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신을 믿지 않는다는 불경죄로 고발되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유무죄를 가리는 1차 투표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 형량을 선택하는 2차 투표에서는 사형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악에 붙잡히는 것이라고 태연하게 말한 뒤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유죄와 사형에 투표한 재판관들을 향해 예언을 남긴다.
고전본문
하지만 이 말을 하고 나니, 이제는 여러분에게 예언을 해주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군요. 나에게 유죄표를 던진 여러분! 벌써 나는 사람들이 예언을 남기기에 가장 좋은 때, 즉 곧 죽게 될 시점에 와 있기도 하니까요. 나를 죽인 여러분! 제우스께 맹세코, 나는 여러분이 앙갚음으로서 나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한 복수가 내 죽음 이후에 곧장 여러분에게 닥칠 것이라고 예언하는 바이오.
여러분은 자기 삶에 대한 논박을 견뎌내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방금 이런 일을 행한 것이오. 그런데 실은 여러분에게 이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리라고 나는 예언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여러분을 논박하려는 사람들을 더 많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을 자제시켜왔소. 여러분들 자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말이오. 또한 그들은 더 젊은 만큼 더 혹독할 것이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은 그만큼 더 짜증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올바르지 않게 살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훌륭하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어서 하는 말이오. 그런 식으로 벗어나는 일은 절대로 가능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남을 억누름으로써 벗어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자신이 흘륭하게 되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도 쉽게 짜증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나는 유죄표를 던진 여러분에게 이런 예언을 해주고 이제 여러분에게서 벗어나고자 하오.
토론하기
(1) 우리는 간혹 타인과의 대화 중에 잘못을 지적당하거나 비판 혹은 충고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대화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 예컨대 가족이나 친구, 혹은 선생님 등 –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나 대응 방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렇듯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잘못을 지적 당하거나 비판을 받았을 때의 감정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죽음을 앞둔 자의 예언
불경죄로 고발당한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무죄를 가르는 1차 투표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런데 양형을 제안하는 두 번째 연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지금껏 행한 일은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허위의식과 무지를 벗겨내는 것으로서, 이것은 신의 명령이자 사람들을 이롭게 한 것이니만큼, 이에 대한 형벌로는 외국의 귀빈을 접대하는 영빈관에서 평생 식사대접을 받는 것이 적절하다고 제안한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배심원 다수의 권위보다는 오히려 올바른 삶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법정에서의 이런 발언은 배심원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고, 소크라테스는 양형을 결정하는 2차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사형 판결에 대하여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악에 붙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사람들을 돌보라는 신의 명령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왔기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마친 뒤에 소크라테스는 갑자이 자신이 죽음을 앞둔 처지이므로 예언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예언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언은 신의 일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아들인 아폴론에게 신탁과 예언의 일을 주관하도록 맡긴다. 신들은 인간에게 미래의 일들을 알려주는데, 신들의 예언을 전하는 것은 바로 예언자들의 몫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에는 예언자들이 하나의 엄연한 직업인으로서 있었으며, 신들이 인간에게 전해주는 다양한 신호들을 해석한다. 그래서 신탁의 해석이나 꿈의 해몽, 혹은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서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것 등은 모두 예언자들의 일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예언에 필요한 것이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신과의 교감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무속인들이 일반인들과 달리 열병이나 신들림 등과 같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 신과 교류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의 예언자들 역시 미래를 보는 것은 지식이나 기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과의 교감을 통해 신으로부터 전해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의 대목에서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예언을 언급한 것은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음이 임박했다는 점에서 그만큼 신들의 영역에 다가갔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예언은 자신이 영위해온 철학적인 실천의 본성과 의미, 그리고 전망을 밝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언의 내용: 자신이 죽더라도 철학적 대화와 탐문은 계속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시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해왔다. 하지만 정작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의 탐문을 부담스럽게 생각했고, 또 그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무지가 벗겨지는 것을 수치스럽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몰아 제거해버림으로써 불쾌하고 귀찮은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민들이 불행해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죽음으로써 그들의 무지와 허위의식을 깨뜨려줄 사람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예언은 시민들의 어리석은 기대를 완전히 무참히 깨버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뒤를 이어 많은 젊은이들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귀찮게 굴 것이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더 젊고 수도 많은 만큼 자기가 했던 것보다 더욱 더 사람들을 귀찮게 굴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젊은이들은 누구일까?
