면 좋은 것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외적인 부나 신체적인 부가 잘못 사용되거나 악용될 수 있는 것과 달리, 영혼의 부는 잘못 사용되거나 악용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위의 대목에서 외적인 부(돈, 명성, 평판)와 영혼의 부(덕)를 비교하고 있다. 그러면서 훌륭한 시민일수록 더더욱 외적인 부가 아닌 영혼의 부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혼의 부를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덕을 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지혜와 용기, 절제와 정의를 자신의 내면에 갖추어내는 일이다. 이렇듯 오직 좋기만 한 덕목들을 모두 갖추게 되면, 그 외의 나머지 재산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내면, 즉 혼을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혼을 돌보는 첫 단계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편견과 허위의식, 특히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믿었던 이중의 무지를 제거하는 일이다. 이렇듯 혼을 채우고 있었던 무지와 허위의식이 제거되었을 때, 그 다음 단계로서 혼 안에 덕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보았던 예언의 신 아폴론의 경고와도 이어진다. 즉 인간은 자신의 지혜가 보잘것없거나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 결핍된 지혜와 덕목을 채우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해온 일은 바로 이런 아폴론의 경고를 대신해서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이 신에 대한 봉사이자 신을 돕는 일로서, 젊은이와 노인, 내국인과 외국인 등 모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겪고 있었던 이중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덕을 탐구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일생의 과업이라면, 인간의 재판을 통해 금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키워드
더 나쁨(열등함), 더 훌륭함(우월함), 덕목, 무지, 부와 명예, 부정의 신체와 건강, 영혼의 부, 용기, 절제, 죽음,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