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아테네인들 가운데 세 명의 시민들, 즉 멜레토스, 아뉘토스, 뤼콘은 각각 시인과 장인, 그리고 연설가를 대표하여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고발한다. 구체적인 고발 항복은 크게 셋인데, 첫째,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둘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을 도입했으며, 셋째, 이를 통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발 내용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고발자 가운데 한 명인 멜레토스를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석시켜 직접 질문을 한다. 이른바 소크라테스식 대화가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셈인데, 그는 고발 항목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세 번째 항목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고전본문
[소크라테스] 말해보세요, 멜레토스. 유익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게 더 좋은가요, 아니면 사악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은가요? 대답해보세요! 전혀 어려운 걸 묻는 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악한 사람들은 늘 자기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나쁜 것을 산출하는 반면, 훌륭한 사람들은 뭔가 좋은 일을 하지 않나요?
[멜레토스] 물론이오.
[소] 그렇다면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서 유익함을 얻기보다 해를 입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대답하세요! 법도 답변하라고 명하지 않소! 해를 입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멜] 물론 없소.
[소] 자, 당신은 내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사악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나를 법정에 세웠소.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짓을 했다고 보는 것이오? 아니면 의도치 않게 그런 짓을 했다고 보는 것이오?
[멜] 의도적이라고 생각하오!
[소] 뭐라고요, 멜레토스? 그 나이의 당신이 이 나이의 나보다 그토록 더 지혜로워서, 당신은 나쁜 사람들은 늘 자기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훌륭한 사람들은 훌륭한 일을 한다는 것을 아는 반면, 나는 내가 함께 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를 악하게 만들면, 그 사람으로부터 뭔가 나쁜 일을 당할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조차도 모를 만큼 심각하게 무지하다는 건가요? 그래서 이런 대단히 나쁜 일을 의도적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오? 멜레토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당신의 주장을 믿지 않소. 또한 어떠한 사람도 당신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하오. 나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지 않거나, 설령 타락시킨다 하더라도 그럴 의도 없이 그런 것이오. 따라서 이 둘에 비추어볼 때 당신의 주장은 틀린 것이 되오. 그런데 내가 의도치 않게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면, 그런 잘못은 의도치 않게 저지른 것으로서, 우리의 법은 그런 잘못을 한 사람에 대하여 이곳 법정에 세우라고 명령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잡아놓고 가르치며 훈계하라고 명령하오. 왜냐하면 [자기가 한 일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의도 없이 했던 잘못들은 멈출 것이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나와 함께 하면서 나를 가르치는 일은 회피하고 거부한 채, 그저 나를 이곳 법정에 세웠을 뿐이오. 배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처벌이 필요한 사람들을 이곳에 세우는 게 법이거늘 말이오.
토론하기
(1) 고의로 인한 잘못과 본의 아닌 잘못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 실수나 무지로 인해 본의 아니게 저지른 잘못은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용서 받을 수 있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해설읽기
소크라테스는 먼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고발 항목에 대하여 변론을 펼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일장 연설을 하는 대신, 고발인의 한 사람인 멜레토스를 소환하여 마치 심문을 하듯이 질의응답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드러내고자 한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선택한 이러한 변론 방법은 우리에게는 특별히 이상해보이지 않지만, 고대 아테네인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낯설고 의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재판에서 이루어지는 발언들은 대부분 대화가 아닌 일방의 연설로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재판에서는 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판이란 분쟁 당사자들 간의 협의가 더 이상 불가능함을 전제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서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재판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재판정에서 상대를 비난하거나 그에 맞서 자기를 방어하는 발언들은 거의 대부분 배심원들을 향하는 연설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배심원들은 원고와 피고의 연설을 들으면서 그 내용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지를(즉 법과 상식에 부합하는지를) 판정하는 것이다.