소크라테스는 유무죄를 다투는 첫 번째 연설에서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원인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신탁의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 이른바 지혜롭기로 소문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청하였고, 결국에는 그들이 하나같이 자신보다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 소크라테스의 주변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지혜로 유명했던 정치인들과 시인들 및 장인들을 한 명 한 명 논박하는 모습을 보면서 열광했다고 한다. 급기야 그들은 그저 구경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흉내내어 자기들이 직접 지혜로 유명한 사람들을 논박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하여 젊은이들에게 논박당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닌 소크라테스를 원망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원망과 미움의 끝에 이르러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몰려 사형 판결을 받고는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그의 뒤에는 그를 따르고 흉내내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죽게 되면, 한층 더 혈기 방장하고 명민한 젊은이들이 스승이 했던 일을 계승하고 더욱 더 확장해 나가리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는 예언을 통해 자신의 행위, 즉 철학적 탐구의 본격적인 확산을 선포했다고 할 수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예언의 마지막에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적과 비판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완벽할 수 없으며, 언제나 실수와 오류, 잘못된 믿음과 무지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타인의 비판과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는 언제나 수치와 불쾌함, 혹은 귀찮음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로 인해 타인의 조언을 거부하고 피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테네인들의 경우처럼 소크라테스를 죽임으로써 귀찮음의 원인을 제거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결코 자신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던져지는 비판과 문제제기를 똑바로 마주볼 때,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반성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으로 인간다운 훌륭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 반성의 능력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도움은 때로는 뼈아픈 비판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감정들은 인간의 혼을 각성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다. 소크라테스는 한 마리의 등에가 되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열심히 쪼아댔다. 그 결과 사람들의 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의 헌신적인 실천과 죽음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에 플라톤을 비롯하여 소크라테스의 신념을 표방한 다수의 철학자들이 나오게 된다.
키워드
검토하는 삶, 예언, 혼의 돌봄, 훌륭한 삶
전후맥락
신을 믿지 않는다는 불경죄로 고발되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유무죄를 가리는 1차 투표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 형량을 선택하는 2차 투표에서는 사형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악에 붙잡히는 것이라고 태연하게 말한 뒤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유죄와 사형에 투표한 재판관들을 향해 예언을 남긴다.
고전본문
하지만 이 말을 하고 나니, 이제는 여러분에게 예언을 해주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군요. 나에게 유죄표를 던진 여러분! 벌써 나는 사람들이 예언을 남기기에 가장 좋은 때, 즉 곧 죽게 될 시점에 와 있기도 하니까요. 나를 죽인 여러분! 제우스께 맹세코, 나는 여러분이 앙갚음으로서 나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한 복수가 내 죽음 이후에 곧장 여러분에게 닥칠 것이라고 예언하는 바이오.
여러분은 자기 삶에 대한 논박을 견뎌내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방금 이런 일을 행한 것이오. 그런데 실은 여러분에게 이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리라고 나는 예언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여러분을 논박하려는 사람들을 더 많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을 자제시켜왔소. 여러분들 자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말이오. 또한 그들은 더 젊은 만큼 더 혹독할 것이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은 그만큼 더 짜증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올바르지 않게 살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훌륭하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어서 하는 말이오. 그런 식으로 벗어나는 일은 절대로 가능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남을 억누름으로써 벗어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자신이 흘륭하게 되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도 쉽게 짜증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나는 유죄표를 던진 여러분에게 이런 예언을 해주고 이제 여러분에게서 벗어나고자 하오.
