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궤변을 가르쳤다는 비난에 맞서 자기는 그 누구의 선생도 되어본 적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쳤다는 지적은 틀렸다고 말한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대화를 나누거나 구경하려는 젊은이들로 가득했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들 중 누구도 타락시킨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고전본문
실은 난 도대체 어느 누구의 선생도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젊은이든 나이 든 이든 상관없이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일에 관해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나는 어느 누구와의 대화에도 인색하게 굴어본 적이 없고, 돈을 받고서 대화를 할 뿐 돈 없이는 대화를 거절한 적도 없으며, 오히려 부자에게든 가난한 이에게든 똑같이 내게 질문하라고 말하며 나 자신을 내놓았는가 하면, 누군가가 답변을 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를 원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대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들 중 어느 누구에게든 단 한 번이라도 배울 거리를 약속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었소. 그러니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쓸 만한 사람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와 관련해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올바른 것이 아니오. 또한 누군가가 한때 나에게서 뭔가를 배운 적이 있다고 (다른 누구도 그런 적이 없거늘!) 주장한다면 그의 주장은 결코 참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 중 몇몇 사람들이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즐거워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그 이유를 들었소. 내가 앞에서 여러분에게 온전한 진실을 말해주었으니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검토 당하는 것을 들으면서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란 예언을 통해서든, 꿈을 통해서든, 혹은 다른 어떤 신적인 섭리를 통해서든, 바로 신이 나에게 하라고 명한 일이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오.
아테네인 여러분! 이것들은 참일 뿐만 아니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오. 만일 내가 정말로 젊은이들 중 일부는 타락시키는 중이고 또 일부는 이미 타락시켰다면, 또 그들 중 누구라도 나이를 먹은 이후에 자기들이 젊었을 때 나에게 뭔가 나쁜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면, 분명히 그들은 지금 이 자리에 올라와서 나를 고발하고 복수를 하려 들었을 테니까요. 혹시 그들 자신은 그렇게 할 의향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든, 형제든, 친척이든 누구든지 그때를 기억하고 지금 복수를 하려 들었을 것이오. 자기들의 가족이 나에게서 뭔가 나쁜 일을 겪은 것이 정말이라면 말이오.
토론하기
(1) 선생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과거의 자신보다 더 나아진 경험이 있는가? 혹시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라는 비난을 논박하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내세웠다. 즉 자신은 아는 것이 없기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일 수 없다는 것이다. 선생이 아니기에 지혜를 구실 삼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들과 동일하게 취급해온 사람들에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소피스트들은 자기들이 덕의 교사라고 주장하지만,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는 덕의 교사일 수 없으며, 따라서 소피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소크라테스가 한 일이라고는 부자와 빈자, 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화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와도 함께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지혜를 제공하는 선생이 아니라면, 왜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것은 그가 지혜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검토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배우러 그에게 왔다기보다는, 소크라테스가 타인의 무지를 밝혀내는 것을 구경하러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만일 자신이 정말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면, 그들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피해를 입은 셈이므로, 나중에라도 그들 자신이나 가족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앙갚음을 시도했을 법도 한데, 그와 함께 했던 젊은이들 중 누구도 소크라테스를 비난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이는 소크라테스와 함께 했던 젊은이들 중에서 어떠한 피해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해명은 이미 연설의 초반부, 즉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분노의 기원을 설명하는 대목에 자세히 언급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는 신탁을 검증하고자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눴고, 그 결과 그들이 사실은 삶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이러한 이중의 무지가 폭로되는 것을 본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열광했으며, 나중에는 자기들이 직접 소크라테스를 흉내내기까지 한다. 그 결과 논박당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에게서 못된 것을 배웠다며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논박 과정을 보고서 젊은이들이 열광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곰곰이 뜯어보면, 거기에는 엉뚱하게도 고대 그리스 희극에 전형적인 인물 설정이 나타난다. 그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명인이나 권력자가 그저 그렇고 평범한 일반인에게 어처구니없이 패배한다는 설정이다. 이러한 설정은 비극과는 정반대이다. 비극에서는 보통의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그러나 신들만큼은 아닌)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웅은 모든 면에서 타인을 압도하지만, 자신에게 부과된 운명이나, 순간의 미망(迷妄), 혹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정념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해간다. 주인공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함께 따라가며 관객들은 연민의 정과 함께 혼의 정화(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반대로 희극에서는 평범한 일반인(예를 들어 농부)이거나, 사회적 약자(예를 들어 여성)가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이런저런 계기로 인해 공동체의 권력자나 부자와 같은 이른바 사회적 강자와 대립하게 된다. 