물론 고대의 재판에도 증인을 소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때의 증인을 ‘공술인(公述人, synēgoros)’이라고 부르는데, 이 공술인은 사실 관계를 확인해주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연설가의 편을 들어서 그에 대한 지지 발언을 해주거나, 상대에 대한 비난 발언을 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자신의 적을 증인으로 불러서 질문과 답변을 하는 행위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일이 드물긴 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경우 증인 심문의 목표는 상대의 답변으로부터 논리적인 모순이나 말실수를 유도해해는 것이었다. 즉 배심원들 앞에서 주장의 모순점을 지적함으로써 그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문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수단으로서만 사용되었다. 설득의 관건은 대부분 연설의 논리적 개연성, 배심원들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 그리고 연설가 자신을 비롯하여 지지발언을 해주는 공술인들의 평판과 권위에 달려 있었다. 고대의 증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고발을 당하자, 당대 최고의 수사가였던 뤼시아스가 소크라테스를 위해 법정 변론문을 써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대로 고발인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상대의 비난을 논박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어떤 식으로 멜레토스의 고발을 논박할까?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한편으로는 좋음과 나쁨의 대립 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은 회피하려는 인간의 본성에 기반하여 진행된다. 우선 좋은 것은 선하고 유익한 반면, 나쁜 것은 사악하고 해를 끼친다. 따라서 사람들 역시 누구나 좋은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 하며, 나쁜 사람들 곁은 피하려고 한다. 좋은 사람들 곁에 있으면 좋은 영향을 받고 유익함을 얻을 수 있지만, 나쁜 사람들 곁에서는 나쁜 영향을 받고 손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지적에 멜레토스는 혹시 어떤 함정이 숨어있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니기에 동의하게 된다.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비난에 대하여, 이러한 잘못이 ‘고의로’ 행해진 것인지, 아니면 ‘본의 아니게’ 행해진 것인지를 묻고, 이에 대해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고의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바로 위의 논의를 근거로 멜레토스의 답변을 논박한다.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은 그들을 사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소크라테스와 가장 가까이에 나쁜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것을 원하고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반면, 나쁜 것은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만일 자신이 젊은이들을 타락시켜서 나쁘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나쁜 사람들 곁에 있게 되는 셈이며, 결과적으로 자신 역시 나쁜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이 좋은 것(사람)을 원하고 나쁜 것(사람)을 피한다는 전제에 위배된다. 즉 타락해서 나빠진 젊은이들로부터 자신이 해를 입을 것이 뻔한 데,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타락시킬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결론은 둘이다. 하나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알고서, 즉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고서 의도치 않게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만일 전자라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고발자들의 비난은 거짓이 된다. 반면에 후자라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행위는 고의가 아니라 모르고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교정과 교육의 대상이지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소크라테스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고의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과 의도 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구별하고, 법에 따르면 처벌은 전자에 대해서만 타당할 뿐, 후자에 대해서는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오늘날의 법정에서도 일정 부분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고의가 아니거나 모르고 그랬을 경우에는 실제로 어느 정도 죄가 경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언론에서는 살인 등과 같은 중범을 저지른 피고인이 법정에서 자신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소식이 보도되곤 한다. 질병 등으로 인해 범행 의지가 결여되거나 미약한 상태라는 것이 입증될 경우,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됨으로써 죄의 경감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위의 대목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고의가 아닌 잘못은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굉장히 중요한 윤리적 행위 원칙이 숨어있음을 볼 수 있다. 학자들은 그것을 윤리적 주지주의(ethical intellectualism)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용문의 첫 대목, “유익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게 더 좋은가요, 아니면 사악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은가요”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질문을 조금 바꾸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얻게 된다.
⓵ ‘모든 인간은 좋은 것을 원하고 나쁜 것은 원치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것이란 유익함, 즐거움, 선함, 풍요로움 등, 모든 긍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반면 나쁜 것은 손해, 괴로움, 사악함, 결핍 등,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위의 명제에 따르면,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긍정적인 것들을 선호하지, 그 누구도 부정적인 것을 선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행위 원리의 대전제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로부터 다음의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⓶ ‘따라서 인간은 무엇이 좋은지를 안다면, 그것을 바라고 취하려 할 것이요, 무엇이 나쁜지를 안다면 그것을 갖지 않고 피하려 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누구도 자신이 고통 받기를 원치 않을 것이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의 기회를 마다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좋은 것들을 기꺼이 양보하거나, 심지어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양보와 희생이야말로(그리고 그런 양보와 희생을 통해 타인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바로 우리들!)은 크고 작은 잘못들을 저지르며 살아가곤 한다. 누구든 나쁜 것을 피하려 한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면서 많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까?
⓷ ‘사람들의 잘못은 무지에서 기인한다.’ 누구나 부정적인 것을 싫어하고 회피하려 하면서도, 막상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바로 무지 때문이다. 즉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안다면, 나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좋은 것을 원하지, 나쁜 것은 결코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위의 지문에서 살펴본 소크라테스의 방어 논리와도 연결된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만일 실제로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와 어울림으로써 나쁘게 되었다면,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원해서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반대로 만일 자신의 행위가 젊은이들을 나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소크라테스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자신이 위에서도 말하듯이, 타락하여 악하게 변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곁에 있게 된다면, 이번에는 거꾸로 소크라테스 자신이 그들로 인해 나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인간은 누구도 나쁘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그가 자기도 모르게 젊은이들을 나쁘게 만들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그러지 않도록 교육시키는 것이다.