토론하기
(1) 우리는 간혹 타인과의 대화 중에 잘못을 지적당하거나 비판 혹은 충고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대화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 예컨대 가족이나 친구, 혹은 선생님 등 –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나 대응 방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렇듯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잘못을 지적 당하거나 비판을 받았을 때의 감정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죽음을 앞둔 자의 예언
불경죄로 고발당한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무죄를 가르는 1차 투표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런데 양형을 제안하는 두 번째 연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지금껏 행한 일은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허위의식과 무지를 벗겨내는 것으로서, 이것은 신의 명령이자 사람들을 이롭게 한 것이니만큼, 이에 대한 형벌로는 외국의 귀빈을 접대하는 영빈관에서 평생 식사대접을 받는 것이 적절하다고 제안한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배심원 다수의 권위보다는 오히려 올바른 삶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법정에서의 이런 발언은 배심원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고, 소크라테스는 양형을 결정하는 2차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사형 판결에 대하여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악에 붙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사람들을 돌보라는 신의 명령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왔기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마친 뒤에 소크라테스는 갑자이 자신이 죽음을 앞둔 처지이므로 예언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예언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언은 신의 일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아들인 아폴론에게 신탁과 예언의 일을 주관하도록 맡긴다. 신들은 인간에게 미래의 일들을 알려주는데, 신들의 예언을 전하는 것은 바로 예언자들의 몫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에는 예언자들이 하나의 엄연한 직업인으로서 있었으며, 신들이 인간에게 전해주는 다양한 신호들을 해석한다. 그래서 신탁의 해석이나 꿈의 해몽, 혹은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서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것 등은 모두 예언자들의 일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예언에 필요한 것이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신과의 교감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무속인들이 일반인들과 달리 열병이나 신들림 등과 같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 신과 교류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의 예언자들 역시 미래를 보는 것은 지식이나 기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과의 교감을 통해 신으로부터 전해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의 대목에서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예언을 언급한 것은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음이 임박했다는 점에서 그만큼 신들의 영역에 다가갔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예언은 자신이 영위해온 철학적인 실천의 본성과 의미, 그리고 전망을 밝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언의 내용: 자신이 죽더라도 철학적 대화와 탐문은 계속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시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해왔다. 하지만 정작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의 탐문을 부담스럽게 생각했고, 또 그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무지가 벗겨지는 것을 수치스럽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몰아 제거해버림으로써 불쾌하고 귀찮은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민들이 불행해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죽음으로써 그들의 무지와 허위의식을 깨뜨려줄 사람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예언은 시민들의 어리석은 기대를 완전히 무참히 깨버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뒤를 이어 많은 젊은이들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귀찮게 굴 것이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더 젊고 수도 많은 만큼 자기가 했던 것보다 더욱 더 사람들을 귀찮게 굴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젊은이들은 누구일까?
소크라테스는 유무죄를 다투는 첫 번째 연설에서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원인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신탁의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 이른바 지혜롭기로 소문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청하였고, 결국에는 그들이 하나같이 자신보다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 소크라테스의 주변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지혜로 유명했던 정치인들과 시인들 및 장인들을 한 명 한 명 논박하는 모습을 보면서 열광했다고 한다. 급기야 그들은 그저 구경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흉내내어 자기들이 직접 지혜로 유명한 사람들을 논박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하여 젊은이들에게 논박당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닌 소크라테스를 원망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원망과 미움의 끝에 이르러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몰려 사형 판결을 받고는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그의 뒤에는 그를 따르고 흉내내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죽게 되면, 한층 더 혈기 방장하고 명민한 젊은이들이 스승이 했던 일을 계승하고 더욱 더 확장해 나가리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는 예언을 통해 자신의 행위, 즉 철학적 탐구의 본격적인 확산을 선포했다고 할 수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예언의 마지막에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적과 비판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완벽할 수 없으며, 언제나 실수와 오류, 잘못된 믿음과 무지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타인의 비판과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는 언제나 수치와 불쾌함, 혹은 귀찮음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로 인해 타인의 조언을 거부하고 피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테네인들의 경우처럼 소크라테스를 죽임으로써 귀찮음의 원인을 제거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결코 자신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던져지는 비판과 문제제기를 똑바로 마주볼 때,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반성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으로 인간다운 훌륭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 반성의 능력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도움은 때로는 뼈아픈 비판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감정들은 인간의 혼을 각성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다. 소크라테스는 한 마리의 등에가 되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열심히 쪼아댔다. 그 결과 사람들의 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의 헌신적인 실천과 죽음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에 플라톤을 비롯하여 소크라테스의 신념을 표방한 다수의 철학자들이 나오게 된다.
키워드
검토하는 삶, 예언, 혼의 돌봄, 훌륭한 삶