상대방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고서 주인공을 우습게보고 업신여기지만, 이런저런 사건이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평범한 주인공이 승리하게 된다. 사건 속에서 주인공의 별 생각 없는 행동이나 발언에 따라, 강자의 자신감은 불안감으로, 불안감이 조바심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조바심은 열패감으로 바뀌게 되는데, 관객들은 이렇듯 강자가 약자에게 패하거나 망신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게 되고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다. 이때 웃음의 정체는 바로 강자(권력자 혹은 기득권자)와 약자(평범한 서민) 사이의 관계의 전복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도 희극에서와 비슷한 관계의 전복이 발생한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지식인임을 자처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삶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 전혀 아는 게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은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거나 지혜롭기로 유명한 사람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기들이 지혜롭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막상 대화가 시작되면, 대화자들은 자기들의 답변이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결국 대화의 끝에 이르러 대화자들이 자처했던 지혜는 허위의식이요, 대화자들의 신념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반면에 무지를 자처했던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과 달리 하나의 확고한 앎, 즉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에 대한 성찰적인 지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무지를 자처한 소크라테스가 알고 보니 지혜를 자처한 대화자들보다 더 지혜로웠다더라’하는 이러한 역설적인 결과는 대화의 참관자들에게 약자가 강자를 이겨버리는 것과 같은 쾌감을 선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쾌감을 맛보았던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열광했던 것이고, 급기야 자기들 스스로 소크라테스식 대화를 흉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전통 희극과 비슷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에 있어서는 둘이 구별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희극의 목적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고대의 희극 작가들은 이른바 사회적 강자들과 기득권층의 허영심과 허위의식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데 골몰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서 바란 것은 상대방의 무지를 일깨우고 혼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지켜보던 청중들의 웃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에 비례하여 자신의 지혜를 확신했던 대화자의 수치심도 커지지만, 이 수치심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화자가 느끼는 수치심은 그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일종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무지를 깨닫게 된 이상, 대화자의 정신은 자기기만과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정화되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혼을 정화시킴으로써 이제 대화자는 참된 지혜를 배울 준비가 된 셈이다. 이 모든 과정은 앞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등에에 비유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마치 혈통은 좋으나 게으른 말에 달라붙어 끊임없이 쏘아대는 등에처럼, 시민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것이다.
키워드
교육, 대화의 즐거움, 소크라테스식 대화
전후맥락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궤변을 가르쳤다는 비난에 맞서 자기는 그 누구의 선생도 되어본 적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쳤다는 지적은 틀렸다고 말한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대화를 나누거나 구경하려는 젊은이들로 가득했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들 중 누구도 타락시킨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고전본문
실은 난 도대체 어느 누구의 선생도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젊은이든 나이 든 이든 상관없이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일에 관해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나는 어느 누구와의 대화에도 인색하게 굴어본 적이 없고, 돈을 받고서 대화를 할 뿐 돈 없이는 대화를 거절한 적도 없으며, 오히려 부자에게든 가난한 이에게든 똑같이 내게 질문하라고 말하며 나 자신을 내놓았는가 하면, 누군가가 답변을 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를 원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대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들 중 어느 누구에게든 단 한 번이라도 배울 거리를 약속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었소. 그러니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쓸 만한 사람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와 관련해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올바른 것이 아니오. 또한 누군가가 한때 나에게서 뭔가를 배운 적이 있다고 (다른 누구도 그런 적이 없거늘!) 주장한다면 그의 주장은 결코 참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 중 몇몇 사람들이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즐거워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그 이유를 들었소. 내가 앞에서 여러분에게 온전한 진실을 말해주었으니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검토 당하는 것을 들으면서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란 예언을 통해서든, 꿈을 통해서든, 혹은 다른 어떤 신적인 섭리를 통해서든, 바로 신이 나에게 하라고 명한 일이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오.
아테네인 여러분! 이것들은 참일 뿐만 아니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오. 만일 내가 정말로 젊은이들 중 일부는 타락시키는 중이고 또 일부는 이미 타락시켰다면, 또 그들 중 누구라도 나이를 먹은 이후에 자기들이 젊었을 때 나에게 뭔가 나쁜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면, 분명히 그들은 지금 이 자리에 올라와서 나를 고발하고 복수를 하려 들었을 테니까요. 혹시 그들 자신은 그렇게 할 의향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든, 형제든, 친척이든 누구든지 그때를 기억하고 지금 복수를 하려 들었을 것이오. 자기들의 가족이 나에게서 뭔가 나쁜 일을 겪은 것이 정말이라면 말이오.