키워드
고의, 교육, 무지, 실수, 윤리적 주지주의, 잘못, 처벌
전후맥락
아테네인들 가운데 세 명의 시민들, 즉 멜레토스, 아뉘토스, 뤼콘은 각각 시인과 장인, 그리고 연설가를 대표하여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고발한다. 구체적인 고발 항복은 크게 셋인데, 첫째,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둘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을 도입했으며, 셋째, 이를 통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발 내용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고발자 가운데 한 명인 멜레토스를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석시켜 직접 질문을 한다. 이른바 소크라테스식 대화가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셈인데, 그는 고발 항목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세 번째 항목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고전본문
[소크라테스] 말해보세요, 멜레토스. 유익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게 더 좋은가요, 아니면 사악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은가요? 대답해보세요! 전혀 어려운 걸 묻는 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악한 사람들은 늘 자기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나쁜 것을 산출하는 반면, 훌륭한 사람들은 뭔가 좋은 일을 하지 않나요?
[멜레토스] 물론이오.
[소] 그렇다면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서 유익함을 얻기보다 해를 입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대답하세요! 법도 답변하라고 명하지 않소! 해를 입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멜] 물론 없소.
[소] 자, 당신은 내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사악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나를 법정에 세웠소.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짓을 했다고 보는 것이오? 아니면 의도치 않게 그런 짓을 했다고 보는 것이오?
[멜] 의도적이라고 생각하오!
[소] 뭐라고요, 멜레토스? 그 나이의 당신이 이 나이의 나보다 그토록 더 지혜로워서, 당신은 나쁜 사람들은 늘 자기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훌륭한 사람들은 훌륭한 일을 한다는 것을 아는 반면, 나는 내가 함께 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를 악하게 만들면, 그 사람으로부터 뭔가 나쁜 일을 당할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조차도 모를 만큼 심각하게 무지하다는 건가요? 그래서 이런 대단히 나쁜 일을 의도적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오? 멜레토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당신의 주장을 믿지 않소. 또한 어떠한 사람도 당신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하오. 나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지 않거나, 설령 타락시킨다 하더라도 그럴 의도 없이 그런 것이오. 따라서 이 둘에 비추어볼 때 당신의 주장은 틀린 것이 되오. 그런데 내가 의도치 않게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면, 그런 잘못은 의도치 않게 저지른 것으로서, 우리의 법은 그런 잘못을 한 사람에 대하여 이곳 법정에 세우라고 명령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잡아놓고 가르치며 훈계하라고 명령하오. 왜냐하면 [자기가 한 일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의도 없이 했던 잘못들은 멈출 것이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나와 함께 하면서 나를 가르치는 일은 회피하고 거부한 채, 그저 나를 이곳 법정에 세웠을 뿐이오. 배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처벌이 필요한 사람들을 이곳에 세우는 게 법이거늘 말이오.
토론하기
(1) 고의로 인한 잘못과 본의 아닌 잘못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 실수나 무지로 인해 본의 아니게 저지른 잘못은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용서 받을 수 있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해설읽기
소크라테스는 먼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고발 항목에 대하여 변론을 펼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일장 연설을 하는 대신, 고발인의 한 사람인 멜레토스를 소환하여 마치 심문을 하듯이 질의응답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드러내고자 한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선택한 이러한 변론 방법은 우리에게는 특별히 이상해보이지 않지만, 고대 아테네인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낯설고 의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재판에서 이루어지는 발언들은 대부분 대화가 아닌 일방의 연설로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재판에서는 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판이란 분쟁 당사자들 간의 협의가 더 이상 불가능함을 전제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서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재판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재판정에서 상대를 비난하거나 그에 맞서 자기를 방어하는 발언들은 거의 대부분 배심원들을 향하는 연설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배심원들은 원고와 피고의 연설을 들으면서 그 내용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지를(즉 법과 상식에 부합하는지를) 판정하는 것이다.
물론 고대의 재판에도 증인을 소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때의 증인을 ‘공술인(公述人, synēgoros)’이라고 부르는데, 이 공술인은 사실 관계를 확인해주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연설가의 편을 들어서 그에 대한 지지 발언을 해주거나, 상대에 대한 비난 발언을 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자신의 적을 증인으로 불러서 질문과 답변을 하는 행위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일이 드물긴 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경우 증인 심문의 목표는 상대의 답변으로부터 논리적인 모순이나 말실수를 유도해해는 것이었다. 즉 배심원들 앞에서 주장의 모순점을 지적함으로써 그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문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수단으로서만 사용되었다. 설득의 관건은 대부분 연설의 논리적 개연성, 배심원들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 그리고 연설가 자신을 비롯하여 지지발언을 해주는 공술인들의 평판과 권위에 달려 있었다. 고대의 증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고발을 당하자, 당대 최고의 수사가였던 뤼시아스가 소크라테스를 위해 법정 변론문을 써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대로 고발인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상대의 비난을 논박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어떤 식으로 멜레토스의 고발을 논박할까?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한편으로는 좋음과 나쁨의 대립 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은 회피하려는 인간의 본성에 기반하여 진행된다. 우선 좋은 것은 선하고 유익한 반면, 나쁜 것은 사악하고 해를 끼친다. 따라서 사람들 역시 누구나 좋은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 하며, 나쁜 사람들 곁은 피하려고 한다. 좋은 사람들 곁에 있으면 좋은 영향을 받고 유익함을 얻을 수 있지만, 나쁜 사람들 곁에서는 나쁜 영향을 받고 손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지적에 멜레토스는 혹시 어떤 함정이 숨어있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니기에 동의하게 된다.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비난에 대하여, 이러한 잘못이 ‘고의로’ 행해진 것인지, 아니면 ‘본의 아니게’ 행해진 것인지를 묻고, 이에 대해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고의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바로 위의 논의를 근거로 멜레토스의 답변을 논박한다.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은 그들을 사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소크라테스와 가장 가까이에 나쁜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것을 원하고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반면, 나쁜 것은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만일 자신이 젊은이들을 타락시켜서 나쁘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나쁜 사람들 곁에 있게 되는 셈이며, 결과적으로 자신 역시 나쁜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이 좋은 것(사람)을 원하고 나쁜 것(사람)을 피한다는 전제에 위배된다. 즉 타락해서 나빠진 젊은이들로부터 자신이 해를 입을 것이 뻔한 데,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타락시킬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결론은 둘이다. 하나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알고서, 즉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고서 의도치 않게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만일 전자라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고발자들의 비난은 거짓이 된다. 반면에 후자라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행위는 고의가 아니라 모르고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교정과 교육의 대상이지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소크라테스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고의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과 의도 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구별하고, 법에 따르면 처벌은 전자에 대해서만 타당할 뿐, 후자에 대해서는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오늘날의 법정에서도 일정 부분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고의가 아니거나 모르고 그랬을 경우에는 실제로 어느 정도 죄가 경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언론에서는 살인 등과 같은 중범을 저지른 피고인이 법정에서 자신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소식이 보도되곤 한다. 질병 등으로 인해 범행 의지가 결여되거나 미약한 상태라는 것이 입증될 경우,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됨으로써 죄의 경감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위의 대목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고의가 아닌 잘못은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굉장히 중요한 윤리적 행위 원칙이 숨어있음을 볼 수 있다. 학자들은 그것을 윤리적 주지주의(ethical intellectualism)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용문의 첫 대목, “유익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게 더 좋은가요, 아니면 사악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은가요”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질문을 조금 바꾸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얻게 된다.
⓵ ‘모든 인간은 좋은 것을 원하고 나쁜 것은 원치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것이란 유익함, 즐거움, 선함, 풍요로움 등, 모든 긍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반면 나쁜 것은 손해, 괴로움, 사악함, 결핍 등,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위의 명제에 따르면,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긍정적인 것들을 선호하지, 그 누구도 부정적인 것을 선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행위 원리의 대전제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로부터 다음의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⓶ ‘따라서 인간은 무엇이 좋은지를 안다면, 그것을 바라고 취하려 할 것이요, 무엇이 나쁜지를 안다면 그것을 갖지 않고 피하려 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누구도 자신이 고통 받기를 원치 않을 것이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의 기회를 마다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좋은 것들을 기꺼이 양보하거나, 심지어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양보와 희생이야말로(그리고 그런 양보와 희생을 통해 타인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바로 우리들!)은 크고 작은 잘못들을 저지르며 살아가곤 한다. 누구든 나쁜 것을 피하려 한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면서 많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까?
⓷ ‘사람들의 잘못은 무지에서 기인한다.’ 누구나 부정적인 것을 싫어하고 회피하려 하면서도, 막상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바로 무지 때문이다. 즉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안다면, 나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좋은 것을 원하지, 나쁜 것은 결코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위의 지문에서 살펴본 소크라테스의 방어 논리와도 연결된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만일 실제로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와 어울림으로써 나쁘게 되었다면,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원해서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반대로 만일 자신의 행위가 젊은이들을 나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소크라테스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자신이 위에서도 말하듯이, 타락하여 악하게 변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곁에 있게 된다면, 이번에는 거꾸로 소크라테스 자신이 그들로 인해 나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인간은 누구도 나쁘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그가 자기도 모르게 젊은이들을 나쁘게 만들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그러지 않도록 교육시키는 것이다.
키워드
고의, 교육, 무지, 실수, 윤리적 주지주의, 잘못, 처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