토론하기
(1) 선생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과거의 자신보다 더 나아진 경험이 있는가? 혹시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라는 비난을 논박하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내세웠다. 즉 자신은 아는 것이 없기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일 수 없다는 것이다. 선생이 아니기에 지혜를 구실 삼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들과 동일하게 취급해온 사람들에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소피스트들은 자기들이 덕의 교사라고 주장하지만,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는 덕의 교사일 수 없으며, 따라서 소피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소크라테스가 한 일이라고는 부자와 빈자, 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화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와도 함께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지혜를 제공하는 선생이 아니라면, 왜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것은 그가 지혜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검토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배우러 그에게 왔다기보다는, 소크라테스가 타인의 무지를 밝혀내는 것을 구경하러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만일 자신이 정말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면, 그들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피해를 입은 셈이므로, 나중에라도 그들 자신이나 가족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앙갚음을 시도했을 법도 한데, 그와 함께 했던 젊은이들 중 누구도 소크라테스를 비난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이는 소크라테스와 함께 했던 젊은이들 중에서 어떠한 피해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해명은 이미 연설의 초반부, 즉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분노의 기원을 설명하는 대목에 자세히 언급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는 신탁을 검증하고자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눴고, 그 결과 그들이 사실은 삶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이러한 이중의 무지가 폭로되는 것을 본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열광했으며, 나중에는 자기들이 직접 소크라테스를 흉내내기까지 한다. 그 결과 논박당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에게서 못된 것을 배웠다며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논박 과정을 보고서 젊은이들이 열광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곰곰이 뜯어보면, 거기에는 엉뚱하게도 고대 그리스 희극에 전형적인 인물 설정이 나타난다. 그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명인이나 권력자가 그저 그렇고 평범한 일반인에게 어처구니없이 패배한다는 설정이다. 이러한 설정은 비극과는 정반대이다. 비극에서는 보통의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그러나 신들만큼은 아닌)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웅은 모든 면에서 타인을 압도하지만, 자신에게 부과된 운명이나, 순간의 미망(迷妄), 혹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정념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해간다. 주인공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함께 따라가며 관객들은 연민의 정과 함께 혼의 정화(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반대로 희극에서는 평범한 일반인(예를 들어 농부)이거나, 사회적 약자(예를 들어 여성)가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이런저런 계기로 인해 공동체의 권력자나 부자와 같은 이른바 사회적 강자와 대립하게 된다. 상대방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고서 주인공을 우습게보고 업신여기지만, 이런저런 사건이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평범한 주인공이 승리하게 된다. 사건 속에서 주인공의 별 생각 없는 행동이나 발언에 따라, 강자의 자신감은 불안감으로, 불안감이 조바심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조바심은 열패감으로 바뀌게 되는데, 관객들은 이렇듯 강자가 약자에게 패하거나 망신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게 되고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다. 이때 웃음의 정체는 바로 강자(권력자 혹은 기득권자)와 약자(평범한 서민) 사이의 관계의 전복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도 희극에서와 비슷한 관계의 전복이 발생한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지식인임을 자처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삶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 전혀 아는 게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은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거나 지혜롭기로 유명한 사람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기들이 지혜롭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막상 대화가 시작되면, 대화자들은 자기들의 답변이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결국 대화의 끝에 이르러 대화자들이 자처했던 지혜는 허위의식이요, 대화자들의 신념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반면에 무지를 자처했던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과 달리 하나의 확고한 앎, 즉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에 대한 성찰적인 지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무지를 자처한 소크라테스가 알고 보니 지혜를 자처한 대화자들보다 더 지혜로웠다더라’하는 이러한 역설적인 결과는 대화의 참관자들에게 약자가 강자를 이겨버리는 것과 같은 쾌감을 선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쾌감을 맛보았던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열광했던 것이고, 급기야 자기들 스스로 소크라테스식 대화를 흉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전통 희극과 비슷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에 있어서는 둘이 구별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희극의 목적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고대의 희극 작가들은 이른바 사회적 강자들과 기득권층의 허영심과 허위의식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데 골몰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서 바란 것은 상대방의 무지를 일깨우고 혼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지켜보던 청중들의 웃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에 비례하여 자신의 지혜를 확신했던 대화자의 수치심도 커지지만, 이 수치심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화자가 느끼는 수치심은 그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일종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무지를 깨닫게 된 이상, 대화자의 정신은 자기기만과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정화되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혼을 정화시킴으로써 이제 대화자는 참된 지혜를 배울 준비가 된 셈이다. 이 모든 과정은 앞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등에에 비유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마치 혈통은 좋으나 게으른 말에 달라붙어 끊임없이 쏘아대는 등에처럼, 시민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것이다.
키워드
교육, 대화의 즐거움, 소크라테스식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